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소리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마음의 오염과 청정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11. 15:23

 

 

소리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마음의 오염과 청정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다. 작가의 허구를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에 나래에 갇히기 싫은 이유도 있다. 인간이 상상력의 한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상상력이 현실을 사는데 있어서 그다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신 인문관련 서적은 신뢰한다. 사실에 관계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역사나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의 구성은 객관적이기 때문에 읽을 만 하다. 그래서 한 때 열심히 읽은 책은 이제 고전이 되어 버린 프리초프 카프라(Fritjof Capra)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과 같은 신과학운동에 대한 서적과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료마가 간다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소설에 매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도 초기경전을 접하면서 시들해졌다. 아무리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절날 사촌형댁에서 본 거실 한 쪽 벽면을 가득 채운 갖가지 서적이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 이유는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때 벽면 가득히 책으로 쌓아 두었으나 지금은 모두 치워져 있는 이유는 빠알리 니까야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의식이 바뀐 이유도 있다.

 

이렇게 빠알리 니까야 지상주의를 고집하다 보니 다른 책이 눈에 들어 올리 없다. 니까야와 관련된 책만이 진실이고, 니까야 속에 모든 삶의 해답이 들어 있다고 보는 것은 어쩌면 경전적 도그마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M102)”라고 주장하는 영원주의자들의 유일성에 대한 지각과 같은 오류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직 니까야만이 가장 진실한 이야기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박완서의 자전적 성장소설

 

명절을 보내고 돌아 오는 길이 많이 막혔다. 불과 한 시간 여 걸리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꽉 막힌 도로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럴때 스마트폰이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접속하여 간단한 글을 읽거나 음악이나 다운 받아서 듣던 것으로 알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뜻밖에도 오디오 북기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종의 소리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오디오 북을 미리 저장해 놓은 것이 있어서 이를 듣게 된 것이다.

 

글씨가 보이지 않아 책을 보기가 힘든 사람이나 시각 장애를 가진 사람 등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여지는 소리소설은 도로가 꽉 막힌 상황에서 들을 만 하다. 가다 서다 정체와 지체를 반복하는 도로에서 들은 것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다. 박완서 작가가 1992년 발표한 자전적 성장소설이라 한다.

 

책의 제목은 알고 있었으나 한 번도 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소리소설에서 나레이터의 목소리를 통하여 소설을 읽는 것과 다름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도 아주 편하고 느긋하게 단지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더구나 나레이터는 소설을 읽는 중간에 대화체 문구에서 때로 화자의 목소리도 내고 할머니의 역할도 하는 등 일인 다역을 한다. 그래서 대화할 때는 감정을 실어서 말하기도 하는 등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들여 주는 할머니 역할 같기도 하고, 무성영화시대의 변사 역할 같기도 하다. 또한 처음부터 끝까지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갔기 때문에 듣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운명적 파탄을 암시하는 눈물과 울음

 

박완서 작가는 어린 시절을 개성 부근의 시골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소설에 여덟 살 이전 까지의 생활이 매우 생생하게 묘사 되어 있다. 이는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어린 아이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에 대한 것이다. 아직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 특히 생생하게 묘사 되어 있는데, 이는 무엇이든지 첫 경험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 중의 하나나 노을에 대한 묘사이다.

 

유년 시절 어느 날 해질 녁 하늘이 벌겋게 장엄된 것을 본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광경을 최초로 보고 느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아름답고 장엄한 노을을 보고서 커다란 쓸쓸함을 느꼈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하였다.

 

의미 없는 눈물은 없다. 운다는 것은 미래에 벌어질 일에 대한 것일 수 있다. 유행가 중에서 갑순이가 시집간 첫날 밤에 하염없이 운것도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두려움이라 볼 수 있고, 시간역행으로 유명한 박하사탕에서 초반부에 주인공이 철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시울을 적신 것은 미래의 운명적 파탄을 예견한 것인지 모른다. 또 전쟁이 나기 전에 동네의 비석이나 바위가 눈물을 흘리듯이 땀을 흘렸다든가, 오래 된 나무나 산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이렇게 의미 없는 눈물은 없는 것이다. 

 

작가의 유년시기는 1930년대 말이다. 인터넷, 스마트 폰 등 정보통신이 발달한 시대와 비교하면 원시시대와 다름 없지만 원초적 감정은 그때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다고 본다. 소설속에서 표현된 원초적 감정처리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천년 전이나 1930년대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노을을 바라 보고 느끼는 감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노을을 보고 눈물을 터뜨린 아이 

 

서쪽 하늘을 일시적으로 벌겋게 달군 노을은 금방 스러지고 만다. 해가 서산에 넘어 가기 전에 한 번 벌겋게 하늘을 장엄하는데, 이는 마치 임종을 앞둔 노인이 한 번 힘을 쓰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런 하늘을 바라 보았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참 아름답다!”라고 경탄할지 모른다. 하지만 삶의 끝자락에 와 있는 사람들은 쓸쓸함을 느낄 것이다. 무상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무상함은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에서 이미 겪은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을을 바라 보았을 때 특히 삶의 끝자락에 와 있는 노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특별난 것이라 볼 수 있다.

 

노을은 무상한 것이다. 흘러 가는 구름이 무상하듯이 노을 역시 무상한 것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박완서 작가는 유년시절 노을을 보고 울음을 터 뜨렸다고 한다.

 

 

 

 

a red sky

 

 

 

삶의 종착지에 다다른 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상함에 대하여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아름다운 노을을 보고 어린 것이 하염없이 울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미래의 운명이 울음을 통하여 발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울음은 순수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언제부터 오염되기 시작하는가

 

소리소설로 듣는 작가의 유년기 이야기는 순수 그 자체이다. 자연과 동화되어 자연의 일부가 된 이야기 중에는 유년시절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다. 마치 자신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소리소설을 듣다 보면 점차 순수와 멀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산동네, 달동네라 불리우는 현저동 단칸 셋방에서 홀어머니와 오빠와 생활 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들으면 점차 세파에 오염되어 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남들과 비교하게 되고 어머니 지갑을 뒤져 과자를 사먹는 장면 같은 것이다. 이런 과정은 누구나 겪는 것이다. 성장함에 따라 겪게 되는 여러가지 사건에 따라 순수하였던 유년기의 마음이 오염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오염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게 되지만 이를 막을 수 없다. 그저 그대로 굴러 간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유년의 순수로 돌아 가기에는 너무나 오염이 되었다고 느끼는 때가 있다. 이런 시기가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삼사학년 정도 되면 스스로 알게 된다. 이런 시작은 남들과 비교하면서 시작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에 입학하면 나와 다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상대방을 통하여 자신의 집이 가난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사회가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자신 보다 더 잘 난 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우열에 따라 사회가 결정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아는 과정이 다름 아닌 오염을 가속화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이에 이르면, 아마도 초등학교 삼사학년 정도에 이르면 다시는 유년기의 순수로 돌아 갈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돌아가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많이 오염되었음을 자각하게 된다. 자신을 속이고 살다 보니 그 것이 누적되어 다시는 돌아 갈 수 없음을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한 켠에는 늘 유년기의 순수가 남아 있다. 그래서 순수하였던 마음을 그리워 하고 그 시절로 되돌아 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되돌아 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한편 끊임 없이 자신을 속이는 과정이 진행된다. 그런 유년시절로 돌아 갈수는 없는 것일까?

 

아이로서 출가하여

 

불교에 동진출가(童眞出家)가 있다. 아이로서 출가하는 것을 말한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로서 출가하였을 때 가장 이상적인 출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불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이 세상에 명()과 복()은 길이길이 창성하고 오는 세상 불법(佛法) 지혜 무럭무럭 자라나서, 날 적마다 좋은 국토 밝은 스승 만나오며, 바른 신심 굳게 세워 아이로서 출가하여 귀와 눈이 총명하고 말과 뜻이 진실하며 세상일에 물 안 들고, 청정한 범행(梵行) 닦고 닦아 서리 같이 엄한 계율 털끝인들 범하리까.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

 

 

이산혜연선사 발원문에 따르면 아이로서 출가하는 것은 청정범행을 닦기 쉽기 때문이라는 뜻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는 이전 생에 부처님 법을 만났으나 성불하지 못 하였을 경우 다음 생에서는 아이 일 때 출가하여 성불할 것을 발원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때가 묻지 않겠다는 것을 발원하는 것이다. 오염원으로 가득찬 세상으로부터 격리 되는 것을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청정무구와 순수 그 자체인 아이일 때 출가하여 계속 그 상태를 유지 하고 싶은 발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동진출가를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 같다.

 

그러나 동진출가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본다. 어린아이가 자발적으로 절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저녁 노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하여 그 아이가 스스로 출가 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동진출가의 의미는 스스로 출가하였다기 보다 어떤 이유로절에 맡겨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아이 시절에 절에 맡겨 졌다고 하여 모두 절에 남아 있을까. 대부분 환속한다고 한다. 절에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믈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의에 의하여 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의로 맡겨 진 경우 다시 세상속으로 나가고 만다는 것이다. 설령 절에 남겨졌다고 하더라도 유독 세상 것들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많다고 한다.

 

여래장 사상의 원류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많이 오염되었음을 알고 있다. 너무나 많이 오염되었기 때문에 오염에 무딘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자신을 속이기 일쑤이다. 그러면 안되는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관성이다.

 

이미 습관화 되어 버렸기 때문에 안되는 줄 알면서도 남의 물건에 손이 가게 되고, 안되는 줄 알면서도 음란한 생각을 하고 음란한 행위를 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마구 화를 내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이렇게 오염되다 보니 때로 유년시절을 떠올린다. 맑고 순수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던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그런 시절을 떠 올리면 마음이 순수해지는 것 같다. 그런 마음은 어떤 것일까. 초기경전에 유년시절과 같은 순수한 마음이 보인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러나 그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마음을 닦지 않는다고 나는 말한다.

 

(빠밧사라왁가-Pabhassaravaggo, 앙굿따라 니까야 A1:6(1-6-1), 대림스님역)

 

 

초기경에 따르면 마음은 원래 빛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객(āgantuka)으로 인하여 오염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오염된 마음을 닦아야 한다고 한다. 마치 더러운 거울을 닦으면 자신의 본래 얼굴을 볼 수 있는 것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오염된 것으로 보고 이를 청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후대 대승불교의 여래장사상으로 발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승불교의 여래장사상과 산불교의 돈오설의 기본 명제로 보기도 한다.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하나의 이상적인 마음을 상정해 놓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본래의 마음에 대할여 진여, 불성, 참나, 본래면목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본마음, 참나를 찾기 위한 수행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의 해석은 이와 다르다.

 

마음은 어떻게 오염되는가

 

마음의 오염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비유를 들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염색공이나 화가가 물감이나 도료나 삼황이나 쪽이나 꼭두서니를 사용해서 잘 연마된 판이나 벽이나 천에 남녀의 모습을 그 팔다리와 함께 그려낸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물질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하고, 느낌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하고, 지각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하고, 형성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하고, 의식을 반복해서 생겨나게 한다.

 

(두띠야 갓둘라밧다경-Dutiya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2, 상윳따니까야 S22:100(5-8), 전재성님역)

 

 

오염된 마음이 생겨나게 하는 원인에 대하여 화가가 캔버스에 물감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마치 어린 아이가 하얀 도화지 위에 색연필을 이용하여 자동차 등을 그려서 여백을 메꾸어 나가는 것과 같다.

 

어린 아이의 마음은 하얀 도화지와 같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자기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듯이 어린 아이 역시 마음의 그림을 그려 나간다. 대부분 오염되는 방향쪽이다. 그래서 초등학교 삼사학년만 되면 자신이 오염되었음을 스스로 알게 된다. 그렇다면 오염원을 어떻게 해야 지울 수 있을까.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야

 

대승불교나 선불교에 따르면 거울을 닦듯이 마음을 닦으면 본래의 순수한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유행화’라는 그림의 그 다양성을 본적이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마음은 그 걸작보다도 다양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이와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이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오염되므로 뭇삶이 오염되고 마음이 청정해지는 까닭으로 뭇삶이 청정해진다.

 

(두띠야 갓둘라밧다경-Dutiya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2, 상윳따니까야 S22:100(5-8), 전재성님역)

 

 

유행화(流行畵)라는 것은 바라문 외도들이 옷창고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다양한 모양으로 선취(善趣)와 악취(惡趣)에 따라 성공하고 실패하는 자들의 모습을 새겨 넣은 그림을 말한다. 업을 짓고, 업을 경험하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 주는 그림이다. 마치 업경대와 같은 것이다. 그런 유행화를 마음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유행화 보다 훨씬 더 다양한 것이라 하였다. 누구나 마음의 그림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윤회하면서 반복적으로 마음을 오염시켜 왔다. 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물감을 이용하여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짓는 그림을 그려 온 것이다. 이렇게 덕지 덕지 달라 붙어 있는 물감들을 떼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반복해서 자신의 마음을 관찰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는 사념처 수행을 말한다. 부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고 되새기고 사유하여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문답식 설명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존]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

그런데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기는 것은 옳은 것인가?”

[수행승들]

“세존이시여, 옳지 않습니다.”

 

(두띠야 갓둘라밧다경-Dutiya gaddulabaddha sutta-가죽끈에 묶임의 경2, 상윳따니까야 S22:100(5-8),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물질부터 시작하여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이르기 까지 오온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나의 것이 아님을 문답식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먼저 유신견을 타파하기 위해서이다. 자아를 긍정하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는 한 어떤 오염원에서도 해방될 수 없음을 말한다.

 

가죽끈에 묶인 개와 기둥

 

그래서 개체가 있다는 견해인 유신견에 대하여 부처님은 가죽끈에 묶인 개가 견고한 막대기나 기둥에 단단히 묶여, 그 막대기나 기둥에 감겨 따라 돌듯(S22:99)”라 하여 가죽 끈에 묶인 개에 비유 하였다. 여기서 가죽끈은 견해와 같고 기둥은 자신의 몸과 같다.

 

그래서 가죽끈으로 묶인 개가 기둥을 따라 맴도는 것처럼, 범부는 견해와 갈애로 자신의 몸을 묶고 한량 없이 윤회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청정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유신견을 타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대승불교와 선불교에서는 이와 반대로 본래의 마음을 찾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유신견을 말한다. ‘존재의 무리에 실체가 있다또는 개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이런 유신견을 가지고 있는 한 결코 성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수다원이 되기 위한 초보단계에도 들어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작가의 자전적 소설 제목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다. 그런 싱아는 어떤 것일까. 처음 들어 보는 싱아에 대하여 인터넷백과사전을 찾은 결과 마디풀과(Polygonaceae)에 속하는 다년생초라 한다. 1m정도 자라고 해마다 6-8월경에 꽃이 피는데, 봄에 어린 잎과 줄기를 익혀 먹거나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소리소설에서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싱아 줄기를 날 것으로 씹어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자연과 일부가 되어 싱아를 먹은 것으로 묘사 되고 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기 위하여 서울로 오고 나서부터 싱아를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고향에서는 지천으로 자라는 싱아를 서울에서 볼 수 없었던 것은 어떤 이유일까? 아마도 자라면서 점차 오염되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유년기 시절이 하얀 도화지이었다면, 학교에 다니면서 부터는 자신만의 그림이 그려 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 따라 싱아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싱아를 볼 수 없게 되자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고 묻는다. 이는 유년으로 다시 되돌아 갈 수 없음을 말한다.

 

이 마음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

 

흔히 불교에서는 천진불(天眞佛)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전에 따르면 “법신은 천연의 진리이며 우주의 본체라는 뜻으로, ‘법신불’을 달리 이르는 말”로 설명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해 맑은 마음을 말한다. 그래서 청정한 나이 든 고승에 대하여 천진불 같다고 말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졌음을 말한다.

 

그러나 어린아이 마음 자체로 돌아 갈 수는 없다. 비록 유년기의 마음이 순수한 마음이긴 하지만 조건에 따라 조건만 맞으면 쉽게 오염될 수 있다. 따라서 거울의 때를 벗겨 내듯이 본마음을 드러내자고 한다면 이는 유신견으로서 비불교적이다. 또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낭만적 발상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경에 따르면, 무명에 덥힌 뭇삶들이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여 왔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이 마음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왔다라고 관찰함으로서 오염된 마음이 청정해 질 수 있다고 한다.

 

 

 

2013-02-11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