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살충과 낙태, 죄의식을 조장하는 치사한 광고전략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26. 14:10

 

살충과 낙태, 죄의식을 조장하는 치사한 광고전략

 

 

 

광주 대원정사 부처님은~”

 

광주 대원정사 광고가 또 시작 되었다. 잊을만 하면 듣게 되는 광고 방송은 짜증 그 자체이다. 같은 내용의 광고 방송을 한 두 달도 아니고 수 년간 들었기 때문이다.

 

광주 대원정사는 지난 2007년 화재로 전소되었다. 그런데 전소된 대웅전 복원불사를 위해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방송광고를 한것이다. 그래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광주 대원정사 부처님은~”이라고 시작 되는 광고를 무려 4년간 방송하였다. 그런 노력의 결실일까 대웅전이 복원(2008.4-2010.4) 되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웅전의 후불탱화 등의 불사방송이 또 시작 되었다. 그런 광고를 보면 부처님오신날 광고가 다르고, 우란분절을 앞둔 광고가 달랐다. 계절마다, 명절마다 각기 다른 내용을 보내는 것이다. 우란분절을 앞둔 경우 태아의 영가천도에 관한 광고를 하였다. 마치 맞춤광고를 보는 듯 하였다.

 

이와 같은 대원정사의 방송에 대하여 2010년에 글을 올린 바(“광주 대원정사 부처님은 생불산에 화현 하시어…”불교방송은 , 2010-07-23) 있다.

 

이렇게 4년간 지속된 방송광고가 대웅전 불사와 후불탱화 불사등의 완성으로 끝나는 줄 알았다. 한 동안 광고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또 다시 광고방송이 시작 되었다. 이번에는 기복적인 요소가 강하게 포함된 내용이었다. “기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도 기도소리를 빼지 않고 들으시고 기도를 성취해 주신 부처님”이라는 내용과 함께 지장전 복원 불사를 동참하는 호소 광고 이었다. 이에 대하여 불교방송은 기복백화점인가, 2011-07-19)”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하나가 끝나면 또 하나의 불사광고가

 

아침 불교방송에서 수 년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대원정사 광고를 들었다. 하나가 끝나면 또 하나의 불사광고가 나오고, 그것이 끝나면 또 새로운 불사광고가 계속되어 라디오 앵벌이와 같다라고 올린 글에 표현 하였다.

 

전각이 화재로 전소 되었어도 다른 사찰의 광고는 없는데, 유독 대원정사만큼은 전국의 불자들을 대상으로 읍소하는 형식의 동참광고를 내었다. 그것도 태아영가 등 감성을 자극하는 듯한 광고를 내보는 것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광주대원정사와 불교방송이 특수관계에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다만 조계종 교육원장을 지낸 암도스님이 회주로 있다는 것 외 별다른 관계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올해 다시 광고가 시작되고

 

그리고 2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언제 부터인가 대원정사 광고를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올해 들어 다시 대원정사 광고를 듣게 되었다. 지난 2007년 이래 7년째 듣는 광고이다. 이번에는 극락전과 지장전 불사에 대한 것이다. 이를 디카를 이용하여 녹취하였다.

 

 

 

 

 

녹취한 광고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광주 대원정사는 기도성취를 잘 해 주는 화현부처님의 가피력으로 어류, 가축, 짐승, 벌레 등을 살생 하여 지은 죄업장을 소멸하고, 사업, 취업, 시험, 취직 등 소망성취공덕이 있는 수륙제를 3 26일에 봉행 합니다.

 

또한 화마로 불에 타 버린 아미타불과 지장보살님을 모셔 드리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제 아픔과 슬픔을 거두고 아미타불과 지장보살님을 모실 극락전, 지장전 불사중이오나 역부족입니다.

 

극락전, 지장전 불사가 원만 성취할 수 있도록 십시일반 동참을 바라오며 불쌍히 버려져 집 없이 떠돌고 있는 가엾은 유산 낙태영가를 지장보살님의 품안에 안장해 주는 인연불사에도 동참바랍니다.

 

문의는 광주 지역번호 영육이 오칠일에 육칠팔구 영육이 오칠일에 육칠팔구 대원정사로 하시기 바랍니다.

 

(광주대원정사 광고, 불교방송 녹취 2013-03-26)

 

 

광고내용을 보면 극락전과 지장전 복원 불사에 대한 것이다. 화재로 전소된 전각에 대하여 전국의 불자들에게 동참을 읍소 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사업, 취업, 시험, 취직 등 기도를 잘 들어 준다는 화현 부처님을 소개 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을 파고드는

 

매번 그렇지만 광주대원정사의 광고를 보면 인간의 심성을 자극하고 있다. 삶의 과정에서 누구나 한 번쯤 실수를 하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데, 그런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듯이 보인다. “어류, 가축, 짐승, 벌레 등을 살생하여 지은 죄업장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누구나 벌레를 죽였을 것이다. 개미 한마리 죽이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또 돼지나 닭 등 가축을 기르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살생 하지 않을 수 없다. 잔칫날이나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닭 등을 잡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주대원정사 광고를 보면 이와 같은 인간의 약점을 파고 들고 있다. 어찌 보면 대단히 치사한 광고전략이라 볼 수 있다. 닭과 같은 짐승은 물로 개미를 죽인 자 모두 죄인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죄업을 지은 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죄업장을 소멸하기 위한 수륙제에 동참하라고 한다.

 

또 하나 치사한 광고전략을 보면 낙태에 대한 것이다. 대한민국 여성 들 상당수가 낙태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틈새를 노리고 죄의식을 불어 넣고 있다. “불쌍히 버려져 집 없이 떠돌고 있는 가엾은 유산 낙태영가라는 감성적인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민을 살생자로

 

광주대원정사 광고에서 어류, 가축, 짐승, 벌레 등을 살생 하여 지은 죄업장이라는 문구를 보면, 의도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대하여 명확하지 않다. 이유를 불문하고 살생을 하였으니 살생업을 저지른 것으로 간주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의도가 중요하다. 그래서 비구들이여, 의도가 업이라고 나는 말하노니 의도한 뒤 몸과 말과 마음으로 업을 짓는다. (A6:63)”라고 말씀 하셨다. 의도가 개입 되지 않은 것은 살생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길을 걷다가 개미를 밟아 죽였을 때, 죽일 의도가 없었다면 살생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정사의 광고문구를 보면 전불자, 전국민에 대하여 모두 살생업을 지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낙태아도 영가로

 

어쩔 수 없이 낙태 할 수 있다. 그럴경우 의도가 개입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낙태에 대하여 살인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여 엄격하게 금지하는 나라들이 있다. 그런데 영가천도를 하는데 있어서 죽은 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낙태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낙태한 경험이 있는 자들 모두에게 살인업을 뒤집어 씌우는 것과 같다. 더구나 낙태영가라 하여 마지 죽은 자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

 

짐승, 벌레, 낙태 등 살생업에 대하여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의도 하지 않았던 것이든 누구도 여기서 벗어 날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광고에서와 같이 지장보살님에게 기도 하거나 영가천도한다고 하여 죄업이 모두 소멸되는 것일까?

 

피치 못하게 살생업을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누구나 살생업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이를 앙굴리말라경에서 볼 수 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 당시 희대의 살인마이었다. 살인자로서 살인한 사람의 손가락으로 화관을 만들어 다닐 정도로 흉폭하고 잔인한 연쇄 살인마이었다.

 

새롭게 태어난 앙굴리말라

 

그런 살인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존자 앙굴리말라는 싸왓띠에서 탁발을 하고 식후에 탁발에서 돌아와 세존께서 계신 곳을 찾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앉았다. 한쪽으로 물러앉아 존자 앙굴리말라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앙굴리말라]

“세존이시여, 저는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싸왓띠로 탁발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저는 싸왓띠에서 차례로 탁발을 하면서 유행할 때에 어떤 부인이 난산하여 아기가 불구가 된 것을 보았습니다. 보고 나서 저는 ‘오! 뭇 삶들은 얼마나 괴로운가? 참으로 뭇 삶들은 얼마나 괴로운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앙굴리말라경-Agulimāla sutta,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와 겪은 내용이다. 탁발을 할 때 어떤 부인이 난산하여 아기가 불구된 것을 본 것이다. 이를 불쌍히 여겨 부처님에게 말하는 장면이다.

 

저보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앙굴리말라여,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싸왓띠로 가라. 가서 그 부인에게 ‘자매여,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당신이 잘 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 되길 바랍니다.’라고 말하라.”

 

(앙굴리말라경-Agulimāla sutta,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에게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듣자 앙굴리 말라는 “세존이시여, 저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았는데, 저보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깜짝 놀라듯이 말한다.

 

영적 태어남(spiritual birth)

 

왜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에게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라고 했을까? 앙굴리말라가 교단에 들어 가기 전에 수 많은 살생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한 이유에 대하여 각주에 특별한 설명이 없다.

 

이에 대하여 검색을 통하여 영문판 앙굴리말라를 접할 수 있었다. “내가 태어난 이래에 대한 문구가 since I was born”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spiritual birth, but Agulimāla, not yet an arhat, still recalling his past violence, misunderstood . In reply, the Buddha then refers to “birth amongst the noble ones” (āriyāya jātiyā jāto).

 

(Agulimāla Sutta, The Discourse on Agulimla | M 86/2:97-105)

 

 

각주에 따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가 태어난 이래라고 말씀 하신 것은 앙굴리말의 영적 태어남(spiritual birth)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앙굴리말라가 이전에 연쇄살인자이었지만 교단에 들어와서 수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각주에 따르면 ‘Agulimāla, not yet an arhat’ 라 하여 앙굴리말라는 아직 아라한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았는데, 저보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깜짝 놀라듯이 대답한 것에 대하여 still recalling his past violence, misunderstood’라고 하였는데, 이는 앙굴리말라 자신이 과거 자신의 폭력적인 모습을 회상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설명하고 있다.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그러자 부처님은 부처님은 “birth amongst the noble ones(고귀한 태어남)”이라는 말을 추가하여 다시 한번 말한다.

 

 

“앙굴리말라여, 그렇다면, 그대는 지금 싸왓띠로 가라. 가서 그 부인에게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당신이 잘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되길 바랍니다.’라고 이와 같이 말하라.

 

(앙굴리말라경-Agulimāla sutta,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이전 문장과 똑 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고귀한 태어남이라는 말이 추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전 문장에서는 내가 태어난 이래라 하였으나, 이후 문장에서는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yatoha bhagini, āriyāya jātiyā jāto),”라고 내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라한이 된 앙굴리말라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와 거듭난 것이다. 그래서 영문판에서는 영적 태어남(spiritual birth)’이라 주석하였다. 경에서는 부처님이 āriyāya jātiyā jāto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고쳐 이야기 하셨다. 비록 앙굴리말라가 살인업을 저질렀을 지라도 부처님의 교단에서 가르침을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고귀한 태어남(āriyāya  jāti)로 본 것이다.

 

그러나 앙굴리말라는 아직 아라한은 아니다. 뒤이어 그 후 존자 앙굴리말라는 홀로 떨어져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훌륭한 가문의 자제들이 그러기 위해 올바로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위없이 청정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라는 문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산부를 만난 것은 아라한의 이전 단계 성자로 추측된다.

 

임신한 여인을 위한 수호주문(paritta)

 

이렇게 부처님으로부터 고귀한 태어남이라는 명칭을 부여받은 앙굴리말라는 부인과 아기에게 다음과 같이 법문한다.

 

 

yatoha bhagini, āriyāya jātiyā jāto, nābhijānāmi sañcicca pāa jīvitā voropetā, tena saccena sotthi te hotu sotthi gabbhassā'ti. Atha kho sotthi itthiyā ahosi sotthi gabbhassa.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내가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인하여 당신이 잘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되길 바랍니다.”

 

‘Sister, since I was born amongst the noble ones, I do not recall ever having intentionally deprived a living being of life. By this truth, may you be well, may your child be well!’

 

(앙굴리말라경-Agulimāla sutta,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이 문장은 수호주문(paritta)이다. 오늘날 남방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분만에 가까운 임신한 여인을 위한 수호주문으로서 빅쿠들이 자주 외는 말이라 한다.

 

출세간적 업장소멸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죄업으로 인한 업장소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하나는 앙굴리말라경(M86)에서와 같이 출세간적 방법이고, 또 하나는 소금덩이경(A3.99)에서와 같이 세간적 방법이다.

 

먼저 출세간적 업장소멸을 보면,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가 성자로서 거듭 태어났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고귀한 태어남(āriyāya jāti)’이라 하였다.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 등을 소멸한 결과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갔을 때 이전의 죄업은 씻겨 나가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아라한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에 맞아 죽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돌에 맞아 죽어 가는 앙굴리말라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adhivāsehi tva brāhmaa, adhivāsehi tva brāhmaa, yassa kho tva kammassa vipākena bahūni vassāni bahūni vassasatāni bahūni vassasahassāni niraye pacceyyāsi.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가 업의 과보로 수 년, 아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그대가 지금 여기서 받는 것이다.”

 

(앙굴리말라경-Agulimāla sutta, 맛지마니까야 M86,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지금 받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따르면, “그 사람의 윤회의 여행이 지속되는 한, 지금 여기 행위가 이루어지는 현세에서 체험될 수 있는 과보, 다음 생에서 체험될 수 있는 과보, 다음 생에 이어지는 어떤 생에서 체험되는 과보가 있다. 앙굴리말라는 거룩한 경지(아라한)을 얻었으므로 뒤의 두 가지 과보를 피할 수 있었으나 첫 번째 과보는 피할 수 없었다. 거룩한 님은 거룩한 경지를 얻기 전에 행한 행위의 현재적인 과보를 감지하는데 민감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세간적 업장소멸

 

다음으로 세간적 업장소멸을 보면 소금덩이경를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물이 조금 밖에 없는 잔에다. 소금덩이를 넣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 잔에 있는 적은 물은 이 소금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그러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그 물잔속의 물이 조금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강가 강에다 소금 덩이를 넣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가강은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세존이시여, 그 강가강은 많은 물의 적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소금 덩이로는 마실 수 없이 짜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로나팔라경-Lonaphala Sutta-소금덩이경, 앙굿따라니까야 AN 3.99-대림스님역)

 

 

한 스푼 되는 소금덩이를 컵에 넣고 물을 부으면 짠 맛이 날 것이다. 그래서 마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갠지스강에 던져 버리면 어떻게 될까? 짜지 않게 되어 마실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제 까지 지은 죄악 보다 더 큰 선업, 강물 같은 선업을 지으면, 이전의 죄악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 한다. 이것이 세간적 또는 출세간적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죄의식을 조장하는 치사한 광고전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대원정사의 광고방송을 보면, 인간의 죄의식을  조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에서 기른 닭을 잡아 먹는 것, 길을 가다가 모르고 벌레를 죽인 것,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낙태한 것 등에 대하여 죄업으로 몰아 가는 것이다. 더구나 낙태아에 대하여 영가라는 칭호까지 붙여 가며 낙태한 이들의 죄의식을 자극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치사한 광고전략이라는 것이다.

 

 

2013-03-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