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환경에 물들지 않는 훌륭한 삶, 이중지련(泥中之蓮)
어떤 것이든지 쓴다. 소재가 고갈되어서 글을 못 쓰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 보면 모두 글쓰기 소재이기 때문이다. 시시콜콜한 신변이야기부터 심오한 철학적 담론에 이르기 까지 글쓰기 소재가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마치 돈버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 주변을 보았을 때 온통 돈으로 보이듯이 주변을 보면 온통 글쓰기 소재로 가득하다.
여백을 대할 때
소재를 발견하고 글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소재를 이용하여 어떤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야 할지 나름대로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것이다. 글의 도입부에 어떤 이야기로 풀어 나갈 것인지, 그리고 본론에서는 어떤 예를 들어야 하는지, 또 경전의 어떤 구절을 인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강을 구상해야 한다.
다음으로 머릿속 시나리오를 구체화 하는 것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엠에스워드를 띄어 놓고 하얀 여백과 마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때가 가장 막막하고 막연한 때이다. 비록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갈지에 대한 구상을 하였더라도 여백을 대하면 막막하다. 그러나 일단 쓰고 보는 것이다. 자판을 두드리는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원래 의도 하였던 것과 엉뚱한 길로 빠질 때도 많다. 그래서 처음 여백을 마주 하였을 때가 가장 난감하다.
쉬운 글쓰기와 어려운 글쓰기
가장 쉬운 글쓰기는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팩트(fact)라 한다. 신문기사 같은 것이다. 육하원칙에 따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국내 사찰순례나 외국성지순례 같은 여행기가 대표적이다.
또하나 쉬운 글쓰기는 기사나 논문, 경전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주로 이런 방식을 이용하고 있다. 특히 경전을 근거로 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경전공부도 하고 방문자와 공유하기 위해서이다. 경전의 한 구절이나 게송을 올려 놓았을 때 누군가 크게 공감하였다면 글을 쓴 목적은 달성되고도 남았다고 본다. 그래서 방문자가 들어 와서 무언가 하나라도 건질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가장 쓰기 어려운 것은 머리로 생각해 내서 쓰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수필 같은 것이다. 논문도 이에 해당된다. 사실 이런 글쓰기야말로 진정한 글쓰기라 볼 수 있다.
글을 잘 쓰려고 애를 쓰다 보면 글이 더 써지지 않는다. 마치 “내가 머무를 때에는 가라앉으며 내가 애쓸 때에는 휘말려 들었습니다.(S1:1)”라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더 안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자리에서 일어나 경행이라도 하면 다음생각이 떠오른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머무르지도 애쓰지도 않고 거센흐름을 건넜습니다.(S1:1)”과 같이 집착하지 않을 때 잘 써지는 것이다.
직장생활과 글쓰기
글을 써 보지 않은 사람들은 글쓰기에 대하여 시간과 정력만 낭비라 생각한다. 더구나 돈도 되지 않은 글쓰기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직장생활 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직장생활 할 때는 글쓰기를 해 본적이 없다. 인터넷을 접속해도 남이 쓴 기사나 글을 읽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마우스를 이용한 클릭만 하였다. 낮에는 일하기 때문에 인터넷에 접속하는데 한계가 있고, 설령 시간이 남는 다고 할지라도 자기개발에 몰두 할 것이기 때문에 글쓰기는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대부분 직장인들이 그렇다고 본다.
하지만 자기 일을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모든 것을 자신의 판단대로 할 수 있다. 그래서 시간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굳이 시간을 내서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면 언제든지 글쓰기를 할 수 있다. 그런 글쓰기는 시간낭비도 아니고 정력낭비도 아니다. 비록 돈도 되지 않는 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좋아서 하는 것이다.
글쓰기 삼매
왜 글을 쓰는 것일까? 여백을 대하면 막연하고 활자화 하는 과정이 때로 고통을 야기하는데 그럼에도 글을 쓰는 것은 그만한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글쓰기는 참선을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본다.
다리를 꼬고 앉아서 참선이나 명상, 좌선선수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명상수행이 고통스런 것이라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할 만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속에서 사는 수행자들이 평생 산속에 머무는 것도 나름대로 살아 가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행복때문이다. 삼매를 통한 행복은 세속의 행복과 비할 바가 아니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라 본다.
경에 따르면 삼매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사유(尋, vitaka)와 숙고(伺, vicāra)가 있어야 한다. 이를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라고도 번역한다. 글쓰기를 하기 위해서는 머리속에 시나리오를 작성하는 것이 ‘사유’ 또는 ‘일으킨 생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자판을 이용하여 글로 표현 하는 것이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숙고’ 또는 ‘지속적 고찰’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집중하여 글이 완성되었을 때 희열(喜, pīti)을 느낀다. 그리고 글이 인터넷에 올려져 방문자의 반응이 있었을 때 행복(樂, sukha)을 느낀다. 또 글의 내용을 반조하였을 때 평정(捨, upekkhā)을 느낀다. 글쓰기를 통하여 마치 사선정을 모두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글쓰기도 삼매로 볼 수 있다.
독서삼매, 뜨개질 삼매, 일삼매 역시 삼매라 볼 수 있다. 누구나 대상에 집중하다 보면 희열, 행복, 평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맛이 있어서 참선을 하는 것이고, 이런 기분 때문에 글쓰기를 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글에 대한 반응을 보니
글을 쓰는 시간은 제한 되어 있다. 하루 종일 글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오전 중에 글쓰기를 마치고 오후에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늦어지는 경우 점심을 넘어 오후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다 보면 진이 빠져 아무일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래서 가급적 오전에 끝내려 한다. 그런 글이 쌓이고 쌓여서 2,000개가 넘었다. 단지 매일 매일 숙제 하듯이 작성된 글이다. 그런 글들의 반응은 어떤 것일까?
블로그의 관리자 모드가 있다. 작성된 글에 대한 통계를 보여 준다. 먼저 방문자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월별방문자 현황
월별방문자에 대한 것이다. 월평균 방문자가 4만명 가량 되고, 페이지뷰는8만명에 정도 된다. 매일평균 1,300명 가량 방문하는 셈이다.
다음으로 방문자 분포도이다.
월별방문자 분포도
월방문자 분포도이다. 연령대별로 보았을 때 40대(18%)와 50(19%)대가 주류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30대(10%), 20대(7%), 60대(6%) 순으로 되어 있다. 성별분포도는 남자(41%)가 여자(20%) 보다 2배 가량 된다. 이런 수치는 로그인으로 들어 온 경우에 해당된다.
어떤 학생들이 보고 있는 것일까?
방문자 분포도에서 주목하는 것은 이삼십대이다. 삼십대가 10%이고, 이십대가 7%이기 때문이다. 이를 백분율로 환산하면 삼십대는 16%이고, 이십대는 11%가 된다. 이삼십대가 약 28%에 달하는 것이다. 주로 경전적 근거를 들어 글쓰기를 하고, 더구나 글이 A4 10장에 달할 정도로 긴 글임에도 불구하고 이삼십대에서 꾸준하게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경이롭게 생각한다. 특히 이십대가 그렇다.
우리나라에서 이십대라면 학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어떤 학생들이 보고 있는 것일까? 댓글 등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불교관련 학업과 관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검색과정에서 방문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이삼십대가 상당수를 차지 한다면 이삼십대가 공감할 수 있는 글도 올려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다음으로 여성구성비가 남성에 비하여 절반에 지나지 않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독자가 2/3에 달했는데 현재는 반토막이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여성을 배려한 글쓰기를 해야 함을 알려 주는 것 같다.
가장 많이 조회한 글
게시된 글에 대한 통계를 보았다. 월별통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월별게시된 글
가장 많이 조회한 글이 ‘ “연금을 버려라!” 공무원의 삼중혜택’이다. 3월 2일 작성한 글이다. 우리나라 공무원 연금제도의 문제점에 대하여 지적한 글이다. 이런 류의 글이 1위와 2위를 차지한 것에 대하여 놀랍다. 대부분 인터넷 검색을 통하여 들어온 것이라 보여진다.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쓴 것일 뿐인데, 온라인상에서 댓글 논쟁이 지금도 치열하게 전개 되고 있다.
세 번째로 많이 조회된 글은 ‘이 고뇌의 강을 건너서 ‘진흙속의연꽃’으로’이다. 블로그 타이틀을 바꾸었을 때 작성한 글이다. 2012년 9월 14일자 글임에도 불구하고 상위에 랭크 된 것은 키워드 검색을 통하여 들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검색창에 ‘진흙속의연꽃’을 키워드로 집어 넣으면 위에 올려진 글로 링크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유입키워드 랭킹 순위를 보면 ‘진흙속의연꽃’ 과 ‘공무원연금’이 항상 1위와 2위를 다툰다. 그래서 월간 조회수가 많은 글이라 보여 진다.
‘진흙속의연꽃’을 키워드로
미디어다음에서는 ‘진흙속’만 쳐도 ‘진흙속의연꽃’이라는 말이 빨간색으로 자동적으로 뜬다. 그래서 올린글을 가장 먼저 보여 주고 있다. ‘진흙 속의 연꽃’이라 하지 않고 붙여 써서 ‘진흙속의연꽃’라고 하였음에도 그대로 띄어 주는 것은 그만큼 조회가 많았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런데 누군가 질문하였다. 왜 붙여 썼느냐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이름이기 때문이다. 인디언 이름 중에는 ‘늑대와 함께 춤을’이라는 문장식 이름도 있다고 하는데, 필명이라 할지라도 이름이기 때문에 붙여 쓰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진흙속의연꽃’라 한 것이다.
누군가 왜 진흙속의연꽃이라고 이름 하였느냐고 물어 볼 수 있다. 다른 뜻은 없다. 단지 이름이 좋았을 뿐이다. 명상음악 중에 ‘태양의 후예’, ‘동방의 등불’, ‘진흙속의 연꽃’ 등이 있었는데 이중 하나를 고른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어느 스님이 ‘진흙속의 연꽃’은 부처님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여 무례 하다는 뉘앙스로 글을 남겼다. 그래서 필명을 바꿀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였으나 그만 두었다. 여래십호 중에 하나를 쓴 것도 아니고, 또 올려진 글에 날자와 함께 서명이 되어 있어서 모두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어떤이는 말한다. 필명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더구나 받침도 많아 쓰기 불편하다고 한다. 그래서 줄여서 ‘연꽃’이라 한다. 그래서 두 글자로 된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한다. 법명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익명을 전제로 한 인터넷에서 이름은 자신이 마음대로 지어서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좀 더 의미 있고 차별화 되는 필명을 생각하다 보니 ‘진흙속의연꽃’이라는 여섯 글자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네이버 검색창에 ‘진흙속의연꽃’을 검색하자 뜻 밖에 한자어를 발견하였다. 한자어로 ‘이중지련(泥中之蓮)’이 진흙속의 연꽃이라 한다. 뜻풀이를 보면 “진흙 속의 연꽃이라는 뜻으로, 나쁜 환경(環境)에 있어도 그것에 물들지 않는 훌륭한 삶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참으로 좋은 뜻을 가진 말이라 생각된다.
이중지련(泥中之蓮)을 제2의 필명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새로운 카페에 가입할 경우나 새로운 필명이 필요할 경우 사용하려 한다.
필명이라도 멋지게
이름은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름은 함부로 짓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그러나 인터넷 필명을 보면 함부로 짓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익명을 전제로 한 공간이긴 하지만 오로지 필명과 남겨진 글로밖에 알 수 없는 공간에서 필명은 그 사람의 인격과도 같다. 필명만 보아도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필명이라도 멋지게 지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2013-04-26
진흙속의연꽃
'진흙속의연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책을 골라야 좋을지..”상윳따니까야를 추천하는 이유 (0) | 2013.04.27 |
---|---|
사이버인연과 신상털기,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운 애증(愛憎) (0) | 2013.04.27 |
부처님이 간화선으로 견성성불했다고? 조사불교의 한계 (0) | 2013.04.25 |
누가 스님모독, 승가모독하는가? (0) | 2013.04.23 |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 사울대공원 벚꽃구름 (0) | 2013.04.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