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인터넷 룸펜과 사자후(獅子吼)

담마다사 이병욱 2013. 2. 1. 18:34

 

인터넷 룸펜과 사자후(獅子吼)

 

 

 

최근 올린 글로 인하여 반론을 많이 받았다. 당사자로 부터의 반론이 아니라 스님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로 부터의 받은 글이다. 공통적으로 너무 비판적으로 쓰지 말라는 것이다. 있는 사실만쓸 것을 충고하고 있다.

 

공인(公人)이란

 

불교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스님들이다. 그리고 학자와 언론인, NGO단체의 오피니언 리더들이다. 이들은 모두 공인(公人)이다. 공인은 무엇일까.

 

같은 발음의 공인(公認)국가나 공공단체 또는 사회단체에서 어떤 자격따위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단체에 속하는 모든 사람을 공인(公人)이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공무원, 교사, 군인, 경찰 등 국가공무원이 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들에게 신분보장과 연금혜택 등 특별 대우가 보장된다. 그러나 공무원 신분에 어긋난 행위를 하였을 때는 마땅히 비판 받아야 한다.

 

축구국가대표선수도 공인에 들어 간다. 그런데 국가대표선수가 골을 넣었다고 하여 전국민이 보는 TV앞에서 기도세레모니를 하면 어떻게 될까.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은 환호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보았을 때 불편하게 한다. 이는 축국국가대표가 공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서 그런 행위를 할 수 있고, 또 한편으로 고도의 선교전략으로도 볼 수 있다.

 

불교계의 공인은 누구일까. 당연히 스님들이다. 그래서 각묵스님은 음성강의 파일에서 비구니 학인스님들에게 ‘승복을 입는 순간부터 공인이다’라는 말을 하였다. 승복을 입고 대중에게 나타나는 순간 개인이 아니라 공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위키백과에 따르면 ‘공인(公人)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로서 그에 대한 품평과 비판이 표현의 자유에 의해 널리 허용되는 인물을 말한다.’라고 정의 해 놓았다.

 

또 스님들 뿐만 아니라 학자들, NGO대표들 모두 공인인 것이다. 그런 공인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고 행위에 대하여 당연히 비판을 감수해야 한다. 비난이나 비방이 아니고 사실에 근거한 정당한 비판을 수용해야 하는 것이 공인의 자세이다.

 

최대종교가 개신교

 

오늘날 한국불교를 이끌어 가는 스님들과 학자,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들이  비판받는 것은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권리와 혜택만 누리려 할 뿐 책임지는 자세와 의무를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국민일보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충격적인 뉴스가 보도 되었다.

 

 

개신교 인구는 2004년 21.6%에서 지난해 22.5%로 0.9% 포인트 늘었다. 같은 기간 천주교 인구도 8.2%에서 10.1%로 증가했다. 반면 불교 인구는 26.7%에서 22.1%로 4.6% 포인트 감소했다. 그러나 종교별 신뢰도는 천주교(26.2%) 불교(23.5%) 개신교(18.9%) 순인 것으로 조사됐다.

 

( [한목협 ‘2012 한국인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종교인구 감소에도 개신교 증가… ‘사회 영향력’ 1위, 국민일보 2013-01-30)

 

 

비록 개신교에서 조사한 통계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최대종교가 개신교가 된 것이다. 지난 2004년 조사 당시 불교가 26.7%이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4.6%감소하여 22.1%가 됨으로서 22.5%를 차지한 개신교에 1위를 내 준 것이다. 참고로 지난 2004년 인구총조사 당시 문광부에서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불교가 22.8%, 개신교가 18.3%이었다.

 

개신교측 자료를 더 보면, 눈에 띠는 것이 월평균헌금액이다. 지난해 1인당 월평균 헌금액수가 22만 2000원이라 한다. 이를 연으로 따지면 1년에 266만4000원이 된다.

 

또 종교다원주의를 긍정하는 비율이 25.4%에서 30.2%로 높아졌고, 또 하나 특이한 것은 윤회설을 긍정하는 비율이 이전 보다 10%가 증가 하였다고 한다.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는 것을 탓해야

 

자료에 따르면 불교와 개신교의 교세가 비등하지만 사회적 영향력은 개신교가 월등하다. 체감하는 영향력은 불교대 개신교의 비율이 110 정도 되는 것 같다. 이는 사회적 영향력 뿐만 아니라 헌금액, 출석률 등 전 분야에서 1 10의 법칙이 적용된다.

 

헌금과 보시금액이 열 배 차이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만큼 신자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으로 본다. 지역에 기반을 두고 지역에 뿌리를 내려 교회공동체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원인으로 본다. 반면 불교는 지역적 기반이 없다 보니 절에 갈 기회가 적어 지고 그에 따라 보시금액 역시 적어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스님들이 불자들에게 보시를 하지 않는다고 탓 할 것이 아니라,  사람 사는 곳에 절이 없는 것을 탓해야 한다.

 

쓰레기 정보로 가득찬 곳?

 

이렇게 현실세계에서 절 구경하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불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말라 해도 마땅히 해갈 시켜 줄 곳이 드물다. 그래서 사이버공간을 기웃거려 본다. 그러나 사이버 공간 역시 갈증을 해소 시켜 주기에는 만족스럽지 않다.

 

불자들은 현실세계에서 외면당하고 사이버 세계에서도 외면 당한다. 스님들이나 학자들의 자비심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하루 종일 컴퓨터와 생활하는 사람들의 사이트에 접근한다. ‘인터넷 룸펜이라고 불리우고 심지어 인터넷 폐인이라고도 불리우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사이트에 접속하는 것이다. 인터넷 카페나 개인 블로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보기에는 일반적으로 쓰레기 정보로 가득찬 곳으로 간주한다. 신뢰할 수 없는 데이터나 자기 주장만 난무하고, 인신공격, 근거 없는 비난이나 비판을 일삼는 곳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들이나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카페나 블로그 활동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활동을 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일까 글을 써도 단행본을 내거나 학술지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교수와 학자들의 놀이터

 

불교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스님들과 학자들이다. 그러나 카페나 블로그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다. 스님들의 경우 세상과 인연을 끊고 깊은 산중으로 출가 하였듯이 사이버세상과 역시 인연을 끊은 것 같다. 가장 많은 불교지식과 수행체험을 사이버상에서 공유하면 좋으련만 사이버 세상에서 스님의 글을 보기란 가물에 콩나듯이 희귀한 일이다.

 

학자들 또한 사이버 세상에서 보기 힘들다. 카페나 블로그를 하면 격이 떨어지는 것 일까 좀처럼 학자들의 글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에 가면 볼 수 있을까.

 

주로 학자들이 글을 올리는 곳이 불교평론이다. 그런데 지난해 불교평론은 필화사건으로 인하여 폐간 되었다가 이번에 복간 되었다.

 

학술지에 실려야 좋은 점수를

 

불교평론사이트를 방문하였다. 예전처럼 교수와 학자들의 글로 가득하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인들의 글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글을 올리지 않는 것일까. 유홍준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이 평생공부한 것을 대중과 나누어 쓸 생각을 했다면 혼자서 좋은 논문을 썼다라고 학술원 상 받을 생각만 했지 또 학술지에 실려야지 대학에서 점수를 많이 주는 제도만 있었지, 문화유산 답사기 쓴 것은 교수 평가에서 일점도 안줘요. 제도가 그렇게 되 있어요.

 

( [리더스콘서트] 유홍준 교수 특강)

 

 

문화유산 답사기로 잘 알려져 있는 전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가 한말이다. 교수들은 학술지에 논문이 실려야 유능한 교수로 인정 받는다고 한다.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책을 써서 베스트 셀러가 된다고 해도 교수의 평가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서 자신의 제자가 있는데, 그 제자가 문화답사기에 대한 내용을 논문형식으로 학술지에 발표 하였더니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동국대 K교수는 불교평론에 글을 싣는 것 조차 잡문이라 하였다. 불교평론에는 일정 매수 이상은 쓸 수 없지만 학술지에는 매수의 제한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이렇게 고급평론지 성격의 불교평론에 조차 글을 올리는 것 조차 꺼려 하는 것이 학자들이라 보여진다. 이런 상황이니 카페나 블로그를 만들어 매일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시간 낭비라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 없다.

 

이와 같이 스님들은 세상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인터넷에 글을 쓰지 못하고, 학자와 교수들은 격이 맞지 않아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그 빈자리를 시간이 남아 도는 인터넷 룸펜들이나 인터넷 폐인들이 채워 넣는 것이다.

 

올려진 글로 평가받는 사이버세상

 

최근 불교평론에 흥미 있는 논문이 하나 떳다. 덕성여대 박수호 교수가 쓴 소셜 미디어의 등장과 포교라는 글이다. 글에서 박수호 교수는 인터넷을 활용한 포교의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박수호 교수에 따르면, 사이버공간에서 정보생산은 교수나 연구원등 전통적인 생산자에만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활동할 수 있고 또한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미디어의 속성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 카페나 블로그등 를 비롯하여 쌍방성을 특징으로 하는 페이스북 같은 SNS, 트위터 같은 신종매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쌍방향성 공간에서는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 명예와 관계 없이 동등한 입장에서 소통이 가능하고, 또 익명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사회적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차례씩 현실공간과 사이버공간을 들락날락 한다. 현실사회에서 친구가 있듯이 사이버 공간에서 역시 친구가 있다. 모두 하나의 아이디를 갖고 있고 익명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모두 동등한 관계이다.

 

사이버공간은 현실공간에서처럼 스님이나 교수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아이디와 필명으로만 소통 되는 사이버 공간에서 올려진 글로 평가 받는다. 글이나 자료가 그 필명의 얼굴인 셈이다.

 

 

1000만명에 달하는 불자들은 지금 이순간에도 현실과 가상세계를 들락 거린다. 이미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사이버 세상에서 친구도 사귀고, 정보도 얻는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정보도 얻는다. 그런 정보들이 스님들이나 학자들 입장에서 본다면 쓰레기에 지날지 모르지만 때로는 감동을 주기도 한다. 하나의 음악파일로 인하여 신심이 고취될 수 있고, 하나의 글로 인하여 마음을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고귀한 분들이 경멸하는 룸펜들이나 폐인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최상의 지혜에서 사자후가

 

사회적 약자나 미천한 자들이 생산하는 정보도 때로는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더 값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자라면 누구나 사자후를 토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자후는 어떤 것일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열 가지 힘을 모두 갖추고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을 함께 지니며 모우왕의 지위를 차지하고 무리 가운데 사자후를 하며 하느님의 수레바퀴(梵輪) 굴린다.

 

(열가지 힘의 경, S12:21)

 

 

 

 

Lion

 

 

 

부처님의 설법에 대하여 사자후(獅子吼, sihanado)’라고 한다. 각주에 따르면 사자후는 당당하고 의미 있는 선언이다. 최상의 지혜에서 사자후가 나온다고 한다. 이런 사자후는 실제로 사자가 포효 하는 것과 같다.

 

시하경(S22:78)에 따르면 사자가 포효하면 모든 동물들이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에 빠진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사자후 역시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직까지 상락아정의 전도된 인식에 빠진 자들은 부처님의 사자후를 듣고 처음에는 두려움에 빠질 것이지만, 부처님이 설한 진리에 전율하고 이어서 감동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자후를 스님들이나 학자들이 해 주어야 한다. 현실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이버 세상에서도 사자후를 토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사이버 세상에서 고귀한 분들의 사자후를 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 미천한 자, 인터넷 룸펜, 인터넷 폐인들이 대신 사자후를 토하고 있는 것이다.

 

 

 

201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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