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지적해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맙다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29. 19:23

 

 

지적해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맙다

 

 

 

, 내 급 되서 뜰려고 그러지?”

 

우연하게 유튜브 사이트에서 이문열작가에 대한 것을 보았다. 어느 후배 평론가가 이문열작가의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내가 최악의 실망을 느낄 때가 언제인가 하면, 어떤 젊은 문학평론가가 이문열씨를 비판하였을 때, 그 때 이문열의 반응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아랫것 하고 논쟁하지 않는다’ 아랫것 하고 논쟁하지 않는다? ‘너 나하고 논쟁해가지고 내 급 될라고 그러지?’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나? 지는 유명한 분이고 이렇게 높은 분이야. ‘너는 저 아랫것인데 내가 너하고 논쟁하면 너하고 나하고 같은 급 되잖아’ ‘너, 내 급 되서 뜰려고 그러지?’ ‘내가 너 같은 것 하고 왜 논쟁하냐?’ 이게 이문열씨의 대답이었어요.

 

(이현이 말하는 이문열.avi, 유튜브 )

 

 

이현선생이 강의 중에 가르치는 학생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표현한 것이다. 이문열작가는 평소에 영남학파 출신임을 강조 하였다고 하였다. 영남학파 중에서도 남인계통이라 한다.

 

이렇게 뼈대 있는 집안의 가문에서 정통유학을 공부하고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이문열에게 어느 신출내기 작가가 비판을 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문열의 보수적 성향에 대한 것이라 본다.

 

이문열은 여러 차례 조선일보 등 보수신문에 보수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올렸다. 그에 따라 진보진영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아야 했다. 그런 비판에 대하여 이문열은 일체 대응을 하지 않은 것이다.

 

왜 이문열은 무대응으로 일관하였을까? 그것은 이현선생의 , 내 급 되서 뜰려고 그러지?”라는 말에 모든 것이 함축 되어 있다. 이문열이 비판하는 자들에게 대응하는 순간 그들과 동급이 되어 버린 다는 것이다. 그런 이문열은 영남학파의 남인의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인데 선조가 다름 아닌 조선 중기 유명한 유학자이었던 이황이라 한다.

 

이황을 깐 기대승

 

하지만 이황은 이문열과 달랐다는 것이다. 어떻게 달랐을까. 이현선생의 강의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가 이황한테 얼마나 예를 다하고 조심하는지 몰라. 왕이 어려워 할 정도로 조선최고의 학자야. 기대승은 시골의 촌놈선비야. 새파란 놈이야. 그 기대승이 이황을 깠어. 이황이 무시하면 그만이죠? 이황이 무시한다고 뭐라고 할 사람 없다고. ‘미친놈!’하고 무시하면 끝이야. ‘내가 무슨 너깠것 하고 논쟁하니’하고 무시해 버리면 끝이라고.

 

그런데 이황이 이 젊은 유학자와 논쟁에 대해서 한 번도 무시하지 않아. 그 젊은 유학자가 편지를 보낼 때 마다 꼬박 꼬박 정성스럽게 답장을 쓰세요. 자기 입장을 변호 하시고 기대승의 입장을 비판 하는 답변을 굉장히 정중하게 꼬박 꼬박 답장을 쓰시는 분이에요. 

 

(이현이 말하는 이문열.avi, 유튜브 )

 

 

 

퇴계

 

 

 

이황과 기대승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황(1501-1570)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이고 주리론 사상을 형성하여 주자성리학을 심화하여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조선후기 영남학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 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조선 중기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이황에게 젊은 시골서생인 기대승이 논쟁을 건 것이다. 그런 기대승은 어떤 인물일까.

 

인터넷 백과사전에 따르면 기대승(1527-1572)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알려져 있다. 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로서 특히 지치주의(至治主義的)적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하였다고 한다.

 

기대승은 나이로 보아 아버지 뻘에 해당 되는 그 시대 당시 최고의 명성을 얻고 있었던 대유학자에게 질문을 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이현선생은 그 기대승이 이황을 깠어라고 표현 하였다. 새파랗게 젊고 이름도 알려 지지 않는 무명에 가까운 유학자가 대유학자를 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대하였을까. 이문열처럼 무대응으로 일관하며 , 내 급 되서 뜰려고 그러지?”라고 하였을까? 그렇지 않다. 대유학자는 신출내기 유학자에게 정성스럽게 답장을 해주고 잘못을 지적해 주고 자신의 사상을 설명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남학파 남인의 뼈대 있는 가문 출신 이문열의 조상인 이황의 태도이었다.

 

이황이 기대승에게 답변 해 주었다고 해서 결코 이황이 기대승급으로 내려 가지 않았고, 기대승 역시 이황급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로 다른 관점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고 상대방의 잘못된 부분을 알려 주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마성스님으로부터 댓글을 받고

 

존경하는 마성스님으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이렇게 댓글을 보내 주는 것 자체가 관심의 표현이라 보여 진다. 하루에도 수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지만, 특히 유명인이 댓글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필명으로 짤막하게 줄 뿐 자신의 실명을 걸고 댓글을 다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스님은 이 블로그에 올라온 글 중에서는 정확한 사실이 아닌 것이 너무나 많고, 댓글 중에서도 잘못된 견해가 많이 있습니다.”라는 문구로 시작 하였다. 이 글을 보고 뜨끔 하였다. 거의 매일 글을 올리는 입장에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특히 경전적 근거를 들어 글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많은 오류가 발견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오류를 지적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오류가 있는 채로 인터넷의 바다를 둥둥 떠 다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구업을 짓게 됨은 물론이다. 그래서 오류를 지적해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맙다. 그 만큼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있고 아껴 주기 때문이라 본다.

 

스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

 

스님은 니까야의 오류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어서 스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을 말미에 적어 놓았다. 아마도 꼭 하시고 싶은 말씀이라 보여진다.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진흙속의연꽃'님은 몇 차례에 걸쳐 스님이 역경사업에 종사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글을 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도 전혀 역사적인 사실이 아닙니다. 2500년 불교사에서 경전을 전승하고 번역한 사람들은 모두 출가자가 한 것입니다. 재가자가 경전 번역이나 연구에 종사하게 된 것은 1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에 서양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불교교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불교에 대해 알고 싶어서 스스로 번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대정신수대장경>에 나오는 수천권의 경전들은 모두 스님들이 번역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구마라집 삼장, 현장, 법현, 불타야사 축불념 등 수많은 역경승들에 의해 번역되어 오늘날 우리들이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정신수대장경>에서 재가자가 번역한 것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대장경 No.20 <불개해범지아발경(佛開解梵志阿)>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잘못된 번역이었기 때문에 <대정신수대장경>을 편집할 때 삽입해야 되느냐를 고민한 것입니다. 이처럼 현존하는 한역 대장경과 티베트 대장경은 모두 스님들이 번역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이 역경에 종사하는 것을 아주 나쁜 시각으로 기술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가는 그분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승하고 번역하여 후대에 전하는 것은 부처님의 출가제자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많이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확한 사실을 쓰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글로 상처받는 사람들이 없게 하는 것이 훌륭한 것입니다.
말이 길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성 합장      

 

(마성스님 댓글)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마성스님으로부터 여려 차례 댓글을 받았다. 그 때마다 느낀 것은 항상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미천한 재가불자의 넋두리 비숫한 글을 항상 지켜 보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 보고 있을 수 많은 스님들과 학자들 그리고 불교계의 유명인사들이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유명인들은 좀처럼 흔적을 남겨 주지 않는다. 매일 글을 쓰다 보니 검색하면 걸려서 이곳에 오게 될 수도 있을 텐데 아무 흔적도 남겨 주지 않는 것을 보면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대체로 부정적인 생각들이다. 아마도 블로그의 글에 대하여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지적해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맙다

 

스님들이나 학자 등 유명인들이 댓글을 남기지 않는 이유는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글들이 대체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정보에다 자신의 견해가 잔뜩 담긴 잡문 내지 쓰레기성 글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유명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댓글을 다는 행위에 대하여 잡문을 쓰는 자와 동급이 되어 버린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마성스님은 잡문을 쓰는 블러거의 글에 종종 글을 주시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 잡아 주었다. 왜 고마운가.

 

일을 하며 한정된 시간에 글을 쓰다 보니 집중해서 정신 없이 쓴다. 한번 교정을 보고, 올리고 나서 또 보지만 실수가 발생될 수 있다. 오자, 탈자는 물론이고 심지어 거꾸로 된 내용을 올린 것을 본다. 그런데 글을 쓰는 사람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남이 지적해 주어야 그때서야 잘못된 것을 알고 바로 잡는다. 그래서 지적해 주는 사람이 가장 고마운 것이다.

 

재가의 번역성과물을 배제하는 듯한 승가

 

스님은 글에서 스님들이 번역작업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맞는 말이다. 출가수행자의 역할이 수행포교임을 감안한다면 번역 작업 역시 스님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한 것은 번역작업을 하는 것에 있어서 승가의 입장에 대한 것이다. 이는 각묵스님의 논문에서 그는 조계종의 승려가 아닙니다라는 말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또한 승가에서는 전반적으로 재가의 번역성과에 대하여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농후하다는 것이다. ‘재가자가 번역한 것이 오류투성이라 도저히 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이다. 그러다 보니 승가에서 의도적으로 재가의 번역성과물에 대하여 배제하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래서 대체 어디가 문제있는지 알아 보기 위하여 번역 비교를 하여 보았다. 그런데 번역을 비교한 결과 오히려 승가의 번역물에 문제점도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번역비교가 번역자들이나 승가의 입장에서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두 종류의 번역물이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마당에 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 보여진다.

 

스님들이 왜 사업을 하는가?

 

이렇게 번역비교를 하였고, 또한 승가 번역자의 태도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충실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출가자는 현세에 해탈과 열반의 실현을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승가의 번역자들은 이 생에서 빠알리삼장의 완역에 매진하겠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해탈과 열반은 언제 실현할 것인가. 바로 이런 점이 모순이라는 것이다.

 

번역을 평생의 사명으로 알고 매진 한다는 말은 출가자가 할 말이 아니라고 본다. 재가자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출가자가 그런 말을 하면 매우 혼란 스럽다는 것이다. 출가자가 목숨이 다 할 때까지 하겠다는 것에 대하여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또 번역을 하여 책을 내는 것은 좋으나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이는 출판사업에 해당되기 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장사를 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비즈니스이다. 그러나 물건을 사고 파는 것으로 본다면, 사업이나 장사나 비즈니스나 모두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이 사고 파는 행위는 세속적이다. 더구나 초기불교를 전공으로 하는 스님들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보여진다.  

 

아쇼카선언문에 왜 침묵하는가?

 

초기불전연구원에서 평생에 걸쳐 번역에 종사하는 두 분의 스님을 비판하였다. 빠알리 삼장을 번역하여 한국불교 발전에 기여 하고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원음을 전달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항상 아쉬운 것은 초기불교적 가르침에 맞는 행위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지난2011년 ‘불교인을 위한 종교평화선언’, 소위 ‘21세기 아쇼카선언’이 있었다. 불교의 근간을 흔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 진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불구하고 초기불전연구원의 두 스님은 침묵하였다. 아무런 의사 표시를 하지 않은 것이다.

 

도법스님이 주도하는 21세기 아쇼카선언은 현재도 진행중이다. 언제 본선언문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전파 하는 스님들이라면 당연히 의사 표시를 했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말과 행동이 일치 되지 않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지금이라도 ‘21세기 아쇼카선언문’에 대한 입장을 밝혀 주기바란다.

 

스님의 허물에 대하여

 

재가자가 출가자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큰 허물이라 한다. 스님의 허물에 대하여 재가가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계기가 되면 스스로 참회하여 초심으로 되돌아 갈 것이기 때무이라 한다. 그렇다고 침묵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스님들이 일탈이 계속 되고 있을 때 불자들이 침묵한다는 것은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작년 소위 승려들의 억대 도박파문이 일어 났을 때 불교시민단체에서는 여러 가지 요인중에 불자들의 책임도 있다고 하였다. 스님들의 잘못에 대하여 침묵하였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스님들의 잘못이나 허물에 대하여 지적해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승가도 살과 한국불교도 사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런 지적에 대한 것은 빠알리니까야에도 언급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다른 자들이 나를 비난하고, 가르침을 비난하고, 참모임을 비난하더라도, 그것에 대하여 그대들은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이와 같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설명해 주어야 한다.

 

(브라흐마잘라경-하느님의 그믈의 경, 디가니까야 D1,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비판하자 이에 대하여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잘 모르는 자들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에 대하여 비난한다면 침묵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들이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는 자들이나 비난하는 자들에게 침묵한다면 그들과 같은 편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불-법-승 삼보를 지키기 위하여 적극적인 행위를 요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언젠가는 그분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

 

마성스님은 글에서 대림스님과 각묵스님이 역경에 종사하는 것을 아주 나쁜 시각으로 기술한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분들에게 사과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충고 하였다. 이 말을 수용한다.

 

초기불전 연구원 스님들이 역경에 종사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일생을 걸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계기가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받아 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분 스님들이 블로그에 실려 있는 글을 읽고 있는지 읽고 있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그 어떤 흔적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반론도 없었다. 의사표시도 없고 반론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사과한다는 것이 모순이다. 반드시 요청이 있어야고, 올린 글에 대하여 반론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름 없는 블로거에게 의사 표시 한다고 하여 결코 동급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마성스님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예를 올린다. 그런 마성스님은 앞서 언급한 조선중기의 대유학자 이황과도 같은 분이라 여겨 진다. 신출내기 시골서생인 기대승이 시쳇말로 이황을 깠을 때이황은 지극 정성으로 답변하고 잘못을 지적하고 자신의 사상을 알려 주었다. 그런 이황과 같은 분위기를 마성스님으로부터 느꼈다.  

 

 

 

2013-01-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