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그토록 바라던 오늘이건만
완연한 봄이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핀 것을 보니 확실히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그런 봄이 오기를 겨우내 기다렸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이다. 또 꽃이 피는 계절이다. 바람이 불어도 부드럽고 감미롭다. 그런 봄을 맞이하는 자들은 행운이다. 특히 인생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이 맞이 하는 봄은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마치 여행을 갔을 때 여행지를 바라 보며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하고 맞이 하는 심정과 같은 것이라 본다.
봄을 맞이 하면서 어느 블로그에 올려져 있는 문구가 강렬하게 떠오른다. 짤막한 잠언으로서 ‘그토록 바라던 오늘’이라는 문구가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키워드 검색을 하니 다음과 같은 완성된 문장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
단 하루면 인간적인 모든 것을
멸망시킬 수 있고 다시 소생시킬 수도 있다.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BC 406)
인용된 문구는 소포클레스의 경구라 알려져 있다.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오늘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또 다른 버전은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이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었다.(프랜시스 베이컨)”가 있고, “네가 헛되이 보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사람이 그렇게도 살고싶었던 내일이다.(칸트)”가 있다. 모두 오늘을 소중히 보내라는 명언이다. 그런데 소포클레스는 단 하루의 시간만 주어진다고 해도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오늘을 소중히 여겨라
오늘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도 찾을 수 있다. 소포클레스 보다 이전에 태어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1.
Atītaṃ nānvāgameyya, 아띠땅 난와가메이야
nappaṭikaṅkhe anāgataṃ; 납빠띠깐케 아나가땅
yadatītaṃ pahīnaṃ taṃ, 야다띠땅 빠히낭 땅
appattañca anāgataṃ. 압빳딴짜 아나가땅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2.
Paccuppannañca yo dhammaṃ, 빳쭙빤냔짜 요 담망
tattha tattha vipassati; 땃타 땃타 위빳사띠
asaṃhīraṃ asaṃkuppaṃ, 아상히랑 아상꾹빵
taṃ vidvā manubrūhaye. 땅 위드와 마누브루하예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3.
Ajjeva kiccamātappaṃ, 앗제와 낏짜마땁빵
ko jaññā maraṇaṃ suve; 꼬 잔냐 마라낭 수웨
na hi no saṅgaraṃ tena, 나 히 노 상가랑 떼나
mahāsenena maccunā. 마하세네나 맛쭈나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4.
Evaṃ vihāriṃ ātāpiṃ, 에왕 위하링 아따삥
ahorattamatanditaṃ; 아호랏따마딴디땅
taṃ ve bhaddekarattoti, 땅 웨 밧데까랏또띠
santo ācikkhate muni 산또 아찟카떼 무니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한 밤의 슬기로운 님
고요한 해탈의 님이라 부르네.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M 131, 전재성역)
1번 게송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라.(nānvāgameyya)’는 과거로‘되돌아 가지 말라’는 것이다. 각주에 따르면 ‘갈애(tanha)와 사견(ditthi) 때문에 과거로 되돌아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이다.
과거로 거슬러 가면 현재를 속박시킨다
이 문구에 대하여 경의 본문에 다음과 같이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가? 이와 같이
‘나는 과거에 이러한 물질을 갖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고,
‘나는 과거에 이러한 느낌을 갖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고,
‘나는 과거에 이러한 지각을 갖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고,
‘나는 과거에 이러한 형성을 갖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고,
‘나는 과거에 이러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이여,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M 131, 전재성역)
과거에 속박되는 것은 기억이다. 그러나 각주에 따르면 단지 기억하는 것만으로 현재를 속박시키는 것은 아니라 한다. 현재를 과거에 속박시키는 요인은 ‘갈애’와 ‘갈애와 연관된 사견’으로 보기 때문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도 일종의 갈애이기 때문에 기억을 통해서라기 보다 갈애에 대한 사유로서 과거의 체험을 되살림으로서 현재의 속박이 일어나는 것이라 한다.
미래를 바라면 현재를 속박시킨다
부처님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도 말고 미래도 바라지 말라고 하였다. 미래를 바라지 말라는 것은 어떤 뜻일까? 경의 본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미래를 바라는가? 이와 같이
‘나는 미래에 이러한 물질을 가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고,
‘나는 미래에 이러한 느낌을 가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고,
‘나는 미래에 이러한 지각을 가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고,
‘나는 미래에 이러한 형성을 가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고,
‘나는 미래에 이러한 의식을 가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승이여, 미래를 바란다.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M 131, 전재성역)
미래를 바라는 것 역시 과거를 거슬로 올라 가는 것과 동일하다. 현재를 미래에 속박시키는 요인은 갈애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미래를 바라면 현재를 속박시키는 것이다.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부처님은 과거와 미래에 대하여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yadatītaṃ pahīnaṃ taṃ, appattañca anāgataṃ)”라고 하였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일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tattha tattha vipassati)”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각각의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바로 일어나는 곳에서 통찰을 통해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관찰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다. 마음을 현재에 두고 관찰하면 현상이 무상, 고, 무아이듯이 과거나 미래의 일 역시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니 무아이고, 실체가 없는 것을 집착하니 괴로울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 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고 하였다.
지금 여기에서 통찰을 하면 탐욕 등에 정복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게송에 따르면 부처님은 항상 마음을 현재에 둘 것을 말씀 하셨다.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으면 괴롭기 때문이다. 마음을 현재 두면 마음이 과거나 미래에 가 있지 않기 때문에 괴롭지 않다. 그리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마음이 속박되지도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마음이 속박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은 마음을 항상 현재에 둘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도 알 수 있다.
[빠삐만]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 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시오.”
(삼바훌라경-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1,전재성님역)
악마 빠삐만이 수행승들에게 한 말이다. 경에 따르면 빠삐만이 한 성직자의 모습으로 분장하였다. 변장한 모습을 보면 “늙어서 서까래처럼 된 등을 구부리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라는 문구가 있다. 의성어 “콜록콜록”에 대하여 빠알리어 “ghurughurupassāsī”라고 표현 된 것이 눈에 띤다. 빠알리어 ‘구루구루(ghurughuru)’가 ‘콜록콜록’이라는 의성어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빠삐만은 수행자들에게 감각적 욕망을 즐기라고 권유한다. 젊었을 때 즐기지 않으면 언제 즐길 수 있느냐는 식으로 꼬드기고 있다. 그러면서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시오. (mā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itthāti.)"라고 말한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시오”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말라는 뜻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경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
“성직자여, 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우리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 아픔으로 가득찬 것이고, 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 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삼바훌라경-Sambahulasutta-많은 수행승들의 경, 상윳따니까야 S4:21,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시간에 매인다’는 것은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현재를 버린 다’는 말과 같다. 눈, 코, 귀 등으로 인한 오욕락에 빠져 있을 때 시간에 속박된 것이라 하는데 결과적으로 현재를 빼앗기는 것과 같다.
마음이 현재를 벗어나 있으면
그런데 악마 빠삐만은 머리카락이 검은 젊은 시절에 오욕락을 마음껏 즐기는 것이 시간에 매이고 좇는 것이라 하며 이런 생활이야말로 현재를 사는 것이라 하였다. 정반대의 말을 한 것이다. 이는 악마 빠삐만이 바라던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감각적 욕망에 매여 있을 때 시간이 묶이는 것은 물론 현재를 사는 것도 아니다. 감각적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시간에 매이게 되고 매인 것을 좇기 때문에 현재를 버리게 된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악마 빠삐만의 말에 넘어 가지 않았다. 그러자 악마 빠삐만은 “혀를 낼름거리고 이마에 삼지창 표시를 짓고 지팡이에 의지해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라고 경에 설명 되어 있다.
술집에서 맞는 아침햇살
누구나 한 번쯤 경험 할 수 있는 것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다. 동료들과 또는 거래처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시간이 잘 흘러 간다. 노래 등 여흥까지 곁들이면 더 빨리 흘러 간다. 그렇게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떠들다 보면 밤새도록 마시게 된다.
그렇게 술집에서 아침을 맞이 하였을 때, 더구나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았을 때 그 기분은 어떨까. 결코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것이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긴 하였지만 대가는 너무 크다. 돈과 시간과 정력의 낭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다음날 숙취로 인하여 일에 대한 생산성은 형편없이 떨어진다. 그래서 하루 종일 아무일도 못하게 된다.
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으려면
아까운 것은 시간이다. 그런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시간은 빨리 흘러간다. 그래서 현재를 살 수 없다. 그렇다면 갈애와 감각적 욕망에 따른 현재에 매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그렇다면, 어떻게 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는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의 많이 배운 거룩한 제자는 거룩한 이를 인정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가르침에 이끌리고, 참사람을 인정하고, 참사람을 알고, 참사람에 이끌려서,
1) 물질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가 물질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2) 느낌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가 느낌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3) 지각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가 지각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4) 형성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가 형성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5) 의식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가 의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현재의 상태에 정복되지 않는다.
(밧데까랏따경-Bhaddekaratta Sutta-한 밤의 슬기로운 님의 경, M 131, 전재성역)
현재의 상태에 정복 되는 것은 각주에 따르면 통찰부족이라 한다. 갈애나 그 갈애와 관계된 견해에 이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그런 갈애는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에 기인한다. 그래서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가 의식을 소유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어제 죽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오늘이건만
술을 좋아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술집에서 아침을 맞았을 때 가장 처참하다고 한다. 더구나 찬란한 아침햇살을 받았을 때 부끄럽고 창피한 느낌을 갖는 다고 한다. 일생을 술독에서 보낸 자들에게 있어서 시간은 거기에 매인 것이고 현재를 버린 것이나 다름 없다.
현재를 버린 결과는 어떤 것일까?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모아 놓은 재산도 없을 때 “고기 없는 연못에 사는 늙은 백로처럼, 죽어간다.(Dhp155)”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 또 “쏘아져 버려진 화살처럼, 누워서 옛날을 애도한다.(Dhp156)”라는 말처럼 방에서 숨만 쉬고 살아가는 삶을 살아 갈지 모른다. 모두 눈과 귀, 몸 등으로 형상, 소리, 감촉 등 온갖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 결과 시간에 매이고 그 시간을 좇고 현재를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현재는 어제 죽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오늘이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두 가지
사람들이 크게 착각 하는 것이 있다. 현재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현재행복론’은 여지 없이 깨진다. 부처님은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M38)”이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지금 행복할지라도 그 행복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일시적인 행복감을 느낄 뿐이다. 지금 여기서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ā)으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또 하나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설령 영원히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남들이 사는 기대수명대로 살 것처럼 생각한다.
기대수명은 문자 그대로 기대하는 수명이다. 어느 한 개인에게 보장된 수명이 아닌 것이다. 이는 수(壽)와 복(福)이 보장되는 천상의 존재와 달리 인간은 몸과 입과 마음으로 지은 업이 있기 때문에 재복과 수명이 보장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재난이 닥칠지 알 수 없고 또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들은 늘 언제 죽을지 몰라 전전 긍긍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게송에서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라고 분명히 말씀 하셨다.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이 인간들의 운명이다. 죽은 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오늘이지만 이 오늘이 지나 내일이 온다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ko jaññā maraṇaṃ suve)” 라고 말씀 하신것이다. 그래서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하라고 말씀 하셨다.
그래서일까 맛지마니까야 밧데까랏따경(M131)에서는 앞에 언급된 게송을 뒤에서 다시 한 번 더 반복하였다. 이런 케이스에 대하여 아직까지 빠알리니까야에서 보지 못하였다. 다시 게송을 반복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일어나는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
정복되지 않고 흔들림없이
그것을 알고 수행하라.
오늘 해야 할 일에 열중해야지
내일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대군을 거느린 죽음의 신
그에게 결코 굴복하지 말라.
이와 같이 열심히 밤낮으로
피곤을 모르고 수행하는 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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