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스님에 의한 스님을 위한 번역, 번역은 학자들에게
혹독하게 추운 날씨이다. 두툼한 옷에 모자와 장갑을 착용하지 않으면 걸어다니기 불편할 정도로 쌀쌀하다. 매일 영하 10도 안팍의 날씨에 가장 타격을 받는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겨울은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 있어서 ‘재난’과 같은 계절이다. 그날 그날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은 날씨에 매우 강한 영향을 받게 되는데,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일을 못하고,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도 일을 못하고, 추워도 일을 못한다. 이것 저것 다 빼고 나면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마치 가난을 숙명처럼, 삶을 마치 ‘형벌처럼’ 살아 가는 민초들이 부지기 수라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겨울의 추위는 겨울 날씨만큼이나 차갑고 음산하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는 꽃 피는 따스한 봄을 고대하는지 모른다.
춥고 쓸쓸하고 외로운 겨울을 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곳은 꿈과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옛날 왕족들은 겨울에 따뜻한 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세 개의 궁전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의 이야기를 기록한 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에게는 세 개의 궁전이 있어 하나는 우기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겨울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여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사는 사 개월 동안 궁녀들의 음악에 탐닉하여 밑에 있는 궁전으로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나는 감각적 쾌락의 생성이나 소멸이나 유혹이나 재난이나 그것에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서 감각적 쾌락의 갈애를 버리고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를 버려서 감각적 쾌락의 갈증을 버리고 안으로 마음의 고요를 성취했습니다.
나는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다른 뭇 삶들을 봅니다. 나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마간디야여, 참으로 그 감각적 쾌락의 착하지 못하고 건전하지 못한 것들을 떠나면, 천상의 즐거움을 능가하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므로 그 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
(마간디야의 경-Māgandiya sutta, 맛지마니까야 M75,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출가 하기전 태자로서의 삶을 살았을 때 세 개의 별궁에서 살았다고 한다. 인도의 계절은 우기와 겨울과 여름 이렇게 세 개의 계절로 나눌 수 있는데, 부처님이 태자로 있을 때 계절마다 별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시원한 곳에 있는 궁전에 지내고, 겨울이 되면 따뜻한 곳에 있는 궁전에서 보냈다고 한다.
여행 다니기 좋아하는 스님들
요즘 여유 있는 사람들은 해외여행을 자주 다닌다. 특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들은 여름과 겨울에 외국에 별장을 마련해 놓고 지낸다고 한다. 그래서 뜨거운 여름이 되면 서늘한 곳으로 가서 보내고, 매서운 추위가 몰아 닥치면 마치 봄날과 같은 따뜻한 곳에 있는 별장에서 보낸다고 한다. 마치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출가 하기전 온갖 감각적 쾌락을 누리면서 살았던 태자로서의 별궁을 떠 올리게 한다.
공항에 가보면 스님들을 종종 보게 된다. 여행을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 스님들은 한 곳에 머물기 보다 이리 저리 떠 돌아 다니며 공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여행을 좋아하는 것으로 비친다고 한다. 그런 스님들을 외국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데, 특히 중국의 여행지 사성급 호텔에서도 볼 수 있다. 다른 나라 스님들은 볼 수 없는데 유독 한국의 스님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이다.
이렇게 여행 다니기 좋아 하는 스님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하게 된다. 그런데 어느 스님들의 경우 겨울이 되면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필피핀이나 태국에 머물면서 한철 보내 듯이 오랫동안 머문다고 한다. 번역등의 일이 목적이라고 하지만 매년 되풀이 되는 것을 보면 마치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출가 하기전 ‘겨울궁전’을 연상케 한다.
조계종 표창장을 받은 뜻은?
최근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 빠알리니까야 번역 관련 기사 (니까야 완역한 대림·각묵스님 총무원장 표창) 가 떳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 4부 니까야를 완역함에 따라 조계종 총무원장장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표창과 더불어 완역지원금 천만원이 전달 되었고, 향후 종단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할 방침이라 한다.
이 기사를 접하고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서가 ‘조계종의 정전’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보여졌다. 또 다른 번역서인 한국빠알리성전협회의 4부 니까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조계종 총무원에서 표창까지 하고 상금을 전달하고 지원약속을 했다는 것은 초불의 번역서를 정전으로 인정하겠다는 발상으로 보여진다.
못하는 것이 없는 스님들
이에 반하여 성전협회 전재성박사에 대하여 4부 니까야 완역과 관련한 상을 주었다는 기사를 찾을 수 없다. 승단에 있어서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은 잊혀진 존재로 보여진다. 단지 스님이 아니어서 인정되지 않는 것일까. 번역은 스님들이 해야만 인정되는 것일까. 엄밀히 말한다면 번역은 스님들이 할일이 아니라고 본다. 출가자의 본업은 수행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실천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은 못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세속에서 재가자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스님, 노래를 잘하는 스님, 무용을 잘 하는 스님, 심지어 요리를 잘 하는 스님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런 잡기 들이 수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매 순간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림이나 노래, 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수단이기 때문에 초기경전에 따르면 바람직 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번역은 학자들의 몫
이렇게 출가자들이 그림, 노래, 춤, 음식과 같은 감각적 쾌락과 관련된 일에 열중하는가 하면 시(詩), 서(書), 화(畵), 다(茶) 등에도 열중하기도 한다. 번역도 그 중에 하나 속할 것이다. 그러나 번역은 학자들의 몫이라 본다.
불교를 연구하는 전문학자의 영역에 스님들이 참여 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출가자의 본분을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물론 중국에서 구마라즙이나 현장스님 등의 역경승도 있었고, 외국에서도 빅쿠 보디 등의 비구들의 번역이 있어서 불교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가 있기는 하지만 출가자가 번역에 매진 하는 것, 그리고 평생의 원력으로 삼는 것은 출가자의 본분과 벗어난 것이라 보여 진다.
그런데 출가자의 번역에 대한 당위성에 대한 이야기도 듣는다. 예를 들면, 중학교 일학년 학생이 막 영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실력으로 섹스피어의’햄릿’을 번역해보리라 한다면 그것은 웃음거리만 될 뿐이라는 비유를 든다. 단지 외국어만 잘한다고 하여 심오한 내용를 번역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리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를 출가자번역의 당위성으로 활용하여, 수행을 해본 자만이 번역할 수 있다라고 보는 것은 유아독존적 사고방식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수행에 대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방대한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수행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한 가르침이 설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율에 대한 가르침, 자비실천의 가르침, 평등의 가르침, 현실직시의 가르침, 우정에 대한 이야기, 재가자의 삶에 대한 이야기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런 가르침에 대한 이해는 출가수행자보다 오히려 다양한 경험을 해 온 학자에게 더 유리할 수 있다. 학자라고 해서 수행을 해 보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없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재가자 출신의 학자가 더 훌륭한 번역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전문분야에서 각국어에 능통한 학자라면 훨씬 더 번역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 있어서 전문 번역 학자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4부니까야를 최초로 완역한 전재성 박사의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 동영상에 따르면, 한국에 있어서 불경번역 작업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학자들의 번역 작업은 매우 열악하여 자비로 번역하는가 하면 외부의 지원이 거의 없다고 한다. 따라서 번역작업에 대한 지원은 학자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스님의 스님에 의한 스님을 위한 번역
그럼에도 불구하고우리나라의 경우 번역작업을 스님들이 주도 하고 있다. 또 스님이 번역한 것을 정전으로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종단에서 스님들에게 상을 주고, 스님들에게 지원을 하고 있다. 아무리 재가에서 심혈을 기울여 번역하였다고 할지라도 승단에서 인정해 주지 않고, 스님의 번역물을 인정해 준다면 한국불교는 ‘스님의 스님에 의한 스님을 위한’ 번역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빅카웨(bhikkhave)와 빅카워(bhikkhavo)
그렇다면 승단에서는 왜 재가자의 번역물을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가장 큰 요인으로 ‘번역어’를 들 수 있다.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에는 비구를 호칭하는 ‘빅카웨(bhikkhave)’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하였다. 아마도 이 말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듯이 보인다.
빅카웨는 빠알리어라기 보다 마가다어라고 한다. 일본학자 미즈노 고오겐의 ‘빨리어 문법(연기사)’책에 따르면 빅카웨라는 용어는 정확한 빠알리어가 아니라고 한다. 비구들을 부르는 정확한 빠알리어는 문법적으로 보았을 때 ‘빅카워(bhikkhavo)’가 맞다고 본다.
그렇다면 빠알리어 문법을 무시해 가면서 까지 왜 마가다어인 빅카웨(bhikkhave)라고 표기 하였을까. 이에 대하여 문법책의 저자 미즈노 고오겐은 ‘부처님에 대한 향수’ 때문이었을 것이라 한다. 부처님을 그리워 하는 마음에서 ‘빅카워(bhikkhavo)’라는 말대신 비구를 호칭할 때 만큼은 ‘빅카웨(bhikkhave)’를 사용한 것이라 추측하는 것이다.
‘수행승’이라는 용어에 불편해 하는 사람들
이렇게 뿌리깊게 남아있는 명칭 빅카웨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수행승’ 이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전승되어 오던 ‘비구’라는 한자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행승이라고 번역한 것에 대하여 승단에서 불편해 하고 거부한 것임에 틀림 없다.
이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동영상 강의도 있다. 해피스님의 ‘건강이란 - 4부니까야 완역법회 소회[해피설법회 대구 1-12 낮]’ 의 동영상강의에 따르면 수행승이라는 번역어에 대하여 불편하게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 테라와다 비구가 이정도라면 한국불교의 승단 역시 똑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비구를 비구라 칭하지 않고 수행승이라고 칭하는 것에 대한 괘씸한 감정 같은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은 승단에서 외면받는 것 같다. 종단의 승가대학의 교재가 초기불전연구원의 것을 사용하고, 교수들의 인용문 역시 초불의 것을 사용하는 것은 비구호칭에 대한 영향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주류 기득권층 불교에서
이렇게 “수행승들이여”와 “비구들이여”로 크게 양분되어 있는 호칭으로 그 사람이 어떤 번역물을 선호 하는지 대충 알 수 있다.
“비구들이여”로 시작되는 구문을 활용한다면 주류 기득권층 불교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수행승들이여”라고 과감하게 인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주류와 기득권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라 볼 수 있다.
만일 스님이나 학자가 논문에 “수행승들이여”라고 시작 되는 문구를 인용하였다면 한국적 불교현실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임에 틀림 없다. 이런 인식은 이번 조계종 총무원에서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완역한 4부 니까야에 대하여 표창을 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초불의 번역서가 앞으로 승단의 공식적인 경전임을 대외적으로 선포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주류 기득권층과 맞선 부처님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주류 종교에 맞서 잘못된 견해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잘못된 사회제도 역시 비판의 대상이었다. 연기법으로 주류종교인 브라만교의 영원주의를 비판하였고, 브라만교 우위의 사성계급을 비판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뭇삶들을 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또한 뭇삶들을 제도와 관습과 인습의 굴레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모순과 위선과 허위에 가득찬 기존 질서체제에 비판을 가한 것은 부처님 당시에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번역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전재성박사의 파격
기존 질서 체제 하에서 비구를 비구라 부르지 않고 수행승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는 혁명적 발상이다. 승가에서 도저히 인정할 수 없고 묵과할 수 없는 초법적인 일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승가에서 스님들이 별도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작업에 착수 하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용어가 예전부터 사용하던 친숙한 한자용어를 사용한 것이라 보여진다.
반면 전재성박사는 비구를 비구라 부르지 않고 수행승이라 부르고, 범천을 범천이라 부르지 않고 하느님이라 부르는 파격을 단행하였다. 전재성박사가 그렇게 파격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스님이 아닌 재가번역자의 입장에서 비구를 비구라 하고, 범천을 범천으로 해야 하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번역물의 대상을 달리 본 것이라 보여 진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번역
만일 전재성박사가 빅카웨를 비구라 하고, 브라흐마를 범천이라고 예전의 한자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번역하였다면 승가의 구미에 맞았을 것이다. 그래서 배척당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전재성박사의 니까야 해제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역자는 학창시절 고아원야학 선생을 하다가 버려진 고아들에게도 이해가 가능한 불경을 번역해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경전 자체가 주는 문맥상의 의미를 정확히 읽어야 하고 일상용어를 사용하여 번역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역자의 주관적인 선입견이 반영되었겠지만, 그러한 것을 최소한 줄이기 위해 역자는 영국, 독일, 일본 등 세계적인 번역본을 모두 참고했습니다. 그러나 빠알리어를 서구적인 번역어가 깊이 침투해 있는 우리의 일상용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번역에서 어느 정도 왜곡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왜곡을 치유하려면, 독자들은 빠알리 원전을 직접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빠알리어 자체는 철학적으로 고도로 정밀화된 추상적 사유체계와 개념적 연결관계를 갖고 있어 번역에서 그러한 사항을 제대로 반영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역자는 번역된 우리말 문맥 속에서 난해한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도록 가능한 한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고 개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쌍윳따니까야 개정판 해제, 전재성박사)
전재성박사에 따르면 학창시절 고아들 야학을 하는 과정에서 이해 하기 쉬운 경전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한글만 알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그런 경전을 번역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가급적 한글로 풀이 하였고, 가급적 한자어를 사용하지 않고 문맥을 통하여 의미를 파악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데 주안점을 주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철저하게 일반국민들의 입장에서 번역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국민들이 볼 수 있는 경전, 심지어 타종교인도 볼 수 있는 경전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언어를 사용하여 한글만 깨치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번역을 한 것이라 보여진다. 한마디로 전재성박사의 번역물은 승가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 철저하게 이 시대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 번역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승가에서 환영 받지 못한 이유라 보여진다.
출가자의 본분은 무엇인가
한국불교에만 있는 현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포교대상이 있다. 그런데 포교대상은 스님만이 받는다. 이제까지 십년 넘게 시행된 포교대상 수상자를 보면 한결같이 스님들이다. 그것도 고위직을 지낸 유명스님들이 대부분이다.
출가자의 본분은 수행과 포교이다. 출가자가 수행과 포교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에게 포교를 잘 했다고 상을 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스님들이 스님의 본분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이웃종교에서 신부나 목사가 선교를 잘했다고 상을 주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스님들에게 주는 상은 부지기수로 많다는 것이다. 그런 것중에 하나가 번역을 잘 했다고 해서 주는 상도 포함될 것이다.
스님의 본분이 수행과 포교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작업을 한 것에 대하여 표창을 하는 것은 스님의 본분에 벗어난 것에 대한 상을 주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번역상은 재가의 학자에게 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전문번역자들이 평생연구하고 번역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의 영역이라 볼 수 있는 번역에 대하여 상을 주는 것은 학자들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발상으로 보여지고, 스님이 번역한 것이 정전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과 같다고 보여진다.
이득과 명성을 추구하는 스님들
스님들이 명예와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다. 그런 이야기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있다.
상윳따니까야에는 56개의 주제모음이 있다. 그 중 제17 상윳따가 ‘라바삭까라상윳따 (Lābhasakkāra Saṃyutta)’이다. 우리말로 ‘이득과 명예의 모음’으로 번역된다. 이 모음에 대한 해제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의 생활은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제공하는 일상적인 만족,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추구하는 생활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수행승은 명상수행의 삶에 헌신하고 정신적인 완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을 고귀한 자로서 인식하고 공덕을 추구하는 경건한 재가신자와 보시와 공경과 찬양의 대상이 된다.
(17 라바삭까라상윳따 (Lābhasakkāra Saṃyutta)해제, 전재성박사)
출가수행자가 해야 할 일은 수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완성을 위하여 노력해야 되는데,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완성하여 공경과 찬양의 대상이 되는 복전이 되는 것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멀리 한채 다른 일에 몰두 하여 예상치 않게 쏟아지는 이득과 명예, 그리고 칭송이 따른다면 어떻게 될까. 수행자의 본분에 어긋나는 그림그리기, 노래하기, 무용하기, 심지어 시(詩), 서(書), 화(畵), 다(茶)등에 몰두하여 명성을 얻었다면 어떻게 될까. 경에 따르면 이득과 명성에 대한 욕망에 대한 유혹보다도 더 미묘한 유혹으로 이끌 것이라 한다.
이런 명예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쏟아지는 이득과 명성과 칭송과 찬사에 대하여 마치 자신의 정신적인 가치에 부수 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의 아만을 아찔한 높이까지 치솟게 할 것이라 한다.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하지만 이런 이득과 명예와 칭송은 수행의 궁극적 목표를 잃게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출가자에게 쏟아지는 이득과 명예와 칭송의 위험성을 경고 하였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좋은 예라 보여진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환대와 명성은 두렵고 자극적이고 거친 것으로 위없는 평화를 얻는 데 장애가 된다.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어부가 미끼를 단 낚시바늘을 깊은 연못에 던지면 눈을 가진 어떤 물고기가 그것을 삼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어부의 낚시바늘을 삼킨 물고기는 불행에 빠지고 재난에 빠져서 어부가 원하는 대로 이끌리게 된다.
(발리사경-Balisasutta-낚싯바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7:2(1-2),전재성님역)
경에서 어부는 악마 빠삐만을 말하고, 낙싯바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의미한다. 수행자가 본분을 잃어 버리거나 본분과 관련 없는 일을 하여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얻었을 때 악마의 낚시 바늘에 코를 꿰인것으로 본다.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는 어부의 손에 달려 있듯이, 이득과 명예와 칭송을 탐하는 자들 역시 악마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20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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