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원수가, 싫어 하여 떠나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인연이 있었던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더거나 전철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확률을 말한다. 아마 극히 낮을 것이라 생각한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아는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0.1% 이하라고 본다.
일생에 걸쳐서 아는 사람은 천명이 넘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를 하거나 사람을 상대하는 마당발을 제외 하고 보통사람들이 인연을 맺은 사람은 그다지 많다. 학교나 직장 또는 이웃, 친척 등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천명을 넘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것이다.
디지털단지에 갔더니
주로 사무실에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밖에 돌아 다닐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전화나 이메일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날은 밖으로 나갈 일이 생길 때가 있다. 거래처에서 부르는 경우이다. 을의 입장에서 오더를 받아 와야 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향한다.
오랜 만에 구로 디지털단지를 방문하였다. 벚꽃이 만개하여 딱딱한 이미지의 산업단지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특히 제방에 피어 있는 벚꽃길은 환상적이었다.
디지털 단지를 방문할 때 마다 느끼는 것은 활력이 넘친다는 것이다. 새로 지은 건물이 주는 이미지도 산뜻 하지만 무엇보다 젊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기 때문이다. 주로 아이티(IT)에 종사 하는 인력인데 표정을 보면 기술지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컴퓨터와 정보통신 등 첨단 테크놀로지를 다루는 엔지니어들의 전형적인 이미지이다.
디지털 단지의 변화는 눈부시다. 예전에는 구로공단이라 하여 조립공장이 밀집 되어 있는 공단이었으나 지금은 환골탈태하여 첨단 기술의 메카로서 자리잡고 있다. 그런 변화는 건물에서 볼 수 있다.
아파트형공장이라 새로운 개념의 건축물이 등장한 곳이 디지털 단지이다. 소형조립라인과 사무실, 주차장, 식당 등이 한 건물안에서 모두 이루어지는 복합건물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콤플렉스 빌딩이 이곳 저곳에 새워 진 것을 보면 상전벽해와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런데 최근 또 다른 신개념 빌딩이 들어 섰다. 기존의 아파트형공장 이미지와 달리 커다란 빌딩으로 이루어진 복합 단지이다. 30층 높이로 지어진 건물로 마치 사무실 같은 느낌이 들지만 아이티 관련 업종이 대부분이다. 이렇게 신개념의 건물이 생겨난 곳에 가게 되었다.
들어 가 보니 예전에 같은 직장에 일하던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 동안 인연이 있었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10년 만에 우연히 만난 그 사람은 같은 부서에 있지 않았고 단지 업무상 이야기만 하는 정도 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나다 보니 새삼스럽게 과거의 기억이 떠 올랐다. 이제까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이다. 만남 중에는 좋은 인연도 있지만 악연도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로 맺어진 인연
이해관계로 맺어진 인연에서 한 번 틀어지면 악연으로 끝나기 일쑤이다. 특히 조직에서는 살아 남기 위하여 남을 밟기도 하고 중상모략이 난무 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안 볼 것 처럼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수 많은 악연을 쌓아 놓았을 때 살아 있는 한 다시 만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래서 가급적 좋은 인연을 맺고자 한다. 나중에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이 생에서 못 만나면 다음생에서도 만날지.
한 번 지은 업은 언젠가는 과보로 나타난다는 것이 업설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의도가 실려 지은 행위는 과보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당장 확인 할 수 것이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도 곱다”라는 격언이다. 이처럼 대화 하는 과정에서 즉각적으로 업과 과보에 대하여 알 수 있지만 대부분 잠재된 채로 있게 된다. 그러다 조건이 맞으면 과보로서 나타난다.
우연히 만난 것도 과거에 인연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전에 만난 적이 없다면 옛날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그런데 악연을 맺은 사람과 맞닥뜨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싫어 하여 떠날 때
원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나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 멀리 있는 아프리카 사람하고 원수가 될 수 없다. 원수는 가장 가까운 사람사이에서 생겨난다. 가장 인연이 깊은 사이에서 원한이 생겨나는 것이다. 가족간의 갈등, 직장에서 갈등, 사제간의 갈등 등 모든 갈등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끼리 발생한다. 그래서 원수가 되면 싫어 하게 되고 떠나게 된다.
싫어 하게 되고 떠난다는 말은 빠알리 니까야에 무수하게 나온다. 그런 정형구에 대하여 한자어로 ‘염오 이욕’이라 한다. ‘미워하며 떠난다’ 또는 ‘싫어 하며 떠난다’는 말이다.
상대방이 싫으면 누구나 떠나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누가 싫어 하는가? 그것은 자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어를 집어 넣는다면 ‘내가 싫다’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하였을 때 내가 싫은 것이다.
누가 싫은 것인가?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대상이 다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
Rūpaṃ bhikkhave, aniccaṃ,
vedanā aniccā,
saññā aniccā,
saṃkhārā aniccā,
viññāṇaṃ aniccaṃ.
Evaṃ passaṃ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rūpasmimpi nibbindati, vedanāyapi nibbindati, saññāyapi nibbindati. Saṃkhāresupi nibbindati, viññāṇasmimpi nibbindati.
[세존]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느낌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지각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형성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의식은 무상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물질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느낌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지각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형성에서도 싫어하여 떠나고 의식에서도 싫어하여 떠난다.
(아닛짜경-Anicca sutta-무상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12, 전재성님역)
싫어 하여 떠남이라는 말이 빠알리어로 ‘닙빈다(nibbida)’ 또는 닙비다(nibbinda)이다. 이를 한자어로 ‘염리(厭離)’라 한다.
경에서 싫어하여 떠나는 대상이 오온이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이다. 이런 오온은 나, 나의 것, 나의 마음이 아니다. 즉 나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싫어 하여 떠나려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내가 아니라 그 순간의 느낌이나 지각 같은 덩어리이다. 그 덩어리 역시 실체가 없다.
허깨비가 허깨비를 대상으로
원수를 싫어 하는 것은 실체가 없는 내가 아니라 그 순간 조건지어진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 즉 오은이다. 내가 싫은 것이 아니라 조건 지어인 오온이 싫은 것이다. 그런 오온은 어떤 것일까? 무상경에서는 물질, 느낌 등 다섯 가지가 무상한 것이라 하였다. 둑카경(S22:13)에서는 오온이 괴로운 것이라 하였다. 무아경(S22:14)에서는 오온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하였다. 이렇게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오온이 원수를 싫어 하여 떠나려 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상대방을 싫어 하여 떠나려 한다면 그 때 나는 실체가 없는 허깨비라 볼 수 있다. 허깨비가 역시 실체가 없는 허깨비를 대상으로 싫어하여 떠나려 하는 것이다. 원수와 같은 상대방 역시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싫어 하여 떠나야 할 대상은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으로 표현되는 오온이다.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ho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그가 해탈할 때 ‘해탈되었다는’는 궁극의 앎이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졌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고, 해야 할 일은 다 마쳤으니,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안다.
(아닛짜경-Anicca sutta-무상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12, 전재성님역)
경에서 “싫어하여 떠나면 사라지고, 사라지면 해탈한다.( Nibbindaṃ virajjati, virāgā vimuccati, vimuttasmiṃ).”라는 문구는 빠알리 니까야에서 자주 쓰이는 정형구이다. 무상하게 변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도 없는 오온에서 싫어 하여 떠나는 것이다. 이렇게 떠나 사라지면 해탈한다고 한다. 싫어 하여 떠나는 대상이 원수와 같은 상대방이 아니라 나라고 불리우는 오온인 것이다. 그래서 오온을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파악하였을 때 통찰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궁극의 앎이 생겨나 아라한 선언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원수가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원수가 생겨 난다. TV에서 보는 것처럼 먼 나라의 사람, 나와 무관한 사람은 결코 원수가 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사람, 인연이 깊은 사이일수록 원수가 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부모 자식간의 갈등, 직장에서 상사와 부화 또는 동료와의 갈등, 스승과 제자와의 갈등 등 모든 원한 관계는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때 마다 사람들은 원수로부터 싫어하는 마음을 낸다. 그리고 원한 맺힌 자로부터 떠나고자 한다. 여기까지가 일반 범부들이 생각하는 수준이다. 철저하게 자아를 기반으로 둔 싫어함이다.
싫어 하여 떠나야 할 대상은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자아는 실체가 없다. 나의 몸, 나의 자아라고 하는 개념을 오온으로 분해하여 보았을 때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 범부들은 이처럼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 상대방을 미워하고 떠나려 한다. 그러나 떠나야 할 대상은 오온이다. 상대방을 미워하는 그 마음, 즉 오온으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싫어 하여 떠나야 할 대상은 인연이 너무 깊어 원수가 된 상대방이 아니라 그런 마음을 내는 자신, 즉 무상하고 실체도 없는 오온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오온에서 떠나야 한다고 하였다.
2013-04-1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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