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노스님부터 탁발을, 거리의 탁발자를 보며
거리에서 탁발자를 보았다. 막 음식점에서 나왔는데 손에는 목탁이 쥐어져 있고 바랑을 메고 있다. 날씨가 추워서일까 모자달린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음식점을 나오자 마자 바로 옆 음식점에 들어 간다.
두 말 없이 천원 한 장 쥐어 주고
도시에서 탁발자를 종종 본다. 주로 음식점을 돌아 다닌다. 대부분 한 지역의 모든 음식점을 차례로 순방하는 것이 보통이다. 마치 금강경에서 차제걸이 하는 것처럼 빠짐 없이 차례로 순례하는 것이다.
탁발자가 들어 오면 음식점 주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두 말 없이 천원 한 장 쥐어 준다. 더 이상 말이 필요치 않는 것 같다. “우리는 교회 다녀요!”라든가 “가 보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손님이 있기 때문에 영업에 방해 된다고 생각 되는지 빨리 보내는 것이 상책이라 여기는 것 같다. 실제로 그런 광경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탁발을
조계종의 경우 공식적으로 탁발을 금하고 있다고 한다. 주된 이유는 승려로서의 위의를 해치고 탁발과정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에는 탁발에 의존하였다. 이는 초기경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탁발은 어떻게 하였을까. 브라흐마데바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런데 그때 어떤 바라문 여인의 아들인 브라흐마데바가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세존의 앞에 출가했다.
그때 존자 브라흐마데바는 홀로 떨어져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양가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닫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곧바로 알았다. 존자 브라흐마데바는 거룩한 님 가운데 한 분이 되었다.
그때 존자 브라흐마데바는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탁발을 하기 위해 싸밧티 시로 들어갔다. 싸밧티 시에서 집집마다 탁발을 하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집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때 존자 브라흐마데바의 어머니인 바라문 여인은 일상적으로 하듯이 하느님에게 헌공을 올리고 있었다.
(브라흐마데와경-Brahmadevasutta, 상윳따니까야 S6:3(1-3), 전재성님역)
경에서 탁발하는 장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집집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차제로’의 뜻이다. 순서대로 탁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출가하기 전 자신의 어머니가 사는 집으로 탁발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들어 갈 수 없다. 집안으로 들어 가지 않고 집 밖에서 탁발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도시에서 보는 탁발자들은 음식점안으로 들어 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목탁을 치며 주문이나 경을 독송하는 것이다.
빅쿠와 걸식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오늘날 도시에서 보는 탁발자는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걸인과 다름 없다. 불교세가 강하지 않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절을 보기 힘들고 스님 역시 보기 힘들다. 그래서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런데 보통사람들이 불교에 대하여 눈으로 접촉하게 되는 계기는 아이러니 하게도 탁발자를 통해서 일 것이다. 그런 탁발자의 모습이 걸인과 다름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탁발자와 걸인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초기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바라문]
ahampi kho1 bho gotama bhikkhako bhavampi bhikkhako idha no kiṃ nānākaraṇanti?
“존자 고따마여,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입니다. 우리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세존]
Na tena bhikkhako hoti yāvatā bhikkhate pare,
Vissaṃ dhammaṃ samādāya bhikkhu hoti na tāvatā.
Yodha puññañca pāpañca bāhitvā2 brahmacariyavā3,
Saṅkhāya loke carati sa ve bhikkhūti vuccati.
“다른 사람에게 걸식을 한다고
그 때문에 걸식자가 아니니
악취가 나는 가르침을 따른다면
걸식 수행자가 아니네.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려
청정하게 삶을 영위하며
지혜롭게 세상을 사는 자가
그야말로 걸식 수행승이네.”
(빅카까경-Bhikkhakasutta-걸식자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0(2-10), 전재성님역)
경에서 걸식자는 ‘빅카카(bhikkhaka)’이다. 빅카카는 일반적인 걸식자를 말한다. 그래서 바라문이 ‘저도 걸식자이고 그대도 걸식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같은 걸식을 함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의 제자는 ‘빅쿠(bhikkhu)’라 한다.
그렇다면 빅카카와 빅쿠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청정함’에 있음을 말한다. ‘악취가 나는 가르침(Vissaṃ dhammaṃ)’을 따르면 빅쿠가 아니고 빅카카라는 것이다. 그래서 빅쿠는 공덕마저 버리고 악함도 버리고 청정한 삶을 사는 자라 한다. 이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 걸식하는 것을 말한다.
청정함을 잃어 버렸을 때
비구가 청정함을 잃어 버렸을 때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ntamidaṃ bhikkhave, jīvikānaṃ yadidaṃ piṇḍolyaṃ. Abhisāpoyaṃ lokasmiṃ piṇḍolo vicarasi pattapāṇīti
수행승들이여, 이 탁발이라는 것은 삶의 끝이다. 세상에는 ‘손에 바루나 들고 돌아다녀라!’라고 하는 저주가 있다.
(삔돌야경-Piṇḍolya sutta-걸식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0(3-8), 전재성님역)
각주에 따르면 탁발이라는 것은 가장 낮은 위치라 한다. 이를 삶의 끝이라 하였는데, 이는 가장 하찮고, 가장 형편없고, 가장 나쁜 것을 말한다. 이처럼 스스로 가장 낮은 삶을 자처하는 것이 탁발이다. 이는 청정을 실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청정함을 잃어 버렸을 때 어떻게 될까. 그 경우 세상사람들이 탁발하는 자들에게 “손에 바루나 들고 돌아다녀라!”라고 저주의 말을 한다는 것이다.
탁발자와 전도사
거리에서 탁발자를 보았을 때 불자로서 창피한 느낌을 갖는다. 타종교에서는 도(道)를 전하러 다닌다고 가가호호 방문하는데, 승려복장을 한 탁발자들은 가게를 차례로 돌며 동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탁발자가 승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승려복장을 하고 목탁을 치며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보아 일반시민이 보기에 불교승려라고 생각할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런 탁발 모습을 보면서 불자들은 ‘열등감’을 느끼고, 타종교신자들은 ‘우월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탁발자를 보면 항상 못마땅하였다.
그런데 최근 인식이 조금 바뀌었다. 어찌 보면 탁발자들이야말로 가장 낮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탁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추고 가장 하찮게 하고 가장 형편 없게 하기 때문에 누구나 함부로 탁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탁발행위 자체는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본다. 때로 “손에 바루나 들고 돌아다녀라!”라는 저주의 말도 들을 수 있고, 봉변을 당할 수도 있고, 온갖 수모를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큰스님 노스님부터 탁발을
거리의 탁발자를 보면 그들의 어떤 삶을 사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청정함만 유지하고 있다면 부처님 당시 탁발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그런 탁발자들이 어쩌면 제도권의 스님들도 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유재산을 축적하고 은처, 도박 등 갖가지 추문에 노출되어 전국민의 조롱거리가 되다시피하여 재가자와 조금도 다름 없는 반승반속의 삶을 살아 가는 스님들 보다 더 청정하게 보이는 것이다.
한국불교가 부처님 당시와 같은 청정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빅카가 아닌 빅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큰스님, 노스님부터 탁발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불교 훨씬 달라질 것이다. 이미지 개선이 될 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흥을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큰스님, 노스님이 가장 낮은 자세로 탁발을 하려 할까.
2013-02-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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