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밟아도 일어난다” 분발하는 글쓰기
경멸하듯이 비아냥거리는 댓글
최근 댓글을 하나 받았다. 불선법을 조장하는 댓글은 다음과 같다.
경전 곳곳에,초기불교 스님들도 무명연행 행연무명을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스승없이 공부하면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얄팍한 앎 소지장이라.
(T네티즌)
핵심사항은 스승이 없다는 것이다. 스승없이 쓰는 글에 대하여 얄팍한 알음알이라고 경멸하듯이 비아냥거리는 댓글이다. 이와 같은 경멸성 글을 여러 차례 받았다. 공통적으로 S스님을 언급할 때이다. 특히 S스님의 법문에 대한 비판글을 올릴 때이다. 이루 미루어 보아 S스님과 인연이 있는 네티즌이라 보여 진다.
글을 쓰다보니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있다. 지난 2006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햇수로 8년째이다. 그동안 쓴 글을 보니 2,201개이다. 거의 매일 글을 쓰다시피 한 것이다. 모두 직접작성한 글이다.
처음 글을 쓸 때는 자신의 생각 위주로 글을 썼다. 그러다 보니 A4한장 채우기도 힘들었다. 경험과 지식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전을 근거로 글을 쓰기 시작 하였을 때 확장되기 시작 하였다. 그래서 요즘은 썼다 하면 열 페이지가 된다.
어떤 법우님은 열 페이지에 달하는 글 너무 양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설렁설렁 넘어간다고 한다. 그러나 쓰다 보니 그렇게 늘어난 것이다. 해가 가면 갈수록 글이 길어진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스님은 열페이지가 넘으면 지루해지기 때문에 가급적 열페이지 이내로 글을 쓰도록 충고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가급적 열페이지 이내로 작성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글을 쓰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글쟁이가 될 줄 꿈에도
글쓰기는 삶의 일부분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고 졸리면 잠을 자야 하듯이 글쓰기는 일상이다. 밥먹는 행위와 똑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글쟁이가 될 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누가 원고료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글쓰기에 집착하는 것일까?
글쟁이가 된 것은 직장을 잃고 나서부터이다. 사오정이 되어 더 이상 취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직장갖기를 포기 하였다. 그리고 나의 을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자그마한 임대사무실을 마련하였다.
일하는 시간 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다 보니 시간은 무한정 남아 돌았다. 할 것이라고는 인터넷을 가지고 노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블로그라는 것을 2005년에 만들었고, 남의 글을 열심히 올렸다. 물론 불교와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열심히 올린 글 중에 혜민스님의 칼럼도 있었다. 혜민스님이 하바드대학교에서 박사과정으로 있을 때 법보신문의 ‘세심청정’이라는 컬럼에 올린 글이었다. 그런 글쓰기를 보면서 글이라는 것이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남의 글만 열심히 올리다 보니 내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처음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 2006년도이다. 주로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꼈던 수필형식이다.
글이라는 것을 써 본적도 없고 배운적도 없는 공학도 출신이지만 누가 보건 말건 생각을 올렸다. 그렇게 글쓰기가 생활화 되자 어느 스님이 관심을 보였다. 인도유학 중에 있었던 H스님이다. 그 스님은 어느 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보내 주었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처음 접하는 초기불교 자료는 생소하였다. 듣도 보도 못한 내용으로 가득하였고 내용도 방대하여 읽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관심을 갖기 시작 하였다.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접하고 나서부터이다. 그때 부터 초기경전을 근거로 글쓰기를 시작 하였다.
분발할 때
요즘 글쓰기를 하는 주목적은 빠알리니까야 공부때문이다.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글쓰기 자체가 공부가 되는 것이다. 그런 글을 인터넷에 올린다. 경전에서 감명깊었던 내용을 발견하였을 때 이를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그럴 경우 다음과 같은 댓글을 받기도 한다.
연꽃님_()_
매일매일 블로그에 올라 온 글을 읽으며 저 자신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요
어려운 댓글을 읽으면서 공부가 무르익어 가는 분들만
연꽃님 카페를 공유하나ᆢ그리 생각했던 순간도 있었지요
저는 우연히 연꽃님 블러그를 방문하여 지난 날 올려놓은 글들을 하나하나 읽고 메모하는 복많은 불자임에 행복한 날을 보냅니다
오늘 주신 글은 스님들 법문을 들을 때 의심됐던 한 부분이었는데요 참으로 공부가 많이 되고있음을
또 한 번 감사인사 드립니다
향기나는 맑은 날 되시길 요ᆢ
(P법우님)
올린 글에 공감을 표현 하는 내용이다. 이런 댓글을 받기가 쉽지 않다. 글을 읽는 과정에서 감명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감명은 다름 아닌 경전에서 언급된 문구이다. 그런 문구를 소개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감사의 글을 남겨 주면 더욱 더 ‘분발’하게 된다.
또 하나의 분발요인
분발하게 하는 요인이 하나 더 있다. “불교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스승없이 공부하면 이런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얄팍한 앎 소지장이라.”와 같은 류의 댓글을 받았을 때이다. 특정 스님을 지칭하여 비판하였을 때 받는 글이다. 스님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학자도 아닌 것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투의 글이다. 그래서 “얄팍한 앎 소지장이라”라고 하였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글로 표현 하는 것이다.
헌법에 표현의 자유가 있듯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도를 많이 닦은 스님이 아니어도 글을 쓸 수 있고, 불교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어도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 할 수 있는 시대이다. 눈 있는 자, 귀 있는 자 누구라도 네트워크만 연결되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시대이다.
하지만 글쓰기는 특별한 자가 써야 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성인의 경지에도 올라 가지 않은 자가 글을 쓴다’느니, ‘생멸멸도 해 보지 못한 자가 생멸법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느니 하는 글을 받아 보았기 때문이다.
일부 문제있는 스님들을 비판하고 대승의 교학을 비판하고, 선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을 때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주류불교에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스승없이”라든가 “얄팍한 앎 소지장”과 같은 댓글을 받는데 이런 글을 받을수록 더욱 더 분발하게 한다.
스승이 없다고
인터넷에 쓰는 글은 한국의 주류불교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연히 비판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 판단의 잣대는 철저하게 빠알리니까야에 근거한다. 이는 다름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에 근거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빠알리 니까야의 내용과 다른 법문이나 글을 발견하였을 때 비판한다.
그러나 조사스님을 가르침을 따라는 조교(조사불교)입장에서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괘씸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스승이 없다’는 등의 표현과 ‘얄팍한 앎의 소지장’과 같은 말로 깍아내리고 글 같잖게 보는 것이다. 특히 스승이 없는 것을 강조 하고 있다.
스승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사자상승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조교와 달리 재가불자들은 스승을 갖기 힘들다. 생활인이기 때문에 경전공부하는 것 조차 힘들다. 그래서 멀리 스승을 찾아 가거나 일부로 시간을 내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또 천만이나 되는 불자들이 모두 스승을 갖는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불자들은 어디에 의지해야 하나?
그렇다면 스승이 없는 불자들은 어디에 의지해야 할까? 당연히 가르침에 의지해야 한다. 빠알리니까야를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Attadīpā bhikkhave,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
Attadīpānaṃ bhikkhave, viharataṃ attasaraṇānaṃ anaññasaraṇānaṃ dhammadīpānaṃ dhammasaraṇānaṃ anaññasaraṇānaṃ, yoniyeva upaparikkhitabbā1- "kiñjātikā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Kiṃpahotikā"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으며,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않는 다면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무엇을 원인으로 하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라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앗따디빠경-Attadīpa sutta-자신을 섬으로의 경- S22:43,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다. 의지할 것은 자신과 부처님의 가르침(Dhamma)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가르침에 의지하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빠알리니까야를 말한다. 따라서 모든 판단 기준은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른다.
스승이 없을 때
스승이 있긴 하지만 믿고 따를수 없을 때 어떻게 해야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이라도 있습니까?”
[장자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도 없습니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들이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을 때 가르침을 따르라고 하였다. 이는 다름아닌 빠알리니까야를 말한다.
스승을 구하려 한다면
스승이 없는 불자들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스승역할을 하는 것은 빠알리니까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스승을 구하려 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살펴 보라고 한다.
첫째, 어느 종파에 속해 있는지 알아야 한다.
둘째, 어느 경전을 의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셋째, 스승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넷째, 언행이 일치하는지 알아야 한다.
스승이 속해 있는 종파를 먼저 파악해야 하고, 다음으로 어떤 경전을 의지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고, 어느 스승으로 부터 가르침을 받았는지 알아야 하고, 그런 스승은 말과 행동이 일치 되는지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의 ‘언행일치’이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 다르다면 언행일치가 안되는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우리나라 불자들이 미얀마로 한 해 이천명씩이나 수행하러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스승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까지 전승되어온 교단이 있고, 그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 역시 전승되어 왔고, 또한 스승에서 스승으로 가르침이 전승되어 왔고, 더구나 언행일치가 되는 스승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M60)”라고 하여 가르침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한 것이다.
잡초는 밟아도 일어난다
스승이 없다고 하여 타박을 받았다. 그것도 S스님의 백일법문에 대한 내용을 비판하였다는 이유로 ‘불교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 ‘얄팍한 앎 소지장’과 같은 말을 들었다.
그렇다고 하여 위축되지 않는다. 자극을 받았다고 하여 절필한다거나, 기분이 좋으면 글을 쓰고 기분이 나쁘면 글을 쓰지 않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마치 배고프면 밥을 먹듯이 글쓰기를 한다. 그런 글쓰기는 철저하게 ‘비주류 B급 삼류’ 정신을 지향한다.
왜 ‘비주류 B급 삼류’인가? 조교처럼 주류불교와 다른 이야기를 쓰기 때문에 ‘비주류 글쓰기’이고, 스님도 학자도 아닌 것이 글을 쓰기 때문에 ‘B급 글쓰기’이고, 논문처럼 형식을 갖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삼류 글쓰기’이다.
‘비주류 B급 삼류’는 잡초와도 같다. 온실속의 화초가 아니라 비바람을 맞고 자라는 들풀인 것이다. 잡초와 같은 글쓰기에 대하여 '주류 A급 일류'측에서는 ‘잡인’ 또는 ‘잡놈’이라 볼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이것 저것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잡초’는 밟아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2013-04-0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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