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령과도 같은 종교평화선언
왜 사느냐고 묻거든
왜 사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서 산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죽지 못해서 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에서는 어떻게 말할까?
성철스님의 정상론(頂上論)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이 있다. 1967년 해인총림의 방장으로 취임한 후 그 해 동안거를 맞아 대중스님들에게 법문한 내용이다. 스님은 종교가 추구하는 구경의 목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이야기가 조금 벗아나지만 종교란 궁극적으로 무엇이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교란 어떤 특징과 무엇을 근본으로 삼는냐 하는 문제를 잠깐 살펴봅시다.
물론 불교나 예수교나 회교나 이미 다 알다시피 세계적인 종교임에는 틀림없으나 각기 그 교조의 입자이 다르고 그 내용이 상이하므로 같은 종교라고 하더라도 사뭇 다를 수밖에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각 종교의 입장과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구경목표는 다 같다고 봅니다. 예를 이야기하자면 서울로 갈 때 북쪽에서 가든지 남쪽에서 가든지 서쪽에서 가든지 동쪽에서 가든지 어디서 가든지 간에 서울이 목표인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목표는 공통입니다. 그 공통인 종교의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상대유한의 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을 시작하면서 말한 것이다. 종교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구경목표는 다 같다고 한다. 마치 산에 올라 가는 길이 다르지만 정상에서 만나는 것처럼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목표는 같은 것이라 한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라 한다.
불교의 궁극목표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를 들어 말하고 있다.
상대유한의 세계는 생멸(生滅)의 세계이며 절대무한의 세계는 해탈(解脫)의 세계이니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종교의 근본목표인 것입니다.
영원한 행복이란 상대유한의 세계에서는 실현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근본 욕구는 영원한 행복에 있는데 절대무한의 행복을 얻기 위해서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목표로 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그 종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그러면 다른 종교는 그만두고 불교의 구경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부처님이 다른 경에서도 많이 말씀하셨지만 [기신론(起信論)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고(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樂)을 얻는다. 離一切苦하고 . 離一切苦 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樂)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입니다. 그것은 곧 상대유한의 세계를 떠나 절대무한의 세계로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는 것과 그 내용이 꼭 같습니다.
(성철스님, 백일법문)
성철스님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근본목표가 다 같은 것임을 강조하면서 기신론의 문구를 예로 들고 있다. 그것은 “모든 고(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樂)을 얻는다 (離一切苦得究竟樂)”라는 것이다. 이를 줄여서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 한다.
전도된 인식 상락아정(常樂我淨)
성철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생멸의 유한세계에서 절대무한의 세계에 들어가 영원한 행복을 얻는 것이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목표라고 한다. 이와 같은 논리라면 전세계의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키워드는 절대 무한세계와 영원한 행복이다. 특히 ‘절대’와 ‘영원’이라는 말에 주목한다.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절대라는 말과 영원이라는 말은 금기어에 가깝다. 절대와 영원이라는 말은 써서는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일체 현상이 무상, 고, 무아이기 때문에 이와 반대 개념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말하면 전도된 인식을 가진 것으로 본다. 따라서 단지 영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불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외도의 사상과 다름 없다.
불교와 타종교의 차이는?
빠알리 니까야에서도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망갈라경(Sn2.4)이 있다. 부처님이 최상의 행복에 대하여 설한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어리석은 사람을 사귀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여 부모를 돌보는 것 등 여러가지 행복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두 최상의 행복이라고 한다. 아내와 자식을 돌보는 것도 최상의 행복이라 하고 술마시는 것을 절제하는 것도 최상의 행복이라 한다. 반드시 절대무한의 세계에 들어 가는 것만이 궁극적 행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행복중에 열반을 이루는 것도 최상의 행복이라 하였다. 공덕을 쌓는 것이나 열반을 이루는 것이나 모두 최상의 행복이라 하였다.
그래서 행복경이나 자애경, 보배경에서 행복을 말하고 있지만 반드시 열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부처님이 행복에 대해서만 말씀 하셨다면 다른 종교와 하등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여럿 있듯이 불교도 그 중의 하나의 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타종교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열반에 대한 것이다. 타종교에서는 영원한 사는 것과 영원한 행복, 즉 상락아정을 이야기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부처님의 궁극적 가르침에 대한 목표는 명백히 열반이기 때문이다.
예불문에서도 언급된 열반
그래서 행복경이나 자애경, 보배경에서 행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반드시 다음과 같은 문구가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구 분 |
내 용 |
비 고 |
망갈라경 (행복경, Sn2.4) |
Tapo ca brahmacariyañca ariyasaccānadassanaṃ, Nibbānasacchikiriyā ca etaṃ maṅgalamuttamaṃ.
감관을 수호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
열반을 이루니 |
멧따경 (자애경, Sn1.8)
|
Diṭṭiñ ca anupagamma sīlavā dassanena sampanno Kāmesu vineyya gedhaṃ na hi jātu gabbhaseyyaṃ punaretī
삿된 견해에 의존하지 않고 계행을 갖추고, 통찰을 갖추어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면,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 |
윤회에 들지 않을 것 |
라따나경 (보배경, Sn2.1) |
Khīṇaṃ purāṇaṃ navaṃ natthi sambhavaṃ Virattacittā āyatike bhavasmiṃ, Te ṇīṇabilā avirūḷhicchandā 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 Idampi saṅghe ratanaṃ paṇītaṃ Etena saccena suvatthi hotu.
그에게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운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참모임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 지이다. |
열반에 드시나니 |
테라와다 불교에서 예불문으로 사용되는 세 경을 보면 공통적으로 열반에 대한 것이 언급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가 열반임을 잊지 말라는 것으로 보인다. 재가자들이 수호경으로 삼고 있다는 경에서조차 열반이 언급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에서는 좀처럼 열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한국불교에 있어서 최고의 스승으로 불리웠던 성철스님도 불교의 궁국적 목표가 이고득락이라 하였지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더구나 ‘정상론’을 말하면서 모든 종교가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라 하였다.
도법스님의 나눗배론
종교의 본질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행복의 추구를 넘어 궁극적으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다. 비록 재가자일지라도 언젠가는 성취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열반은 뭇삶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라 다름 없다. 열반은 일종의 불교적 구원론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테라와다불교 예불문에 열반이나 윤회의 종식이 언급되어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 결사추진본부장을 맡고 있는 도법스님은 오로지 ‘뭇삶의 안락과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고 생명사상을 이야기 한다. 그 어디에도 열반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지난 2011년 종교평화선언을 주도 하였던 도법스님의 종교관은 어떤 것일까. 최근 불교닷컴에 실린 기사를 보면 도법스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종교평화선언(21세기 아쇼카선언) 준비과정에서 한 주장은 굽힘없이 되풀이 했다.
“성자들, 현자들이 하는 얘기는 사실 대동소이합니다. 누구는 하느님이라고 하고, 누구는 붓다라고 하고, 누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언어, 개념이라는 것은 강을 건너기 위해 잠시 필요하고 강을 건너면 버려야 하는 나룻배, 뗏목입니다. 그 말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가 중요한데 그것은 실상 다 같은 얘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부처님 이런 것은 인격화시킨 개념이고, 도나 진리, 법이라는 말들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개념입니다. ... 문제는 우리가 불교 수행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156쪽)”
( 도법 스님 《지금 당장》서 일갈 “종교집단 물신화, 영혼이 없어”, 불교닷컴 2013-02-12)
도법스님의 불교관을 보면 성철스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철스님이 ‘정상론’을 이야기 하였다면 도법스님은 ‘나룻배론’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는데 있어서 건너기 위한 수단은 많다는 것이다. 그런 수단 중의 하나가 불교라고 한다. 그래서 건너고 나면 어느 종교나 모두 다 똑 같다는 논리이다.
망령과도 같은 종교평화선언
이와 같은 도법스님의 종교다원주의적 종교관의 영향이어서인지 마치 망령과도 같은 종교평화선언이 다시 부활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불교포커스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 하였기 때문이다.
화쟁위원회는 종단 낸 논란으로 유보된 ‘종교평화선언문’ 발표를 재추진한다. 결사본부 백승권 사무국장은 “총무원장 자승스님의 임기 내에 반드시 종교평화선언을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 결사본부, 종무제도 쇄신-청규 제정, 예산 7억4천만원 “호법제도 개선…종교평화선언 재추진”, 불교포커스 2013-02-06)
참으로 끈질기다. 지난 2011년 한국불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종교평화언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이야기이다. 그것도 자승스님의 임기 내에 ‘반드시’ 선언문을 발표하겠다는 것이다.
반드시 라는 말이 들어 간 것으로 보아 임기내에 종교평화선언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비불교적인 선언이라는 지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실행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슈선점이라 보여진다. 아직까지 한국불교가 사회에 대하여 이렇다할 공헌을 하고 있지 못한 마당에 선언을 한다는 것은 불교가 평화의 종교임을 전국민들에게 각인시켜 주기 위함일 것이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그러나 추진하는 사람의 문제이다. 자승스님은 다음과 같이 국민들에게 각인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한불교조계종 호법부장 서리 정념 스님(사진)은 16일 오전 라디오에 출연해 종단의 일부 스님이 연루된 도박사건과 관련해 국민에게 사과하며 “성호 스님이 주장한 종단 고위층의 성매수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정념 스님은 이날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나와 “먼저 국민들께 머리 숙여 참회드린다. 있어선 안 될 일들이 일어나 국민들에게 실망을 드려 종단 전체가 참회하고 자숙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는 전날 출연한 성호 스님의 ‘스님 성매수’ 등 주장에 대한 반론 형식이었다.
정념 스님은 “어제 명진 스님에게 전화해 사실 확인을 했다. 명진 스님 말이 자승 스님은 당시 다른 곳에 있다가 중요한 얘기를 하자는 말에 (나중에) 왔으며 (자승 스님은) 올 때 운전했던 스님이 있고, 또 장소가 적절치 않아서 오랜 시간 머물지 않고 장소를 나갔다고 했다”고 전했다. 정념 스님은 “명진 스님이 자승 스님은 ‘곡차’, 즉 술은 입에 대지 못하는 체질이다. 성매수 얘기가 나왔는데 그런 일은 전혀 없었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 “자승 스님, 룸살롱 갔지만 성매수 안해”, 동아일보 2012-05-17)
우리나라 국민들이 많이 본다는 메이저 신문중의 하나인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룸살롱에는 갔지만 성매수는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룸살롱에 간 것 자체가 잘못 된 것인데, 거기에다 성매수를 했느니 안했느니 하는 이야기가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전국민에게 알려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나온 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총무원장 자리에 자승스님이 앉아 있다는 그 자체가 불자임을 부끄럽게 만든다. 그런 스님이 자신의 임기내에 ‘반드시’ 종교평화선언을 이루어내겠다고 비장한 각오를 밝히고 있다.
열배나 되는 거인을 향하여
종교평화선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 봉은사 땅밝기에서 유래한다. 극렬한 기독교의 선교정책에 불교계의 앞마당은 물론 안방까지 넘보는 사태가 벌어지자 세상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는데, 어이없게도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불교계가 종교평화선언이라는 이름으로 화해의 제스처를 보낸 것이다. 가해자는 가만 있는데 피해자가 용서를 바라는 듯한 행위이다. 마치 거인과 소인의 싸움에서 소인이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듯한 모습이다.
오늘날 불교와 개신교의 교세는 비슷하다. 그러나 피부로 느끼는 현실적인 교세는 불교대 개신교가 1일대십(1:10)이다. 불교가 개신교의 10%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교인수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그렇다. 그래서 개신교가 불교에 비하여 무려 10배나 큰 거인이다. 그런 거인을 향하여 평화선언을 하는 것이다. 사실상 자비를 바라는 항복선언이나 다름 없다.
기독교에 흡수될 것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의 임기내에 불교만의 종교평화선언이 이루어진다면 한국불교는 기독교에 흡수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역적 기반을 상실한 한국불교가 지역사회를 위하여 기여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서 한국불교는 대중적 기반을 상실한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인도에서 대중적 기반을 상실한 대중불교가 밀교화 되면서 힌두이즘 속으로 사라진 것과 유사할 것이라 보여진다.
그런 첫 번째 단계가 종교평화선언이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상론이나 나룻배론과 같은 다원주의적 사상이 기반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교평화선언을 하는 순간 인공호흡기에 의지하여 유지하여 온 듯한 한국불교가 호흡기를 떼는 것과 같은 것이라 본다.
부처님 법대로 사는 시대
자승스님과 도법스님의 임기내에 종교평화선언이 이루어진다면 더 이상 불교는 존속하기 힘들것으로 본다. 모든 종교는 같은 것이라 보기 때문에 종교간 구별이 없어지고, 더구나 전법은 교세확장이 아니라 하니 포교가 무력화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언이 이루어지면 한국불교에 있어서 한 시대가 끝나는 것으로 본다. 한시대가 끝나면 또 다시 새로운 시대가 시작 될 것이다. 그런 시대는 ‘부처님 법대로’ 사는 시대가 될 것이다.
201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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