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뭇삶들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자비심이 없는 스님들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8. 10:48

 

 

뭇삶들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자비심이 없는 스님들

 

 

 

군포교에 대한 글을 여러 차례 썼다. 그리고 보시에 동참하는 호소문 형식의 글도 올렸다. 이는 군불교가 한국불교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나아 진 것 같지 않다. 지난해 호국연무사 불사가 완성되어 한꺼번에 5천명이 수용가능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벅찼으나 개신교의 공격적인 선교활동에 비하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것임을 또한 알 수 있었다.

 

군포교의 특성상 문화활동이 수반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교에는 개신교의 실로암과 같은 열광적인 아이템이 없다. 이렇게 군불교가 지지지부빈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스님들이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님들이 외면하는 군불교 현장

 

이런 사실에 대하여 군포교 현장에서 활동중인 재가의 박호석 법사가 스님들의 동참을 호소하는 글을 미디어붓다에 올렸다.

 

 

전국의 회주·한주 스님!

 

이 사바의 중생들이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스님들께서는 한 결 같이 문중일이나 챙기시고, 일대사 해결하셨다고 쉬고만 계십니까? 아니면 사제나 상좌에게 주지 맡기니 하는 짓 못마땅하다고 별채에서 속이나 끓이고 계십니까?

 

남의 종교 얘기라서 입에 담기 싫지만 대부분 목사는 정년이 있어 뒷방으로 물러나면 복음이 미치지 않는 시골이나 군부대의 교회에 머물면서 여생을 전도에 바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후방을 막론하고 대대급 부대의 일요일 예배는 물론이고 평일에도 장병들과 상담을 위해 상주하는 나이 지긋한 민간인 목사를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우리 불가에는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간혹 점안식이나 수계법회와 같은 행사를 제외하고는, 군승이 없는 법당에 상주하거나 정기적으로 일요법회를 맡아하시는 원로급 스님들을 만나 뵙기 어렵습니다.

 

(박호석 법사의 '벼랑끝 군불교'2- ‘회주·한주 스님 전상서’, 미디어붓다 2013-02-05)

 

 

 

 

 

 

깡통법당

9사단 수색대대 군법당. 일명 깡통법당으로 불린다.

사진 ; http://www.mediabuddha.net/bbs/board.php?bo_table=07_1&wr_id=9699

 

 

 

 

 

박호석 법사를 한 번도 본적이 없지만 인터넷신문사이트를 통하여 종종 글로서 볼 수 있었다. 군포교에 헌신하면서 도로명주소문제에 대해서도 이슈화를 시킨 바도 있었기 때문이다.  

 

 

법사의 글에 따르면 전국에 있는 우리나라의 큰스님이나 노스님들은 매우 한가해 보이는 것 같다. 절일에 대하여 상좌에게 물려 주고 뒷방에 물러나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이는 스님들을 한주나 회주라 하는 것 같다.

 

큰스님과 노스님

 

한주와 회주의 의미는 무엇일까. 구글 검색을 해 보았다. 사찰에서 스님들을 부르는 데 있어서 여러가지 명칭이 있는 것을 알았다. 사찰에서 스님들의 소임에 대한 호칭은 다음과 같다.

 

 

회주(會主)스님: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 하나의 모임을 이끌러 가는 큰 스님

법주(法主)스님: 불법을 잘 알아서 불사나 회상의 높은 어른으로 추대된 스님

조실(祖室)스님: 선으로 일가를 이루어서 한 파의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진 스님

                     * 원래는 조사의 내실을 의미하며, 스님이 주요사찰에 주재함을 의미

방장(方丈)스님: 총림의 조실스님. 원래는 사방 1장인 방으로 선사의 주지가 쓰는 거실

도감(都監)스님: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일이나 그 사람을 말함

부전(副殿)스님: 불당을 맡아 시봉하는 소임을 말하며, 예식 불공 등의 의식집전 스님

지전(知殿)스님: 殿主(전주)스님이라고도 하며, 불전에 대한 청결, 향, 등 등의 일체를 맡은 스님

노전(盧殿)스님: 대웅전이나 다른 법당을 맡은 스님

주지(住持)스님: 사찰의 일을 주관하는 스님-사찰의 전권을 행사하는 총책임자 스님

원주(院主)스님: 사찰의 사무를 주재하는 스님-감사(監寺), 감원(監阮)으로 살림살이를 맡는 스님

강사(講師)스님: 강원에서 경론(經論)을 가르치는 스님, 강백(講伯)스님이라고도 함. 

 

칠직(七職)스님: 7가지 직책의 스님-포교, 기획, 호법, 총무, 재무, 교무, 사회 각 국장스님

 

(불교에서 말하는 방자 스님은 무엇을 일컫는 말인가요?, 다음 지식)

 

 

다음 지식사이트에 묻고 답하기에 올려져 있는 글을 보면 회주(會主)에 대한 내용은 있으나 한주에 대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회주의 경우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서 모임을 이끌어 가는 큰스님으로 설명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절에서 가장 큰스님을 회주라 칭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한주란 무엇일까? 또다른 검색에서 찾은 결과 한주(閒主)결재대중의 모범이 되는 스님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한주의 한()자가 한자 사전을 찾아 보면 한가할 한으로 되어 있다. 이루 미루어 보아 회주나 한주 스님은 나이 드신 큰스님이나 노스님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불교를 앞지른 개신교

 

그런데 개신교 목사들도 회주와 한주 개념의 목사가 있다고 한다. 일선에서 물러난 원로목사라 한다. 그러나 이들 은퇴한 원로목사들은 불교의 회주나 한주와 다르다고 한다. 은퇴하여 편하게 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시골이나 군부대에 머물면서 전도하면서 여생을 보낸다고 한다. 이런 점이 회주 또는 한주와 다른 것이다.

 

그래서 박호석 법사는 회주와 한주 스님께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전국 사찰에 머물고 계신 회주·한주 스님!

이 가슴 벅찬 불사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개신교가 드디어 불교를 제치고 신자 수 1위에 올랐다는 인터넷 언론보도가 나온 날, 이렇게 간곡히 동참을 청하옵니다. 박호석 합장

 

(박호석 법사의 '벼랑끝 군불교'2- ‘회주·한주 스님 전상서’, 미디어붓다 2013-02-05)

 

 

박호석 법사는 군불교의 현실에 대하여 설명하고 아직도 희망이 있음을 말한다. 스님들이 군법당에 나와 주시면 현재 보다 더 활성화 될 것이라 희망 섞인 예측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가 불교의 교세를 앞질렀다는 보도가 나간 후에 회주와 한주 스님들의 동참을 호소하고 있다.

 

빳빳하게 풀먹인 삼베옷을 입은 신선

 

회주나 한주 스님이라는 명칭은 큰스님이나 노스님에 대한 존칭어라 본다. 그런 스님들의 이미지는 빳빳하게 풀먹인 삼베옷을 입은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그리고 경치 좋은 산사에서 차를 마시는 모습 또한 연상된다. 이런 큰스님, 노스님의 이미지는 결코 대중적이지 않다. 도시의 저자거리에서 사는 사람의 모습과 너무 다른 신선의 이미지를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님들이 산중에만 머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자비심이 없어서 일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뭇삶에 대한 자비심이 없기 때문에 저자거리를 내려 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뭇삶에 대한 연민 때문에

 

스님들이 왜 자비심이 없는 것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의 행적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두 가지 경우를 들 수 있다. 먼저 청원경에서 볼 수 있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하느님의 청원을 알고는 뭇삶에 대한 자비심 때문에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때 세존께서는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금 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마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연못에서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물 속에서 나오지 않고 수중에 잠겨 자라고,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에까지 나와 있으며, 어떤 무리의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는 물 속에서 생겨나 물 속에서 자라서 수면을 벗어나 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깨달은 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조금밖에 오염되지 않은 뭇삶, 많이 오염된 뭇삶, 예리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둔한 감각능력을 지닌 뭇삶, 아름다운 모습의 뭇삶, 추한 모습의 뭇삶, 가르치기 쉬운 뭇삶, 가르치기 어려운 뭇삶, 그리고 내세와 죄악을 두려워하는 무리의 뭇삶들을 보았다.

 

보고 나서 하느님 싸함빠띠에게 시로 대답하셨다.

 

[세존]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하느님이여, 곤란을 예견하고

나는 승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브리흐마야짜나경-Brahmāyācanasutta-하느님의 청원에 대한 , 상윳따니까야 S6:1(1-1), 전재성님역)

 

 

브라흐마야짜나경(청원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뭇삶(중생)들에게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 것은 한마디로 자비심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비심이 빠알리어로 까루나(kāruñña)’이다. 까루나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연민이라 번역한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불교에서 많이 사용하는 자비심으로 번역하였다.

 

예전의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

 

이렇게 부처님이 깨달은 위없는 진리를 설하기로 한 것은 뭇삶에 대한 자비심 (sattesu ca kāruññata)때문이다. 세상에서 생노병사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삶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진리에 설하면 덜 오염된 자들은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진리를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전제 조건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신앙을 버리라 (pamuñcantu saddha)고 하였다. 이 말은 예전의 잘못된 자기 자신의 신앙을 버려라라는 말과 같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 들이 근거 없는 제사를 지내는 행위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데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을 보면 이와 정반대로 자신의 믿음을 보여라라고 번역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불사라는 불리는 성스런 도를 설했으니 이제 모든 사람들은 믿음을 내어라라는 뜻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직 뭇삶들에게 설법하기 전이다. 따라서 믿음을 내어라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誤譯)’이라 본다. 부처님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잘못된 믿음을 먼저 버려야 한다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전도명령

 

다음으로 부처님의 세상에 대한 자비심을 또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부처님의 전도선언문이다. 부처님이 연민의 마음으로 가지고 세상속으로 들어가 법을 펼쳤는데, 법을 펼친지 채 1년도 안되어 제자가 60명으로 늘었다. 이때  제자들을 향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전도할 것을 명한다.

 

 

[세존]

나는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도 하늘나라의 올가미와 인간세계의 올가미, 그 모든 올가미에서 벗어났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 둘이서 같은 길로 가지 마라.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 지극히 원만하고 오로지 청정한 거룩한 삶을 실현하라. 본래부터 눈에 띠끌이 거의 없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쇠퇴하고 있다. 그들이 가르침을 들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나도 역시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우루벨라의 쎄나니 마을로 가겠다.”

 

(두띠야마라빠사경-Dutiyamārapāsasutta-악마의 올가미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S4:5(1-5), 전재성님역)

 

 

흔히 전도선언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경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세상의 뭇삶에 대한 연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bahujanahitāya),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bahujanasukhāya), 세상을 불쌍히 여겨(lokānukampāya)” 제자들에게 전도할 것을 명령하였다.

 

뭇삶들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자비심이 없는 스님들

 

이와 같이 부처님이 진리에 대하여 설하기로 결심하고, 제자들에게 전도할 것을 주문한 것은 한마디로 뭇삶(중생)들에 대한 연민세상에 대한 자비심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전도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렇게 준엄하게 전도명령을 내린 결과 법의 바퀴가 오늘날까지 쉼 없이 굴러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서 빳빳하게 풀먹여 다려 입은 삼베승복을 입고 차를 마시며 유유자적하는 신선과 같은 삶을 살아 가는 큰스님과 노스님이 있다면, 이는 부처님의 준엄한 전도명령을 어긴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큰스님과 노스님을 비롯하여 스님들이 산중을 벗어 나지 못하는 것은 한마디로 뭇삶에 대한 연민과 세상에 대한 자비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감히 말 할 수 있다.

 

 

 

201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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