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한글 삼귀의문(三歸依文) 문제점 네 가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4. 30. 15:12

 

한글 삼귀의문(三歸依文) 문제점 네 가지

 

 

 

무엇이든지 처음 경험한 것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처음 등교하였을 때, 처음 만남을 가졌을 때, 처음 모임을 가졌을 때, 처음 출근 하였을 때, 처음 외국에 나갔을 때 처음 접한 경험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평생동안 기억된다. 불교와의 처음 만남 역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노래로 처음 접한 불교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중학교때이다. 종립중학교에 배정 받은 것이다. 그 이전에는 불교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 단지 교과서에서 불교는 3대 종교중의 하나이고,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는 세계 4대 성인중의 하나라는 정도 밖에 몰랐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 가자 마자 불교를 접하였다. 그것도 노래를 통하여 접하였다.

 

첫 음악시간에 가르쳐 준 것은 삼귀의사홍서원이었다. 40 전후로 보이는 남자선생님이었는데 오르간을 치며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 합니다~”로 시작되는 우리말 삼귀의를 가루쳐 주었다. 이어서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로 시작 되는 사홍서원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입학하자 마자 노래를 가르쳐 준 것은 운동장 조회 때문이었다. 오로지 운동장 조회시간에서만 삼귀의와 사홍서원을 부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요즘 절에서 행하는 법회형식은 아니다. 단지 삼귀의로 시작하여 사홍서원으로 마무리 하는 형식만 있었다.  

 

한글 삼귀의문은 언제

 

중학교때 처음 접한 삼귀의문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사용되어 왔는 줄 알았다. 나중에 안일이지만 한글삼귀의가 등장한 것은 70년대 초반이라 한다. 한글 삼귀의 노래가 어떻게 시작 되었는지 검색하여 보았다. 법보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그리고 일반 불자들에게 가장 많이 보급되면서 지금은 모든 법회 때마다 불리는 찬불가삼귀의사홍서원 1970년에 만들어졌다. 이 두 곡은 당시 종립학원연합회가 주최한 찬불가 공모에서 당선된 곡으로, 대전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최영철 교사가 작곡했다.

 

( [이것이 불교 최초] 66. 찬불가(讚佛歌), 법보신문)

 

 

 

 

 

법보신문에 따르면 1970년에  최영섭교사가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 자세한 기사가 불교신문에 있다. 불교신문에는 최영철 작곡가는 지난 1925년 충남 금산에서 출생했다. 그는 1973년 조계종 총무원에서 주최한 찬불가 공모에서 삼귀의, 사홍서원을 작곡해 당선됨으로써 불교음악과 인연을 맺었다. 현재 불교계 의식에서 불리는 삼귀의, 사홍서원을 만든 장본인이다.( 불교신문, 2009.10.31)  ”로 되어 있다. 1973년에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오보이다. 1973년이라면 이미 한글삼귀의와 사홍서원이 보급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보신문 기사대로 1970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불교초심자가 작곡한 삼귀의문

 

한글삼귀의 노래를 최영섭작곡가가 작곡한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작사는 누가 하였을까? 최영섭작곡으로만 되어 있을 뿐 작사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불교신문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에 띈다.

 


하지만 불교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심자에게 교장의 제안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처음에 교장선생님의 제의를 받았을 때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어요. 당시에는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더욱이 찬불가는 생소한 분야였죠. 그러다 교장선생님의 독려에 힘입어 용기를 내 공모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며 고민했고, 곡 테마가 생각날 때마다 메모하고 밤을 새우며 몇 달을 고생했어요.”

 

(최영철 삼귀의 사홍서원 작곡가, 불교신문 2009-10-31)

 

 

놀라운 사실은 삼귀의가 공모를 통하여 선정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불교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 작곡가에 의하여 한글삼귀의와 한글사홍서원이노래가 탄생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부대중이 법회 할 때 마다 부르는 한글삼귀의가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는 작곡가에 의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모든 스님을 모두 거룩한 존재로

 

한글삼귀의문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이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승보가 스님들이 아니라 승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보가 승가에서 스님으로 둔갑한 것은 공모제도를 통하여 선정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작곡가는 불법승 삼보의 개념에 대하여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승중(僧衆)  스님들이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한문에 없는 거룩한이라는 명칭까지 붙여 모든 스님을 모두 거룩한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원래 한문 삼귀의는 어떤 것일까? 불교신문에 따르면 歸依佛兩足尊(귀의불양족존), 歸依法離欲尊(귀의법이욕존),  歸依僧衆中尊(귀의승중중존)으로 되어 있다. 이를 해석하면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한문삼귀의문에서는 거룩한을 뜻하는 한자어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과 가르침은 그 자체로 거룩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거룩한이라는 말을 집어 넣은 것은 하나의 편법으로 보인다. 부처님이나 가르침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거룩한 그 자체이지만 스님의 경우 다르다.

 

만일 한자어 그대로 번역한다면 歸依僧衆中尊(귀의승중중존)’은 단지 스님들에게 귀의합니다로 된다. 스님들이 승보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럴경우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된다. 폭력승, 도박승, 은처승 도 승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한문에도 없는 거룩한이라는 말을 집어 넣어 거룩한 스님들이라 하였고 , 스님들에게만 거룩한 말을 붙이는 것이 형평성에 맞지 않아서인지 부처님과 가르침에도 모두 거룩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놓았다. 그래서 한문에도 없는 거룩한이라는 용어가 들어가서 한글삼귀의에서는 거룩한 부처님’, ‘거룩한 가르침’, ‘거룩한 스님들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작곡가는 잘못이 없다

 

한글삼귀의문에서 스님들을 승보로 본다면 스님들은 자동적으로 모두 승보가 된다. 더구나 거룩한 스님이 되는 것이다. 비록 한글삼귀의문이 비록 공모를 통하여 발표 하였다고 하지만 비구-대처승간의 정화과정에서 땅에 떨어진 승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라 본다. 그런데 찬불가를 작곡한 사람이 불교에 대하여 잘 모르고 , 더구나 승보에 대한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작곡한 것을 채택한 것은 종단이다. 그리고 종단에서 보급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승보개념에 대한 논란에서 작곡가에게 잘못을 물을 수 없다.

 

여러 차례 글을 올렸지만

 

그 동안 한글삼귀의문 문제를 여러 차례 글을 올렸다. 1)거룩한 스님들과 상가(Sangha), 한글삼귀의는 ‘횡포’이자 ‘희극’, 2)보통스님들은 ‘귀의’대상이 아니다!  현행 ‘삼귀의’ 개정되어야, 3)스님인가 상가(Sangha)인가, 삼보와 삼귀의(三歸依)에서 진정한 귀의 대상, 4)“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 잘못 삼귀의, 스님이 아닌 승가로  와 같은 글이다.

 

그 때 마다 불자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특히 불법승 삼보 가운데 승이 성자들의 공동체를 뜻하는 상가(Sangha) 또는 승가임에도 불구하고 스님들로 둔갑된 것, 그것도 모자라 거룩한 스님들로 바뀐 것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바뀐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스님은 승가의 일원일 뿐

 

누구나 삭발을 하고 회색승복을 입으면 승보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귀의의 대상, 의지처, 피난처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문제에 대하여 인터넷 필명 실론섬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가 스님들을 대할 때 개인적인 존경이나 예경심이 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럼에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그 스님은 승가의 일원일 뿐이지
그 스님 자체가 승가는 아니라는 것 입니다.

 

(실론섬님)

 

 

올려진 글이 또 한 군데 실리고 있다. 인터넷카페 원불사(源佛寺)이다. 카페를 운영하는 법우님이 글을 매일 올리고 있어서 블로그와 카페 두 군데서 글을 볼 수 있다.

 

카페에 올려져 있는 글에 대하여 거의 매일 평가를 해주는 님이 있다. 인터넷필명 실론섬님이다. 필명이 말해 주는 것처럼 현재 스리랑카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재가불자님이시다. 테라와다 불교 사정에 밝고 또한 교리적으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실론섬님의 글을 읽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실론섬은 삼귀의에서 승보가 스님이 아니라 상가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초기경전을 근거로 하고 있고 스리랑카 현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래서  스님은 승가의 일원일 뿐이지 그 스님 자체가 승가는 아니라고 한다.

 

테라와다불교에서는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는 삼귀의를 띠사라나(Tisarana)라 한다. 우리말로 세 가지 귀의처라는 뜻이다. 그런데 세 번째를 보면 상강사라낭갓차미(Sangham saranam gacchami)’ 라고 되어 있다. 이를 해석하면 상가에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스님이 아니라 승가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삼귀의에서 승보는 스님이 아닌 승가공동체임이 명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는 한글삼귀의문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님을 승보로 하였을 때 어떤 문제가 발생될까? 다음 네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승가의 존속이유가 없어진다

 

실론섬님은 글에서 붓다의 가르침 어디에도 일개 뛰어난 개인의 수행승을 외호하고 공양하고 따르라는 말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말은 무슨뜻일까? 만일 승보를 스님으로 한정해 버리면 승가가 존속할 이유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인기 있는 스님, 똑똑한 스님, 거룩한 스님들의 개인플레이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스님들만 있고 승가가 없는 불교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불교가 있다. 일본이다. 일본의 경우 승가가 없다고 한다. 메이지 시대 폐불훼석(廃仏毀釈)에 따라 승려들이 대처육식을 하게 됨에 따라 승가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직업으로서 스님은 있지만 계율대로 사는 스님들은 없는 것이다. 불교가 국가권력의 탄압에 굴복하여 승가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경우 스님들만 있을 뿐 승가가 없다. 다만 있다면 직업을 가지고 세습하는 스님들의 모임인 재가승가가 있을 뿐이다.

 

승가가 사라진 일본불교에서 수계의식은 어떻게 할까? 율사가 없기 때문에 외국에서 초빙한다고 한다. 계율의 나라 중국에서 율사를 초빙하여 수계의식을 치룬다고 한다. 중국에는 계율이 살아 있어 승가가 존속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스님들이 승가공동체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각자 뿔뿔이 흩어져 토굴 같은 곳에 혼자서 산다면 이를 어떻게 보아야할까? 더 이상 승가로 볼 수 없다. 그런 개별 스님들이 승보가 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스님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계를 지키며 살아야 진정한 승가라 볼 수 있다. 그런 승가가 귀의의 대상이고, 의지처이고 피난처이다.

 

둘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자자와 포살이 있을 수 없다

 

승가를 승보로 보아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자자(Pavāraa , 自恣)와 포살(uposatha, 說戒)이다. 자자란 무엇인가? 이는 초기경에 실려 있는 자자장면은 다음과 같다.

 

 

[세존]

자 수행승들이여,

지금 그대들은 마음 편히 말하라. 그대들이 볼 때 내가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무언가 비난해야 할 것이 있는가?”

 

이와 같이 말했을 때 존자 싸리뿟따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왼쪽 어깨에 가사를 걸치고 세존께서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싸리뿟따]

세존이시여,

저희들이 볼 때 세존께서는 몸이나 말로 행한 것에 아무 것도 비난해야 할 것이 없습니다.”

 

(빠와라나경-Pavāraasutta-참회의 모임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8.7, 전재성님역)

 

 

빠와라나(自恣)는 안거의 해제일인 보름날에 수행승이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그 동안의 지은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고 비판을 구하는 행사라 한다. 그런데 경을 보면 부처님이 제자들 앞에서 자신의 허물이 있는지 물어 본다. 그러자 사리뿟따가 아무 비난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수행승이 대중 앞에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행한 것중에 비난 받을 것이 없는지 물어 보는 것이 자자행사이다.

 

다음으로 우뽀사타(uposatha)가 있다. 잔뚜의 경(S2:25)에 우뽀사타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각주에 따르면 우뽀사타의 의미는 계를 설하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설계(說戒)라 한다. 즉 보름날이나 신월의 포살일에 수행승들이 자신들의 의무계율(계본)을 외우고, 일반신도들은 설법을 듣거나 수행을 하기 위해 승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빠와라나(자자)와 우뽀사타(포살)는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고 오늘날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자와 포살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승가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음을 말한다.

 

만일 스님들이 함께 모여 살지 않는다면 자자와 포살은 없을 것이다. 함께 모여 살기 때문에 서로 잘못을 지적하고 참회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를 지키기 때문에 사쌍팔배의 성자가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사쌍팔배의 성자의 공동체가 성스런 상가, 즉 성승가(聖僧伽)이다. 그런 성승가가 귀의처이자 의지처이고 피난처이다. 그래서 상가가 승보인 것이다.

 

셋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에게 보시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글삼귀의문의 내용과 같이 스님들을 승보로 간주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보시를 해도 스님들에게 하는 것이다. 평생 모은 재산을 말년에 승가에 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있는 스님에게 하는 것이다.

 

거액의 보시를 받은 스님은 절을 짓고 선원을 만든다. 그리고 주지, 선원장, 이사장 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절을 사유화 한다. 이 모두가 스님을 승보로 보고 있기 때문이라 본다. 만일 승가를 승보로 본다면 거액의 말년 보시금이 승단으로 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고따미]

 세존이시여,

이 한 벌의 새 법복은 특별히 세존을 위하여 제가 손수 짜고 손수 기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를 위하여 이것을 영납하시고, 애민히 여겨 받아주십시오.”

이와 같이 말하자 세존께서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고따미여,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 그대가 승단에 보시할 때에 곧 나와 승단을 공양하는 것이 됩니다.”

 

(닥키나위방가경-Dakkhiāvibhagasutta-보시에 대한 분석의 경, 맛지마니까야 M142, 전재성님역)

 

 

부처님의 양어머니 마하빠자빠띠가 부처님에게 손수 기워 만든 법복을 보시하려 하자 부처님은 승단에 이것을 보시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이렇게 부처님은 수행승에게 개별적으로 보시하는 것을 금하였다. 보시는 승단에 하는 것이다.

 

 

넷째, 스님을 승보로 보면 스님이 스님에게 귀의하는 모순이 발생한다.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였을 때 세 번째 문제는 출가승의 귀의대상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어느 법우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주셨다.

 

 

더우기 승가란 부처님 가르침대로 수행을 잘 할 것 같으면 사쌍팔배가 실현 되는 곳으로써의 승가공동체로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수행해서 사쌍팔배안에 들고자 노력하는 승가공동체로써 거룩한 승가라함이 더욱 타당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한 곳에 출가, 재가불자가 귀의하는 것 아닌가요?    

수행으로써 사쌍팔배 안에 들려면 출가승도 거룩한승가에 귀의 하여 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쌍팔배가 실현되는거룩한 승가공동체의 승가를 재가자는 믿고 의지하게 되는게 아닐까요?

 

(T법우님)

 

 

T법우님에 따르면 출가승이 출가승에게 귀의한다는 것이 맞지 않다는 지적이다. 현행 한글삼귀의문에 따르면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였을 때 재가불자들은 문제가 없겠지만, 출가자가 출가자에게 귀의 한다는 것이 어색하다는 것이다. 그럴 경우 출가자가 성스런 승가공동체, 즉 성승가에 귀의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거룩한 스님들거룩한 승가와 같다고

 

스님을 승보로 해서는 안되는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스님들이 강력하게 반발하는 것 같다. 카페의 댓글에 올려진 어느 스님의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말 삼귀의..."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제대로 보셔야 합니다. "스님"이 아니고 "스님들"이며,그냥 "스님"이 아니고 "거룩한 스님들"이라고 옮겼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불타와 달마와 승가라고 하거나,붓담,담맘,상강 사라남 가차미라고 하는 것은 뭐라고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부처님,거룩한 가르침,거룩한 승가(상가)에 귀의합니다라는 옮김은 잘 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스님들이라는 말에 다 들어있습니다.

 

(W스님)

 

 

W스님에 따르면 우리말 삼귀의 문 거룩한 스님들이라는 표현에 거룩한 상가(성승가)’라는 말이 다 들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개별스님이 아니라 스님들이라 하였고, 그것도 거룩한 스님들이라 하였기 때문에 성승가와 같은 뜻이라고 보는 것이다.

 

스님은 상가로 옮겼을 때 폐단도 지적하였다. 아파트 상가인지 초상집 상가인지 구별이 가지 않아 어감이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래서 스님들이 복수형이기 때문에 이는 단체를 뜻하고, 더구나 거룩한 말이 붙었기 때문에 거룩한 스님들거룩한 승가와 같다고 주장한다.

 

삼보를 피난처로 삼아야 하는 이유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하여 재반론도 만만치 않다. 실론섬님은 귀의 대상을 상가로 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일까?

 

일반적으로 한국의 불자들은 한글삼귀의문을 낭송할 때 삼귀의는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단 한번만 하고 그친다. 왜 귀의 해야 하는지, 왜 의지처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빠알리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세 번 하고 있다. 세 번 반복하여 총 아홉 번 다짐 하는 것이다. 왜 그토록 많이 하는 것일까? 그것은 빠알리 니까야에 따르면 뒤에 달라 붙는 것이 더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가르침과 성스런 상가에 대하여 의지해야 할만한 이유, 피난처로 삼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일까? 빠알리 니까야를 보면 부처님께 귀의해야 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귀의 해야 하는 이유

 

부처님(Buddha)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S11;3)

 불수념

가르침(Dhamma)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S11;3)

 법수념

상가(Sangha)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은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S11;3)

승수념

 

 

 

 

위 세가지 사항은 빠알리 니까야에 정형화 되어 있다. 그래서 빠알리니까야 도처에서 정형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청정도론에 따르면 위 세 가지 사항은 40가지 사마타 명상주제에 속한다. 즉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이다. 그래서 두려움이 일어날 때마다 부처님을 생각하고, 가르침일 생각하고, 성스런 상가를 생각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재가자들은 물론 출가자들에게 있어서도 붓다, 담마, 성스런 상가는 귀의처이고, 의지처이고, 피난처이다.

 

사쌍팔배의 성자는 어디서 출현하는가?

 

특히 상가의 경우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이라 하였다. 이는 사쌍팔배의 성자를 말한다. 부처님은 명백히 성자들로 이루어진 성스런 공동체가 귀의의 대상이고 복전인 것이다. 그런 승가공동를 유지하고 존속키시키기 위하여 지켜여 할 계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실론섬님의 글에 따르면 계율이라는 것이 승가를 유지하고 존속시키기 위한 단체 계율이라 한다. 스님 각자에게 적용되는 개별 계율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승가가 없다면 계율도 없고, 계율이 없다면 승가도 없을 것이다.

  

스님들이 함께 모여 살지 않고 토굴 등에서 개별적으로 살아 갈 때, 재가자 도움 없이 자급자족할 때, 직업화 되었을 때 승가공동체라 볼 수 없다. 스님만 있을 뿐 승가공동체가 없기 때문이다. 승가공동체가 없는 불교는 더 이상 불교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계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사쌍팔배의 성자가 출현할 수 없다.

 

그러나 스님들이 함께 모여 살며 승가공동체를 형성한다면 계율을 지키며 자자와 포살을 행할 것이다. 계율을 지키고 가르침을 실천할 때 사쌍팔배의 성자가 출현할 수 있다. 성스런 승가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이다. 불자들은 그런 공동체에 보시해야 한다. 그리고 의지해야 한다.

 

꿈쩍도 하지 않는 종단

 

한글삼귀의문의 모순에 대하여 그동안 수 차례 글을 썼다. 이런 문제점에 대하여 학자들도 지적하였고, 마성스님도 자신의 블로그에서 “불교도들이 행하는 삼귀의례에서 승()은 아리야 상가, 즉 성승가(聖僧咖)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도들이 신앙적으로 귀의하는 대상은 삭발염의한 비구-비구니가 아니라 불교도들의 이상인 사쌍팔배의 성자인 것이다. (교단과 승단의 차이점)”라 하였다.

 

이렇게 뜻 있는 분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종단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거룩한 스님들’ 이라는 말 자체가 ‘거룩한 상가’임을 뜻한다고 애둘러 말한다. 하지만 ‘거룩한 스님들’과 상가는 다른 말이다. 거룩한 스님들은 개별스님이 모인 복수형을 의미하지만 상가는 ‘공동체’를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별스님들과 공동체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왜 고치지 않는 것일까?

 

스님을 승보로 간주 하였을 때 이득은?

 

최근 불교신문에 따르면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의제개혁특위가 만들어 졌다고 한다. 현재 스님들의 승복이 율장정신에도 맞지 않고 시대에도 뒤떨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대단히 바람직한 현상이다.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스스로 개혁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한글삼귀의문은 고치지 않는 것일까?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일까?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대하여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진짜 스님을 승보로 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스님을 승보로 간주 하였을 때 많은 이득이 있을 것이라 보여진다. 스님을 부처님과 가르침과 동급으로 하였을 때, 불보와 법보와 승보 이렇게 삼보 중의 하나로서 스님을 보았을 때 돌아 올 이익은 매우 많을 것이다.

 

우선 신도들이 믿고 따를 것이다. 스님을 부처님과 동격으로 생각 하여 스님의 말이라면 믿고 따르는 것이다. 더구나 그냥 스님도 아니고 거룩한 스님이라고 하였을 때 더욱 믿고 따를 것이다. 그래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고 하였을 때 스님을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생각하는 것이다. 특히 교리나 교학에 잘 모르거나 나이 드신 노보살들이 더욱 그럴 것이다.

 

평생모은 재산을 스님에게 맡기라고

 

어떤 스님은 법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산을 남겨주면 자식을 불효로 만든다. 그러니까 딱 나누어 줄것은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누구한테 준다. 스님한테 기증하기 바랍니다(웃음, 박수). 그러면 제가 그걸 갖고 49재도 지내주고…”

 

 

평생모은 재산을 스님에게 맡기라는 것이다. 자식에게 주면 재산다툼으로 분란이 일어나고 또 제사도 지내주지 않을 것이라 한다. 그럴 경우 차라리 스님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고 한다. 스님에게 맡기면 49재는 물론 매년 기일 때마다 제사를 지내주고, 각종 재가 있을 때 마다 축원해주고, 또 천도재까지 지내 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듣고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스님을 부처님처럼 믿고 따르고 의지하는 불자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에서 사설사암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부자스님,  가난한 종단

 

우리나라에서 종단은 가난하다고 한다. 불사를 할려고 해도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한다. 포교당을 짓고, 병원을 만들고, 학교를 만들려고 해도 돈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개별 스님들은 부자가 많다고 한다. 스님은 부자인데 종단은 가난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혹시 스님을 승보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스님을 승보로 보기 때문에 보시를 해도 승단에 하는 것이 아니라 스님 개인에게 보시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쳐야 할 것이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럼에도 바로 잡지 않는다면 어떤 이득을 취해서 라고 밖에 판단 할 수밖에 없다.

 

마음속의 삼귀의문

 

어느 법우님은 남겨 놓은 댓글에서 삼귀의를 할 때 소감을 남겨 놓았다. 각종 법회에 참석하여 삼귀의문을 낭송할 때 세 번째인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구절에서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바꾸어 부른다고 하였다. 스스로 그렇게 한지 오래 되었다고 한다. 마찬가지이다. 삼귀의를 할 때 그대로 따라 부르지 않는다. 반드시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고 바꾸어 부른다.

 

 

2013-04-3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