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사이버인연과 신상털기,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운 애증(愛憎)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27. 13:17

 

사이버인연과 신상털기,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운 애증(愛憎)

 

 

 

일년 삼백육십오일 경전과 함께 산다. 글을 쓰기 위해서 경전을 열어 보기 때문이다. 주로 삶의 과정에서 자극받았을 때이다. 화가 났을 때, 절망할 때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신기하게도 답이 나와 있다. 그럴 때 마다 느끼는 것은 빠알리니까야는 생활경전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이럴 때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하는 마음으로 경전을 대한다.

 

네 가지 음식(자양분)이 있는데

 

이제 습관이 되어 버린 글쓰기는 일상이 되었다. 배고프면 밥을 먹듯이 단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허기진 것 같아 허전 하기만 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는 거칠거나 미세한 물질적 자양분,

둘째는 접촉의 자양분,

셋째는 의도의 자양분,

넷째는 의식의 자양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Moiyaphagguna1sutta-몰리야 팍구나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12,전재성님역)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육체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들과 달리 먹는 문제만 해결된다고 하여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 배고품 못지 않게 정신적 배고품 역시 강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먹는 것 외에 세 가지지를 더 말하였다. 이를 구분하여 보면 (1)먹을 수 있는 자양분(麤細食, 추세식), (2)느낌을 위한 접촉의 자양분(觸食, 촉식), (3)새로운 존재의 생성을 위한 의도의 자양분(意思食, 의사식), (4)정신-신체를 위한 의식의 자양분(識食, 식식) 이렇게 네 가지의 자양분이 있다고 하였다.

 

정신적 배고픔, 식식(識食)

 

이 중 네 번째인 식식(識食)이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음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자양분은 모두 윤회의 원인이 된다고 하였다. 경에 따르면  네 번째의 의식의 자양분(識食)’의 경우 현생과 다음생을 연결하는 재생연결식으로 설명된다.  

 

이 네가지 자양분은 경에 따르면 갈애를 원인으로 하고 갈애를 근거로 하고 갈애를 원천으로 한다.(S12:12)”라고 하였다. 네 가지 자양분은 윤회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윤회의 원인이 되는 갈애를 소멸시키기 위한 연기법을 설하신다.

 

의식의 자양분이라 불리우는 식식은 지적 욕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어야 기쁨을 느낀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글쓰기도 식식에 해당된다. 하루라도 글을 쓰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끼는 것은 육체적으로 배고픈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 근거한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가르침을 사유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준다. 배고프면 먹는 식의 동물적 삶, 본능적 삶이 아니라 가르침을 사유하고 기억하는 삶의 방식으로 전환하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글쓰기를 하다보면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한 번 만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상털기

 

사람들은 관심있는 사람을 알고 싶어 한다. 나이가 몇살인지, 어디 출신인지, 어디 학교출신인지, 심지어 가족관계까지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알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신상을 털고 싶은 것이다.

 

왜 그런 심리가 발동하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호감에 따른 관심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만나 보았자, 털어 보았자 별 볼일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을 전문으로 하는 스님도 아니고,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도 아닌 보통불자이기 때문에 신상을 털어 보았자 나올 것이 없다.

 

설령 만나서 이야기 해 보았자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필명 진흙속의연꽃은 오로지 사이버상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만일 신상이 털린다면 사이버상에서 사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운 애증(愛憎)

 

법구경에 사랑하는 자도 갖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갖지 말라.(Dhp 210)”라는 구절이 있다. 사랑과 미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을까? 사랑하는 자는 만나지 못함이 괴로움이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만남자체가 괴로움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모두 만남에서 비롯된다. 만남으로 인하여 사랑과 증오의 관계가 생겨난다.

 

지금 애인이 있는데 죽도록 사랑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애인이 변심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사랑이 증오로 바뀔 것이다. 사랑이 증오로 바뀌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운 것이다. 연예인을 좋하는 사람이 하루 아침에 스토커로 변하는 것은 사랑과 미움, 애증의 관계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사랑하는 자 때문에 슬픔이 생겨나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두려움이 생겨난다.(Dhp 212)”라 하였다.

 

마찬가지로 사이버상에서 인연을 현실로 연결 하였을 때 애증의 관계가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대해 주면 그 순간 관심이 증오로 바뀌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사랑하는 자도 사랑하지 않는 자도 없는 그 님들에게는 참으로 속박이 없다.(Dhp 211)”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사이버상의 인연을 현실세계로까지 연결하지 않는다.

 

 

 

2013-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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