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부처출현에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란?

담마다사 이병욱 2012. 12. 30. 17:17

 

 

부처출현에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란?

 

 

 

금강경의 클라이막스

 

금강경에 대승정종분이 있다. 아마도 이 부분이 금강경에서 가장 클라이막스라 생각된다.

 

대승정종분에서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 비무상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 실무중생득멸도자(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 非無想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 生實無衆生得滅度者)”라는 구절이 있다. 이 부분에 이르면 항상 가슴이 벅차 오르곤 하였다.

 

내용은 존재하는 모든 중생(생명체), 난생이거나 태상,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을 내가 모두 무여열반에 들게 하여 멸도 하겠다는 뜻이다. 이제까지 한량없고 무수하며 가없는 중생을 멸도 하였으나 실제로는 멸도 된 중생이 없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극적인 반전도 있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제도 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우주적 스케일의 부처님의 말씀이 너무 멋있었다. (), (), (), ()로 이루어진 삼계의 모든 중생을 남김 없이 제도하겠다는 보살의 원력에 대하여 감동받았기 때문이다.

 

금강경 수지독송공덕

 

금강경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이다. 그래서일까 불교교양대학에 입교하면 필수적으로 배우는 것이 금강경이다.

 

2004년에 처음 접한 금강경을 그때 당시 모두 외웠다. 누가 시켜서 외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외웠다. 금강경 공부 시간에 누군가 외우는 사람이 있다라는 소리를 들었고, 또 금강경을 가르치는 강사스님이 한 번 외워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라는 이야기를 하였기 때문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약 한달 보름에 걸쳐 외었다. 나중에는 외운 것을 안 잊어 먹기 위해서 늘 독송 하였다. 차에서는 늘 테이프를 틀어 놓았다. 이렇게 금강경 독송을 하는데 약 40분 정도 걸렸다.

 

금강경을 외우게 동기는 기억력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금강경 공덕을 무시할 수 없다. 금강경에 여러 차례 수지독송 공덕이 언급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이칠보만이소항하사수

三千大千世界以用布施,      삼천대천세계이용보시

得福多不?                  득복다부?

 

그렇게 많은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에 쓴다면

그 복덕이 많지 않겠느냐?”

 

(금강경, 11 무위복승분)

 

 

보시공덕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칠보를 우주에 가득 채워 보시하는 공덕의 과보에 대한 이야기이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하거나 남에게 한 구절만이라도 알려 준다면 그 과보가 더 크다는 것을 말한다.

 

우주적 스케일의 대승경전

 

금강경을 접하면서 놀란 것은 우주적 스케일이다. 그 중에서도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삼천대천세계는 어느 정도 크기일까. 빠알리니까에는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역아함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나의 해와 달이 사천하(四天下)를 두루 다니면서 광명을 비추는 바 이와 같은 세계가 천() 개 있다. 천 세계 가운데는 천의 해와 달, 천의 수미산왕(須彌山王), 사천(四千)의 천하(天下), 사천의 대천하, 사천의 바닷물, 사천의 큰 바다, 사천의 용, 사천의 큰 용, 사천의 금시조(金翅鳥), 사천의 큰 금시조, 사천의 악도(惡道), 사천의 큰 악도, 사천의 왕, 사천의 대왕, 칠천의 큰 나무, 팔천의 큰 지옥, 십천의 큰 산, 천의 염라왕(閻羅王), 천의 사천왕(四天王), 천의 도리천, 천의 염마천(焰摩天), 천의 도솔천, 천의 화자재천(化自在天), 천의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천의 범천(梵天)이 있다. 이것을 소천 세계(小千世界)라 한다.

 

하나의 소천 세계가 천 개 있으면 이것을 중천 세계(中千世界)라 하고, 하나의 중천 세계가 천 개 있으면 이것을 삼천 대천 세계(大千世界)라 한다. 이와 같은 세계가 겹겹으로 둘러있으면서 생겼다 무너졌다 하며 중생들이 사는 곳을 일불찰[一佛刹. 불찰이란 범어로 buddha-ksetra 佛士, 한 부처님이 교화하는 세계]이라 이름한다."

 

(불설장아함경 제 十八, 세기경(世紀經) , 염부제주품(閻浮提州品) )

 

 

이렇게 한역 아함경에는 우리가 사는 우주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 되어 있다. 그 중에 삼천대천세계에 대한 것을 보면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우주관이라 볼 수 있는 삼계가 있는데, 그런 것이 1000개 있고, 또 그것이 1000개 있고, 또 그것이 1000개 있다고 한다.

 

삼천대천세계의 크기는?

 

그렇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세계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권오민교수는 구사론에 실려 있는 내용을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아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한 이 같은 세계가 각기 일천 개가 있는 것을 일 소천세계小天世界 하고, 천 개의 소천세계를 일 중천세계中天世界라고 하며, 천 개의 중천세계를 일 대천세계大千世界라고 한다. 다시 말해 이 우주에는 10억 개의 이 같은 수미산의 세계가 있으며, 1대겁에 걸쳐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한다.

 

(아비달마 불교 (2) / 권오민)

 

 

권오민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10억개의 수미산과 같은 세계가 있다고 한다. 1000()X1000()X1000()으로 하여 1,000,000,000(십억)이 되는 것이다. 대승에서 언급한 삼천대천세계는 무려10억개의 수미산과 같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우주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일까?

 

영원주의자들의 견해

 

역사적으로 실재하였던 고따마붓다는 대승경전에서 말하는 우주적 스케일의 삼천대천세계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빠알리니까야에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과 아간냐경(D27)에 일부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브라흐마잘라경(D1)에서는 62가지 삿된 견해중 영원주의를 부수기 위하여 언급되었고, 아간냐경(D27)에사는 사회에서 불평등의 발생 원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일부 언급되었으나 우주의 창조나 크기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부처님의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왜 우주의 스케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브라흐마잘라경에 따르면 영원주의자들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 (sassata attānañca lokañca paññapenti)”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마치 저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가 움직이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있듯이 자아와 우주 역시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본다. 이런 견해에 대하여 부처님은 일어난 법이 소멸되는 것을 관찰함으로서 연기법적으로 영원주의가 삿된견해임을 밝혀 내었다. 또 제행은 무상하기 때문에 이 세상 어는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절대유()’에 바탕을 둔 영원주의는 삿된 견해라 하였다. 이다. 오늘날 영원주의는 현대과학적으로도 삿된 견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적색편이(Red Shift)

 

과학용어 중에 적색편이(赤色偏移, Red Shift)’가 있다. 관측자로부터 후퇴하는 별은 더 붉게 보이는 현상을 말한다. 이 후퇴가 빠를수록 적색편이는 더 커진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멀리 있는 은하는 가까운 은하보다 거리에 정비례하여 더 빨리 멀어진다는 것이다.

 

 

 

 

 

outer space galaxies cosmos

 

 

 

하나의 특이점에서 빅뱅이 일어난 후 은하와 은하는 서로 빛의 속도 보다 더 빠르게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빛의 속도 보다 더 빠르게 팽창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로 보았을 때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영원주의적 관점은 현대과학적 이론으로서도 깨진다.

 

그런데 팽창하는 우주에 있어서 놀라운 사실이 있다. 적색편이로 본 우주는 서로 멀어져 가고 있고, 이는 우주의 팽창을 말하는데, 우주 공간에서의 팽창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은하와 은화가 어느 곳에서이든지간에 서로 멀어진다는 것은 공간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시공간이 있어서 시공간 속에서 우주가 팽창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우주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동시에 시간도 만들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변치 않는 시공간에서 나가 태어나고 죽는 것은 맞지 않는 것으로 본다.

 

세계가 생겨나는 원리

 

부처님은 시공간 속에 있는 생멸하는 객체적인 나가 아니라 내가 주체가 되어서 세계를 바라 보는 나가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나로 인하여 시공간이 만들어 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계가 생겨나는 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나고 소멸하는 것에 관하여 설할 것이니 듣고 잘 새기도록 해라, 내가 설하겠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로까사무다야경-Lokasamudayasutta-세상의 생겨남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07(1-4),전재성님역)

 

 

인식론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대승불교권인 우리나라에서 불자들은 대승불교의 교리와 경전부터 접한다. 그런데 경전을 보면 우주적 스케일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나 법화경에서 보는 영산회상, 화엄경에서 보는 화장세계 등 모두 우주적 스케일이다.

 

이런 우주적 스케일에서 우리들 존재는 매우 미미하다. 그래서일까 현재 종단 종립대학 총장으로 있는 J교수는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우리의 괴로움이라는 것이 우주적으로 보았을 때 티끌 보다 더 작은 것에 불과 하다라고 말하였다. 부처님이 사성제를 통하여 괴로움의 해결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것과 비교하면 동떨어진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대승불교에서 개인은 우주적 스케일의 시공간에서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하여 세상의 객체로 보는 관점이다. 전자는 인식론적 관점이라 볼 수 있고, 후자는 존재론적 관점이라 볼 수 있다.

 

인식론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나로부터 우주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부처님은 세상의 생성원리에 대하여 접촉으로부터 시작 되는 것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시각과 형상이 만나서 시각의식이 형성되는데 이를 접촉이라 한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영역의 접촉에 따라 세상이 생겨나는 것으로 설명(S35:107)하였다.

 

그런 접촉은 필연적으로 느낌을 수반하고 느낌은 또한 갈애를 일으킨다. 그래서 세상은 갈애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갈애는 결국 괴로움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어서 세상이 생겨 난다는 것은 또한 괴로움의 발생(S35:106)과도 같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의 관심사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존재론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러나 나에 대하여 변치 않는 우주적 시공간의 일부로 본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시공간은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시공간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형성된 모든 것들, 예를 들어 기세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이에 대하여 권오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정은 각자가 지은 업에 따라 3계 5취를 윤회하지만, 그들의 삶의 토대가 되는 세계(이를 器世間이라고 한다)는 어떻게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유정의 업에는 크게 유정 각각의 개별적인 업(別業)과 그들 공동의 업(共業)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가 유정 각자의 삶을 결정짓는 업이라면, 후자는 객관의 세계를 형성하는 업으로 말하자면 우주적 에네르기라고 할 수 있다.

(아비달마 불교 (2) / 권오민)

 

 

권오민교수는 공업(共業) 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개별적인 업뿐만 아니라 함께 지은 업도 있다는 것이다. 공업으로 인하여 산천초목 등 기세간이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업개념은 어떤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일까?

 

공업(共業) 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공업과 관련하여 화엄경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하였다.

 

 

불자들이여, 비유를 들자면 삼천대천세계가 한 가지 인연이나 한 가지 사실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한량없는 인연과 한량없는 사실로써 이루어진다. 이른바 큰 구름을 일으켜 큰 비를 내리고 네 가지 풍륜이 서로 지속하여 의지가 된다.

 

네가지란, 하나는 능히 지님[能持]이니 큰 물을 지니기 때문이며, 둘은 능히 소멸함[能消]이니 큰 물을 소멸시키기 때문이며, 셋은 건립함이니 모든 처소를 건립하기 때문이며, 넷은 장엄함이니 장엄하여 퍼뜨림이 다 교묘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인데, 그 가운데서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마땅한 대로 받아서 쓰게 한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인연으로 삼천대천세계가 이루어지는데 법의 성질이 으레 그런 것이고, 내는 이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아는 이도 없고 이루어지는 것도 없지만 저 세계가 성취된다.

 

(화엄경, 여래수량품, 신역화엄경-동국역경원, 법정스님역)

 

 

공업에 대한 경전상의 근거이다. 경에 따르면, 우주가 생성하는 원리가 모두 중생들의 공업과 보살들의 선근으로 일으키는 것이라 하였다. 중생들이 지은 업들이 함께 모여 업을 이루어 산천초목 산하대지 등 기세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나와 기세간으로 나누는 것은 빠알리니까야에서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공업에 따른 기세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보는 것이다. 존재론적으로 보았을 때 필연적으로 존재의 근원을 탐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궁극적 실재를 인격화 하면

 

오늘날 세계의 대부분 종교는 일원론을 바탕으로 한다. 존재의 근원이나 궁극적 실재, 한마음 같은 하나의 근원에서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원인이 되는 최초의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이를 인격화 하면 야훼, 알라, 상제, 브라흐마, 바이로차나 등이 된다.

 

꽃으로 장엄된 화장(華藏)세계

 

화엄경에서는 이 세계에 대하여 비로자나부처님의 화현이라 본다. 꽃을 예로 들면, 세상에 수 많은 꽃이 있다. 그런데 모든 꽃들은 공통적으로 땅에 뿌리를 박고 성장한다. 따라서 모든 꽃들은 땅을 어머니로 하고 땅과 연결되어 있다. 비록 들에서 피는 이름 없는 잡초꽃일지라도 땅을 근거로 하고 있고, 정원에서 관상용으로 키우는 꽃잎이 넓은 꽃 역시 땅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화엄경에 따르면 이 세계는 갖가지 꽃들로 장엄된 화장세계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허공이 부처님이라고

 

이 세계가 비로자나부처님의 화현이라면 우리들도 비로자나 부처님의 분신이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산천초목도 비로자나 부처님의 분신이고, 산하대지 역시 비로자나 부처님의 분신이다. 어느 것 하나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이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현보살이 말하였다.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은 여래-응공-정등각의 몸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한량없는 곳에서 여래의 몸을 보아야 한다. 보살 마하살은 한 법이나 한 가지 일이나 한 몸이나 한 국토나 한 중생에서 여래를 볼 것이 아니고 모든 곳에서 두루 여래를 보아야 한다. 마치 허공이 모든 물질과 물질 아닌 곳에 두루 이르지만,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허공은 몸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몸도 그와 같아서 모든 곳에 두루하고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고 모든 법에 두루하고 모든 국토에 두루하지만, 이르는 것도 아니고 이르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여래의 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 그 몸을 나타낸다.

 

(화엄경, 여래수량품, 신역화엄경-동국역경원, 법정스님역)

 

 

화엄경에 따르면 여래의 몸도 그와 같아서라 하여 허공자체가 부처님의 몸이라 한다. 그래서 나를 포함하여 산천초목, 산하대지가 모두 비로자나 부처님의 몸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허공자체가 부처님이라는 화엄경의 근거를 들어 어느 스님은 "부처님이 우리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 보고 있다"고 법문한다.

 

부처출현에 산천초목 동시성불

 

화엄경의 특징은 부처님이 직접설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처님이 삼매에 들었을 때 보살들이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삼매 상태에서 본 세계는 온통 꽃으로 장엄된 아름다운 화장세계이다. 그렇다면 화엄경의 화장세계를 어떻게 하면 잘 이해할 수 있을까. 꿈의 비유를 들면 가장 잘 이해 할 수 있다고 본다.

 

이화여대 한자경 교수가 불교TV에서 꿈의 비유를 들어 한마음사상에 대한 강의를 하였는데, 화엄경 역시 꿈의 비유를 들면 쉽게 이해 된다.

 

우리들이 매일 꾸는 꿈을 보면 두 개의 나가 있다. 꿈속의 나와 꿈꾸는 나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꿈속의 나와 꿈속에서의 기세간은 모두 꿈꾸는 나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꿈속에서는 꿈속의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심지어 산천초목도 모두 꿈꾸는 나가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꿈꾸는 나는 화엄경에서 비로자나 부처님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꿈을 깬다는 것은 꿈속의 나가 꿈꾸는 나와 같은 것임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것은 나를 포함한 이 세계가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한자경 교수는 강의에서 부처성불에 대하여 산천초목 동시성불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나를 포함한 기세간도 비로자나 부처님의 화현이고 몸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성불하였을때 부처님 혼자서 성불한 것이 아니라 산천초목 산하대지가 함께 성불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부처가 출현하면 산천초목이 동시에 성불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서 부처출현에 산천초목동시성불론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우리들이 시공간의 일부라는 것이고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을 한다. “이 송장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 놈은 무엇인고?”하였을 때 이놈이 존재의 근원이고 궁극적 실재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세계를 존재론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으로 보았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고 분석하여 바라본 세계는 삼천대천세계가 아니라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 몸안에서 세계를 볼 수 있고 이 몸안에서 세계의 끝에 이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신이 주체가 되어 바라 보는 세계만이 존재한다.

 

번뇌망상만 야기할 뿐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은 우주의 형성과 종말 등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는 쭐라말룽끼야뿟따경(M63)에서와 같이 세상은 영원하다든가,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든가, 세상은 유한하다든가, 세상은 유한하지 않다.” 는 등의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하지 않았고, 삽바사와경(모든 번뇌의 경, M2)에서는 그런 형이상학적 의문은 결국 번뇌만 증장시킬 뿐이라 하였다. 존재의 근원을 찾는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번뇌양상만 야기할 뿐이라는 것이다.

 

 

 

2012-12-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