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왜 주장자를 들고 있는지 아세요?”선불교의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

담마다사 이병욱 2013. 3. 29. 15:15

 

왜 주장자를 들고 있는지 아세요?”선불교의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

 

 

 

스님이 폭행하면 뉴스가 되는 이유

 

일반인이 일반인을 폭행하면 뉴스가 아니다.  그런데 스님이 일반인을 폭행하면 뉴스거리가 된다. 왜 그럴까? 다음과 같은 빠알리 니까야 게송이 잘 말해준다.

 

 

Anagaassa posassa

nicca sucigavesino,
V
āaggamatta pāpassa

abbhāmatta'va5 khāyatīti.

 

[하늘사람]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는 것이네

 

(빠두마뿝빠경-Padumapupphasutta-향기도둑의 경, 상윳따니까야 S9:14, 전재성님역)

 

 

청정함을 추구하는 출가 수행자에게 발생한 허물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탐진치로 오염된 일반인과 달리 출가자의 허물은 머리털 만큼의 죄악도 하늘의 커다란 구름 보다도 더 크다고 하였다.

 

도박승과 폭행승, 이관왕 타이틀

 

스님에 의한 무자비한 언론사대표 폭행사건이 일어난 지 열흘이 넘었다. 그러나 종단에서 아직 까지 그 어떤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폭행한 스님은 이번에도 재수 없이 걸린 것일까?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것이 세칭 승려도박사건이다. 그 당사자인 도박승이 이제 폭행승이 되었다. 그래서 두 개의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이관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전하는 기사에 따르면 도박승들은 지금도 그 때 그 사건에 대하여 대단히 억울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하는 카드놀이 또는 화투를 한 것 가지고 너무 부풀렸다고 말하는가 하면 재수 없게 걸렸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승가의 폭력문화

 

도박과 폭행, 출가승려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뉴스거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불시넷의 성명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둘째, 폭력문화를 용인하는 불교 저변의 문화에 대한 성찰이 총체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행해지는 폭언과 다툼을 비롯하여 비구-비구니, 출가와 재가간의 권위적 위계, 여성에 대한 비하 등 일상문화, 나아가 최근 불교방송의 경우처럼 불합리와 비리 등을 온존시키는 구조적 폭력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온존시키는 문화 전반에 대한 근원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보다 더 시급한 결사가 없을 것이니, 이를 종단쇄신의 주요 의제로 삼을 것을 촉구한다.

 

(불시넷 “폭력문화 근절 위한 근원적 대책 마련 시급”, 불교닷컴 2013-03-25)

 

 

불시넷 성명에 따르면 ‘폭력문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승가와 폭력도 어울리지 않은데 폭력문화라니!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을까?

 

왜 주장자를 들고 있는지 아세요?”

 

종종 스님들의 법문을 듣는다. 요즘은 모바일에서 제공되는 불교TV사이트에 접속하여 편안한 자세로 듣는다.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수 백개에 달하는 법문 중에 종범스님의 향기로운 법문을 거의 다 들었다.

 

그런데 어느 법문에서 스님은 이런 말을 하였다. “왜 주장자를 들고 있는지 아세요?”라고 반문 하면서 이어서 “때리기 위해서 들고 있어요”라고 지나가듯이 약간 우스개말로 하는 것이었다. 법문 도중에 나온 말이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제까지 상식을 뒤집어 엎었기 때문이다. 주장자를 드는 것이 노승의 지팡이 또는 고승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인줄 알았는데 방망이로 사용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다 하니 주장자에 대한 이미지가 단번에 바뀐 것이다.

 

 

 

 

 

선불교는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

 

2010년 동국대에서 간화선 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를 불교TV사이트에서 보았다. 그 때 간화선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는 선불교에 대하여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라는 표현을 하였다.

 

반문자주의는 선종의 설립근거인 불립문자와 교외별전 등 경전과 교학을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또 반지성주의라 하였는데, 이는 조사의 할과 방과 같은 폭력적인 방법에 대한 것을 말한다.

 

“너 몇 방 맞을래?”

 

()과 방()은 고함과 몽둥이를 뜻한다. 할은 선승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것으로서 배우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소리를 말한다. 말이나 글로서는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알 수 없다 하여 마음과 뜻으로 알려 주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그런 방편이 하나 더 있는데 방이다.

 

방은 몽둥이를 말한다. 가지고 있는 주장자도 방에 해당된다. 할이 고함소리를 뜻하듯이 방이라는 말은 몽둥이질 하는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말 뜻을 이해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또는 잘 못한 사람에게 농담으로 너 몇 방 맞을래?”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마치 한편의 코메디를 보는 듯

 

이와 같은 할과 방은 외국인 교수의 지적에 따르면 모르는 사람이 보았을 때 매우 반지성적이다. 큰 소리로 호통치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문화에 대하여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종사를 보면 스승이 제자들에게 깨닫게 해 주는 방편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불스님의 불교tv 법문에서도 할과 방에 대하여 매우 실감나게 이야기 하고 있는데, 선어록에 전하는 할과 방에 대한 것은 임제의과 덕산의이 유명하다. 신문에 연재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임제는 어려서 출가하여 경전을 보다가 황벽 선사 밑에 3년 동안 가 있을 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였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목주 스님이 “너는 왜 황벽 선사에게 불법의 참뜻을 묻지 않느냐?”고 하니, 그 말을 듣고 황벽을 찾아가 “불법의 참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갑자기 황벽은 주장자로 임제를 후려쳤다. 호되게 주장자를 맞고 내려온 임제는 목주의 권유로 다시 황벽을 찾아 불법의 참뜻을 물었지만, 이번에도 다짜고짜 주장자로 임제를 내려칠 뿐이었다. 목주의 간절한 권유로 그 다음날도 황벽을 찾아갔으나 또 주장자만 실컷 얻어맞고 말았다.

 

까닭도 모르고 매만 맞은 임제가 황벽과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곳을 떠나려고 하자, 황벽은 대우 스님을 찾아가라고 하였다. 대우는 자신을 찾아온 임제에게 “황벽 선사께서 요즘 무슨 법문을 하시던가?”라고 물었다. 임제는 세 번이나 주장자로 얻어맞은 사실을 말하고 자신에게 무슨 허물이 있기에 그처럼 때리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때 대우가 “황벽 스님께서 자네를 위하여 그처럼 애를 썼는데도 그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단 말인가?”라고 하자, 이 말에 크게 깨친 임제는, “황벽의 불법이 별거 아니군” 하고 중얼거렸다. 대우가 “아까는 잘못이라 하더니 이제는 웬 큰소리인가?” 야단치니, 임제는 대우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세 번이나 쥐어박았다.

(<81> 임제의 ‘할’과 덕산의 ‘방’, 현대불교신문  2007-09-03)

 

 

중국 조사스님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보면 마치 한편의 코메디를 보는 것 같다. 코메디 소재로 삼아도 재미있을 것 같은 내용이다. 스승이 제자를 깨닫게 해주기 위한 방편으로 몽둥이질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요즘 시대와 맞지 않는다. 더구나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야?”라고 물었을 때 선어록에 따르면 조사스님들은 !”하고 고함을 지르거나 다짜고짜 몽둥이질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학인 멧따구]

“세존이시여, 묻사오니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그대는 지혜를 통달하신 님,

자신을 다스린 님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는 갖가지 괴로움이 있는데,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입니까?”

 

[세존]

“멧따구여,

그대는 내게 괴로움의 원인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대에게 말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갖가지 괴로움은,

그것들이 집착을 인연으로 생겨납니다.

 

알지 못해서 집착을 만들어 낸다면,

어리석은 자되풀이해 괴로움에 다가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원인을 본다면,

자각하여, 집착의 대상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Mettagusutta-학인 멧따꾸의 질문에 대한 경, 숫따니빠따 Sn5.4, 전재성님역)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은 제자의 질문에 성의껏 답을 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조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할과 방이라는 반문자의와 반지성주의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자비의 분노라고?

 

이와 같이 반문자주의와 반지성주의로 대표되는 선종의 가풍이 있어서일까 우리나라 선사들은 과격한 면이 보인다. 우리나라 어느 고승의 경우 매우 성질이 급하고 화를 잘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는 제자에 대한 자비의 분노라고 좋게 말하고 있지만성을 낸 것만은 사실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탐욕과 성냄이라는 오염원에 물들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사로 화를 낸다면, 승가에 대하여 잘 모르는 재가불자들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것이다.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이번 폭행을 일으킨 스님은 이관왕이 되었다. 도박승과 폭행승이라는 타이틀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스님도 선사이다.

 

스님의 폭행과 관련하여 불교단체에서 성명이 발표 되었는데 스님의 자리가 아무리 걸림이 없는 삶을 사는 자리라 하지만 막행막식을 해도 되는 것인가?”라는 내용이 눈에 온다. 특히 걸림 없는 삶막행막식이다.

 

 

그렇다면 왜 걸림없이 막행막식을 하는 것일까? 이는 본능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데는 조사스님의 법문의 영향이 크다. 지금도 선사들은 다음과 같은 법문을 즐겨 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스스로 배우지 않아도 배고프면 밥먹을 줄 알고 목마르면 물 마실줄 알고 기쁘면 하하 웃을 줄 알고 슬프면 엉엉 울줄 아는 것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고 또 누구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49년동안 설법하신 법문입니다.

 

(어느 선사, 불교TV 사이트, 불교TV 무상사 일요초청법회 제264,2011-12-08)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졸리면 잘 줄 알고, 화나면 성낼 줄 아는 그 놈, 그 놈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 한다. 이런 류의 법문은 불교tv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수백개에 달하는 선사의 법문에서 볼 수 있고, 또 매일 아침 불교방송 불교강좌에서 인천 Y선원의 S선사의 법문에서도 매일 들을 수 있다.

 

마조(馬祖)선사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대체 배고프면 법문은 어떤 근거로 한 것일까. 인터넷 검색결과 다음과 내용을 찾았다.

 

 

묻는다: 스님도 진리를 체득하려고 수행을 하십니까?
답한다: , 하지.
묻는다: 어떤 수행을 하십니까?
답한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지.(饑來喫飯 困來卽眠)

 

()율사가 묻고 대주혜해 선사(?~842)가 답한 유명한 선문답이다. 평상심(one’s everyday mind)을 설파한 선문답인데 화두로는대주용공(大珠用功)’ 또는기래끽반이라 한다. 대주의 선문답은 그의 은사인 마조 대사가 상당법어를 통해평소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平常心是道)”고 설파한 것을 부연 설명한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금강신문 2010-10-22)

 

 

배고프면 법문은 마조(馬祖)선사의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의 부연설명이라 한다. 평상심시도는 중국 당나라의 유명한 선승 조주(趙州)가 수행승으로 있을 때, 스승인 남천(南泉) 스님에게 "()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는 선배인 마조(馬祖) 선사의 말대로, "평상심이 도이다(平常心是道)"하고 대답했습니다.”라고 한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평상심시도는 본능대로 살라는 것은 아니라 한다. 인공을 가미 하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삶이 평상이라 한다. 하지만 방송에서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마치 걸림없이 사는 것이 도인인 것처럼 들린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화나면 성내는 것이 본성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감각적 대상을 보고 성욕이 나면 어떻게 해야할까?

 

내키는대로

 

걸림없이 사는 것과 비슷한 말이 있다. 그것은 내키는대로 사는 것이라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자승총무원장스님의 발언으로 확인 할 수 있다.

 

 

자승스님은 아울러 "상급자의 명령에 순명하는 가톨릭 등 다른 종단과 달리 우리 스님들은 내키는 대로 걸망을 지고 훌쩍 떠나거나, 선방에 들어가서 몇년간 수행하거나, 외국에 가도 아무런 제어를 받지 않는 풍토여서 해외에서 포교하라며 강제로 파견하는 것은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조계종, 미국서 한국불교 알리기 시동, 매일경제 2010-09-19)

 

 

지난 2010년 자승스님이 미국을 방문하였을 때 기사에 대한 내용이다. 기사에서  내키는 대로라는 말을 하였다. 우리 스님들은 내키는 대로 걸망을 지고 훌쩍 떠난다고 한다. 또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 한다.

 

조사스님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대로

 

내키는 대로 사는 것, 걸림 없이 사는 것이 우리나라 스님들의 삶의 방식이라 보여진다. 이는 재가불자들이 몰랐던 사항들이다. 재가불자들이 생각하기에 스님들은 참선이나 하면서 계를 지키고 청정하게 사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키는 대로 걸림없이 사는 스님들이 많다는 것을 말한다.

 

내키는 대로 걸림없이 산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막행막식(莫行莫食)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선사들의 법문에서 늘 들을 수 있는 배고프면 먹을 줄 알고, 졸리면 잘 줄 알고, 화 나면 성낼 줄 아는~”으로 정형화 되어 있는 법문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도박, 은처, 룸살롱, 횡령, 먹튀, 폭행 등이 일어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아서 발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지금 여기서 발생하는 현상에 대하여 알아차림을 유지한다면 결코 내키는대로 걸림없이 막행막식 하는 삶의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이다.

 

 

 

2013-03-29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