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B급 삼류정신을 지향하며
올해 끝자락에
올해도 끝자락이다. 늘 그렇듯이 끝자락의 경우 ‘파장’분위기가 느껴진다. 학교가 파했을때나 시장이 파했을 때 파장느낌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어제 같은 나날의 경우 파장 분위기와 무관하다. 오늘 떠 오른 태양이 내일 떠오른 태양과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항상 느끼는 것은 언제나 끝자락에 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루해가 무척 짧다. 동지가 지났으므로 이제 해가 길어 질 일만 남았다. 지난 바로 한 달 전 낙엽이 모두 져서 길어 지는 밤과 함께 암울한 기분이었지만, 동지를 기점으로 하여 양의 기운이 뻗어 가기 때문에 느낌과 기분이 다르다.
한 해의 끝자락은 마침내 오고야 마는 날이다. 비록 달력상에 남겨진 하루에 지나지 않지만 이 날을 위하여 한해가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임종의 순간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마치 임종하는 그 순간을 위하여 한 생이 있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임종을 맞는 사람이라면 지나간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간 꿈과 같을 것이라 본다. 이 날을 맞기 위하여 이제까지 모든 일이 있었던 것처럼 보일 것이라는 말이다. 마치 하루가 다 지나간 깜깜한 밤에 늘 앉아 있는 것처럼, 늘 견딜 수 없는 더위나 혹독한 추위 속에 있는 것처럼, 마치 달력상의 한 해의 끝자락에 늘 와 있는 것처럼, 결국 인생의 끝자락에 올 수 밖에 없는 운명 같은 것이다.
그리고 보면 밤이 된다는 것, 더운 날과 추운 날에 있는 것, 한 해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은 마치 고향 같은 것이라 본다. 객지에서 돌아 다니다 마치 집으로 돌아와 본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말한다.
필업에 대한 과보
한 장소에서 수년간을 머물면서 수 많은 글을 남겼다. 거의 매일 쓰다시피 하였는데, 책으로 따진 다면, 대략 300여 페이지에 10권 분량의 책이 된다. 그렇다고 하여 쓴 글을 이용하여 책을 출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넷상에서 공유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글을 쓸 때 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필업(筆業)’을 짓고 있다고 본다. 필업은 ‘구업(口業)’에 속한다고 하는데, 매일 구업을 짓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업, 구업, 의업이라는 삼업을 지으면, 그에 대한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매일 짓는 구업에 대한 과보는 반드시 받을 것이다.
글을 쓰면서 몇 가지 원칙이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비주류, B급, 삼류, 잡것 정신을 잊지 않는 것이다. 왜 비주류 B급 삼류 정신인가.
왜 비주류정신을 지향하는가
첫째, 비주류 정신을 지향한다. 우리나라에서 주류 불교는 1700년 전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통불교라 일컬어지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불교이다. 실제로 중국화 된 선불교가 주류불교이다. 그러다 보니 원래의 대승보살사상과도 동떨어져 있고 더구나 부처님 당시 불교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불교는 오로지 산중에 가야만 볼 수 있다. 따라서 도시에서 불교는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령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기복적인 것이어서 도시인들의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갈증을 풀어 주기에는 부족하다.
이렇게 불교가 산중에만 있다 보니 사회에 대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와 천주교가 지역을 기반으로 지역사회에 봉사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따라서 삶에 지치고 마음의 평화를 바라는 도시인들에게 불교는 너무나 멀리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가 사회에 대하여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마치 그들끼리 은둔하며 살아 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주류불교의 모습이다. 그래서 주류가 아닌 비주류를 지향한다.
왜 B급 정신을 지향하는가
둘째, B급 정신을 지향한다. 지난 10월 조계종의 자정과 쇄신 결사 추진본부에서 주관한 야단법석 시즌2에서 어느 참가자는 “한국불교는 스님과 재가자를 양반과 상놈처럼 구분한다.”라고 하였다. 마치 근대화 이전의 조선시대처럼 스님은 양반이고, 재가자는 상놈처럼 상하관계와 주종관계가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모든 것이 스님 위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스님위주로 되어 있다보니 재가자자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댓글란에 글을 남겨 주신 법우님에 따르면, 재가자가 절에 가면‘차(茶)’라도 한 잔 편안히 마시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고 한다. 또 도시 사찰의 경우 주차장도 확보 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고 한다. 참고로 댓글을 주신 법우님은 건축설계전문가이다. 그런데 성당이나 교회의 경우 가장 가장 먼저 만들어 주는 것이 신도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라 한다. 그래서 신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과 주차공간 확보가 가장 우선되고 필수적이라 한다.
또 한가지는 사찰에서 스님들이 신도회에 대하여 그다지 탐탁치 않게 본다는 것이다. 신도회가 신도들 중심으로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와 승가를 보호하는 ‘호법신장’으로서 긍정적인 역할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은 신도회를 ‘견제의 대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도회에 대한 지원은 고사하고 심지어 ‘무력화’ 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스님들이 사찰을 개인 소유의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찰이 수행공간이기도 하지만 스님들이 머무는 장소이다 보니 마치 사찰이 스님들의 개인처소처럼 활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신도들이 사찰에서 마땅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이다.
또 신도회가 결성되면 사찰에 대하여 이것 저것 간섭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신도회가 강력해지면 스님들이 사찰의 재정 등에 대하여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도들이 뭉치는 것을 그다지 탐탁치 않게 여기고 신도들이 또한 많이 아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한국불교 사찰에서 일요법문 등 법문이 실행되고 있는 곳은 극히 드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신도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리가 없다. 왜 그런 것일까. 이유는 신도들이 많이 아는 것을 그다지 바라지 않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신도들이 많이 알면 자신들의 권위에 손상이 간다고 보는 측면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신도들이 무지하면 할수록 성직자들의 권위는 높아진다는 말과 일치 하는 대목이다.
한국에서 불교의 특징은 산중불교이자 스님불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스님의 스님에 의한 스님을 위한 불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재가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사찰에서 아무것도 없을 정도이다. 사찰에 가서 기도나 하고 시주나 하는 것이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래서 스님은 양반, 재가자는 상놈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스님은 A급이라 볼 수 있고, 재가자는 B급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재가자는 상놈에 해당되고 B급에 해당된다.
재가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목말라 하지만 갈증을 채워 줄 곳이 마땅치 않다. 글쓰기를 하는 이유도 B급을 위한 것이다. 글쓰기를 함으로서 B급과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B급 정신을 지향한다.
왜 삼류정신을 지향하는가
셋째, 삼류 정신을 지향한다. 태생적으로도 삼류이고, 현재 위치도 삼류이고, 글쓰기도 삼류이다.
사람들은 일류를 지향한다. 일류대학에 입학하여 자격시험을 패스하고 마치 엘리베이터가 올라 가는 것처럼 스무스하게 인생이 풀려 나가는 것을 바란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요직을 차지하는 것을 바란다.
유명인사가 되어 명예를 얻었을 때 역시 일류라 본다. 그래서 누구나 일류를 부러워 하고 일류가 되고자 한다. 마치 일류가 아니면 사람 축에도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보는 것이 세태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일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가 이류이고 삼류이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일류가 아니다. 좋은 가문이나 훌륭한 혈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이듯이 그저 그렇고 그런 배경을 가졌다. 용모가 특별히 뛰아다든가, 신체적으로 월등하다든가, 머리가 비상하다든가 등의 특출난 특징을 가진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콤플렉스로 안고 살아 가는 갑남을녀이고 보통사람이고 보통불자이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다 보니 삼류이다.
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많은 재산을 축적한 부자도 아니다. 근근히 그 때 그 때 벌어먹고 사는 1인사업자이다. 1인사업자를 다른 말로 ‘자영업자’라고 한다. 자영업자이다 보니 고정수입이 없다. 일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이 없으면 놀게 된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노느니 글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일이 있으면 만사 제쳐 두고 일을 먼저 한다.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를 멀리 하는 것은 아니다. 짬을 내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런데 짬을 내서 글을 쓰는 것이 더 ‘스릴’있다는 것이다. 일이 없어서 초조와 긴장감에 사로 잡혀 글을 쓰는 것 보다 훨씬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을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맙다. 일을 주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반가운 손님이고 귀인이고 은인이다. 생활을 지탱해 주는 고마운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회적 지위가 없다 보니 ‘삼류’이다.
글쓰기를 한 번도 제대로 배워 본 적이 없다. 2005년 직장을 그만 둔 후로 그야말로 남는 것이 시간 밖에 없어서 자연스럽게 컴퓨터와 친해 졌다. 그래서 불로그를 만들게 되었고 “내 글 한 번 써 보면 어떨까?”하고 2006년부터 글을 쓰게 되었다. 따라서 문법적으로도 오류가 많고 구성도 엉성하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글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보았다면 글 같잖게 보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글을 전문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다.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교수 등 학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때로 스님들의 글쓰기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스님이나 교수, 언론인등의 글쓰기를 보면 지위에 걸맞는 글을 쓰는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 책을 저술하거나 학술 논문을 내기 위한 글쓰기를 하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이 들 일류층에서 블로그나 카페에 글을 쓰는 경우는 극히 드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스님이나 교수 등도 종종 블로그 등에 글쓰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꾸준히 쓰지 않기 때문이다. 올려 놓은지 오래된 것이 대분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카페나 블로그에 왜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일까.
지난 여름 불교평론 폐간 사건이 있었다. 불교관련 논문이나 수필 등을 올려놓는 고품격 계간지이다. D대 K교수는 불교평론 폐간과 관련하여 소회를 올리는 글을 발표 하였다. 그 교수가 불교평론에 논문을 자주 올리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논문이 너무 길기 때문에 잡문성격의 불교평론에 싣기에는 맞지 않아서라고 하였다. 고품격 계간지라 불리우는 불교평론에 실린 글을 ‘잡문’으로 보는 시각이 놀라웠다. 그렇다면 블로그에 있는 글은 어떤 성격일까. 아마도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들은 잡문도 못되고 ‘쓰레기’성 글이라고 볼 것임에 틀림 없다.
일반적으로 ‘먹물’들이라고 불리우는 식자층이나 교수 들은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행위에 대하여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책을 저술하고 장문의 논문을 학계에 발표 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행위가 품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일것이다. 그런 바탕에는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이 저질이고, 왜곡된 내용이고, 잘못된 정보로 가득한 쓰레기라고 보는 시각이 있어서 일 것이다.
대다수의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한다. 책을 읽을 시간도 없고 법문을 들으러 갈 곳도 없고 또 법문을 들으러 갈 시간도 없기 때문에 생활의 일부분이라 볼 수 있는 인터넷을 이용한다. 그래서 이곳 저곳 기웃거려 보지만 현재 자신의 삶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글들로 넘쳐 난다. 이럴 때 글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나 학식이 높은 교수, 그리고 수행을 오래한 스님들의 글이 있으면 매우 좋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글은 찾아 보기 어렵다.
스님이나 학자, 언론인들이 일류라면, 대다수 불자들은 삼류이다. 그래서 일류는 일류 그룹에 걸맞는 글쓰기를 하는 것 같다. 삼류는 역시 삼류에 맞는 글쓰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대다수 불자들이 비주류 삼류에 속하기 때문에 삼류에 해당되는 글쓰기를 한다. 그래서 삼류정신을 지향한다.
개인정보를 올려 놓지 않는 이유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여러 방면으로 알려고 한다.
이웃 사무실에 있는 이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그는 전방에서 통신병으로 근무 하였는데 통신반에서 전화선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여유 있는 시간에 이웃 부대의 통신병과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전화로 통화한 것이다. 이렇게 여러 달 전화로 대화하다 보니 상대방이 누군지 궁금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만나게 되었는데 결론은 실망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만나지 않은 것이 더 나았던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목소리로 접한 상대와 일대일로 대면해 보니 실망 하였다는 것이다. 넷상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넷상에 일체 개인정보를 올려 놓지 않고 있다. 사진이나 전화, 이메일 등 사적인 정보나 통화에 대한 것은 없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신비주의 전략이 아니라 내 세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주류, B급, 삼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알고 나면 실망할 것이다. 그래서 알려고 하는 사람 보다 더 못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어 안심시켜 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가상공간은 현실공간의 연장선상
넷상에서 개인 정보를 알리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넷상에 너무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공간을 넘나 들며 살아가는 현실에서 가상공간은 현실공간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다. 취중(醉中)에 인터넷을 할 수도 있으며, 과도한 정신적 집착을 가진 자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퍼 붓는 자들도 있다. 단지 자신에게 관심을 보여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험한 말을 퍼 붓는 것을 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나네. (S6:9)”라는 말이 실감난다.
또 올려진 글에 대하여 말 꼬투리를 잡는 경우도 있다. 논쟁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런 전략에 말려 들면 졸지에 인터넷토론사이트 같은 장이 되어 버린다. 논쟁을 좋아하거나 댓글놀이를 즐기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을 보면 부처님이 하신 말씀인 “침묵한다고 비난하고, 말을 많이 한다고 비난하고, 알맞게 말한다고 비난하니 세상에서 비난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Dhp227)”라는 말이 실감난다. 회의론자들에게 있어서 답글을 안써도 비난받고, 답글을 많이 써도 비난 받고, 적당하게 써도 비난 받는다. 그럴 경우 차라리 침묵이 더 나을 듯하다.
격려의 글을 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려의 메시지도 많이 받는다. 이름도 얼굴도 알 수 없는 수 많은 법우님들로 받는 격려의 글은 커다란 활력소가 된다. 다음과 같은 글이다.
연꽃님의 여섯가지 감각능력과 담마에 대한 상세한 법문으로
모호하게 알고 있던 ‘세상의 생겨남과 희론의 생겨남’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놓치지 않을려고 노력하는 것은
제 스스로의 삶이 괴로워서이고
이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을 학교교육과정에서 배워본 적이 없고
사회생활하면서도 주변사람이나 교양서적에서도 발견한 적이 없어서 입니다.
전재성 박사님의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 부터 몇권을 읽고있는 중입니다.
생활하면서 부딛히는 괴로움과 유형이 비슷한 경을 찾아보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초불서적에 비해 편안히 이해가 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연꽂님 블러그를 통해 배운 내용으로
세상을 보는눈을 바르게 바꿀 수 있었고
스스로도 전과는 밚이 변해진 모습을 느낄 수 있었던 한해였다고 생각합니다.
연꽃님! 건강하고 평온한 새해 맞이하시길 두손모아 기원드립니다. __()__
(G법우님)
G법우님의 말씀대로 불교를 공부하는 목적은 괴로움때문이다. 지금 현재 즐겁고 행복하다면 굳이 종교를 찾지 않을 것이다. 지금 현재가 불만족 스럽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대부분 불자들이 G법우님과 같은 생각일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고통(appiyehi sampayogo dukkho)
살다 보면 내 힘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나타난다. 그런 문제는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이고 때로 절망스런 것이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생노병사가 가장 큰 괴로움이라 하여 사고(四苦)라고 말하지만, 사고와 더불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또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괴로움 중에 현실적으로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piyehi vippayogo dukkho)’이 가장 크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고통 (appiyehi sampayogo dukkho)’ 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은 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만나기 싫다고 하여 도망 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으로 인한 괴로움이다. 그런 고통은 매우 현실적이어서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과 절망을 야기한다.
“이럴 경우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만나게 되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이 발생하였을 때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당혹하고 당황해 한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힘으로 풀 수 없을 때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대상을 찾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에서 답을 얻고자 한다. “이럴 경우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에 대한 것이다.
중학교때 처음 접한 불교
불교를 다시 접하게 된 것은 지난 2004년도이다. 그 동안 불교를 잊고 있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만 정서적으로는 항상 불교인이었다. 절에 다닌 적이 없지만 종교란에는 항상 ‘불교’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 불교와의 인연은 중학교시절로 거슬로 올라 간다.
중학교에서 불교를 처음 접하였다. 참으로 우연이었다. 배정받아 간 곳이 조계종 종립중학교 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종로 5가 가까이 있었던 중학교에서 불교를 배웠다. 그때 기억이 평생가는 것 같다. 마치 하얀 도화지와 같은 순수한 상태에서 불교를 알게 된 것이다. 그 때 당시 일학년 때 부처님의 일생을 배웠다. 불교시간에 불교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교법사선생님으로 부터 부처님의 일대기를 배웠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때 당시 불교선생님이었던 분은 현재 종립대인 D대 교수님으로 재직중에 있다.
율장 마하왁가에 따르면 “깨끗한 천에 염색이 잘 드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이 있다. 마치 하얀 도화지 같은 중학교 1학년에게 있어서 부처님의 일대기는 깨끗한 천에 염색이 잘 드는 것처럼 잘 받아 들여 졌다. 그래서 부처님 같은 분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립중학교에서 배운 교재 중에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불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었다. 부처님이 우루벨라 산상에서 설법한 내용이다. 교과서에는 삽호와 함께 부처님이 마을을 바라보면서 제자들에게 “탐욕의 불로 불타고 있다” “성냄의 불로 불타고 있다”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다”라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This small town, known at the Buddha's time as Uruvela
그런데 그 때 당시에는 탐욕의 불등에 대한 내용을 전혀 이해 하지 못하였다. 중학생의 머리로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 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용이 중학교 불교 교과서에 실려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마을을 쳐다 보며 왜 탐진치 삼독으로 불탄다고 하였을까. 이런 의문이 늘 화두 처럼 늘 남았다.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과 함께 불교와의 인연은 끊어 졌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불의 가르침에 대한 의문이 최근에야 풀렸다. 빠알리니까야를 보며 스스로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해 하였기 때문이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상윳따니까야에 ‘아딧따빠리야야경 (S35:28)’ 이 있다.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 또는 ‘불타오름의 경’이라 한다. 이 경에서 부처님은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로 타오르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때 탐진치 3독은 불을 타오르게 하는 원동력, 즉 ‘땔감’이라 본다.
땔감이 있어야 불이 계속 타오를 것이다. 만일 땔감이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불은 꺼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불을 끄려면 땔감을 공급하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가 소멸 되었을 때 더 이상 번뇌의 불은 타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번뇌의 불이 꺼졌을 때 이를 열반으로 본다. 이런 내용이 라따나경(Sn2.1)에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Khīṇaṃ purāṇaṃ navaṃ natthi sambhavaṃ 키-낭 뿌라-낭 나왕 낫티 삼바왕
Virattacittā āyatike bhavasmiṃ, 위랏따찟따- 아-야띠께 바와스밍
Te ṇīṇabilā avirūḷhicchandā 떼 니나빌라- 아위루-리찬다-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닙반띠 디-라- 야-타-얌빠디-뽀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상게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라따나경-Ratanasuttaṃ-보배경-寶石經, 숫따니빠따-Sn 2.1, 전재성님역)
라따나경 14번 째 게송에 따르면, 열반에 대하여 등불이 꺼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라 하였다. 이루 미루어 보았을 때 탐진치로 대표 되는 번뇌가 모두 소멸되었을 때 열반이 실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중학교 시절 알 수 없는 의문이 지금에서야 풀렸다고 본다. 탐욕의 불, 성냄의 불, 어리석음의 불이 꺼 졌을 때 열반을 성취하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맞는지 맞지 않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승이 없기 때문이다.
스승이 없는 재가불자
스님들과 달리 재가불자들은 스승이 없다. 재가불자들은 자신을 지도해 줄 수 있는 스승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재가불자들이 천만명이 넘고 통계적으로 스님과 비교하여 99.9%에 달하기 때문에 재가불자를 일대일로 지도해 줄 수 있는 스승을 갖는 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스승이 없는 재가불자들은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당연히 삼보에 의지해야 한다. 그 중에 특히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은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디가니까야 마하빠리닙바나경(D16, 대반열반경)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유훈이 있다.
구 분 |
내 용 |
빠알리어 |
Yo v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
성전협회 (전재성박사) |
아난다여, 내가 가고 난 뒤에 내가 가르치고 제정한 가르침과 계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
초불 (각묵스님) |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것이다. |
For that which I have proclaimed and made known as the Dhamma and the Discipline, that shall be your Master when I am gone. |
(마하빠리닙바나경- 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M16)
마하빠리닙바나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마지막 유훈에서 ‘담마(가르침)’와 ‘위나야(계율)’이 ‘스승(satthā)’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경전적 근거로 보았을 때 현실적으로 스승이 없는 재가불자에게 있어서 스승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가 스승역할을 하는 것이다.
‘비주류 B급 삼류’일지라도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서 많은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빠알리니까야 속에서 부처님은 진리를 설한 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개혁가이자 혁명가이었다. 부처님 당시 사성제라는 제도에 따라 신분과 관습과 인습을 타파 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승가에서는 신분제를 모두 철폐 하였다. 그래서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누구든지 ‘현자’가 될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런 게송 중의 하나가 다음과 같은 것이다.
Mā jātiṃ puccha caraṇañca puccha
kaṭṭhā have jāyati jātavedo,
Nīcā kulīnopi munī dhitīmā
ājāniyo hoti hirīnisedho.
[세존]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어야 하리.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에서도 지혜로운 현자가 생기네.
부끄러움으로 자제하는 자가 고귀하네.
(순다리까경-Sundarikasutta, 상윳따니까야 S7:9(1-9),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부처님 당시 지배층인 바라문 순다리까와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가문이나 출생에 따른 제도를 비판하였다. 그래서 행위를 강조하였다. 태생적으로 바라문이라도 도둑질을 하면 도독놈이 될 수밖에 없고, 태생적으로 노예의 계급이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법을 알게 되면 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불의 비유로 설명하였다.
불의 특징은 무엇일까. 불은 ‘화염’이 있고 ‘광채’가 있고 ‘광명’이 있다. 이런 불의 특징은 어느 불이든지 똑 같다는것이다. 소똥으로 불을 지피었건, 고급 전단향 목재로 불을 지피었건 불의 특징은 모두 같은 것이다. 따라서 비천한 가문에서도 현자가 나올 수 있음을 말씀 하신 것이다.
태생이 좋은 ‘주류 A급 일류’ 출신이나, 태생이 별 볼일 없는 ‘비주류 B급 삼류’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마치 불꽃의 특징이 모두 똑 같듯이 누구나 현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2012-12-31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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