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가인가 이익단체인가? 율장의 새가사(袈裟)와 함께 제2 빅쿠(Bhikkhu)선언을
좋은 문구가 있으면 메모해 놓는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파일을 하나 만들어 놓고 틈틈히 메모해 놓는다. 그래서 글을 쓸 때 곧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주로 경전에서 볼 수 있는 정형구나 게송 등이다. 또 눈에 띄는 기사가 있으면 역시 메모해 놓는다. 당장 글에 적용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써 먹기 위해서이다.
승복이 바뀐다는데
불교신문사이트에서 눈에 띄지 않는 짤막한 기사를 발견하였다. 몇 줄 되지 않지만 글을 쓸 때 참고 하기 위하여 메모해 놓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스님의 상징인 승복에 변화가 예상된다.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향적스님)은 오늘(3월20일) 제193회 중앙종회 임시회에서 의제개혁특별위원회 구성을 합의했다.
제정스님은 “현재 한국불교에서의 승복은 조선시대 상민 내지 천민의 복장에 가깝다”며 “부처님 율장정신과도 위배되며 시대적 복식에도 뒤떨어진 스님들의 의복을 개혁하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라고 말했다. 이어 “수행자다운 의제를 제대로 정비해 위의에 맞고 신심을 증장시킬 수 있는 의제개혁의 연구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의제개혁특위 위원장으로는 제정스님이 선출됐다. 특위에는 비구, 비구니, 사미, 사미니의 모든 의제를 연구하게 된다. 활동인원은 15인 이내며, 기간은 1년이다.
(승복 모양 현대적으로 바뀌나, 불교신문 2013-03-21)
현재 스님들이 입고 있는 승복은 조선시대 상민 또는 천민 복장에 가깝다고 한다. 바꾸는 이유는 율장정신에 위배되고 현시대와도 맞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승복이 어떤 모양으로 바뀔지 알 수 없지만 하나의 단서를 잡을 수 있다면 ‘율장정신’을 들 수 있다. 아마도 율장에 승복에 대한 내용이 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조선시대 상민이나 천민의 복장 가깝다고
우리나라에서 스님의 이미지는 정해져 있다.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과 달리 가장 차별화 되는 것이 ‘삭발’이고, 그 다음으로 ‘회색승복’이다. 그래서 쉽게 구별된다. 이런 스님들의 스님들의 이미지가 고착화 되어 있기 때문에 누구나 머리를 삭발하고 승복을 입으면 마치 스님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승복의 특징은 회색이다. 또 조선시대 전통복식이다. 그런 승복은 한 종류가 아니라 매우 다양하다. 지난 3월 불교박람회장에서 본 승복은 다음 사진과 같다.
승복매장에서 본 승복의 종류는 매우 많다. 도포형도 있고, 조끼형도 있고, 저고리에 고름이 있는 형도 있고, 앞단추 형도 있다. 또 가방도 있고 모자도 볼 수 있다. 공통적으로 회색이고 전통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런 복식에 대하여 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한국불교에서의 승복은 조선시대 상민 내지 천민의 복장에 가깝다.”고 하였다.
세 나라 복식의 혼합형
하지만 도포스타일을 보면 양반이나 상류층 복식에 가깝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따르면 우리나라 승복은 세 나라 복식이 혼합형이라 한다. 가장 겉에 걸치는 가사는 ‘인도스타일’이고, 소매가 긴 도포는 ‘중국스타일’이고, 도포 안의 한복은 ‘한국스타일’이라 한다. 이렇게 우리나라 스님들의 복장은 삼개국의 복식이 혼합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필요할 때만 입는 가사
그런데 한국불교 스님들은 가사를 특별한 때만 입는 다는 것이다. 법회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잠깐 입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를 상징하는 가사를 늘 입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만 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을 볼 때 대부분 가사없이 승복만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사를 입는 다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임을 상징한다. 그리고 계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사를 입은 상태에서 음주을 한다거나 도박을 한다거나 계를 어기는 행위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의 스님들은 평소에 가사를 입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어떤 일이든지 하는 것 같다.
붉은 색 계통의 가사를 수하지 않은 스님들의 겉 모습은 일반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단지 삭발하였다는 것이 다를 뿐 일반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을 다 하는 것 같다. 이사장이나 사장 같은 직함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코메디 같은 출가와 재가의 파워게임
최근 불교방송사태가 점입가경이다. 마치 출가자와 재가자의 파워게임을 보는 것 같다. 불교방송 이사장 영담스님과 이채원사장 측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영담스님은 비리와 횡령 등 각종 의혹으로 인하여 BBS노조에 의하여 검찰에 고발된 상태이다. 불교 NGO 단체에서도 자신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방송 이사들은 이사장의 해임을 결의하였다. 그런데 조계종 출신 스님 이사들이 갑자기 돌아선 것이다. 불교닷컴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한다.
조계종 이사 스님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재가이사들이 주장하는 영담 이사장 스님에 대한 각종 비위혐의에 대해 영담 스님의 소명을 들었다"면서 "그 결과 영담 스님의 비위혐의는 모두 사실이 아님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조계종 이사스님들 12일 이사회 불참 선언…“이사장 검찰 고발은 스님 모독”, 불교닷컴 2013-04-11)
현재 불교방송 이사는 16명이다. 10명이 재가이사이고 6명이 조계종 스님이사들이다. 6명의 조계종스님이사들이 영담스님과 면담후 입장이 바뀐 것이다. 영담스님의 말을 들어 보니 재가측에서 주장하는 것이 모두 사실무근 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재가측에서 영담스님을 검찰에 고발한 것은 ‘스님모독’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승가인가 이익단체인가
이 기사를 접하고 하나의 희극을 보는 것 같았다. 일련의 과정이 마치 코메디 프로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세상과 가족과 인연을 끊고 출가한 스님들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와 세속사람들이 하는 행태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록이 동색이고, 가재는 게편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비리와 횡령 등 각종 의혹에 쌓여 있는 이 시대의 대표적 정치승인 이사장을 옹호하는 조계종 스님이사들을 보면 승가가 하나의 ‘이익단체’ 내지 ‘이익집단’에 지나지 않음을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의 권리와 이익이 침해 당했다고 생각하였을 때 똘똘 뭉치는 것이다. 그리고 전가의 보도 처럼 써 먹는 것이 ‘승가모독’이다.
코메디 1탄
이번 불교방송 사태를 보면서 승가에 대하여, 스님들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있다. 불교방송에서 방송프로를 진행하고 있는 성전스님은 이채원 사장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만 까닥했다는 이유로 승가모독이라 몰아 부쳤다. 급기야 성전스님의 주도하에 불교방송에서 프로를 맡고 있던 스님들이 재가의 사장을 향하여 파업을 하였다. 신도들을 동원한 이른바 파업법회이다. 그래서 모두 방송을 중단 한 것이다.
코메디 2탄
그런데 영담이사장이 이채원 사장을 해임하고 일방적으로 선문스님을 임명하였다. 스님들이 못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이사장, 이사는 물론 사장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사장의 파워는 왕정시대 왕권 못지 않게 강력한 것인데, 이런 사장을 스님이 맡은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임명한 선문스님사장의 지시에 의하여 파업을 벌였던 방송스타스님들이 방송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선문스님사장은 법적효력이 없는 상태이다. 이사회의 승인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파업을 주도하였던 성전스님은 방송복귀를 선언하였다. 이에 대한 코메디 같은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이채원 사장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돌연 방송중단까지 선언했던 성전 스님이 이번에는 생방송을 하고 있던 아나운서를 내쫓고 방송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비난이 일고 있다. 특히 이 아나운서는 이미 오프닝멘트까지 진행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이번 일은 유례없는 방송사고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불교방송 관계자에 따르면 성전 스님은 4월8일 오전 9시5분경 자신의 일방적인 방송중단 선언으로 대신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던 여자 아나운서를 내보내고 방송진행자석에 앉았다.
불교방송 직원들은 성전 스님에게 “진행자 교체를 공식적으로 전달받은 바 없다. 방송진행을 고집한다면 스님들은 물론 담당PD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성전 스님은 “법리적 판단이 끝나면 가차 없이 가겠다”며 방송을 강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문태준 프로그램 담당PD와 박상필 편성제작국장간의 고성이 오가는 등 일촉즉발의 험악한 분위기도 연출됐다. 그러나 대형 방송 사고를 염려한 박 국장이 한발 물러나면서 더 이상의 방송 사고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임에도 성전 스님은 태연스럽게 방송을 진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 성전스님, 생방송 도중 아나운서 내쫓고 방송, 법보신문 2013-04-08)
더구나 BBS 노조에 따르면 통해 "불교방송 노동조합원을 비롯한 직원들은 8일 아침 방송 스튜디오 복도에서 성전스님 앞에 무릎 꿇고 '호소'의 삼배를 올렸다"라 하였다. 이렇게 임의적인 방송 진행 시도를 숙고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 에도 불구하고 성전스님은 방송을 진행 중이던 아나운서를 밀어내고 스튜디오를 무단으로 장악하였다는 것이다.
▲ BBS 사옥 17층 복도 양쪽으로 도열해 합장을 하고 성전스님에게 3배를 드리는 불교방송 직원들의 모습 ⓒBBS 노조
사진: 미디어스
성전스님의 안해무인격의 행위를 보면 한 방송스타 스님의 몰락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떤 멘트를 날렸을까? 불교방송 사이트에 들어가 보았다. 다시보기 기능이 없어서 들을 수 없다. 그대신 진행자는 장수연 아나운서로 되어 있다.
코메디는 오늘도 내일도 계속된다
영담스님이 일방적으로 임명한 불교방송 사장 선문스님은 법원으로부터 효력이 정지 되었다고 보도 되었다. 그렇다면 여자 아나운서를 내쫒고 그 자리에 앉아 일방적으로 방송을 하였다던 성전스님은 앞으로도 계속 방송을 하는 것일까?
불교방송 사태를 보면 어제도 오늘도 코메디는 계속 진행 되고 있다. 앞으로도 새로운 코메디는 계속 될 것이다. 그래서 불교방송에서 벌어지고 있는 코메디는 현재진행형이다.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어질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코메디에 항상 스님이 개입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스님이라는 동류의식에 똘똘 뭉쳐 권리와 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 보인다. 그런 스님들의 입에서 늘 나오는 말은 ‘승가모독’과 ‘스님모독’이다.
승가모독과 스님모독
성전스님은 이채원 사장이 고개만 까닥이었다고 해서 승가모독이라 하였다. 불교방송 스님이사들은 영담스님을 검찰에 고발한 노조에 대하여 스님모독이라 하였다. 승가모독과 스님모독은 다른 것일까?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을 일반적으로 ‘승보’로 보고 있다. 승보의 개념이 승가임에도 불구하고 개별 스님에 대해서도 승보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을 불, 법, 승 할 때 삼보로 보기 때문에 삼배의 예를 올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나이가 어리거나 법랍이 많거나 간에 스님이면 모두 승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팔순 노보살도 나이 어린 스님에게 삼배를 올린다. 따라서 스님모독은 승가모독과 동의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리 비리와 횡령혐의 등 죄를 많이 저질렀어도 스님을 고발한 행위에 대하여 스님모독으로 보는 것은 동류의식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집단은 더 이상 승가집단이 아니라 이익집단의 다름이 아니다. 대체 스님들은 무엇 때문에 출가 하였을까?
스님들은 무엇 때문에 출가 하였을까?
빠알리 니까야를 접하면서 우리나라 스님들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초기경전에 묘사된 빅쿠는 청정범행을 닦고 무소유를 실천하는 이상적인 수행자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가자와 달리 수백개 달하는 계를 지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빅쿠(Bhikkhu)’라 한다.
디가니까야를 보면 계에 대한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만냐팔라경(Sāmaññaphala Sutta, D2, 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에 따르면,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부처님의 제자는 의무계율(빠띠목카)을 수호하고,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식카빠다니)을 받아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의무계율이란 빅쿠가 될 때 받아 지켜야 할 250계를 말하고, 학습계율은 의무계율을 포함하여 사소한 계율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계율을 말한다.
경에 실려 있는 계행의 다발을 보면 현재 불교방송사태에 개입되어 있는 스님들은 모두 ‘아웃(OUT)’이다. 더 이상 부처님의 제자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가사를 입지 않은 스님들
기사에 볼 수 있는 스님들의 사진을 보면 한결같이 가사를 걸치고 있지 않다. 조선시대 상민이나 천민이 입었다는 회색승복차림이다. 스님모독이라고 규정한 여섯 명의 이사들이 입고 있는 복식도 그렇고, 승가모독이라고 발언한 방송스타스님의 승복 역시 그렇다. 이 모두가 가사를 입지 않아서 발생된 문제가 아닐까?
테라와다 빅쿠의 가사
테라와다 비구들은 하루 종일 가사를 입고 지낸다고 한다. 가사가 평상복이고, 외출복이고, 잠옷이라 한다. 세 벌로 이루어진 가사이외 다른 옷을 입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가사는 부처님 당시부터 전승되어 온 것인데 그림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아랫가사(antaravāsaka), 윗가사 (uttarāsaṅga), 중복가사(saṅghāṭi)
출처 : http://www.payer.de/mahavamsa/chronik32.htm
이와 같은 가사를 입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름 아닌 부처님 방식대로 살겠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로 살기로 하였기 때문에 24시간 입는 것이다.
가사는 법당용인가?
그러나 한국불교에서 보는 스님들의 가사를 보면 법당용인 것 같다. 법당에서 예불드릴때나 가사를 입고 법당을 벗어나면 벗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따로 생활따로’가 되기 쉬운 것이다. 가사를 벗어 버린 상태에서는 재가자들의 옷차림과 다름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스님들이 불화나 탱화 등 그림을 그리기에 몰두하고, 노래를 불러 콘서트를 하거나 음반을 출판하고, 사찰음식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추구하는 명목으로 음식개발에 열중하는 것 등은 가사를 입지 않고 승복만 입은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승려도박이나 룸살롱출입, 은처의혹 등 온갖 부정적인 현상의 원인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우라나라 스님들은 수행따로 삶따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 모두가 ‘가사입기 생활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라고 말하면 무리 있는 주장일까?
하지만 항상 24시간 가사를 입고 있는 테라와다 빅쿠들은 수행과 삶이 ‘따로’가 아니라 한다. 삶이 수행이고, 수행이 삶이라 한다. 삶과 수행이 일치 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서 볼 수 있는 낯뜨거운 스캔들을 볼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가사입기와 계율지키기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동아시아 가사의 특징
현재 세계 불교권은 동남아시아의 테라와다불교권, 동아시아의 대승불교권, 티벳의 금강승불교권으로 크게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이중 부처님당시 복식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테라와다불교권’과 ‘티벳불교권’이다. 중국, 한국, 일본 , 대만 등 동아시아 대승불교권 승복은 ‘중국복식’이다. 고대 중국 도교의 도사들이 입었다는 긴 도포를 말한다.
티벳가사를 보면
그런데 티벳의 경우 동아시아복식을 따르지 않았다. 테라와다 방식으로 붉은 승복을 입고 있다. 달라이마라 존자가 입고 있는 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퇴화되어 흔적만 남아 있는 일본가사
일본의 경우 우리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때만 가사를 입는다. 그것도 가사가 목에 두르는 형태로 되어 있어서 마치 퇴화된 흔적을 보는 것 같다.
일본불교에 승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일본에서는 가사가 퇴화되고 심지어 사라졌을까? 종파불교를 특징으로 하는 일본불교에서 주류불교는 ‘정토계’와 ‘일련계’이다. 정토계가 25%이고, 일련계가 20%이어서 두 종파를 합하면 절반에 가깝다.
그런데 일본에 있어서 주류불교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와 거리가 멀다. 토착화된 일본불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처와 식육을 허용하고 있는데 이런 제도는 계율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일본 주류불교에 대하여 일본어판 위키백과에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四分律
中国、韓国、日本の仏教において、歴史的に広く用いられてきた律である。比丘は二百五十戒を遵守する。 現状において、日本では完全に僧伽が消滅しているため、律宗などで儀式上の必要から、形式的に受戒する場合、中国などから戒師を招来する必要がある。
사분률
중국, 한국, 일본의 불교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널리 사용되어 온 율이 있다. 비구는 250계를 준수하는 것이다. 현상에 있어서 일본에서는 완전히 승가가 소멸되어 있기 때문에 율종에서는 의식상의 필요에 따라 형식적으로 수계하는 경우 중국등 으로부터 계사를 초빙하여 할 필요가 있다.
(僧, 일본어 위키피디아)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일본불교에 승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메이지유신시대의 폐불훼석(廃仏毀釈)에 따른다. 메이지신정부의 부국강병정책에 따라 육식과 대처와 모발을 허용함 (肉食妻帯蓄髪勝手たるべし)에 따라 승가가 사라진 것이다.
일본의 재가승가
일본불교는 대처식육모발제도에 따라 계율이 사라졌다. 다만 형해화 (形骸化)되고 의례만 남은 불교가 된 것이다. 그래서 원래 승가의 의미와 정반대로 승려는 직업화되고 세습화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주류불교에서는 더 이상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승보가 없다. 이보만 있는 것이다. 그런 일본불교는 스스로 ‘재가승가’라 한다.
계율이 사라진 일본불교에서는 율사가 없기 때문에 외국에서 율사를 초청한다고 한다. 수계를 받을 때 중국에서 율사를 초청하여 의식을 치룬다고 한다.
계율이 무너진 한국불교
동아시아 삼국에 대하여 중국을 계율의 나라, 한국을 수행의 나라, 일본을 교학의 나라라고 일반적으로 칭한다. 수행의 나라라고 불리우는 한국에서 계율은 잘 지켜 지고 있을까?
최근 일련의 사태를 보면 한국에서의 승가계율은 무너진 듯이 보인다.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승려도박사건이 결정적이다. 이외 차마 말도 꺼내기 민망한 수 없는 계를 위반한 사건들이 있다. 더구나 각종기도와 천도재 등으로 인하여 직업화 되고, 이익집단화 된 승가의 모습을 보면 부처님 당시와 비교해 보았을 때 더 이상 승가라 보기 힘들정도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차라리 일본처럼 ‘재가승가’로 부르는 것이 맞을지 모른다.
빅쿠선언을 해야하는 이유
가사를 입지 않고 승복만 입고 수행따로 삶따로의 생활을 하는 것이 재가자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고, 노후대비를 위한 사설사암 등 개인재산 축적을 하는 것을 보면 역시 재가자의 삶과 다를 바 없다. 더구나 은처의혹까지 받고 있다면 겉모습만 승려일 뿐이다.
이 시점에서 한국불교의 스님들은 빅쿠선언을 할 필요가 있다. 구족계를 받았지만 다시 한번 선언하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모든 대중과 불자와 국민들에게 약속하는 것이다.
빅쿠선언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 가사입기의 생활화이다. 기사에 따르면 율장정신에 따라 가사를 새로 만든다고 한다. 율장정신이라면 부처님 당시의 복식이 되기 쉽다. 현재 테라와다나 티벳불교에서 보는 가사양식이다.
만일 새로 만들어진 가사를 입게 된다면 24시간 입어야 할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부처님 가르침대로, 계율대로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과 같다.
가사입기를 생활화 하고 빅쿠선언을 하는 이유는 출가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이다. 그렇다면 출가목적은 무엇인가. 빠알리 니까야에 표현 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정형구가 잘 말해 준다.
그는 오래지 않아, 그러기 위해 양가의 자제들이 당연히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듯이, 그 위없는 청정한 삶을 바로 현세에서 스스로 곧바로 알고 깨달아 성취했다. 그는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곧바로 알았다.(S6:3)
집에서 집없는 출가를 한 이유가 잘 표현 되어 있다. 직업으로 출가한 것도 아니고, 재산이나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하여 출가한 것이 아니다. 양가집의 훌륭한 자제가 출가한 이유는 바로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청정범행을 닦았을 때 스스로 번뇌가 다함을 알게 되는데, 그 때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아라한 선언을 한다고 한다.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었을 때 출가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그런 성자가 재가불자의 ‘복전 (puññakkhetta)’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예전에 빅쿠선언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973년의 빅쿠선언
우리나라 승단에서 태국의 율사들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사실이 있다고 한다. 1973년에 통도사의 홍법·상우, 부산 선암사의 석암, 쌍계사의 고산, 송광사의 보성·학산, 해인사의 혜암·도견·일타·종진·운산·현우·도성, 대구의 수산, 법주사의 혜정 스님 등무려 40여명이나 되는 스님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들이 태국율사들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것이다. 이는 일제36년 동안 대처식육제도의 일본 불교의 잔재를 청산하고 통합종단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필요성에 따른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한국불교 2000년사에 가장 획기적이고 위대한 사건”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고 한국불교가 중국의 대륙불교를 넘어서서 초기불교의 정통 계맥을 한반도에 다시 복원시킨 ‘쾌거’라 하였다.
하지만 그때 당시 수계를 받았던 스님들은 한결같이 숨기거나 은폐하려 한다고 한다. 소승불교의 비구계를 받은 것에 대하여 창피하고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태국비구계 수지는 한국불교에 있어서 역사적 쾌거일까? 아니면 하나의 해프닝일까?
제2의 빅쿠선언을
현재 승단의 분위기는 1973년의 빅쿠선언에 대하여 해프닝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빅쿠선언이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동떨어진 승가의 모습 때문이다.
제 2의 빅쿠선언을 한다면 율장정신에 따라 새로 만들어진 가사를 입고 선언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40년전과 같이 ‘계율의 나라’라 불리우는 태국의 율사를 초청하여 부처님 당시의 계맥을 이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부처님 법대로, 계율대로 살아 가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불자들은 보고 싶다.
201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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