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잘못에서도 두려움을, 연기(緣起)의 가르침이 주는 혜택
인터넷은 사이버세상이다. 일종의 가상공간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가상공간에서 사람들은 소통한다. 그래서 커뮤니티를 만들기도 하고 친구를 만들기도 한다.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 없이 가상공간을 들락거린다. 그러다보니 사실상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구별이 없어졌다. 인터넷에 접속하는 것은 이제 삶 그 자체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글쓰기를 하고 있다.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거의 매일 올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격려의 글도 받지만 비판을 받기도 한다. 심지어 비난이나 비방글을 접하기도 한다. 그런 비난과 비방, 욕설, 악성 댓글은 익명을 전제로 한 인터넷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어느 네티즌으로부터 글을 받았는데
어느 네티즌으로부터 글을 받았다. 아이디를 보니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성향을 알 수 있다. 오로지 익명으로 소통하는 가상공간에서 남겨진 글을 통하여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네티즌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폿타파다여! 나로서 말할 수 없는 것(무기)은『세계는 상주하는 것으로 이것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 (『디카 니카야』9.25)
(무상정등각)
단지 경전의 한 구절을 남겼을 뿐이다. 왜 이런 문구를 올렸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인사말을 곁들인 반론도 이니다. 어떤 의도로 올렸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인터넷글쓰기에 대한 은근한 불만의 표시로 보여진다.
경을 찾아 보았더니
남겨진 글을 보니 상주론에 대한 것이다. “세계는 상주하는 것으로 이것만이 진실이고”라고 표현 된 것으로 보아 부처님을 영원론자로 보고 있는 듯하다. 경전적 근거를 제시함으로 부처님을 상주론자, 영원론자라는 것을 은연중에 주장하는 것 같다.
경전적 근거로 보이는 단서는 ‘디카 니카야,9.25’라 하였다. 디가니까야로 보여지는데 9.25는 무슨 뜻일까? 더구나 부처님이 영원론을 주장하였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찾아 보기로 하였다.
근거로 삼은 9.25에 힌트를 얻었다. 디가니까야 아홉번 째 경을 찾아 보니 ‘뽓따빠다의 경(Poṭṭhapāda Sutta, M9)’이 있었다. 댓글의 “폿타파다여!”라 한 것과 일치 한다.
다음으로 25라는 숫자는 25번째 문단일 것으로 추즉하여 열어 보았다. 25번 째 문단에는 상주론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지 않는다. ‘긴 크기의 계행’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렇다면 위 문구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경을 처음부터 읽어 보기로 하였다.
뽓따빠다의 경(Poṭṭhapāda Sutta, M9)에서
빠알리 성전협회의 전재성박사 번역서인 디가니까야에 뽓따빠다의 경을 보았다. 총 38페이지 달하는 긴 길이의 경이다. 댓글과 유사한 부분을 찾아 보니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빠알리 원문과 함께 보면 다음과 같다.
[세존]
"Etampi kho poṭṭhapāda mayā abyākataṃ 'asassato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
뿟따빠다여, 나는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설하지 않습니다.
(Poṭṭhapāda Sutta- 뽓따빠다의 경, 디가니까야 D9, 전재성님역)
뿟따빠다가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까?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입니까.(Kiṃ pana bhante asassato loko idameva saccaṃ moghamaññanti?)”라는 질문에 부처님이 답한 내용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라고 천명하는 영원주의를 설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더구나 세계는 영원한 것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라고 천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 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질문은 말룽끼야뿟따 경에서 보여지는 형이상학적 질문과 같은 것이다.
아뱌까따(abyākata)
경에서 뿟따빠다는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까?” “세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입니까?” “세상은 유한 것입니까?” “영혼과 육체는 같은 것입니까?” “여래는 사후에 존재합니까” 등과 같은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을 한다. 그때 마다 부처님은 “~라고 설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가 ‘아뱌까따(abyākata)’이다. 아뱌까따에 대한 빠알리 사전을 찾아 보면 다음과 같다.
Abyākata : (=abyākata)(‹ pp. of a-vyākaroti)﹐【形】不解說的,無法斷言的,無記的
일본어판 사전이다. 아뱌까따에 대하여 ‘불설해적(不解說的)’이라 하였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뜻으로 ‘무기적(無記的)’이라는 뜻이 있다.
아뱌까따에 대하여 전재성박사의 빠알리-한글사전(개정판)을 찾아 보았다. Avyākata에 대하여 ‘1) 설명되지 않은 것, 2) 대답되지 않은 것. 3) 시설되지 않은 것. 4) 무규정, 비결정, 무기’라고 설명되어 있다. 무기(無記)는 십사무기라고 말할 때 그 무기를 말한다.
경전에 없는 내용
이와 같이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설명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댓글에 인용된 것처럼 부처님이 상주론을 인정한 것일까? 결코 아니다. 부처님이 ‘세계는 영원하다’는 등의 영원주의 견해를 빠알리 니까야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댓글에서는 “「폿타파다여! 나로서 말할 수 없는 것(무기)은『세계는 상주하는 것으로 이것만이 진실이고, 그 밖의 것은 허망하다』라는 것에 대해서이다.」”라고 함으로써 마치 부처님이 영원주의를 인정하는 것처럼 써 놓았다.
그렇다면 M네티즌은 왜 이와 같은 글을 올려 놓았을까? 그것은 네티즌의 성향에 기인한다. 평소 올린 댓글을 보면 단멸론적 시각을 가진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생과 윤회는 근본적으로 없다든가, 십이연기는 삼세양중인과가 아니라 현세에서 삶의 과정이라든가 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단멸론적 시각을 가진 네티즌이 부처님을 영원론자로 간주 하는 글을 올린 것이다.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모든 법이 나에 의해 단정되고 설해져 가르쳐졌다. 또한 포타파다여! 모든 법이 나에 의해 단정되지 않은 채로 설해져 가르쳐졌다. 포타파다여! 너에게 내가 단정하지 않은 채로 설해 가르친 법이란 무엇인가? 『세계는 常住(상주)이다』라는 것이, 폿타파다여!, 내가 단정하지 않은 채로 설해 가르친 법이다.」 (『디카 니카야』9.33)
(무상정등각)
뽓따빠다의 경을 근거로 하고 있다. 글을 읽어 보면 마치 부처님이 영원론을 설한 것처럼 보인다. 과연 부처님은 영원론을 주장하였을까? 이 부분과 관련 하여 전재성박사의 번역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 보아도 발견할 수 없었다.
부처님이 무기(無記)한 이유
그 대신 부처님은 뿟따빠다의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뽓따빠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왜 이러한 것을 설하지 않았습니까?”
[세존]
“뿟따빠다여, 이러한 것들은 유익한 것이 아니고 원리에 맞지 않고 청정한 삶을 시작하는데 맞지 않고, 싫어 하여 떠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사라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소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치지 위한 것도 아니고, 곧바로 알기 위한 것도 아니고, 올바로 깨닫기 위한 것도 아니고, 열반에 들기 위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에 대해 설하지 않습니다.”
(Poṭṭhapāda Sutta- 뽓따빠다의 경, 디가니까야 D9, 전재성님역)
이와 같이 부처님은 열 가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설하지 않은 이유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한 마디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은 희론에 불과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룽끼야뿟따경에서도 언급된 것 처럼 사성제를 설함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부처님이 영원론을 허용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댓글을 올린 자는 마치 부처님이 영원론을 허용한 것처럼 글을 올려 놓았다. 그것도 경전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내용을 올려 놓았다. 그런 내용이 한역 아함경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부처님의 말씀을 거두절미 하여 필요한 부분만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보수신문에서 따옴표 부분만 언급하여 정반대의 여론을 이끌어 내듯 부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만 언급하는 것이다. 주로 단멸론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비열한 수법이다. 그렇다면 단멸론적 견해는 왜 발생할까?
최악의 견해
빠알리니까야를 보면 배우지 못한 범부에 대한 언급이 많다. 주로 연기법을 모르는 일반사람들을 지칭한다. 연기법을 모르기 때문에 영원주의와 허무주의에서 벗어 나지 못하는 것으로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 대부분 신의 종교이다. 유일신교의 경우 영혼이 있어서 죽은 다음에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해서 나누는 삶, 도덕적 삶을 살아 가면 천국에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의 입장에서 본다면 삿된 견해에 지나지 않지만, 봉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단멸론적 견해를 가진 자들은 최악이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소멸됨으로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허무주의를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시하고 봉사하고 공덕을 쌓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또한 도덕적 삶을 살아 가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또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과를 부정한다. 그러다 보니 지금 여기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선업도 부정되고, 도덕적 가치도 부정되기 때문에 최악의 견해라 볼 수 있다.
마치 ‘일베충’처럼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는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함으로서 중도의 가르침을 펼치셨다. 그런데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들은 물론이고 불자들 마저 연기법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이 연기법임에도 불구하고 불자들이 연기법을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경전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는데, 경전을 보지 않으니 연기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단멸론자들의 견해에 넘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단멸론적 견해를 갖게 된다. 마치 일베가 무엇인지 알려고 일베사이트갔다가 ‘일베충’이 되는 것과 같다.
악용되고 있는 상호의존연기
단멸론자들이 단멸론의 근거로 활용하는 무기가 있다. 그것은 상호의존적 연기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것이 상호의존적 연기이다.
하지만 이런 연기방식은 부처님이 설한 연기에서 극히 부분적이다. 부처님이 설한 연기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와 같이 인과와 조건을 갖춘 연기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멸론자들이 주장하는 상호의존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이 사라진다”라고 매우 단순하다.
인과와 조건을 갖춘 부처님의 연기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왜 이렇게 단순한 방식의 연기만을 주장하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육체와 정신을 설명하기 적합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대하여 오온으로 분석하여 설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멸론자들은 오로지 육체와 정신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육체적 죽음과 함께 정신도 소멸되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게 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육체로, 저것이 정신으로 하여 “육체가 있으므로 정신이 있고, 육체가 사라지면 정신이 사라진다”라는 매우 단순한 논리이다.
인과와 조건성을 무시하고 상호의존성만 따로 떼어 내어 육체와 정신에 대하여 단멸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그런 상호의존적 연기는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후예들
상윳따니까야 인연상윳따(S12)에 부처님이 설한 연기의 가르침이 상세하게 설해져 있다. 따라서 누구나 연기법을 접할 수 있다. 조금만 읽어 보아도 단멸론들의 주장이 얼마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였는지 금방 드러난다.
인연상윳따에는 다양한 연기의 가르침이 있는데, 단멸론자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상호의존연기도 보인다. 그것은 도시의 경(S12:65)와 갈대묶음의 경(S12:67)에서 보여진다. 십이연기 연결고리에서 의식과 명색과의 관계에서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다른 연결고리와 달리 두 갈대 묶음을 예로 들어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나고”라고 설해져 있다.
이렇게 부처님이 십이연기 연결고리에서 유일하게 식과 명색의 관계에 대해서만 상호의존적 연기로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육체가 멸하면 정신도 함께 멸하여 남는 것이 없다는 단멸론자들의 주장과 정반대로 재생연결식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경을 읽어 보면 식과 명색의 관계에 대하여 상호의존적 연기로 설함으로서 내세와 윤회, 재생연결식이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의존적 연기에 대하여 단지 육체와 정신의 관계에 적용하여 단멸론으로 활용하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 외도들이나 다름 없다. 부처님 당시 유물론적 허무주의를 주장하였던 육사외도 중의 하나인 아지따 께사깜발린의 후예라 볼 수 있다.
오물장과 같은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는 단멸론자들
유물론자의 후예들인 단멸론자들에게 아무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려 주어도 먹혀 들어 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뽓따빠다의 경에서 본 각주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Smv.376에 따르면, 지금 유행자는 마치 마을의 돼지가 향수로 목욕하고 향료를 바르고 꽃다발을 장식하고 왕좌에 올라도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고, 서둘로 오물장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행복을 찾듯,부처님에 의해서 유연하고 미세한 세 가지 특징으로 조직된 가르침에 목욕하고 단장하고 장식하고 소멸론(nirodhakatha)이라는 왕좌에 앉아도 거기서 행복을 발견하지 못한다. 오물장과 같은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여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각주, 전재성박사)
유행자 뽓따빠다가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지각이 인간의 자아입니까? 아니면 지각과 자아는 다른 것입니까?”라고 떠보듯이 질문을 한 것에 대한 각주이다. 그런 뽓따빠다에 대하여 오물장의 돼지와 같다고 묘사하였다.
돼지는 오물장과 같은 돼지 우리에서 살아야 행복을 느낀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똥구덩이에서 사는 구더기를 아무리 깨끗한 곳에 갖다 놓아도 기어이 똥구덩이로 찾아 갈 것이다.
단멸론자들에게 부처님의 바른 연기법을 알려 주어도 이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오물장의 돼지 같고, 똥구덩이의 구더기와 같다. 상호의존연기에 의지하여 “육체가 멸하면 정신도 멸하여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는 오물장과 같은 자기의 견해에 집착하고 그런 이론에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멸론자는 오물장의 돼지, 똥구덩이 속의 구더기와 같다는 것이다.
상호의존만 강조하면
상윳따니까야 해제에 따르면 십이연기의 연결고리가 단지 선행적 요소가 후행적 요소를 야기하는 인과고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고리들 사이의 상호관계는 선형적이라기 보다 수반적이고 복합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연기고리의 기능은 상호의존적으로 지지하는 다양한 관계성을 내포한다고 하였다.
또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일으키는 필연적인 선행, 멀리 떨어진 과거의 형성이 새로운 삶의 의식을 산출하는 원격적인 효과를 내포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들을 병행적으로 검톨해 보면, 선택된 계열들이 과정의 복잡성을 강화 하는 방식으로 고리들이 조여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이런 연기는 형이상학적 법칙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감각적 체험을 통해 끊임없이 일어나는 과정이라 한다. 그래서 지각의 대상에서 위험을 보는 자에게는 갈애가 소멸하여 이어지는 일련의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연기는 괴로움의 소멸과 윤회의 종식으로 설명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기에 대하여 단지 상호의존적 연기로 보았을 때 연기법은 변질된다. 상호의존하여 서로가 서로를 창조하는 것으로 보는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와 단지 육체의 죽음이 정신적 소멸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는 ‘단멸론’이 대표적이다.
인과와 조건성이 상실되고 오로지 상호의존성만 강조 되는 연기는 필연적으로 ‘영원주의’로 귀결될 것이다. 또 상호의존연기에 대하여 육체와 정신에 적용하였을 때 ‘허무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부처님 이전으로 되돌아 가는 것과 똑 같다. 그런 모습을 오늘날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죄의식과 두려움을 주는 교회
오늘날 도시에서 눈에 밟히는 것이 교회십자가이다. 어디를 보아도 십자가를 부지기수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의 약 30% 가량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유일신을 믿는다. 자신의 창조주를 믿고 창조주에 기도하고 창조주를 찬탄하며 살아 간다. 그래서 교회에 매주 나가고 수입의 십분의 일은 십일조를 내며 살아 간다.
그런데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벌 받을 것 같고,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죄 짓는 것 같아 두려움에 떨며 사는 신자들이 많다고 한다. 성직자들이 교인들에게 죄의식과 두려움을 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진아와 영혼을 인정한 조교(祖敎)
산에 가면 절이 있다. 주로 사람이 살지 않는 심산유곡에 있다. 그런데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참나에 대하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영원히 변치 않는 본마음, 존재의 근원, 궁극적 실재가 있다고 한다. 이런 말은 빠알리 니까야에서 나오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부정된다. 불교는 역사적 맥락으로 보았을 때 영원주의로 대표되는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사불교라 불리우는 한국불교에서 종정스님부터 공공연하게 참나를 주장한다면 이는 브라만교 또는 힌두교의 또 다른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대한힌두교 OO종’이 될 것이다.
그런데 최근 불교방송 불교강좌 시간에 S선사는 영혼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다. 영혼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법문 하고 있는 이 자리에도 영가가 듣고 있다고 한다. 또 생전예수재라 하여 살아 있을 때 천도해애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영혼을 인정하는 것은 빠알리 니까야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나누어 자아가 없음을 수 없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을 인정한다면 한국불교는 기독교의 또 다른 버전이 될 것이다. ‘대한기독교 OO종’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조사불교는 참나를 주장함으로써 힌두화 되었고, 영혼을 인정함으로써 기독교화 되었다.
운명론을 믿는 사람들
한국 사회에서 불교와 기독교로 대표되는 메이져 종교를 믿는 인구는 절반이 약간 넘는다. 둘이 있으면 하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용을 들여다 보면 영원주의나 다름 없다.
그런데 한국사람들이 영원주의만 믿는 것이 아니다. 때에 따라 점도 보기 때문이다. 점집, 사주관상, 운명감정 등 운명과 관련하여 업을 삼고 있는 곳이 수도 없이 많고 수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전국민의 반 정도가 대상이라 한다. 이렇게 한국에서는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와 같이 운명론을 믿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사실이다.
밤문화를 즐기는 자들
도시의 밤하늘에 교회 십자가 보다 더 반짝이는 것이 있다. 유흥관련 업종이다. 술집, 안마시술소, 나이트클럽, 모텔 등 향락산업을 말한다. 이렇게 네온싸인이 불야성을 이루는 것은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밤문화가 발달하였다.
밤문화를 즐기는 사람이 있으면 밤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다. 전국민의 약 10%정도라 한다. 그런데 밤문화를 즐기는 사람들 대부분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단멸론적 사고 방식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즐기다가 살다 가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공통되는 현상
이와 같이 한국사회는 부처님이 출현 하기 이전 인도와 크게 다름이 없다. 이런 현상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공통되는 현상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세계 어느 곳이든지 영원주의, 운명주의, 허무주의 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출현으로 이와 같은 삿된 견해는 모두 논파 되었다. 연기법으로 논파 한 것이다. 브라만교와 육사외도를 논파한 이야기가 빠알리 니까야에 실려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들 수 있다.
일어나는 것 만 보이는 영원주의자
영원론자에게 세상은 영원한 것처럼 보인다. 일어나는 것 만 보이고 사라지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 멀리 보이는 산이 영원히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이 보는 것이다.
자아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생겨난 자아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처럼 생각한다. 영혼이 이몸 저몸으로 이동하여 마치 옷을 갈아 입듯이 몸을 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생겨난 것은 소멸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면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고 하였다. 이는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라는 연기법칙에 따른 것이다.
형성된 존재들이 무상하게 소멸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형성이 소멸하듯이 형성될 조건이 사라지면 소멸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기의 소멸을 보았을 때 ‘자아와 세계는 영원하다’는 영원주의는 거짓이 된다.
사라지는 것만 보이는 허무주의자
단멸론자에게 세상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본다. 육체의 죽음과 함께 정신도 해체되어 자아는 물론 세상도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으로 보는 극단적인 최악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영원주의의 경우 봉사하는 삶, 도덕적 삶에 대한 가치라도 있어서 건전하지만, 단멸론의 경우 업과 과보를 부정하고 도덕적 삶에 대한 가치를 부여 하지 않기 때문에 즐기는 삶을 살게 된다. 밤의 문화를 즐기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런 부류이다.
이런 단멸론자들에게 세상은 일어나는 것은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것만 보일 것이다. 전에 산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신도시 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볼 것 이다. 그리고 작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던 사람이 죽은 것을 알았을 때 역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볼 것이다. 이렇게 단멸론자들에게는 사라지는 것만 보인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법에 따르면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면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S12:15)”라고 하였다. 형성된 존재들이 업(kamma), 무명(avijja), 갈애(tanha) 때문에 끊임없이 생겨나는 현상을 통찰한다면, 현세의 존재에 더 이상 내세가 없다는 허무주의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라는 인과와 조건에 따른 연기법칙때문이다.
업이 남아 있는 한 결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이 되지 않는다. 지은 업을 조건으로 하여 다시 태어남이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단멸론자에게 낭패일 것이다. 이와 같이 연기의 생성을 보면 단멸론은 거짓이 된다.
연기의 가르침이 주는 혜택
이와 같이 부처님은 연기법으로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논파 하였고 그런 주장이 거짓임을 입증하였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연기법이 우리에게 오늘날 어떤 혜택을 주었을까?
연기법에 따라 영원주의가 거짓이 된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신을 두려워 하지도 않을 것이다. 또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고 하여 벌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십일조를 하지 않았다고 하여 죄의식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연기법으로 인하여 부처님은 우리들을 ‘신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준 것이다.
연기법에 따라 허무주의가 거짓이 된다면 더 이상 막행막식 하는 삶을 살아 가지 않을 것이다. 업과 과보로 인하여 반드시 다시 태어남을 가져 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죽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케세라세라(될대로 되어 버려라!)”라는 삿된 견해를 갖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소한 잘못에서도 두려움을 보고, 행위에서 두려움을 보고,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업과 업의 과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연기법으로 인하여 부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허무주의를 극복하게 해 준 것이다.
2013-04-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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