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속에 피는 꽃
흐드러지게 핀 벚꽃
어디든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런 벚꽃을 보고 있으면 행복하다 못해 황홀하다.
밤하늘의 별처럼
매년 이맘 때쯤 보는 벚꽃이지만 볼 때 마다 한 번 더 쳐다 보게 만든다. 벚꽃 나무 아래에서 위를 바라 보았을 때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것 처럼 온통 하햔 세상이다.
밤에 보는 벚꽃
낮에 보는 벚꽃만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밤에 보는 벚꽃은 마음을 절로 들뜨게 만든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때 만큼은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디카로 플레시를 터뜨린다.
축복 받은 계절에
바람은 부드럽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축복 받은 계절이다. 지난 겨울 죽은 자들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봄이다.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사람이 사는 곳에 봄이 왔다. 별로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은 늘 그 자리에서 삶을 영위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보는 간판 그대로이다. 이처럼 늘 그 자리에 있기에 변화가 없는 듯 보인다.
사람들이 모두 떠난 곳
그러나 때로 극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기도 한다. 재개발현장이다. 부동산 거품이 절정에 달하던 시절에 재개발 지역으로 고시되어 사람들이 모두 떠난 곳이다.
살벌한 구호가 난무하고
봄은 왔지만 철거된 마을은 살벌 하다. 온갖 살벌한 구호가 난무한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갔을까?
사람들이 떠난지 벌써 1년이 넘은 것 같다. 수 년간 수 없이 지나 다니던 길인데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려 보니 마을이 텅비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주택가와 소형아파트는 물론 꽤 높은 상가빌딩에 이르기 까지 그 많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진 듯이 보인 것이다. 빈집은 마치 폐허처럼 변했고 미쳐 가져 가지 못한 가구들과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다.
폐허가 된 마을 보면 마치 부도난 회사의 현장을 보는 것 같다.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때 질서에서 무질서로 극대화 되듯이 ‘엔트로피(Entropy) 법칙’이 그대로 적용됨을 알 수 있다.
간판은 그대로
상가가 있는 거리에는 사람은 없지만 간판은 그대로 남았다. 작은 교회도, 상가에 있는 절이름도 그대로 남아 있다. 지나가던 길에 자주 보는 점집도 내부는 텅비 있지만 간판은 그대로 남아 있다.
폐허속에서도 피는 꽃
사람이 떠난 폐허에도 봄이 찾아 왔다. 봄은 사람 사는 곳에만 찾아 오는 것이 아니라 폐허속에서도 꽃이 핀 것이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아서
비록 사람이 살고 있지 않지만 꽃나무에서는 때가 되면 스스로 알아서 꽃망울을 터뜨린다. 사람들이 사는 집이건 아니건 차별없이 자신의 할 바를 다하는 것이다.
봄은 폐허속에도
사람들이 모두 떠난 자리에서 누구 하나 보아 주는 것이 없어서일까 폐허속에 피는 꽃은 처량해 보인다. 그러나 그 꽃색깔은 변함 없다. 오히려 폐허속에 피는 꽃이 더 화려해 보인다. 누군가 보아 주는 사람도 없고 플레시를 터뜨리는 사람도 없지만 폐허속에서 꽃나무들은 할 바를 다 하는 것이다. 이렇게 봄은 폐허속에도 예외 없이 왔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 없듯이
법화경에 약초의 비유가 있다. 법화칠유 가운데 하나로서 널리 알려진 비유이다. 어느 지역에 비가 내릴 때 골고루 내린다. 같은 지역내에서 차별을 두고 내리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를 부처님의 가르침의 보편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이 출현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골고루 가르침을 펴지만 받아 들이는 근기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없다. 다만 받아 들이는 사람에 따른 차별만 있을 뿐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와 같아서 모든 사람들을 촉촉하게 적신다. 그래서 법비로 본다. 이런 법화경의 약초유의 원형이 상윳따니까야에 보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Paññā lokasmiṃ pajjoto sati lokasmiṃ1 jāgaro,
Gāvo kamme sajīvānaṃ sītassa iriyāpatho.
Vuṭṭhi alasaṃ analasañca mātā puttaṃva posati,
Vuṭṭhiṃ bhūtūpajīvanti ye pāṇā paṭhaviṃsitāti.
[세존]
“지혜가 세상의 불빛이고
새김을 확립하는 것이 세상에서 깨어 있음이며,
소가 일하는 데 함께 하는 것이고
밭이랑이 그의 삶의 길이네.
어머니가 아들을 키우듯,
비가 게으르거나 게으르지 않은 자 모두를 키우니,
비의 존재가 참으로
이 지상에 사는 생명들을 키우네.”
(빳조따경- Pajjotasutta-불빛의 경, 상윳따니까야 S1:80(8-10),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비로 비유하였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산천초목을 차별없이 젹셔서 생명을 키워 낸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가르침 역시 게으른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모두 차별없이 베풀고 있다. 다만 받아 들일 수 있는 근기에 따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늘에서 금비가 내려도
법화경과 상윳따니까야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비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베풀고 있지만 받아 들이는 자들의 근기에 따라 차별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하늘에서 법비가 아니라 ‘황금비’가 내리면 어떨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a kahāpaṇavassena 나 까하빠나왓세나
titti kāmesu vijjati, 띳띠 까메수 윗자띠
Appassādā dukhā kāmā 압빳사다 두카 까마
iti viññāya paṇḍito. 이띠 윈냐야 빤디또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안다.
(Dhp 186, 전재성님역)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하늘에서 금비가 쏟아진다고 해도 사람들은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 한다. 그런 금비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비유하고 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 은 ‘물질적 쾌락의 욕망(vatthukama)’과 ‘정신적 쾌락의 욕망(kilesakama)’을 말한다. 이득과 환대와 명예를 추구하는 삶이다. 그래서 욕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마치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나는 것처럼 쾌락은 적고 고통만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하늘에서 금비가 내려도 사람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다.
폐허속에 피는 꽃
이와 같이 봄은 차별없이 누구에게나 어느 지역에나 찾아 온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만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라 폐허속에서도 역시 화사한 꽃을 피운다.
아무도 보아 주지 않는 폐허속에 피는 꽃은 외로워 보인다. 그러나 사람이 그렇게 느낄 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이 오면 꽃나무에서는 꽃이 핀다. 마찬가지로 봄은 부자나 가난한자나 귀한자나 천한자나 모두에게 차별없이 다가 온다.
필리핀이나 태국과 같은 따뜻한 나라에서 겨울 한철 보냈던 사람들과 달리 혹독한 겨울을 보낸 자에게 있어서 봄은 각별하다.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맞는 봄이기 때문에 더욱 더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꽃을 바라본다. 그런 꽃을 바라보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봄은 산천초목, 도시와 농촌, 폐허를 가리지 않고 찾아 온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것들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듯이 화려한 꽃을 피워낸다. 그런 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매번 봄을 맞이 하지만 모두 다른 봄이기 때문이다. 살아 남은 자에게 있어서 봄은 생명이고 축복이다.
2013-04-1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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