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누가 스님모독, 승가모독하는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23. 12:05

 

누가 스님모독, 승가모독하는가?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고

 

어느 불자로부터 댓글을 받았다. 불만이 가득섞인 투의 글이다. 최근 승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불미스런 사건에 대하여 글을 올렸는데 그에 대한 반론이라 보여 진다. 장문의 글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 스님들(그것이 하필 종단 지도자급들)의 막행막식이 원인이 되어 또는 가사를 수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 되어   이교도들의 타켓이 되어 스님들이 수난을 당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은 저는 절대 동의할 수 없으며 너무 똑똑한 님의 말씀에 이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저도 불자입니다. 간혹 님의 글을 접하여 바른 말씀을 하시는구나 여겨질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님의 사상에 의심이 들 때도 간혹 있었습니다.

 

(벼리)

 

 

B불자님은 스님들이 하루 종일 가사를 수하지 않아 스님들이 막행막식하여 이교도의 타겟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부 스님들의 비행에 대하여 전체스님들이 다 그런 것처럼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하여 바른 말씀을 하시는구나 여겨질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님의 사상에 의심이 들 때도 간혹 있었습니다.”라는 표현까지 하였다.

 

사상이 의심된다고 하였는데 어떤 사상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아마도 기독교인으로 보는 것 같다. 댓글에서 기독인 운운하는 글을 썼다가 지웠기 때문이다. 스님을 비판하고 주류불교를 비판하면 기독교인으로 내몰리는 것일까?

 

글을 보면 치켜 세워 올려 주는 듯하면서 할말을 다하는 듯하다. 그런 표현 중에 너무 똑똑한 님의 말씀이라는 표현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 아직 까지 한 번도 대중앞에 서 본적도 없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가져 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보통불자가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글을 받는다. 칭찬과 격려의 글도 있지만 비판의 글도 있고 심지어 비난과 비방의 글도 받는다. 어느 스님의 격려 댓글처럼 칭찬받았다고 하여 우쭐하거나 비난 받았다고 하여 절필하지 않는다. 오늘도 내일도 그저 쓸 뿐이다.

 

글을 쓰는데 있어서 구애 받지 않는다. 할 말 다하고 사는 것이다. 승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스님을 승보로 여기기 때문에 스님과 승가는 동의어이다. 그런 승가의 행태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장면 #1 정치승

 

최근 교계신문사이트에 인상적인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마치 남북회담하는 것처럼 승가와 재가가 마주 앉아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19일 열린 불교방송 이사회 장면이다.

 

 

 

불교방송 이사회는 19일 제81차 회의를 4시간여에 걸쳐 비공개로 진행했다.

회의 시작에 앞서 이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사진 : 불교포커스

 

 

 

사진을 보면 모든 것이 대조적이다. 한편은 삭발하였고, 다른 한편은 유발(有髮)이다. 또 한편은 회색승복이고, 또 다른 한편은 검은 양복일색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좌석을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긴장감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이날 회의는 무려 4시간여 걸쳐 진행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기사에 따르면 회의장 밖으로 간간히 고성이 들렸다고 한다. 불교방송 이사장 영담스님을 해임하는 과정에서 승가이사와 재가이사가 파워게임을 벌렸기 때문이다.

 

조계종의 권리찾기

 

스님들이 왜 이러는 것일까? 스님들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최근 보도에 따르면 조계종과 선학원이 결별하였다. 이유는 정관개정에 따른 권리문제 때문이다. 알고 보면 이권이 개입되어 있다. 이런 와중에 불교방송 조계종 이사스님들은 대한불교진흥원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였다. 진흥원의 과거 행적을 문제삼은 것이다. 이를 두고 조계종의 대한불교진흥원에 대한 권리찾기라 보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태를 보면 승가라는 집단도 세속과 전혀 다를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스님들이 이사라는 직책을 맡고 더구나 이사장 이나 사장과 같은 결재권자가 되는 현상에 대하여 불자들은 어리둥절하게 생각한다. 불교에 입문하기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 졌기 때문이다.

 

스님들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심지어 가족과 인연을 끊은 출가자로서 청정범행을 닦고 무소유를 실천하는 줄 알고 있다. 그런데 스님들이 이사장을 하고 사장을 하는 현상에 대하여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사장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사장은 어떤 자리인가?

 

사회에 나오면 대부분 직장생활을 한다.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일정액의 보수를 받으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그래서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게 된다.

 

이처럼 귀중한 시간을 보내는 직장에서 사장은 하늘과도 같은 존재이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종관계가 확실하게 성립되는데, 그런 사장은 절대왕정 시대의 왕과 같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다.

 

이렇게 사장의 권한이 막강한 만큼 사장은 욕도 많이 얻어 먹는다. 모든 권한이 사장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책임은 무한대이어서 조금만 잘못하여도 모든 책임이 사장으로 향한다. 마치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가장 많이 욕을 먹듯이 조직내에서는 사장이 온갖 욕을 먹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사장은 술좌석에서 종종 안주로 회자되기도 한다.

 

사장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때로 철면피가 되어야 하고 때로 반사기꾼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영이 악화되면 인원감축을 해야 하고, 그럴 때 손에 피를 묻히게 된다. 또 이익을 위해서라면 하나가 있음에도 둘 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기꾼적 기질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날이 가면 갈수록 욕을 먹고 타락해 가는 것이 사장자리이다.

 

그런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이사를 하고 이사장을 하고 사장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출가정신에도 맞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역행하기 때문이다. 그런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스님모독, 승가모독일까? 아니면 승단정치를 하는 정치승이 스님모독, 승가모독에 해당되는 것일까?

 

장면 #2 은처승

 

블로그에 ‘스님의 결혼’이라는 타이틀로 글을 올린 바 있다. 은해사의 D스님의 결혼 이야기에 자극받아서 올린 글이다.

 

글에서 스님이 결혼하는 장면을 담은 사진을 올렸는데, 이는 어느 스님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 스님은 인터넷에서 중매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청춘남녀를 짝을 지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카페에서 스님의 결혼과 관련된 사진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결혼(베트남)

 

 

사진속의 배경은 우리나라가 아니다. 사진속에 있는 글자를 보면 한자와 알파벳이 보인다. 문구를 확대한 결과 ‘VIETNAM’이라는 문구를 발견하였는데, 아마도 베트남의 어느 사원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여진다.

 

신랑은 스님으로 회색의 승복을 입고 있다. 마치 우리나라 승복처럼 보인다.  신부는 빨강색의 베트남 전통의상을 입고 있고 부케를 들고 있다. 그리고 양옆으로 스님들이 보이는데 한복스타일의 승복을 입은 스님도 있고 노랑가사를 걸친 남방스님 모습도 보인다. 또 신랑과 신부의 가족으로 보이는 일반인들도 볼 수 있다.

 

독신종단의 팔대원칙

 

스님도 결혼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정을 이루어 자식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처를 허용하는 종단도 있고, 이웃 일본에서는 대처종단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업으로서 승려가 되는 것이고, 일구어 놓은 성과에 대하여 자식에게 세습도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대처를 허용하고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종단에 한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은 독신승 종단이다. 대처종단을 대상으로 정화운동을 하면서 내건 명분이다. 그래서 승려자격 8대원칙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독신자,

-삭발염의자,

-불구가 아닌 자,

-백치자가 아닌 자,

-3인 이상의 승려 단체 생활을 하는 자,

-4대 범계(살, 도, 음, 망)를 하지 않는 자,

-술과 고기, 담배를 하지 않는 자,

-25세 이상인 자

 

 

라고 되어 있다. 이중 독신이 가장 첫 번째 조건임을 알 수 있다.

 

5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한 D스님

 

 

이처럼 독신주의를 표방하는 조계종에서 지난 2011년 스님결혼사건 (“은해사 A 스님 결혼사실 있다”)이 일어 났다. 대구 은해사의 D스님이 미국에서 교포여인과 결혼 하여 5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해 온 것에 대하여 옛적 도반이었던 A 스님이 폭로한 갓이다.

 

D스님은 19089년부터 1993년 합의 이혼하였다고 한다. A스님이 이를 증명할 혼인증명서까지 제출하였지만 D스님의 결혼사실에 대한 조사는 흐지부지 되었다. 조계종 호법부에 따르면 이미 법적으로 이혼한 상태이고, 혼인증명서는 있지만 실제 함께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독신주의를 천명한 독신비구종단에서 스님이 결혼하고 이혼한 사실이 있어도 스님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현주소이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이를 보도한 기자는 “화쟁위원회를 대표한다는 승려조차도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는 소식이고 보면, 조계종이 점차 존립의 근거를 상실해가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장자종단 조계종의 양심은 어디로)”라고 하였다.  대처종단을 몰아 내기 위하여 정화라는 명분으로 절을 장악한 조계종에서 대처를 허용한다면, 다시 대처승이 절을 빼았는다고 해도 막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면

 

불교신문에 따르면 60년대 “정화하러 간다”는 말은 “대처승이 사는 절을 빼앗으로 간다”는 말과 동의어 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찰들이 조계종의 넘어 오게 되었는데 이는 청정비구 승단이라는 명분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들려 오는 소문에 따르면 일부 힘있는 스님들의 은처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들려 오고 있다. 더구나 어느 스님은 결혼한 사실까지 있다. 그런 스님들이 낮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kāmarāga)’ 등 다섯 가지 장애(오장애)를 극복하기 위하여 참선지도를 하고, 밤에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마음껏 누린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아마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르다 할 것이다.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알려 주는 것이 스님모독, 승가모독일까? 아니면 낮에 한 말 다르고 밤에 하는 행동이 다른  언행일치가 되어 있지 않은 스님이 스님모독, 승가모독에 해당되는 것일까?

 

장면 #3 사업승

 

지난 3월 학여울역 부근 세텍(SETEC)에서 열린 불교박람회 (2013 불교박람회 관람기)에 갔었다. 매년 한 차례 열리는 불교박람회에서는 불교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주로 불교관련 용품들이다.

 

박람회장에서 눈에 띠는 것은 사찰음식이었다. 사찰에서 스님들이 개발한 음식을 산업화 또는 사업화한 것이다. 그런 사찰음식을 보면 럭셔리하다. 고급 웰빙음식으로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실제로 스님들이 그런 음식을 드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관람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나라 스님들은 잘 먹고 사는 것으로 보일 것임에 틀림 없다.

 

사업에 더 관심이 많은 스님

 

박람회장에서 가장 북적이는 곳이 있었다.  경남 K시에 위치한 모 사찰의 사찰음식전문부스이었다. ‘OO이라는 사찰음식 전문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부스에서는 즉석에서 연밥을 팔고 있어서 주변이 마치 노천시장, 야시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2013 불교박람회 사찰음식부스

 

 

부스에는 갖가지 먹을 거리가 매우 다양하게 선보였다. 마치 식당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하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OO원 브랜드는 H스님이 일구어 낸 것이라 한다.

 

H스님의 성공스토리를 우연히 불교방송에서 들었다. 일요일 오전 일곱시에 방송되는 ‘우리절 우리스님’에 출연한 스님은 사찰음식 사업에 대하여 주로 이야기 하였다. 이를 디카를 이용하여 녹음해 두었다. 다시 듣기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음악이 들어가는 프로는 음원저작권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시듣기 기능이 작동하지 않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경남 K 시에서  사찰 바로 옆에 OO원이라는 사찰음식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는 스님은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추진하고 있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전통사찰 제조협회라는 것을 추진해서 한 삼년 정도 왔습니다. 그거는 왜 만들었느냐 하면 우리 음식이나 물건 등 손재주가 많은 스님들이 참 많아요.

 

천연염색하는 스님도 있고, 먹거리가 아닌 다른 것으로 있는 스님도 있어서, 그 스님들을 모아서 그 스님들 만드는 것..불자들은 믿잖아요? 믿을 수 있는 음식이나 물건이기 때문에 그걸 불교백화점 처럼… 제가 오프라인에 나와 해 보니까 내가 하는 것만으로 한계가 있는 거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내가 하는 것을 찾고자 하니까 당신들도 간장 된장 다 담그니까 맛이 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판매할 수 있는 루트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스님네가 절에다 된장 십오년 된게 있어.. 뭐 이거 불사하는데 좋겠다..이렇게 연락을 주시면 제가 불사하는데 기꺼이.. 그냥은 드리지 못하지만.. 그걸 발전 시켜서 신도들과 같이.. 지금은 그래 해야 되잖아요. 사업이라는 것을 떠나서 자급자족하는 백장청규의식을 가지고…

 

(우리절 우리스님,  불교방송- 우리절 우리스님.  07:00 일요일 방송, 2013-04-21일자)

 

 

스님의 말을 들어보면 수행보다 사업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사찰음식 전문점을 운영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서 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스님네들이 만든 것들, 예를 들어 먹거리나 천연염색 등을 만들었지만 판로에 자신이 없을 경우 자신에게 맡겨 달라고 한다. 얼마든지 팔아 줄 수 있다고 한다. 단 공짜는 아니고 어느 정도 수수료를 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파는 것일까? 그것은 불자들에게 파는 것이다. 이는 그 스님들 만드는 것..불자들은 믿잖아요?”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스님이 불자들을 상대로 하여 장사를, 아니 사업을, 아니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다.

 

백장청규정신이라고

 

H스님은 스님들이 먹거리 등을 만들어서 파는 행위에 대하여 매우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근거로서 ‘백장청규’정신을 들고 있다. 그리고 노동하여 먹고 사는 행위에 대하여 ‘생활선’이라 하였다. 그렇다면 백장청규란 어떤 것일까? 인터넷 검색을 하여 보았다.

 

 

8권. 정식명은 《칙수백장청규(勅修百丈淸規)》라고 한다. 원래 당()나라의 백장 회해(百丈懷海)가 선종(禪宗) 사원의 규범을 성문화(成文化)한 것을 《고청규(古淸規)》라고 하였는데, 선종이 독립된 사원 ·제도 ·의식 등을 아직 갖지 않았을 때 법당(法堂) ·승당(僧堂) ·방장(方丈) 등의 제도를 설정하고, 중승(衆僧)에게 동서(東序) ·요원(寮元) ·당주(堂主) ·화주(化主) 등의 각 직책을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이것이 당 ·송 시대에 이리저리 흩어져서 없어졌으므로, 1335년 원()나라의 백장 덕휘(百丈德輝)가 순제(順帝)의 칙명을 좇아 수정, 전국 선원에서 시행시켰는데, 바로 이것이 《칙수백장청규》이다. 9장으로 되어 일종청규(一宗淸規)의 대강(大綱)이 망라되어 있다.

 

([출처] 청규 | 두산백과)

 

 

백장청규는 선종이 독립된 사원 ·제도 ·의식 등을 아직 갖지 않았을 때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철저하게 자급자족 하는 수행공동체를 말한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생활선

 

마조스님의 제자인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스님에 이르러 선종이 본격적인 선수행의 도량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때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말이 나왔다. “하루 동안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식사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외부의 지원 없이 인적이 끊긴 곳에서 수행자들이 필요한 자원을 스스로 해결하면서 살아갔다. 이러한 삶 자체가 세상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상이어서 평상의 마음이 그대로 도(平常心是道)라 하였다. 선종에서는 이를 ‘생활선’이라 하였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정신은 자급자족 생활공동체 정신을 말한다. 잉여농산물을 팔아 장사하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보다 비즈니스에 더 몰두하는 듯한 스님들의 모습을 본다. 백장청규의 근거를 들고 생활선을 이야기하면서 “지금 스님들이 이 방송을 듣거나 우리불자님들이 들으면 가서 하나라도 끊어서 보내 주신다면 제 연락처를 알아서 주십시요. 좋은 음식만들어서 보급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스님모독, 승가모독일까? 아니면 스님들이 장사를 하여 날로 사업을 번창하게 하는 것이 스님모독, 승가모독에 해당되는 것일까?

 

승려의 본분은 무엇인가?

 

 스님을 지칭하는 여러 호칭이 있다. 스님들이 스스로를 호칭할 때 ‘중’이라는 말을 종종듣는다.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것으로 보이지만 일종의 자기비하로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중이라는 말은 속어로서 불자들이 사용하기 꺼려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이 종종 중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불편하다. 중과 관련된 각종 관용구나 속담이 있기 때문이다.

 

중이라는 말보다 ‘승려’라는 표현이 좀 더 격식있다. 승려()라는 말은 출가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그것을 널리 알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 승려를 우리말로 좀 더 높여 부르면 ‘스님’이 된다.

 

승려의 본분사는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대로 수행과 포교하는 것이 본업이다. 수행과 포교를 떠나 다른 일을 하는 것은 본분사에서 벗어나는 행위이다. 스님이 정치를 하고, 장사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등의 행위는 승려로서 해야 할일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님이 이사, 이사장, 사장을 맡아 경영에 관여 하는 행위하거나 종단정치를 하는 승려를 정치승이라 할 것이다. 또 스님이 몰래 아내를 두고 낮에 하는 말과 밤에 행동하는 것이 다르다면 이를 은처승이라 할 것이다. 또 백장청규와 생활선을 거론 하면서 장사에 열중한다면 사업승이라 볼 것이다. 이처럼 정치승, 은처승, 사업승은 승려로서의 본분에 어긋나기 때문에 계율을 어긴 것이라 볼 수 있다. 계율을 어겼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속퇴(俗退)해야 할 것이다.

 

()지키기 힘들면

 

율사 철우스님의 불교신문 칼럼을 보면 비구계를 받은 자일지라도 일곱번까지 환속과 출가가 자유롭다고 한다. 비구계를 받은 출가자가 도저히 계를 지킬 자신이 없으면 속세로 환속하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만 둔 사람이 다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기를 일곱번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바라이죄(사람을 죽이는 것, 도둑질 하는 것, 음란한 짓을 하는 것,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고 거짓말 하는 것)  어기면 승단에서 영원히 추방된다고 한다.

 

승려가 이사, 이사장, 사장과 같은 감투가 쓰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경우 속퇴하여 회사를 만들면 된다.  각각적 쾌락의 욕망을 참지 못하여 안달이 났을 경우 속퇴하여 가정을 이루어 살면 된다. 돈을 좀더 많이 벌어 노후를 안락하게 보내고 싶거든 속퇴하여 장사를 하면된다.

 

반승반속(半僧半俗)

 

그럼에도 불구하고 삭발한 채 회색승복을 걸치고 정치승, 은처승, 사업승으로 살아 간다면 반승반속이라 볼 수 있다. 계를 지키지 않은 반승반속(半僧半俗)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계행이 나쁜 사람은 나쁜 계행 때문에

 

(1)신들과 인간들이 불쾌하게 여긴다.

(2)동료 수행자들의 훈도를 받을 수 없다.

(3)나쁜 계행을 비난할 때 괴로워한다.

(4)계를 지닌 이를 찬탄할 때 후회한다.

(5)그 나쁜 계행으로 인해 대마로 만든 옷처럼추하다.

 

계행이 나쁜 사람의 견해를 따라 행하는 이들은

 

(1)오랫동안 처참한 곳의 고통을 받기 때문에 그와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2)자기에게 시물을 보시한 사람들에게 큰 결과를 생기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3)여러 해된 오물 구덩이처럼 청정해지기 어렵다.

(4)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처럼 [승과 속의] 둘 모두로부터 제외된다.

(5)비구라고 주장하지만 비구가 아닌 것이 마치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와 같다.

(6)마치 모든 사람들의 적인 것처럼 항상 동요한다.

(7)마치 죽은 시체와 함께 살 수 없는 것처럼 그와 함게 살 수 없다.

(8)비록 배움 등의 덕을 가졌더라도 동료 수행자들의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나니

마치 화장터의 불이 바라문들의 존경하는 바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9)수승한 법을 증득할 수 없나니 마치 장님이 색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10)정법에 대해 희망이 없나니 마치 천민의 아들이 왕위에 희망이 없는 것과 같다.

(11)행복하다고 생각하지만 고통스럽다. 불의 무더기의 가르침(火聚經, A.iv.128-34)에서설한 그런 괴로움을 받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제1장 계, 154절, 대림스님역)

 

 

계를 지키지 않는 반승반속은 ‘화장터에서 가져온 나무’같고, ‘소의 무리를 따르는 당나귀’같고, ‘여러 해된 오물 구덩이’처럼 악취가 나기 때문에 접촉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 하였다.

 

가사입기 운동을 제안하였더니

 

계를 지키지 않는 정치승, 은처승, 폭력승, 사업승 등이 승가에 계속 남아 있게 되면 어떻게 될까? 계를 지키지 않아 속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승단에 계속 남아 있다면 승단이 오염될 것이다. 마치 고이고 썩은 물웅덩이 같이 될 것이다. 그래서 가사입기 운동을 제안하였다. 마침 가사의 모양이 율장정신과 현시대를 반영하여 바뀐다고 하니 그런 기대감에 대한 글 (출가와 재가의 파워게임인가? 불교방송 스타스님들의 파업법회)을 블로그에 올렸다. 그랬더니 앞서 언급한 B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보내 주셨다.

 

 

불교가 본토에서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그 나라의 기후에 맞게 그 지역의 옷의 형태를 버리지 못하고 운력을 할 때는 일반옷을 입으며 예불시에는 가사를 수하게 됩니다. 일하다가 더러워진 옷을 감추고 가사를 수하는 것이 아닐까요?

24시간 가사를 수하지 않아서 계율이 무너졌다는 말씀에 절대 동의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초심의 수행심이 사라져 권력에에 눈이 멀어진 어느 불쌍한 비구라고 표현했다면 몰라도 ... 그 한사람이 불교를 대표 할 수는 없습니다.

(벼리)

 

 

법우님은 가사를 24시간 수하지 않아 계율이 무너졌다는데 절대로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부 스님들의 문제를 전체로 보지 말것을 요청하였다.

 

스님들에 대한 글을 쓸 때 매우 조심스럽다. 재가불자가 스님의 허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굳이 재가자가 스님의 허물을 이야기 하지 않아도 스스로 참회하여 초심으로 돌아 갈 것이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문제가 되었을 때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경우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악의 편이라 볼 수 있다. 승려의 정치행위, 은처, 폭력, 장사 등 승려로서 해서는 안될을 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이런 행위를 하면 결국 재가자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중에서 사는 스님들과 달리 재가자들은 타종교인들과 함께 살아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느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인지

 

법우님은 글에서 불교가 기후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도와 환경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운력을 하고 노동을 하여 자급자족 하는 것도 동아시아 불교에 있어서 하나의 전통이라 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여기와 다른 지역에 가서 전도할 시에는 거기의 풍속을 절대 배척해서는 안된다. 그 지역의 풍속에 맞게 수용하여 전도를 하라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압니다.”라 하였다. 그런데 어느 경전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고 싶다. 경전을 근거로 하여 글쓰기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말이기 때문이다.

 

불법이 쇠퇴하는 징조

 

부처님은 “자신을 섬으로 하고 자신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가르침을 섬으로 하고 가르침을 귀의처로 하지 다른 것을 귀의처로 하지 말라.( S22:43)” 라고 하였다. 자기자신과 가르침에 의지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스님들이 가르침에 어긋 나는 행위를 하면 어떻게 될까? 정법은 소멸되고 말것이다.

 

정치승, 은처승, 폭력승, 사업승의 출현에 따라 청정해야 할 승가가 오물구덩이 속 같이 되었을 때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혼란과 파멸로 몰아 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셨다.  

 

 

 [세존]

깟싸빠여, 여기 수행승, 수행녀, 재가의 남녀신자들이

 

1)스승을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2)가르침을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3)참모임을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4)수행을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5)삼매를 존중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

 

깟싸빠여, 이 피해야만 하는 다섯 가지 원리가 올바른 가르침을 혼란과 소멸로 이끈다.

 

(Saddhammapatirūpakasutta-정법에 대한 허위적 조작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13,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 한마디만 들어도 성자의 흐름에 드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날이 가면 갈수록 성자가 적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에 따르면 “뭇삶들이 타락하고 올바른 가르침이 파멸할 때는 수행의 계법이 더 많더라도, 더 적은 수행승들이 최상의 지혜를 얻는다.(S16:13)”라고 하였다. 오늘날 성자가 출현하기 힘든 이유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라 본다. 그렇게 된 이유로서 출가수행자들의 타락을 들 수 있다.

 

정치승, 은처승, 폭력승, 사업승 등 온갖 계율일 위반한 승려들이 출현하였을 때 가르침이 쇠퇴하였다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사부대중이 스승을 존중하지 않는 등 다섯 가지 요인이 발생하였을 때 불법은 쇠퇴하여 소멸되고 말것이라 한다.

 

누가 스님모독, 승가모독하는가?


스님의 허물에 대하여 지적하는 것에 대하여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렇다고 하여 모른 채 한다면 불법의 소멸에 동참하는 것과 같다. 구조적으로 고쳐지지 않는 것은 알려 주어야 한다. 승단의 모순과 위선, 거짓에 침묵한다면 결국 불법은 이땅에서 쇠퇴하여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지적하는 것이 스님모독, 승가모독일까? 아니면 정치승, 은처승, 사업승이 활개 치는 것이 스님모독, 승가모독에 해당되는 것일까?

 

 

 

2013-04-2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