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도시의 절대고독,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한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는 여운이 길게 남는다. 그리고 강렬하게 영향을 준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공허하기도 하고 우울한 감정 같은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역시 그러 하였다.
작가가 증언하고자 한 것은?
듣는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고, 또 소리소설이라고 볼 수 있는 소설을 다 들었다. 도서관사이트에서 서비스 되고 있는 오디오북(Audio book)서비스를 통해 모바일로 다운 받아 3일에 걸쳐서 다 들었다.
이틀 간 들은 것에 대하여 글(소리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마음의 오염과 청정)로 표현 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내용에 대해서는 하루 밤 만에 다 들었다. 듣다 보니 새벽까지 듣게 되었다. 다 듣고 나서도 그 여운으로 인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소설의 클라이막스로 여겨지는 마지막 장면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작가는 증언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겪은 것에 대하여 세상에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예감이 현실화 되어 1992년 소설로 나오게 된 것이다. 작가의 기억을 되살려 자전적 성장소설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글에서 작가는 1.4후퇴 당시 텅빈 도시를 보고서 그 동안 일어났던 운명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표현하였다. 유년시절 개성 부근의 시골에서 살았을 때 서쪽 하늘에 벌겋게 물든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하였는데, 그 울음이 아마도 한국전쟁 중에 일어났던 운명적 파탄에 대한 눈물이었는지 모른다.
작가의 증언은 전쟁이 끝난지 41년이 지난 1992년에 발표 되었다. 이전에 소설에서 단편적으로 증언이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구체적인 증언이 이루어졌다고 본다. 노태우 정부가 시작 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가 시작 된 시점에서 소설이 발표 되었으므로 작가는 무려 40년을 기다린 후에 증언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벌레’를 벗어 나기 위해서라도 증언을 해야 겠다고 하였는데, 그 벌레란 것은 어떤 의미이고 그때 당시 도대체 어떤 일들이 작가에게 벌어진 것일까?
세상이 바뀐 1950년 6월 28일
소설의 대부분은 유년기에서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다닌 이야기 위주이다. 그러나 소설의 클라이막스라 볼 수 있는 끝 언저리 부근에서는 작가가 대학에 입한 한 후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시작된다. 작가가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일학년에 입학한 스무살 때인 6월 부터 다음해 1월의 사건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그 때 당시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한국전쟁’이었다.
한참 꿈과 낭만에 부풀어 있던 스무살 처녀의 눈에 비친 한국전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작가는 세상이 바뀐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날이 밝자 숙부와 숙모는 오늘은 상점을 열 수 있을 것 같다며 집으로 떠났다. 우리도 다들 밖이 조용해진걸 전쟁이 진정된 것 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붙들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헐레벌떡 되돌아 온 숙부는 몹시 얼뜬 목소리로 밤사이에 세상이 바뀐 걸 알려 주었다.
엄마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어쩔꼬, 이를 어쩔꼬.” 헛소리처럼 탄식하는 엄마의 손을 잡으니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숙부는 그런 엄마가 잘 이해 안되는 모양이었다. 싱글대며 농담을 다 했다. “아 형수님이야 무슨걱정이유. 툭하면 이승만 박사 욕도 잘 하시더니만. 잘 됐지 뭐 그래요.”그리고 우리 한테도 빨리 나가 보라고 했다.
길가에 인민군을 환영하는 인파가 적지 않다고 했다. 엄마가 굳은 표정으로 못나가게 했다. 대통령이 남긴 목소리를 곧이 곧대로 믿던 숙부는 이미 바람 부는 대로 살 각오가 되 있는 반면, 같은 대통령을 그렇게 못마땅해 하던 엄마는 되레 새세상에 심한 낯가림을 하고 있었다.
오빠 때문에 그러는 줄 알지만 좀 지나친 것 같았다. 전향한 게 투쟁경력에 큰 흠이 되긴 하겠지만 설마 정상을 참작해 주겠지 하는 치사한 생각을 난 하고 있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1950년 6월 28일에 대한 상황이다. 밖으로 나가 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승만 정부가 내빼듯이 도망간 수도 서울에 인민군이 입성한 것이다. 6월 25일 전면적으로 남침한 지 불과 3일만의 일이다. 이승만 정부의 호언장담을 곧이 곧대로 믿고 있었던 시민들은 피난갈 생각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완전히 딴 세상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낭만적 공산주의자
소설에는 주로 세 식구가 등장한다. 엄마와 작가와 오빠이다. 아버지는 세 살 때 병으로 죽어서 기억에 없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는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의 회색분자에 가깝다. 해방후 한 때 공산주의에 매료 되어 좌익활동을 하였으나 전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종의 낭만적 공산주의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작가 역시 그때 당시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랫듯이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고, 그때 당시 젊은이들처럼 낭만적 공산주의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실체를 모르고 팜플렛이나 책을 통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운명에 휘말려 들게 된 사건
이런 상황에서6월 28일을 맞았는데, 그 날에 대한 묘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오빠는 일생일대의 부자연스런 모습으로 귀가했다. 설사 엄마의 계획대로 지키고 있던 길목에서 만났다고 해도 사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빠는 거의 한 트럭분 됨 직한 죄수들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죄수라고 했지만 머리를 빡빡깍고 죄수복을 입고 있어서 그렇게 부른 것이지, 그들의 표정은 훈장을 주렁주렁 단 개선장군보다 더 당당하고 위엄과 영광에 넘치고 있었다. 그들에 비해 평상복을 입은 오빠가 되레 자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이해 못하는 사람처럼 맹하니 무표정했다.
그들중 하나가 댓돌 아래에서 역시 표정이 바른 채 우두망찰하고 서 있는 엄마를 사뿐히 안아 올려 좌정을 시키고 큰 절을 하자 모두 따라했다. 엄마도 이제야 그를 알아 보고 그의 손을 잡고 그간의 고생을 위로 했지만 한 번 바랜 핏기는 돌아 오지 않았다.
엄마한테 먼저 큰 절을 올린 이는 우리가 삼선교 집에서 살 때 문간방에 세들어 살다가 바로 우리 집에서 잡혀간 바로 그 사내이었다. 오빠도 그때는 조직생활을 할 때 이었기 때문에 비록 횡적인 관계는 없지만 서로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가 체포된 후 남은 가족에게 우리가 그다지 야박하게 굴지 않았다는 것을 아내한테 듣고 옥중에서도 늘 감사하고 있었다고 한다.
28일 아침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대는 제일 먼저 갇힌 사상범들을 해방시켰고, 갈아 입을 옷도 없었겠지만 있다고 해도 안 갈아 입을 만큼 죄수복 자체가 혁명투사의 자랑스런 표지가 된 그들은 그대로 트럭에 올라타 시내를 누비며 군중의 환호에 답하는 일방, 군중의 열광을 유도했을 것이다.
오빠의 학교가 있는 시골에선 비교적 조용하게 세상이 바뀌었다고 한다. 포소리도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아 설마 했었는데, 아침에 면소와 주재소에 인공기가 게양된 걸 누가 일러 주면서 서울서는 큰 전투가 벌어졌다고 해서 부랴부랴 서울로 오다가 그 트럭을 만난 거였다.
일러준 사람이 친절하게도 오빠에게 붉은 리본을 단 밀집모자도 씌워주고 자전거에도 붉은 헝겁을 메달아 주어서 오빠는 그게 계면쩍어 도중에 떼었다 붙였다 했다니 그의 소심함을 짐작할 만한 했다. 그렇게 이쪽에도 저쪽에도 자신이 없는 오빠니 만치 혁명투사들이 탄 트럭을 보고도 못 본척도 못하고 열광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바라 보았을 것이다.
트럭이 오빠 곁으로 바싹 다가 오는 것 같아 비실비실 피하려는데 누가 손을 내밀더라고 했다. 트럭에 탄 사람들과 행인들의 열렬한 악수와 포옹을 이미 무수히 목격한 오빠는 수줍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순간 오빠는 “이럴수가 , 동지를 이렇게 만날수가!” 하는 감격스런 소리와 함께 부웅 떠서 트럭 위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내 자전거!”하고 아끼던 자전거를 불러 볼 새가 없었다. 그리고 한 나절을 지칠 줄 모르고 흥분의 도가니 속에 쌀의 뉘 처럼 어설프게 끼여 있다가 마지 못해 그들을 달고 귀가 한 것이었다.
곧 우리집 좁다란 마루가 그 트럭 위가 되어 엄마하고 올케하고 나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찌게도 끓이고, 지짐질도 했다. 동네 반찬가게에서 두부는 목판째, 술은 짝으로 들여 왔다. 그들은 먹고, 마시고, 지치지도 않고 인민가요를 불러 댔다. 조그만 집이 떠나갈 듯 했다. 지붕에서 기왓장이 다 들썩들썩 하는 것 같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다운 받은 mp3파일을 듣고 옮긴 것이다. 소설이기 때문에 긴 설명을 필요로 하여 해당된 부분을 모두 실었다.
소설속에서 6월 28일날 상황이 극적으로 묘사 되어 있다. 어정쩡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의 오빠와 죄수들이 대조적이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해방된 죄수들은 모두 사상범들로서 28일 당일 시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더구나 엉겁결에 죄수들 트럭에 올라탄 오빠가 그들과 함께 작가가 사는 집으로 와서 인민가요를 기왓장이 떠들썩 하게 불렀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본의 아니게 운명에 휘말려 들게 된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공감하였다는데
이와 같이 바뀐 세상에 대하여 작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때 당시 젊은이나 지식인층 대부분 좌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막연하게 공산주의를 동경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오빠와는 달리 바뀐 세상에 서슴없이 공감했다. 그들이 이승만 정부 욕하는데 공감했고, 노동자 농민에 대한 약속에 공감했다. 거의 잊고 지내던 팜플렛을 보고 맛본 공산주의에 대한 최초의 감동과 매혹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 그들의 승승장구에 박수갈채를 보내고 싶었고, 한 때 민청조직에 들어 있었다는 것을 대단한 투쟁경력처럼 자부하고 생각까지 들었다. 게다가 입학한지 얼마 안되는 대학에대한 애착도 무시 못했다.나는 바뀐세상에 참여하고 싶었고, 내가 속할만한 데는 대학밖에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그때 당시 서울사람들은 이승만정부에 대하여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말로는 평양점심, 신의주저녁을 부르짖었으나 가장 먼저 도망 것이 정부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한강다리마저 끊어 놓았으니 서울사람들은 꼼짝 없이 서울에 갇힐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보복을 두려워 하는 친정부측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일반시민들이었다. 보통사람들 눈에 자고 나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부분 시민들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세상이 바뀌자 그 동안 숨죽여 지내던 좌익의 활동이 시작된다. 낭만적 좌파중의 하나이었던 작가 역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컷다고 한다. 그래서 적극참여 하게 되었는데 소속된 대학에서이다.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
하지만 실망도 컷다고 밝히고 있다. 거짓으로 열광하는 것이 마치 쇼처럼 보인 것이다. 공산주의 실체를 알고 나서 활동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활동이 문제가 되었다. 9월에 세상이 다시 한 번 바뀌면서 시련의 시기가 찾아 온 것이다. 그때 당한 수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눈물겹게 표현하고 있다.
별의별 청년단체들이 다 나를 보자고 했다. 그들은 나를 ‘빨갱이년’이라고 불렀다. 빨갱이고 빨갱이년이고 간에 그 물만 들었다 하면 사람도 아니었다.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영장이고 나발이고 인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빨갱이를 색출하고 혼 내줄 수 있는 기관은 수도 없이 난립 되어 있었고, 이웃이 계속 우리를 수상쩍게 여기는 한 난 그들의 밥이었다. 그들은 나를 함부로 욕하고, 위협하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들의 눈빛의 비하면 그 정도는 인권침해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나를 짐승이나 벌레처럼 바라다 보았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 주었다. 벌레처럼 기었다. 정말로 그들에겐 징그러운 벌레를 가지고도 오락거리를 삼을 수 있는 어린애 같은 단순성이 있었다. 다행히 그들은 빨갱이를 너무도 혐오했기 때문에 빨갱이의 몸을 가지고 희롱할 생각은 안 했다.
나는 내가 너무 귀족적으로 자란 걸 다 원망했다. 잘 먹고, 잘 입고 떠 받들어졌다는 소리가 아니라 수모에 길들어질 기회 없이 커 왔다는 뜻이다.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듯이 뒤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이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린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여러군데서 개별적으로 당한 일들이 한 묶음으로 단순하게 남아 있고, 구체적인 사건들을 추상적으로 밖에 생각해 낼 수가 없다. 그건 몸으로 벌레처럼 기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폭력에 굴복당했다는 증거겠지만 어쩌랴. 그렇게 생겨 먹은 게 곧 보통사람이 안 미치고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의 한계인 것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다시 한번 세상이 바뀌자 이번에는 공산주의에 협력하였던 사람들의 숙청이 시작된다. 작가 역시 그런 희생자 중의 하나이었다. 부역자나 협력자들을 일반적으로 ‘빨갱이’라고 부르는데, 여자에 대해서는 ‘빨갱이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소속된 대학에 가서 활동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래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며 갖은 수모를 다 당했는데, 이에 대하여 작가는 ‘벌레’가 되었다고 했다. 마치 벌레 취급하듯이 혐오하고 경멸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몸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 기억을 지우려고 하였으나 나중에 증언하기 위해서 잊어 버리지 않으려고 또한 노력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벌레 취급당하면서 정신적 폭력을 겪자 미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렇게 갖은 수모와 모욕을 겪으면서 사람취급도 받지 못한채 마치 벌레처럼 살아 갈 때 다시 한번 세상이 또 바뀌려 한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하여 서울을 내주는 작전상 후퇴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만정부는 서울시민들에게 모두 피난 갈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마치 소설 전쟁과 평화에서 모스크바 시민들을 모두 소개하여 텅비어 있는 채로 만드는 것과 유사하게 보인다. 인민군들이 들어와도 협력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 본다.
이승만정부는 6월에는 대책없이 줄행랑을 쳤으나 이번에는 작전상 후퇴임을 천명하며 다시 반격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에 서울시민들은 너도 나도 피난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피난을 가지 않고 남아 있다면 적에게 협조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나중에 수복 되었을 때 어떤 보복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따라서 작가의 가족도 피난을 가기로 결심한다. 9.28수복후 모진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피난을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오빠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사고난 것이다. 구파발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오빠가 총기오발사고로 다리에 총상을 입은 것이다. 그래서 가족들은 오빠와 함께 피난가기 위해서 구파발로 간다. 엄마와 올케는 오빠의 두 아이를 하나씩 안고, 작가는 리어커에 오빠를 싣고 피난 길을 나선 것이다.
텅빈도시는 얼마나 공허할까
그러나 한강을 건너기는 너무나 먼 거리이다. 도중에 옛적 살던 현저동에 도착한다. 모두가 떠나 버린 현저동에 다시 도착한 것이다. 이 부분이 소설의 클라이 막스이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우리가 가짜 피난지로 정한 동네는 현저동이었다. 다시 현저동이라니!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일 것 같던 팔다리에 새로운 힘이 솟았다. 층층다리를 통하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돌게 되어 있었지만 손수레 때문에 그 길을 택했다.
마지막 피난민이 맹수에 놀란 토끼처럼 화들짝 뛰어내리는 길을 거슬러 우리는 숨가쁘게 새로운 피난처에 도착 했다. 엄마가 점찍어 놓은 집은 숙부네 신세진 적이 있는 바로 그 집이었다. 그집도 피난을 떠나고 잠겨 있었다. 그러나 허술한 집일수록 자물쇠도 허술한 법이어서 우리는 힘을 합해 아예 문고리를 낚아 챘다. 방금 떠난 것처럼 아랫목에 온기가 남아 있었고 윗목엔 먹다 남은 밥상이 그냥 헤버러져 있었다. 총각김치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우리는 먼저 양식이 있을 만한 데를 뒤졌다. 우리가 가진 양식은 너무 적었고 어느 세상에서나 목구멍은 포도청이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짓에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쌀은 없고 잡곡 한 움큼과 밀가루가 반자루 가량 남아 있었다. 저녁은 새로 짓지 않고 남기고 간 찬밥으로 때웠다. 군불도 뜨끈뜨끈 하게 지폈다. 더 나쁜 일이 일어날 없을 지경까지 몰렸을 때 평화로움 안에서 우리는 깊은 숙면에 빠졌다.
새날이 밝았다. 오빠가 오래간만에 잘 잤노라고 기지개를 폈다. 나는 앞으로 후퇴한 정부가 수복 될 때만 생각하고 당장 당면한 또 바뀐 세상에 어떻게 대처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선 대책 없는 식구들이 답답하고 짐스러웠다. 오빠를 손수레에서 내려 놓았다고 해서 내 짐이 가벼워 진 건 아니었다.
나는 바뀐 세상의 눈치를 보려고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나갔다. 지대가 높아 동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혁명가들을 해방시키고 숙부를 사형시킨 형무소도 곧장 바라다 보였다.
천지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마치 차고 푸른 비수가 등골을 살짝 긋는 것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그건 천지에 사람없음에 대한 공포감이었고 , 세상에 나서 처음 느껴 보는 전혀 새로운 느낌 이었다.
독립문까지 뻔히 보이는 한 길에도, 골목길에도, 집집마다에도 아무도 없었다. 연기가 오르는 집이 어쩌면 한 집도 없단 말인가! 형무소에 인공기라도 꽃혀 있다면 오히려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 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 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쫒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업치고 덥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 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쭘, 보리쌀 한 두 대박 정도 없으라고.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작)
작가의 가족은 피난한 척 한 것이다. 만일 피난 가지 않고 바뀐 세상에 남아 있다면 나중에 또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중에 옛적에 살던 현저동으로 들어 간다. 그곳에서 피난한 척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모두 떠난 도시에서 사람의 인기척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텅빈 도시에서 자신의 가족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텅빈도시는 얼마나 공허할까. 사는 곳에 재개발지역이 있다. 부동산 투기가 절정에 달했던 지난 2007년 무렵 재개발지역으로 고시된 지역이다. 매번 지나다니는 길에 있는 구역인데, 어느날 눈을 돌리니 동네가 텅텅 비어 있었다. 매번 다니던 길에 어느날 갑자기 텅 빈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런 상태로 거의 일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러나 언제 개발될 지 기약할 수 없는 것 같다. 동네는 텅텅 비어 있지만 개발을 반대하는 각종 플레카드가 난무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벌한 구호가 적혀 있는 텅빈 동네를 지나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은 고요와 적막이다. 어떤 움직임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사람이 살아야 할 곳에 사람이 살고 있지 않고 마치 유령의 도시처럼 방치 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을 지날 때면 늘 불안감과 공포감을 유발한다. 작가도 그런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 전쟁중이라 더 했을 것이다.
작가는 거대한 도시에서 아침이 되어도 밥을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자 공포감을 느꼈다고 하였다. 텅빈 거대한 도시에 자신들만 남겨져 있는 듯한 ‘절대고독’ 같은 것이다. 그래서 두려움과 공포가 앞섰지만 순간적으로 이런 상황을 후세에 남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글로서 남기고자 한것이다. 그러자 새로운 힘이 솟아 올랐다고 했다. 우선 생존해야 되기 때문에 식량을 확보 하기 위하여 빈집을 털 계획부터 마련한 것이다. 그렇게 소설은 끝났다.
한국인들의 집단 무의식
소설듣기를 마치자 한 동안 멍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오래갔다. 마치 자신이 소설속의 상황을 겪은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도 아니 건만 생생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나라 민족이 전쟁체험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소설과 영화와 드라마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직접적인 체험을 하지 못하였을지라도 공감 하는 것이다. 그런 공감은 때로 공포로 다가오기도 한다.
언젠가 꿈을 꾸었는데 북한군이 쳐들어와 점령하는 꿈을 꾸었다. 순식간에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런 꿈을 꾼 것은 ‘집단무의식’때문일 것이다. 한국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공포감이 집단무의식 형태로 한국사람들의 의식에 박혀 있기 때문에 표출 된 것이라 보여진다. 그래서일까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더욱 공감하는지 모른다.
2013-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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