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꿈과 깨달음
현실은 늘 만족스럽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연이어 발생한다. 하룻밤자고 나면 해결되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문제에 봉착하였을 때 사람들은 절망하게 된다.
천상의 삶을 동경하지만
문제는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에 떠나 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즐거움만 있는 천상세계, 기쁨을 먹고 사는 천상세계를 바라는지 모른다. 그런 천상은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수명이 보장 된다.
한 번 천상에 난다고 하여 영원한 삶이 보장 되는 것은 아니다. 공덕과 수명이 다하면, 활의 현의 힘으로 화살이 날아 올라가 떨어지듯이 아래 다른 세상으로 내려 가야 한다. 그런세상은 대부분 악처라 한다. “범천에서 빛나던 존재도 돼지우리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미얀마 속담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천상에서는 즐기기만 할 뿐 새로운 공덕을 쌓지 못한다고 한다. 부자들이 즐기기만 할 뿐 새로운 선업공덕을 쌓지 않는 것과 같다. 선업공덕을 다 써 먹고 남는 것은 악업만 있기 때문에 대부분 악처에 나기 쉽다고 한다. 그런 측면으로 보았을 때 천상에 태어 나는 것이 최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천상에서의 수명이 길다고 할지라도, 즐거움에만 취해 있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듯이 천상에서 몇만겁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지나가는 시간은 매우 빠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혜민스님의 ‘아는 것을 아는 놈’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한다. 무엇 때문에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일까. 초기불교에 따르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한국불교에서의 깨달음은 그렇지 않다. 최근 혜민스님의 글을 보면 깨달음이란 어떤것인지 알 수 있디.
혜민스님은 휴심정에 실린 글에 따르면, 깨달음의 자리 또는 부처의 자리에 대하여 ‘앎’이라 하였다. 앎이라고 하면 ‘아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 내가 아는 것을 앎이라 한다. 그러나 혜민스님이 말하는 앎은 좀 다른 것 같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이 막 떠올랐을때 우리 안에 무언가가 “아! 지금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안다. 도대체 무엇이 그러면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알아챘을까? 생각이 올라왔구나 하고 아는 것은 또 다른 생각인가? 아니면 생각 이전의 뭔가 다른 놈이 알아채는 것인가? 한번 가만히 들어다보자.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아는 “놈”이 무엇인가?무엇이 알아채나?
(혜민스님, 부처자리, 휴심정 2012-12-26)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생각을 한다’라고 한다. 자신이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생각은 떠 오르는 것이다. 마치 저절로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온갖 생각이 떠 올라왔을 때 사람들은 그 생각을 인식한다. 그런데 혜민스님은 일어난 생각을 아는 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아는 것을 아는 놈을 말한다. 이렇게 이중으로 아는 놈에 대한 의문이다. 그 아는 놈을 찾자는 것이다.
배고프면 배고픈 줄알고
그런데 혜민스님에 따르면 생각이 올라온 것을 알아 채는 것을 또 다른 생각으로 보는 것은 착각이라 한다. 아는 것을 아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플때 생각으로 “아! 지금 배 고프다”라고 굳이 생각을 내지 않아도, 언어화 하지 않아도 배 고프다는 사실을 즉시 알수 있지않는가? 똑같은 이유에서 생각이 올라왔을때 꼭 “지금 생각이 올라왔다”라고 언어화, 생각화하지 않아도 생각이 올라왔다는 것을 무언가가 바로 알지 않는가?혹시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면 자세히 한번 들어다 보면 알수 있다.생각이 떠 올랐을때 “지금 생각이 떠 올랐구나” 라는 생각 없이도, 언어의 작용이 없이도 즉시 무언가가 바로 고요한 가운데 그냥 안다.
(혜민스님, 부처자리, 휴심정 2012-12-26)
요지는 ‘무언가’가 있어서 그냥 안다는 것이다.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는 것이라 한다. 그 아는 놈이 누구냐는 것이다. 하지만 언어와 문자로 그놈 이니 무언가를 설명하는 것은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민스님은 문자를 통하여 그놈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 몸받기 이전부터
그 앎과 아는 놈에 대하여 혜민스님은 또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이 앎은 허공 모양을 한 거울과도 같아서 앞에 있는 대상이 사물이든 생각이든 느낌이든 일어났다는 것을 그냥 비추어 바로 알뿐,그 대상들이 거울 자체, 앎 자체를 물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앎은 그 대상들이 마음 거울앞에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그래서 앎 자체는 본래 청정한것이고,또한 이 세상이 생기기 이 전부터, 내가 이 몸받기 이전부터 지금처럼 존재해온 것이다.
(혜민스님, 부처자리, 휴심정 2012-12-26)
아는 놈, 그 놈,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아는 놈은 내가 있기 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있건 없건 간에 그 놈은 항상 있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는 놈과 앎에 대하여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수행을 통하지 않고 언어와 문자로 표현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면 조금 도움이 될지 모른다.
꿈속의 세상
혜민스님의 앎과 아는 놈에 대한 이야기는 꿈의 비유와 매우 유사하다고 느꼈다.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의 강의가 불교tv 사이트 (제7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1부, 제8회 윤회와 무아의 현대적 의미 2부) 에 실려 있다. 이 강의에서 한자경 교수는 꿈의 비유를 들어 윤회와 무아를 설명하였는데,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꿈을 꿀 때 두 가지의 나가 있다. 하나는 ‘꿈속의 나’이고, 또 하나는 ‘꿈꾸는 나’이다. 꿈속의 나를 소아(i) 또는 가아(假我)로, 꿈꾸는 나를 대아(I) 또는 진아(眞我)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한자경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꿈속의 나는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한다.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내는 것은 꿈꾸는 나뿐만이 아니다. 삼라만상 모든 기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꿈꾸는 나는 꿈속의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 아는 마음을 ‘한마음’이라 한다. 그 한마음은 꿈속의 모든 유정들 속에 들어 있어서 서로 연결되어 있는 마음이라 한다.
이는 우리가 꿈을 꿀 때 알 수 있다. 꿈속에서 꿈속의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꿈꾸는 나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꿈속의 나와 객관적 대상을 모두 만들어 내고 인식하는 주체는 꿈꾸는 나인 것이다.
이와 같은 한자경 교수의 꿈의 비유에서 표현된 꿈꾸는 나는 혜민스님이 말하는 아는 놈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또 혜민스님이 말하는 ‘앎’이라는 것은 한자경 교수가 꿈의 비유에서 ‘꿈꾸는 자의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꿈에서 꿈꾸는 자는 꿈속의 나 뿐만 아니라 타인의 마음도 알 수 있고 심지어 산천초목까지 모두 인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혜민스님이 말하는 ‘앎’이라는 것은 꿈의 비유에서와 같이 ‘꿈꾸는 자의 마음’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비로자나부처님의 한바탕꿈
유명선사들의 열반게를 보면 이 세상에 대하여 ‘꿈속의 세상’으로 표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꿈속의 세상에서 꿈을 깨는 것을 깨달음으로 보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을 꿈속의 세상으로 보는 것은 아마도 화엄경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화엄경의 경우 부처님이 삼매에 들었을 때 설법한 내용이다. 부처님이 직접설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삼매에 든 상태에서 보살들이 설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십지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많은 보살들 가운데서 금강장보살이 상수가 되었는데, 그 때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신력을 입어 보살의 대지혜광명삼매에 들었다.
삼매에 들었을 때 무수한 부처님이 그의 앞에 나타나 말씀 하셨다.
“잘하는 일이다. 금강장이여, 그대는 보살의 대지혜광명 삼매에 잘 들었다. 이것은 시방세계에 계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들이 그대에게 가피함이니, 그것은 비로자나여래 응정등각의 본래 원력이며 또한 그대의 뛰어난 지혜의 힘이다. 그리고 그대가 보살들에게 불가사의한 부처님 법의 광명을 말하게 하려는 배려에서이다.”
(화엄경, 십지품 서장, 법정스님역, 동국역경원)
이렇게 화엄경은 삼매에 든 상태에서 설한 것이다. 대승경전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반야심경 역시 부처님이 삼매에 든 상태에서 관자재보살이 설한 것이다. 부처님이 직접 반야심경을 설하지 않았지만 삼매에서 깨어난 부처님이 관자재보살의 설법을 ‘추인’함으로서 부처님이 설한 것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것이라 설명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삼매에서 본 우리가 사는 세상, 화엄경에서 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두 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 (化現) 이라 본다. 나를 포함한 세간과 기세간에 살고 있는 모든 중생들과 산천초목들이 모두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이라 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비로자나부처님의 한바탕꿈이라 볼 수 있다.
모두 한마음에서
선사들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잘 이해가 가지 않으면 꿈의 비유를 들면 의외로 이해가 쉽게 된다. 화엄경의 화려한 세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화엄경에 따르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부처님의 몸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이는 화엄경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사는 세계는 꽃으로 장엄된 ‘화장세계(蓮華藏世界)’와 같다는 것이다.
그 꽃이란 것이 장미와 백합 또는 온실에서 자란 난초와 같이 예쁘고 고상한 꽃이 아니라 이세상 어디에서난 볼 수 있는 잡화이다. 야생에서 자란 수천 수만가지 꽃이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크고 작은 갖가지 꽃으로 나름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들판에 홀로 피는 민들레에서부터 산간의 무덤가에 피는 할미꽃, 그리고 이름없는 들꽃에 이르기 까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세상을 장엄한다.
이들 꽃들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땅을 기반으로 해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보면 근원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두 ‘하나의 마음(한마음, 一心)’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이와 같이 선사들이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을 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매우 이해하기 쉽다. 또 꿈에서 깨어나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보면 역시 이해 하기 쉽다. 그래서일까 조계종의 소의경전이자 선불교에서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금강경 마지막 게송에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불자들이 알고 있는 대표적 경전은 금강경이다. 불자가 되면 한 번쯤 금강경 강의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tv사이트에도 수 많은 금강경 강좌가 있다. 대부분 스님들이 진행한다. 그러다 보니 금강경 외에는 경전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옆으로 돌려 보면 수 많은 경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금강경이 한자로 5,249자에 불과 하지만, 부처님의 원음을 번역해 놓은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수십권에 달한다. 그 많은 경들 속에서 꿈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유위법이나 무위법, 진제와 속제, 이법계와 사법계 등과 같은 이분법적인 내용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현상에 대해서만 설한 것이다. 따라서 여몽환포영이 삼라만상 세간 기세간을 포함한 형성된 모든 것을 뜻하는 유위법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물질은 포말과 같고
느낌은 수포와 같네.
지각은 아지랑이와 같고
형성은 파초와 같고
의식은 환술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가 가르치셨네.” (S22:95)
라고 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섯가지 다발로 분류한 오온이 무상함을 설하는데 쓰이고 있다.
“불교는 결코 신비주의를 요청하지 않는다”
그래서 전재성 박사는 상윳따니까야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불교는 결코 신비주의를 요청하지 않는다. 불교적인 세계는 측량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초자연적 근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를 반영하는 그야말로 ‘와서 보라(ehipassika)’ 고 할 만한 존재에 대한 경험적 체험에 의해 산출된다. 특히 그것은 마음과 세계에 대한 정신적 수행의 산물로서 인과적 과정의 작용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제2권 [인연모음 1] 해제. 전재성박사)
불교는 알 수 없는 의문을 가지고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대한 탐구라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원인과 조건과 결과에 따른 연기법적인 관찰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해답없는 의문을 제기 하지 않는다. 만일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는 의문을 제기한다면 ‘시공간속의 영원한 감옥’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을까.
시공간의 영원한 감옥
부처님은 시공간 속에 있는 나가 아니라고 하였다. 만일 시공간속에 있는 것이 나라고 한다면, 나는 우주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주가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우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의 경우 시공간속의 나를 상정한다. 꿈의 비유에서 꿈속의 나와 같은 것이다. 시공간속의 나를 가정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근원’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공간속의 나가 있게 한 ‘창조주’나 ‘궁극적 실재’를 말한다. 선사들이 꿈의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한마음’이라 볼 수 있다.
화엄경식으로 말한다면 비로자나부처님이 삼매에 들었을 때 나를 포함한 온갖 것들이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으로 보듯이, 시공간속의 나는 필연적으로 존재의 근원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존재의 근원이 유일신교적으로 말하면 ‘창조주’가 되고,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 볼 수 있고, 유식에서는 ‘아뢰야식’, 선불교에서는 ‘본래면목’ 또는 ‘주인공’ 또는 ‘참나’ 등 여러이름으로 불리운다. 또 원효스님의 사상으로 보았을 때 ‘일심(한마음)’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시공간속의 나를 가정하였을 때 우리는 시공간속의 감옥에 갇히게 되고 우리에게 자유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머리로 이해 되지 않을 때
시공간속의 나의 존재는 존재의 근원 내지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혜민스님의 글에서 아는 것을 아는 놈에 대하여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그래서 혜민스님은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한다.
깨달음의 자리, 부처 자리를 경험하고 싶은가? 지금 이 글을 읽고 아는 그 자리가 바로 수행자가 그토록찾던 자리이다. 멀리 있는 것도 수십년간 고행해서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도대체 뭐가 아는지,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주위를 안으로 회광반조해서, 아는 자리의 모양이 따로 있는지,그리고 어디에 앎이 위치하는지 자세히 살피고 또 살펴봐라.앎 자체의 성품을 깨달을때 그곳에 바로 부처가 있다.
(혜민스님, 부처자리, 휴심정 2012-12-26)
이 글을 머리로만 이해 하려 한다면 잘 들어 오지 않는다. 반드시 꿈의 비유를 통하여 접근하면 이해 하기 쉽다. 그래서 꿈꾸는 나와 꿈속의 나가 같은 것임을 알면 된다. 심지어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 삼라만상 기세간 모든 것들이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낸 것이는 것을 알면 된다.
그러기에 모든 것들은 하나의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의 마음으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한마음을 알면 되는 것이다. 그 한마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이는 다름 아닌 꿈을 깨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한바탕 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이놈이 무엇인고?”라며 알 수 없는 의심을 하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고 존재의 근원을 탐구 하다 보면 깨닫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언제 깨달을지 기약이 없다. 이는 시공간이 먼저 존재하고 감각의 장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가 거기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전도된 인식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듯이
이렇게 잠에서 깨는 것을 깨달음으로 인식할 경우 굳이 깨달을려고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는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빠쿠다 까짜야나 (Pakudha Kaccayāna)의 주장을 보면 알 수 있다. 7요소설을 주장한 빠쿠다 까짜야나 는 ‘유물론적 영혼론’이라는 견해를 주장하였다.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를 들어 실타래를 던지면 풀려질 때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자나 슬기로운 자나 똑같이 그들의 즐거움과 괴로움이 다할 때까지 윤회한다.
(마하딧티경-Mahādiṭṭhi suttaṃ- 견해의 큰경, 상윳따니까야 S24:78, 전재성님역)
빠쿠다 까짜야나는 실타레의 비유를 들고 있다.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지금 풀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 버려 두어도 시간이 되면 모두 풀려지게 될 것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윤회가 끝나는 것도 윤회를 끝내려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물론적 영혼론에 따르면, 즐거움이 다하고 괴로움이 다하다 보면 언젠가는 윤회가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자나 어리석은 자나 누구든지 윤회하도록 내버려 두어도 마치 아침이 되어 잠에서 깨어나듯이, 꿈에서 깨어나듯이 모두 해탈할 것이라 한다.
접촉을 조건으로 갈애가
그렇다면 어떤 인식을 가져야 할까.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일체경에서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이것을 실로 일체라 한다.(S35:23)”라 하였다. 시공간속에 우리가 아니라 , 우리가 시공간이라는 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감각능력과 감각대상과 감각의식의 인식에 따른 감역에서 시공간이 파생되어 나온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서 세상이 생겨나는 것(S35:107)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졌을 때 세상이 소멸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시공간 속의 나가 있다고 본다면 존재의 근원과 합일 할 수밖에 없고, 접촉에 따라 시공간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으로 본다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2-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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