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미래의 승복, 어떤 모양의 가사(Kasaya)일까?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14. 13:33

 

 

미래의 승복, 어떤 모양의 가사(Kasaya)일까?

 

 

 

불교신문에 따르면 승복의 변화가 예상된다. 현재 우리나라 스님들이 입고 있는 승복은 율장정신에도 맞지 않고 시대에도 뒤떨어진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복식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에 기사에 따르면 승복은 조선시대 상민 내지 천민의 복장에 가깝다. (불교신문 2013-03-21)”라고 하였다. 그래서 조계종에 의제개혁특위가 만들어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의 모든 복장에 대하여 일년간 연구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승복은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까?

 

계율이 무너졌을 때

 

승복은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같은 것이다. 삭발한 모습과 함께 승복을 봄으로써 불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 출가자수행자의 모습은 항상 청정무소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최근 출가수행자들이 수난을 당하고 있다. 전철에서 극성스런 전도사의 타켓이 될 뿐만 아니라, 가게에서 출입금지를 당하고, 심지어 침을 내 뱉으며 재수 없다는 소리까지 듣는다고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것은 계율이 무너졌기 때문이라 본다.

 

일부 계행이 나쁜 자들에 의하여 저질러진 승려도박 과 이와 관련된 고발사건 등으로 국민들은 승가의 내부 모순과 위선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결과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인하여 최근 스님들이 거리에서 가게에서 수모들 당하고 있는 것이라 보여진다. 그렇다면 본래의 청정과 무소유의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부처님 법대로 사는 것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일부 계행이 나쁜 승려에 의하여 저질러진 행위가 사회 이슈화 되었을 때 누가 가장 큰 피해를 입을까? 길거리에서 전철에서 가게에서 스님들이 불편을 겪고 수모를 당하는 직접적인 피해도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피해는 고스란히 불자들에게 돌아 온다. 자신이 불자임을 마음 놓고 밝힐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이익마저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타종교인과 함께 어루러져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자신을 불자라고 밣혔을 때 승진이나 사업, 장사, 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다면 최대피해자는 불자들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스님들이 계행을 지켜 주고 청정한 삶을 살아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가사입기 운동

 

스님들이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가사입기 운동이다. 24시간 가사입기를 생활화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당시의 복식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실제로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삼의로 된 가사를 24시간 입고 지낸다고 한다. 그래서 삶과 수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다 보니 계행의 어김으로 인한 대형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부처님은 어떤 옷을 입고 있었을까?

 

우리나라 승가에서 비일비재로 있는 것이며 잊을 만하면 발생되는 범계행위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부처님의 법대로 사는 것이지만 가사입기를 생활화 하면 어느 정도 방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부처님의 제자임을 나타내는 가사를 항시 입고 있었을 때 감히 계를 어기는 행위가 자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떤 옷을 입고 있었을까?

상윳따니까야 ‘가사의 경(civarasutta, S16:11)’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깟싸빠]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저의 헝겁조각을 이어 만든 하의를 받아주십시오’

 

[세존]

‘깟싸빠여, 그대는 내가 입고 있는 삼베로 된 분소의를 받아라’

 

[깟싸빠]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입고 계신 삼베로 된 분소의를 삼가 받겠습니다.’

 

(찌와라경-varasutta- 가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11, 전재성님역)

 

 

이경은 부처님이 완전히 열반에 든 직후 깟사빠 존자의 회상이라 한다.  

 

깟사빠는 장자이었으나 출가의 삶을 동경하여 헝겁조작으로 이어 만든 하의를 입고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 하였다. 처음에는 이교의 가르침을 따랐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

 

그런 깟사빠에게 부처님은 나는 장로이거나 새내기이거나 중년이거나 그들에게 한 잘못에 대하여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일으키리라.( S16:11)”라는 마음으로 닦아야 함을 이야기 하였다.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침내 깨달을 얻게 되었을 때 깟사빠는 자신이 입고 있던 헝겁조각으로 기워 만든 하의를 벗어서 부처님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 하였다. 경에 표현 되어 있지만 앉지만 벌거숭이가 된 상태이었다고 본다.

 

깟사빠는 세존이시여, 오랜 세월 저에게 이익과 행복이 있도록 여기 앉으십시요.”라는 말과 함께 헝겁조각을 기워 만든 하의에 앉으시기를 요청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자신이 입고 있던 삼베로 된 분소의(糞掃衣)’를 깟사빠에게 주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은 비단으로 된 화려한 옷이 아니라 무덤가에 버려져 있는 헝겁을 기워 만든 분소의를 입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입은 분소의

 

그런 분소의는 어떤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뿐나(Punna)라고 하는 노예신분의 여인에게 씌어진, 무덤에 버려진 수의를 주어서 만든 것이다. 그 수의는 세존이 무덤에 들어 갔을 때에 수병모양으로 벌레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벌레를 제거하고 위대하고 고귀한 것으로 만들자 땅이 흔들리고 큰 소리가 나고 신들이 찬탄해마지 않았다. 세존은 이 분소의는 태어나면서 두타행을 하는 자가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깟싸빠가 제가 그것을 실천하겠다.’고 하고 분소의를 교환하자 땅이 바다에 이르기 까지 흔들리고 큰소리가 났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와 같이 분소의는 부처님이 입었고, 이 분소의를 두타제일 깟사빠존자에게 물려 주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가 후대 선불교에서 법이 전등된 근거로 되는 경으로 삼고 있다.

 

선종의 제1, 마하가섭(摩訶迦葉)

 

그래서 중국 송나라 시대 도원(道原)이 지은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 따르면 역대 조사의 선종계보가 실려 있는데, 깟사빠 존자를 선종의 제1조로 보고 있다. 전등록에 실려 있는 선종계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법계보

 

7불(七佛)과 인도(印度)의 조사(祖師)

 

 7불(七佛)

 비바시불(毘婆尸佛)
 시가불(
尸棄佛)
 비사부불(
毘舍浮佛)
 구류손불(
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
拘那含牟尼佛)
 가섭불(
迦葉佛)
 석가모니불(
釋迦牟尼佛)

 

인도(印度) 15조

 

제1조 마하가섭(摩訶迦葉)
 제2조 아난(
阿難) (곁가지로 末田底迦가 있다. 기록이 없다. 원주)
 제3조 상나화수(
商那和脩)
 제4조 우바국다(
優婆?)
 제5조 제다가(
提多迦)
 제6조 미차가(
彌遮迦)
 제7조 바수밀(
婆須蜜)
 제8조 불타난제(
佛陀難提)
 제9조 복타밀다(
蜜多)
 제10조 협존자(
脇尊者)
 제11조 부나야사(
富那夜奢)
 제12조 마명대사(
馬鳴大師)
 제13조 가비마라(
迦毘摩羅)
 제14조 용수존자(
龍樹尊者)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婆)
 제16조 라후라다(
羅多)
제17조 승가난제(
僧伽難提)
제18조 가야사다(
伽耶舍多)
제19조 구마라다(
鳩摩羅多)
제20조 사야다(
夜多)
제21조 바수반두(
婆修盤頭)
제22조 마나라(
摩拏羅)
제23조 학륵나(
鶴勒那)
제24조 사자존자(
師子尊者)

제25조 바사사다(婆舍斯多)
제26조 불여밀다(
不如密多)
제27조 반야다라(
般若多羅)

 

중국(中國)의 5조와 그 법을 이은 25인

 

제28조 보리달마(菩提達磨)

제29조 혜가대사(慧可大師)

제30조 승찬대사(僧璨大師)
제31조 도신대사(
道信大師)

제32조 홍인대사(弘忍大師)

제33조 혜능대사(慧能大師)

 

(경덕전등록의 선종계보)

 

 

이와 같이 선종에서는 과거칠불부터 시작하여 스승과 제자의 사자상승 (師資相乘)의 원칙에 따라 법이 전승되어 왔음을 계보를 통하여 밝히고 있다. 그런 법은 문자와 언어로 알 수 없고 오로지 부처님의 마음과 뜻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승과 제자사이에 마음과 마음으로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전승되어 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부처님이 깟사빠에게 전승한 것은 무엇일까?

 

선종계보에 따르면 마하가섭이 선종1조로 되어 있다. 그런 마하가섭이 가사의 경에 등장하는 깟사빠 존자이다. 깟사빠가 부처님으로부터 분소의를 전수 받은 것을 선종에서는 크게 의미를 두어 선종의 계보를 만드는 근거로 활용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경에서 부처님은 깟사빠에게 분소의를 물려 주면서 어떤 말을 하였을까? 선종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에서 마음으로 법을 전승한 것일까? 경에 따르면 깟사빠는 다음과 같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한다.

 

 

[깟싸빠]

벗이여, 그래서 나는 부드러운 헝겁조각을 이어 만든 하의를 세존께 드리고 나 또한 세존께서 입고 계셨던 삼베로 된 분소의를 입었다.

벗이여, 만약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 대해 ‘세존의 아들로 그 분의 입에서 태어났고 가르침에서 태어났으며 가르침에 의해 형성되었고 가르침의 상속자이며 삼베로 된 분소의를 입었다’ 고 말한다면, 그는 나에 대해 ‘세존의 아들로 그분의 입에서 태어났고 가르침에서 태어났으며 가르침에 의해 형성되었고 가르침의 상속자이며 삼베로 된 분소의를 입었다’ 고 말해야 할 것이다.

 

(찌와라경-varasutta- 가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11, 전재성님역)

 

 

여기서 벗이여라고 한 것은 아난다 존자를 지칭한 것이다. 경에 따르면 아난다 존자는 머리는 허였게 새였지만 깟사빠 존자가 애송이라고 부르고 있다.  

 

깟사빠존자는 분소의를 받은 사실에 대하여 가르침의 상속자(dhammadāyo)’라고 하였다. 그 가르침이란 무엇일까?

 

각주에 따르면 가르침의 상속자는 아홉가지의 출세간적 상태인 구차제정(九次第定)의 유산을 상속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구차제정(九次第定)이란 무엇일까? 이는 경에서 이어서 설명되어 있다. 그것은 첫 번째 선정에서부터 열반의 상태인 상수멸(想受滅)에 이르기 까지 아홉가지 선정의 단계를 말한다.

 

상수멸(想受滅)은 어떤 것일까?

 

깟사빠가 가르침을 상속받은 것은 선정상태 뿐만 아니라 열반에 이르는 아홉가지 출세간적 가르침을 상속받은 상속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열반의 상태인 상수멸은 어떤 것일까? 경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벗이여,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를 완전히 뛰어넘어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듭니다.

 

(찌와라경-varasutta- 가사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11, 전재성님역)

 

 

비상비비상처정(nevasaññānāsaññāyatana)을 뛰어 넘어 지각(saññā)과 느낌(vedana)이 소멸된 상태가 상수멸(saññāvedayitanirodha)이라 한다.

 

부처님이 출가하여 알라라 깔라마로부터 무소유처정을 배우고, 웃따까 라마뿟따로부터 비상비비상처정까지 배웠지만 상수멸은 이를 뛰어 넘는다. 부처님이 발견한 경지인 열반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경지에 이르는 길, 아홉가지 출세간적 가르침의 길을 깟사빠가 상속받은 것이다.

 

말로, 언변으로 견성성불을 인가하거나 천명

 

하지만 선종에서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스승과 제자사이에 법이 전승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스승이 제자의 깨달은 상태를 말을 통하여 점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에 대한 비판도 있다. 불교저널에 연재 되어 있는 조준호 교수는 다음과 같이 비판 하였다.

 

 

반면에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래되어 번뇌단절을 언어와 대화로 증명하려는 선문답이 전개되었다. 폐해로 문자선이나 구두선이라는 말까지 나오지 않았는가! 입으로 나와 너 모두를 속일 수 있는 법거량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치적으로는 막힘없이 불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걸림없는 선도리를 설하며 활달자재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아직 번뇌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다. 말로는 걸림이 없고 막힘이 없는 깨달음을 자재롭게 펼 칠 수도 있었다. 밝은 대낮에는 깨달음을 논하고 어두운 밤에는 다시 번뇌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나아가 경계에 부딪쳐 예사로 화를 낼 수도 있다. 말로, 언변으로, 견해로 번뇌단절의 견성성불을 인가하거나 천명하기도 하였다. 선문답에 있어 유() () 유무(有無) 비유비무(非有非無) 또는 공() () ()과 같은 중도논리로 번뇌단절의 견성성불을 증명하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깨달음이, 번뇌단절이 마치 논리구조에서 있는 것인 양 오해될 위험소지가 있다. 이는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 따로 몸 따로 인 공리공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만약 번뇌단절과 깨달음이 신증과 별개로 견해와 논리에 있다면!

더 나아가서 이러한 분위기는 극단적으로 깨달으면 파계의 무애행(無碍行)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심지어는 계율의 잣대로도 들이댈 수 없다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조준호 교수, (2) 초기불교, 불교사에 있어 위상과 중요성, 불교저널 2012-12-07)

 

 

스승과 제자 사이로 이어지는 법맥의 전승이 자칫 말장난으로 그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다. 깨달음과 점검이라는 것이 “말로, 언변으로, 견해로 번뇌단절의 견성성불을 인가하거나 천명하기도 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 정신적으로 청정하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말이라는 도구로 점검이 이루어지고 말이라는 도구러서 깨달음음 인가하였을 때 얼마나 객관성을 갖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몸따로 마음따로이고, 낮에 한 말과 밤에 행동하는 것이 다른 언행불일치를 지적하고 있다.

 

어떤 모양의 가사일까?

 

선종에서는 과거 칠불부터 시작하여 선종의 1조라 불리우는 마하가섭으로부터 33조 혜능대사에 이르기 까지 부처님의 진실한 법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조교(조사불교)에서는 상수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가사를 전달 받아 법맥이 이어 온 것은 강조하지만 도중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실종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실종되고 형식만 남은 한국불교에 새로운 바람이 일어 나고 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조계종에서 추진 중인 승복의 변화이다. 전하는 기사에 따르면 율장정신에 따라 새로운 가사가 연구된다고 한다. 또 시대에 맞게 현대화 할 것이라 한다.

 

율장에 위배 되지 않고 현시대에 뒤쳐지지 않는 가사가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율장에 따르면 친척이 아닌 남자나 여성 재가자가 비구에게 많은 가사를 보시해도 그는 많아야 위가사와 아래 가사만 받을 수 있다. 그 이상 받으면 포기하고 참회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위가사와 아래가사 두 개만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추울 때 입는 중복가사로 불리우는 대가사까지 합하면 세 벌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 벌이면 족하다고 하여 삼의일발이라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그런 가사의 모습을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볼 수 있다.

 

 

 

 

 

사진 : Dhammapada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가사를 연구한다면 어떤 모양일까? 테라와다식일까 티벳불교식일까 아니면 전혀 새로운 방식일까? 설령 가사를 새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보수적인 승단에서 이를 수용할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현 승복은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불교, 조사불교에서 벗어나 부처님 당시 불교, 자주불교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바꾸어져야 한다. 불자들은 그런 가사를 보고 싶다. 재가자는 미래의 출가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몇 년후 우리나라에서도 부처님 당시 입었던 가사를 걸친 빅쿠(Bhikkhu)들을 볼 수 있을까?

 

 

 

2013-04-1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