진흙속의연꽃

임락경목사의 ‘기통찬’이야기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22. 11:35

 

 

임락경목사의 기통찬’이야기

 

 

 

 

휴심정사이트에 임락경목사의 글이 실렸다. ‘기통찬 휴심정 송년모임’이라는 글이다. 다종교인 우리나라에서 휴심정사이트에 글을 올린 다양한 종교인들의 송년모임인 것이다. 사진을 보니 스님도 보인다. 그런데 상을 보니 놀랍게도 막걸리, 맥주, 소주병이 그득하다.

 

 

 

 

사진 : 기통찬 휴심정 송년모임

 

 

임락경목사의 글에서

 

글을 쓴 임락경목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종교인들 송년모임에 대한 글을 올렸다. 목사의 글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올 모임은 지난해보다 참석자가 더 늘었다. 지난해는 글의 주제를 기싸움으로 정했었다. 모인 이들 모두가 기가 넘치는 이들이었다. 꼭 기싸움 하려고 모여든 사람들 같았다. 수신(修身)은 기본이고 제가(齊家)는 가정이 있는 이들은 잘하고 있고, 가정이 없는 승려 귀신애비(神父)들은 일찍이 치국(治國)을 논하고 있었다.

 

그 때 내가 쓴 ‘기싸움’ 글에 어떤 불심이 강하신 불자께서 댓글을 달았다. 임락경 목사의 글은 휴심정에 싣지 말아달라고. 그래서 한동안 글을 올리지 않았다. 그 불자님이 내 글을 잘못 이해했다. 내 글을 다시 읽어 주시고 오해는 풀고 살고 싶다.

 

(임락경목사, 기통찬 휴심정 송년모임, 휴심정 2012-12-21)

 

 

글에 따르면 지난해 모임에 대한 글에 대한 내용이 있다. 지난해 기싸움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처음 모인 각종교 필진의 종교인들의 모임에서 마치 자신의 종교의 기를 과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글에서 어느 불자의 댓글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지난해 임락경목사의 기싸움에 대한 글을 읽고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두 편의 글을 올렸다. 하나는 종교전문기자의 힘과 종교명망가들 16인의 송년모임(2011.12.12)이고, 또 한편은 임락경목사의 글 ‘기()싸움’을 읽고(2011.12.13)라는 글이었다.

 

첫번째 글에서는 임목사의 글만 믿고 글을 썼다. 그런데 이상했다. 임목사가 쓴 글을 보면 참석한 종교인 중에 불교의 유명스님이 다수 있는 것이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스님도 있고, 조계종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는 도법스님도 있고, 더구나 저 먼 인도땅 다랄살라에 주석하는 청전스님도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필진들의 송년 모임에 일부로 이들 스님이 참석한 것일까? 그러나 사진을 보면 이들 스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글에 따르면 술과 고기이야기가 나오고, 모두들 막걸리잔을 채우고 건배하였다는 것이다. 얼마나 많이 마셨는지 막걸리 두 상자를 비웠다고 한다. 그런데 글을 쓴 임목사는 술을 못하기 때문에 자신은 술을 마지지 않았다고 써 놓았다.

 

막걸리 파티

 

그렇다면 그 자리에 참석한 유명스님들이 술과 고기를 먹었다는 것일까? 만일 스님들이 술을 마셨다면 계를 어기게 된 것이라 본다. 여러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임목사는 작년 자신의 글에서 분명히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신성한 모임에 불청객이 아닌 청객은 청객이었다. 그 모임에서 나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 아닌 군학 일계(軍鶴一鷄)였다. 다 알고 있듯이 복장을 보나 잘생긴 것 빼고는 학력도 경력도 없고 무식하고 예의 없기로 유명한 돌팔이, 촌놈, 농사꾼이다. 자칭, 타칭 그렇다.

모인 이들의 학력, 경력이 대략 이렇다.

 

 

 *1988년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 이웃과 세상에 보탬이 되는 보살의 삶을 서원하고, 단체를 설립했다. 기아·질병·문맹퇴치운동과 인권·평화·통일·생태환경운동에 앞장서 실천하는 보살로서 2000년 만해상을, 2002년에 라몬 막사이사이상을, 2007년엔 민족화해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 불교 개혁운동을 시작, 2000년대 들어 지리산살리기운동을 하면서 5년간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을 꾸려 전국을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다녔다. 지리산 어느 사찰에서부터 생명과 평화의 기운을 전국에 보냈고, 지금은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랬다’며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해 광주 대건신학대에 다니다 송광사 방장 구산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22년 전 인도로 떠나 히말라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 매년 여름 히말라야 최고 오지인 라다크를 찾아 고립된 티베트 스님들과 오지 주민들에게 약과 생필품을 보시하고 있다. 어느 산악인보다 히말라야를 많이 누빈 히말라야 도인.

 

*해인사로 출가했다. 오랫동안 한문 경전 및 선사들의 어록을 번역과 해설 작업, 그리고 강의를 통해서 고전의 현대화에 일조했다. 또 대중적인 글쓰기를 통해 세상과의 소통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임락경목사, 기싸움, 휴심정 2011-12-11)

 

 

작년 이맘 때 임락경 목사가 작성한 글이다. 임목사는 모인 이들의 학력, 경력이 대략 이렇다.”며 필진을 소개 하였다. 그 중 불교계 인사에 대한 것을 올려 놓은 것이다. 법륜스님, 도법스님, 청전스님, 원철스님에 대한 이력에 대한 것이다.

 

이 문구를 보고 글을 썼다. 물론 소개 말미에 도착하고 보니 아주 이름 있는 분 3-4명 빠지고 다 모였다.”라는 문구가 있으나 모인 이들의 학력, 경력이 대략 이렇다.”라는 문구로 보아 이들 스님들이 막걸리파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오해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D법우님이 댓글을 올리고

 

이렇게 소감문을 블로그에 올리고 나자 평소 댓글을 자주 달아 주시는 D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댓글을 휴심정에 올렸다.

 

 

실제 16명의 모두 나와 있는 사진을 보니 법륜 도법 청전스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승복 입은 스님 중에 없는 것을 보면 임목사님이 뭘 잘못 아신 것 같습니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 주최자인 조현기자님 해명을 부탁드립니다.
어떤 분이 이 글을 소재로 스님들이 계율을 어겼다고 비난성 글을 썼기에 꼭 부탁드립니다.

 

(2011년 12월 12일 7:37 PM (unmunsan2)

 

 

임락경 목사의 글에 따르면 네 분스님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휴심정 운영자에게 확인해 달라는 댓글이었다.

 

조현 종교전문기자의 확인

 

이에 대하여 휴심정을 운영하는 한겨레신문의 조현 종교전문기자는 다음과 같이 확인해 주었다.

 

 

예 그 분들은 송년회 참석하지않았습니다. 송년회엔 휴심정 필자들 뿐 아니라, 휴심정에서 인터치-인간변화포럼을 매달 한차례씩 진행하는 환희당포럼 멤버인 종교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서로 아시는분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서로 처음 뵈었을겁니다. 위 글을 쓰신 임목사님께서 참석자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프로필들에 적힌 소개글을 딴듯합니다.

 

(조현기자, 휴심정 사이트 운영자)

 

 

조현기자에 따르면 네 분의 스님은 막걸리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확인해 주었다. 필진의 프로필을 글에 소개하였기 때문에 발생한 오해로 본다는 것이다.

 

공개사과를 요구하였으나

 

이것이 작년에 있었던 임락경목사에 대한 글의 전말이다. 그래서 글을 통하여 임락경 목사의 해명과 사과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체 응답이 없었다. 그리고 일년이 지난 이 때 또 임락경 목사의 종교인필진 송년회 글을 두 번째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작년 글에 대한 해명이나 사과 없이 그 불자님이 내 글을 잘못 이해했다라는 식으로 써 놓았다.

 

물론 잘못 이해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년의 글을 보면 누가 보더라도 네 분의 스님이 막걸리파티에 참석하여 계를 어긴 것으로 비추어져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임목사의 글 중에 모인 이들의 학력, 경력이 대략 이렇다.”라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번째 글을 썼고, 두번째 글은 댓글공방에 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임목사의 공개사과를 요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목사는 올해의 글에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말하며 정확히 해명을 해주지 않고 있다. 네 분 스님이 참석하지 않았다면 참석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될 것을 그런 말을 그렇게 하기 힘든 것일까.

 

임락경목사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보면

 

휴심정 종교필진들의 올해 송년회 파티에 대한 임락경 목사의 글에서 불교에 대한 글을 보았다. 두 가지인데 먼저 선불교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종교 전쟁은 불교에서는 없다. 불경에 있는 가르침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 : 불교 외에 다른 경전도 있고 좋은 책도 있다. 불입문자(不立文字) : 불경 외에도 다른 문자도 있다. 직지인심(直指人心) : 교리를 캐거나 모든 계행을 닦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지도해 불과를 얻을 수 있음. 견성성불(見性成佛) : 진리만 바로 보면 성불할 수도 있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불경이 아니고 아무 경전이라도,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라도 진리는 있고 진리만 바로 찾아 실천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임락경목사, 기통찬 휴심정 송년모임, 휴심정 2012-12-21)

 

 

임락경목사는 글에서 종교화합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다종교인 우리나라에서 종교전쟁이 없는 이유에 대하여 나름대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각 종교의 특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중 불교에 대한 것이다.

 

교외별전, 직지인심에 대한 전혀 다른 해석

 

임목사는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 세가지는 불교이긴 하지만 중국불교화된 선불교에 대한 것이다.

 

선불교는 대승불교와도 다른 또 다른 불교를 말한다. 중국조사에서 시작 되었다고 하여 조교(祖敎)라고도 한다. ‘조사불교라는 뜻이다. 따라서 선불교에 대하여 불교라고 말한다거나 선어록을 불경이라고 칭하는 것은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고 한 말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의 원음이라 불리우는 방대한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 되어 나온 요즘 선불교가 불교를 대표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목사는 선불교의 세 가지 종지에 대한 나름대로 견해를 밝힌다.

 

임목사는 교외별전에 대해서는 불교 외에 다른 경전도 있고 좋은 책도 있다라는 식으로 견해를 밝힌다. 다른 경전이란 바이블, 코란 등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다른 경전을 지칭하는 것이 교외별전이라 한다. 그리고 직지인심에 대하여 불경 외에도 다른 문자도 있다라는 식의 해석을 한다.

 

하지만 이는 임목사 자신만의 생각이다. 교외별전, 직지인심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마음에 대한 것이다. 선불교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이나 글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언설로 진리를 표현 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진리가 전승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불립문자, 직지인심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임목사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모임

 

다음으로 임목사는 견성성불에 대하여 나름대로 매우 독특한 견해를 내 놓고 있다.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라도 진리는 있고 진리만 바로 찾아 실천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라는 견해를 말하는 것이다.

 

선불교에 따르면 견성성불이라는 것이 내 안의 불성을 본다는 뜻이다. 우리가 원래 부처이었기 때문에 부처임을 확인하는 것이고, 부처의 성품을 보면 성불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견성성불이라 한다. 그런데 임목사는 종교다원주의적 시각으로 견성성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늘 주장하듯이 산을 오르는데 있어서 여러갈레의 길이 있다든가, 산의 정상이 하나이듯이 진리를 하나라는 말이다. 이런 다원주의는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를 가정한 것이다.

 

길희성교수에 따르면 자신의 글에서  궁극적 실재에 대하여 (), (), 태극, (), 브라흐만 혹은 아트만, (), 일자(一者), 절대자, 무한자, 절대 정신, 스스로 존재하는 자, 존재의 근거 혹은 존재 자체, 세계의 건축가 혹은 설계자, 창조주 같은 개념들이다. (신의 암호, 신이라는 암호)”라고 규정한 바 있다. 아마도 모인 각 종교필진들이 종교다원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견성성불을 해석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러나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에 따르면 궁극적 실재를 인정하는 종교다원주의적 발상은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은 중도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절대유절대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조건에 따라 소멸하기 때문에 궁극적 실재를 가정하는 것은 허구가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법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단멸론적 허무주의가 허구임을 밝혔고, 또 일어난 법이 사라지는 것들 봄으로서 영원주의 역시 허구임을 밝혔다. 이렇게 부처님은 연기법에 따라 중도를 설함으로서 허무주의와 영원주의를 논파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죽으면 모든 것이 소멸되고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라는 허무주의를 부수었고,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를 타파함으로써 뭇삶들을 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런데 임목사는 선불교의 세 가지 요체를 불교의 진리인 것 처럼 말하면서 종교다원주의적 해석을 가하여 한국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전쟁 없는 것이 비빔밥문화때문이라고?

 

다음으로 임목사는 우리나라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또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종교전쟁이 없는 것은 비빔밥문화 때문인 것으로 안다. 각 종교마다 기맥힌 종교지도자들이 있고 기통찬 종교지도자들이 있다. 기맥히면 죽고 기통차야 산다. 이렇게 각 종교마다 기통찬 이들이 있어 싸우지 않고 종교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기통찬 이들이 모여 있어 활기찬 송년의 저녁이 되었다.

 

(임락경목사, 기통찬 휴심정 송년모임, 휴심정 2012-12-21)

 

 

임목사는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비빔밥문화’ 때문이라 한다. 기막힌 종교지도자들이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비빔밥처럼 비벼져 있기 때문에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비벼져 있지 않다면 종교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서세동점 시절에

 

비빔밥의 비유를 들어 종교전쟁을 설명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기본적으로 유일신교는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호전적이었고, 불교는 평화적이었다. 유일신교가 전쟁을 걸어 오더라도 불교에서는 이를 응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전도사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연말시상식 때

하나님 운운하는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경기장에서 공인이라 볼 수 있는 국가대표 선수가 전국민이 시청하는 tv앞에서 기도세레모니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이렇게 공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이런 활동이 지나쳐 땅밝기까지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서세동점 시절 한손에는 코란, 또 한손에는 칼식으로 피의 선교를 한 바 있다. 이처럼 유일신교가 가는 곳에 늘 갈등과 긴장이 있었고 피의 역사가 있었다.

 

때리면 맞는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 살인을 넘어 살생까지 금지하는 평화의 종교이다. 그래서 단 한번도 무력으로 종교전쟁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어떻게 포교를 하였을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세존]

 뿐나여,

그러나 만약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그대에게 날카로운 칼로 목숨을 빼앗으면 뿐나여, 그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뿐나]

세존이시여,

만약에 쑤나빠란따까의 사람들이 저에게 날카로운 칼로 목숨을 빼앗으면, 그때 저는 이와 같이 '몸 때문에 목숨 때문에 오히려 괴로워하고 참괴하고 혐오하여 칼로 자결하길 원하는 세존의 제자들도 있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고도 칼로 자결하는 셈이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세상에 존귀한 님이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분이시여, 그때는 이와 같이 말할 것입니다.”

 

(뿐나경- Puṇṇasutta, 상윳따니까야 S35:88(4-5),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10대 제자중의 하나로서 설법제일이라 불리웠던 뿐나(부루나)존자는 포교에 임하는 자세를 밝히고 있다.

 

먼 이교도 지역에 가서 포교하는 뿐나를 누군가 칼로 죽이려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는 부처님의 염려스런 질문에, 뿐나는 칼로 죽이려 한다면 칼에 맞아 죽겠다고 한다.

 

이처럼 불교의 포교는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포교가 아닌 법에 의한 포교이었다. 살인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에 대한 살생마저 금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때리면 맞고, 칼로 죽이려 한다면 칼에 맞아 죽겠다고 하는 부처님제자의 모습이 경에 담겨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다종교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종교평화가 유지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종교지도자들이 비빕밥처럼 비벼져 있는 것은 임목사 개인의 견해일 것이다.

 

딧티(ditthi, 사견)와 닷사나(dassana, 정견)

 

작년과 올해 두 차례 임락경 목사의 글을 비판하였다. 비판한 이유는 임목사가 명백히 글을 잘못 썼는데도 불구하고 일언반구 사과없이 단지 잘못 이해한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선불교의 종지에 대한 것을 종교다원주의적 입장에서 해석하여 마치 그것이 불교의 전체인 것처럼 써 놓았다. 이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글을 쓴 것이다. 이는 모두 임락경 목사의 개인적인 견해 때문이다.

 

초기불교에 따르면 견해를 딧티(ditthi)라 한다. 이는 사견을 말한다. 개인적인 견해를 딧티라 하는 것이다. 반면 경전에 근가하면 닷사나(dassana)가 된다. 닷사나는 정견(正見)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원음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에 근거한 발언을 하면 정견(닷사나)이 되고, 이를 벗어난 발언을 하면 사견(딧티)이 되는 것이다.

 

임락경 목사가 불교적 상식을 동원하여 이야기 하였으나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그래서 임락경 목사의 글을 사견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나네

 

부처님은 초기경전에 늘 당부 하셨다.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든가 논쟁을 할 때 정견을 이야기하지 않고 사견을 이야기 하였을 때 ‘죄과’를 치를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뚜두]

 

Purisassa hi jātassa kuhārī jāyate mukhe,
Y
āya chindati attāna bālo dubbhāsita bhaa.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나네.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네.

 

 

Yo nindiya pasasati ta vā nindati yo pasasiyo,
Vicin
āti mukhena so kali kalinā tena sukha na vindati.

 

 

비난받아야 할 것을 찬양하고

찬양해야 할 것을 비난하니

입으로써 불운을 쌓고

그 불운으로 안락을 얻지 못하네.

 

(뚜두브라흐마경- Tudubrahma1sutta-하느님 뚜두의 경, 상윳따니까야 S6:9(1-9), 전재성님역)

 

 

 

2012-12-2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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