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불행과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7. 11:58

불행과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런 질문에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산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서 그다지 행복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라 본다. 행복하다면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 행복하더라도 그 행복이 언제 깨질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도 영원한 행복이다. 지금 불행한 사람은 이 불행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려 하고, 지금 행복한 사람은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행복이란 삶에서 또는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껴 흐믓한 상태를 말한다. 일종의 느낌이다. 따라서 행복은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이다.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사람은 조건이 바뀌면 행복끝 불행시작이 될 수 있고, 지금 불행한 사람은 조건이 바뀌면 불행끝 행복시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불교에서도 행복을 말한다. 부처님도 행복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빠알리어로 행복을 뜻하는 수카(sukha)’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행복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목표일까? 각묵스님은 각종기고문과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표현하였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된다.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각묵 스님/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예로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는 사성제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멸성제에서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괴로움의 끝은 행복이 아니라 해탈인 것이다.

 

이고득락은 어디서 유래 되었을까?

 

그렇다면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 되었을까? 이는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에서 “‘모든 고()를 버리고 구경의 낙()을 얻는다. 離一切苦하고 . 離一切苦 이니라. 모든 고()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입니다.(백일법문)”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따르면 이고득락이라는 말이 대승기신론에서 유래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의 승려 마명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대승 불교의 교리를 통론적으로 서술한 책을 말한다. 따라서 이고득락은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의 어느 부분에 언급되어 있을까? 인연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一者因緣總相.
所謂爲令衆生離一切苦得究竟樂 非求世間名利恭敬故

 

첫째는 총체적 이유이다. 모든 중생에게 일체의 괴로움을 여이게 하고 성불 해탈의 낙인 궁극의 낙을 얻도록 하는 자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의 명예나 이익 존경을 구하기 위해 본 논을 짓는 것이 아님이다.

 

(대승기신론, 인연분)

 

 

이일체고득구경락(離一切苦得究竟樂)의 준말이 이고득락(離苦得樂)’임을 알 수 있다. 중생에게 일체의 괴로움을 여의게 하고 궁극적행복을 얻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견성성불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승불교 열반경에서 말하는 상락아정에서 락()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내용을 확인시켜주듯이 이고득락에 대한 국어사전에 따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열반락(涅槃樂)을 얻는 것라고 정의 되어 있다. 괴로움을 여의어 궁극적으로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 대승불교의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고득락에서 낙은 열반락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초기불교용어로 부적절하다. 이고득락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상락아정은 부처님의 무상, ,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법구경의 행복에 대한 게송

 

각묵스님은 기고문에서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을 말하였다. 세 가지로 구분된 것을 보면 모두 공통적으로행복에 대한 것이다. 마치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처럼 보인다.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일까?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처럼 보이는 것은 경전에서 부처님이 행복에 대해서 말씀 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법구경에서 행복에 대한 게송을 모았다. 전재성박사의 번역이다.

 

 

1.

Mā pamādamanuyuñjetha                 마 빠마다마누윤제타

mākāmaratisanthava                  마 까라마띠산타왕

appamatto hi jhāyanto                 압빠맛또 히 자얀또

pappoti vipula sukha               빱뽀띠 위뿔랑수캉.

 

방일에 사로잡히지 않고

감각적 욕망의 쾌락을 가까이 하지말라.

방일하지 않고 선정에 드는 님은

광대한 지복을 얻는다.(Dhp 27)

 

2.

Dunniggahassa lahuno                  둔닉가하싸 랄후노

yatthakāmanipātino                    얏타까마니빠띠노

cittassa damatho sādhu                따차 다마토 사두

citta danta sukhāvaha            땅 단땅 수카와항.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 온다.(Dhp 35)

 

3.

Sududdasa sunijpua               수둣다상 수니뿐앙

yatthakāmanipātina                  얏타까마니빠띠낭

citta takketha medhāvī              찟땅 락께타 메다위

citta gutta sukhāvaha            찟땅 굿땅 수카와항.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지만,

지극히 보기 어렵고 미묘한 마음을

현명한 님은 수호해야 하리.

마음이 수호되면, 안락을 가져온다.(Dhp 36)

 

4.

Puññañce puriso kayirā                뿐냔쩨 뿌리소 까이라

kayirā na punappuna               까이라 낭 뿌납뿌낭

tamhi chanda kayirātha              땀히 찬당 까이라타

sukho puññassa uccayo.                수코 뿐냐싸 웃짜요.

 

선한 일을 행했으면,

더욱 더 거듭해야 한다.

그 의욕을 북돋우어야 하리.

공덕이 쌓이면 행복하다.(Dhp 118)

 

5.

Na ve kadariyā devaloka vajanti     나 웨 까다리야 데와록깡 와잔띠

bālā have nappasasanti dāna        발라 하웨 납빠상산띠 다낭

dhīro ca dānam anumodanāno            디로 짜 다낭 이누모다마노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         떼네와 소 호띠 수키 빠랏타.

 

인색한 자는 천상계에 이르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보시를 칭찬하지 않는다.

현명한 자는 보시를 기뻐하면서

그것으로 실로 내세의 안락을 얻는다. (Dhp 177)

 

6.

Sukho buddhānamuppādo                 수코 붇다나뭅빠도

sukhā saddhammadesanā                 수카 삿담마데사나

sukhā saghassa sāmaggī              수카 상가싸 사막기

samaggāna tapo sukho.               사막가낭 따뽀 수코.

 

깨달은 님의 출현도 행복이고

올바른 가르침의 베품도 행복이고

참모임의 화홥도 행복이고

화합한 님들의 수행도 행복이다. (Dhp 194)

 

7.

Natthi rāgasamo aggi                  낫티 라가사모 악기

natthi dosasamokali                   낫티 도사사모 깔리

natthi khandhasamā dukkhā             낫티 칸다사마 둑카

natthi santipara sukha             낫티 산띠빠랑 수캉.

 

탐욕에 비길 불은 없고

성냄에 비길 죄악은 없다.

존재의 다발에 비길 고통은 없고

적정보다 나은 안락은 없다. (Dhp 202)

 

8.

Jighacchāparamā rogā                  지갓차빠라마 로카

sakhāraparamā dukkhā                 상카라빠라마 둑카

eta ñatvā yathābhūta               에땅 냐뜨와 야타부땅

nibbāna parama sukha.            닙바낭 빠라망 수캉.

 

굶주림은 가장 심각한 질병이고

형성된 것들은 극심한 괴로움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면,

열반 곧, 위없는 지복을 얻는다. (Dhp 203)

 

9.

Ārogyaparamā lābhā                    아로기야빠라마 랍바

santuṭṭhiparama dhana              산뜻티빠라망 다낭

vissāsaparamā ñāti                    위싸사빠라마 냐띠

nibbāna parama sukha             닙바낭 빠라망 수캉.

 

건강이 최상의 이익이고

만족이 최상의 재보이고

신뢰가 최상의 친구이고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Dhp 204)

 

10.

Sāhu dassanamariyāna                사후 다싸나마리야낭

sannivāso sadā sukho                  산니와소 사다 수코

adassanena bālāna                   아다싸네나 발라낭

niccameva sukhī siyā.                 닛짜메와 수키 시야.

 

고귀한 사람은 만나면 좋고

함께 지내면 언제나 행복하다.

어리석은 자들을 멀리 여의면,

언제나 행복을 여의리. (Dhp 206)

 

11.

Atthamhi jatamhi sukhā sahāvā         앗탐히 자땀히 수카 사하와

tutthi sukha ya itarītarena           뚵티 수카 야 이따리따레나

puñña sukha jīvitasankhayamhi      뿐냥 수캉 지위따상카얌히

sabbassa dukkhassa sukha pahāna    삽바싸 둑카싸 수캉 빠하낭.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벗이 행복이고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고

목숨이 다할 때에는 공덕이 행복이고

일체의 괴로움을 버리는 것이 행복이다. (Dhp 331)

 

12.

Sukhā matteyyatā loke                 수카 맛떼이야따 록께

atho petteyyatā sukhā                 야토 뼅떼이야따 수카

sukhā sāmaññatā loke                  수카 사만냐따 록께

atho brahmaññatā sukhā                아토 브라흐만냐따 수카.

 

세상에서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고

또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세상에서 수행자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고

또한 거룩한 님을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Dhp 332)

 

13.

Sukha yāva jarā sīla              수캉 챠와 자라 실랑

sukhā saddhā patiṭṭhitā                수카 샅다 빠띹히따

sukho paññāya pailābho               수코 빤냐야 빠띨라보

pāpāna akaraa sukha             빠빠낭 아까라낭 수캉.

 

늙어도 계행이 행복이고

믿음이 확립된 것도 행복이다.

지혜를 얻음이 행복이고

악을 짓지 않음도 행복이다. (Dhp 333)

 

14.

Mettāvihārī yo bhikkhu                멭따위하리 요 빅쿠

pasanno buddhasāsane                  빠산노 붇다사사네

adhigacche pada santa             아니갓체 빠당 산땅

sakhārūpasama sukha               상카루빠사망 수캉

 

수행승이 자애롭게 살고

깨달은 님의 가르침에 기쁨을 발견하면,

모든 형성이 지멸하여

행복한 적멸의 경지를 얻는다. (Dhp 368)

 

15.

Pāmojjabahulo bhikkhu                 빠못자바홀로 빅쿠

pasanno buddhasāsane                  빠산노 붇다사사네

adhigacche pada santa             아디갓체 빠당 산땅

sakhārūpasama sukha              상카루바사망 수캉

 

넘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수행승이 깨달은 님의 가르침을 믿으니,

모든 형성의 지멸,

적정의 경지, 안락을 얻는다. (Dhp 381)

 

 

위 게송을 보면 법구경판 행복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법구경에서는 행복에 대한 품이 별도로 있다. 15품인 수카왁가(sukhavagga)가 그것이다. 이를 우리말로 안락의 품이라 번역하였다. 행복을 뜻하는 빠알리어 수카(sukha)는 행복뿐만 아니라 안락(安樂) 또는 지복(至福)으로도 번역되기 때문이다.

 

법구경에서 말하는 행복(sukha)

 

법구경에서 말하는 행복(sukha)은 매우 다양하다. 선정에 드는 것이 행복(Dhp 27)이라고도 하고 ,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행복(Dhp 35)라고도 한다. 공덕을 쌓는 것도 행복(Dhp 118)이고, 보시를 하여 내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행복(Dhp 177)이라 한다.

 

그런데 열반을 행복이라고  한 게송도 많다. “적정보다 나은 안락은 없다. (Dhp 202), 열반 곧, 위없는 지복을 얻는다. (Dhp 203),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Dhp 204)”와 같은 내용이다.

 

한편 고귀한 사람을 만나고 어리석은 자를 멀리하는 것도 행복(Dhp 331)이라 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Dhp 331)이라 하여 소욕지족의 삶도 행복으로 보았다.

 

또 망갈라경(Sn2.4)를 마치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게송도 있다.  어머니, 아버지, 수행자, 거룩한 님을 공경하는 것도 행복 (Dhp 332)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망갈라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라 하였다.

 

이렇게 15개에 달하는 행복게송을 보면 각묵스님이 말한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총망라 된 듯이 보인다.

 

금생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

 

행복게송에서 금생의 행복에 대한 것을 들라면 12번항의 세상에서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고 또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세상에서 수행자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고 또한 거룩한 님을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Dhp 332)”를 들 수 있다. 마치 망갈라경(Sn2.4)의 일부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행복경이라 번역하고 있는 망갈라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Sn2.4)”등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리고 후렴구에서 “에땅 망갈라뭇따망(eta magalamuttama)”이라 하였다. 이는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구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이것이 최상의 행복입니다”라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망갈라(magala)가 행운, 길상, 축복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의 법구경게송에서는 모두 수카(sukha) 로 되어 있어서 행복, 안락, 지복으로 번역되어 있다.

 

비록 망갈라경과 법구경에서 같은 행복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쓰이는 단어가 다르다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망갈라와 수카를 구분없이 모두 행복으로 번역하였다면 이는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원어를 모르는 독자들은 그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번역이 가장 이상적일까? 이는 한글로 번역된 것을 다시 빠알리어로 옮겼을 때 그 뜻이 통하면 훌륭한 번역이라 본다. “최상의 축복입니다하였을 때 축복에 대히여 행복을 뜻하는 수카가 아닌 망갈라로 재번역하였다면 제대로 번역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금생의 행복에 대한 게송을 보면 윤리적 가르침으로 귀결된다. 부모를 모시고 계행을 지키고 보시하면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길상이라 하였다.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 정신적으로 안락한 것을 원한다. 이는 오욕락으로 귀결된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 다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즐기는 것을 말하지만, 세상에서의 오욕락은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이다. 그래서 금생의 행복만을 이야기 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삶에서 또는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껴 흐믓한 상태에 집착하기 쉽다. 그리고 고생끝 행복시작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을 행복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이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 고 있다.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을 때 느끼는 환희, 제대를 하여 위병소 정문을 통과할 때의 가벼운 발걸음, 입사시험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기쁨 등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갖가지 행복은 일시적이다. 일종의 행복감이다. 일시적으로 행복을 느낄 뿐이지 행복이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을 바란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금생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내생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

 

지금 행복한 사람들은 이 행복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지금 불행에 처한 사람은 어서 빨리 이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어느 경우이든지 갈애가 생긴다. 그런 그래서 행복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아서 괴롭고, 불행은 불행한 것 자체로 인하여 괴롭다. 이래저래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생에서는 행복만 있는 천상에 나기 바란다.

 

천상에 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5번항의 법구경게송에서 “현명한 자는 보시를 기뻐하면서 그것으로 실로 내세의 안락을 얻는다. (Dhp 177)”라고 하였다. 보시하는 생활, 즉 봉사하는 삶을 가지면 천상에 태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계행을 지키고 보시하는 삶을 살아 가는 모든 사람은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초심자나 재가불자, 보통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오계를 지키고 보시하는 것은 매우 건전한 생활이다. 이는 공덕을 쌓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네.(S1:32)”라고 하였다. 이런 공덕은 노자돈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법구경에서 그대는 떠남의 문턱에 서 있으나, 그대에게는 노잣돈 조차도 없구나.(Dhp 235)”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노잣돈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저 세상을 여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오계를 지키고 보시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이는 욕계천상을 말한다. 그런 천상의 생활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수()와 복()의 세상이다. 수명과 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인간세상의 경우 지은 업 때문에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공덕을 쌓아 태어난 천상세계는 수명이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천상도표를 보면 수명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 바로 위의 세상인 사천왕천의 경우 500천상년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9백만년이다. 바로 위의 삼십삼천의 경우 36백만년을 산다. 이렇게 보시와 지계와 믿음을 실천한 존재들은 천상에서 수명대로 살면서 그 복을 누린다. 그런 천상에서 불행은 없고 오로지 즐거움만 넘쳐난다. 그래서 모두 천상에 태어나기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에 태어나는 자들은 반드시 불교인이어야 할까? 경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외도들도 천상에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이다.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를 가졌지만 봉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외도 들 역시 천상에 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죽으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가진 단멸론자들은 예외이다. 보시에 대한 과보, 업에 대한 과보 등을 부정하여 공덕을 쌓지 않기 때문이다.

 

천상은 욕계천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천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천상은 선정수행의 과보에 대한 공덕으로 태어나는 곳이라 한다. 이는 1번항의 방일하지 않고 선정에 드는 님은 광대한 지복을 얻는다.(Dhp 27)”라는 게송에서 알 수 있다. 선정수행을 하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행복이 넘쳐 나는 곳이 색계천상이다. 구체적으로 색계이선천이다. 색계 이선천 중에서도 극광천(極光天,abhassara)’에 대한 묘사를 보면  ,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Dhp 200)”라고 되어 있다. 극광천에 대한 묘사는 디가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선정수행에 대한 과보로 태어난다는 극광천은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D27)”라고 표현 되어 있다. 스스로 빛이나고 허공을 날아 다니고 기쁨을 먹고 사는 극광천의 중생들은 수명이 8겁으로 되어 있다. 선정수행의 공덕으로 수명과 복이 보장된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내생의 행복이다. 보시와 지계로 욕계천상에 나는 것, 선정수행으로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 나는 것이다. 그런 천상은 오로지 기쁨과 행복, 또는 평정으로 가득찬 곳이다. 그런데 행복만 있는 천상의 삶은 어떤 것일까? 태어날 때부터 행복만 있고 고통과 불행이 없는 곳에서 태어난 자들은 과연 행복을 행복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까?

 

천상에서 수명대로 사는 뭇삶들은 기쁨과 행복만 느낄 뿐이다. 슬픔과 불행을 모르기 때문에 그 기쁨이 기쁨인지, 그 행복이 행복인지 알 수 없다. 그런 행복을 행복이라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떤 이는 기독교의 천국에 대하여 닫힌 지옥이라 한다. 오로지 영원한 행복만 있는 천국은 행복이 행복인줄 모르기 때문에 지옥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천상은 수명과 공덕이 다 하면 내려 가야 한다. 그럴 경우 ‘행복끝 불행시작’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내생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궁극적인 행복은

 

그렇다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법구경 게송 14번 항의 모든 형성이 지멸하여 행복한 적멸의 경지를 얻는다. sakhārūpasama sukha, Dhp 368)”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열반의 실현이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열반상태는 어떤 것일까?

 

빠알리니까야에서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 중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볼 수 있다.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서 나온 수행승에게 어떠한 접촉이 경험됩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서 나온 수행승의 마음은 세 가지 접촉, 즉 비움의 접촉, 인상 없음의 접촉, 바램 없음의 접촉이 경험됩니다.”

 

(쭐라웨달라경-Cūavedalla Sutta-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님역)

 

 

교리문답의 작은 경이라고 이름 붙여진 쭐라웨달라경에 두 사람이 문답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전에 부부 이었다. 위사카(visākha)가 전남편이고, 담마딘나(dhammadinna)가 전부인이다. 그런데 전부인 담마딘나는 아라한이다. 전남편이 공속하게 궁금한 것에 대하여 문의 하자 전부인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장면이다.

 

수행녀 담마딘나는 상수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가 상수멸인데 이는 열반을 뜻한다.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九次第定)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단계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부처님과 동일한 깨달음의 경험을 하는 단계이다.

 

열반은 어떤 상태인가?

 

담마딘나는 상수멸정으로부터 나왔을 때 비움의 접촉, 인상 없음의 접촉, 바램 없음의 접촉이렇게 세 가지가 경험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식과 지각이 멸한 상태, 즉 상수멸(열반) 상태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자에게 어느 것이 제일 먼저 소멸합니까, 신체의 형성입니까 언어의형성입니까 마음의 형성입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자에게 먼저 언어의 형성이 소멸하고 그 후에 신체의 형성이 소멸하고 그 후에 마음의 형성이 소멸합니다.”

 

(쭐라웨달라경-Cūavedalla Sutta-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님역)

 

 

상수멸정에 들 때의 상태를 말한다. 가장 먼저 소멸되는 것이 언어의 형성이고, 다음으로 신체의 형성이 소멸하고, 마지막으로 마음의 형성이 소멸한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두 번째 선정에서 언어의 형성인 사유와 숙고가 멈추고, 네 번째 선정에서 신체적 형성인 호흡이 멈추고, 마음의 형성인 지각과 느낌은 아홉번째 선정이라고 할 수 있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saññ ā vedayitanirodha, 想受滅)을 성취함으로서 멈춘다.(Pps.II.365)”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마치 죽은 듯이 보일 것이다. 그래서 교리문답의 큰경(M43)에 따르면 죽음과 상수멸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죽음이란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이 몸을 떠나는 것(M43)’으로 설명되지만, 상수멸을 성취한 수행자는 세 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에 출정(出定)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수멸의 상태는 마치 죽은 것처럼 인식(, saññā)과 느낌(, vedana)이 소멸된 상태이기 알 수 없다. 다만 출정하였을 때 알 수 있는데, 그때 ‘비움의 접촉(空觸, suññato phassa), 인상 없음의 접촉(無相觸, animitto phassa), 바램 없음의 접촉(無願觸, appaihito phassa)’을 경험함으로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각주에 따르면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상태의 성취에서 일어날 때의 의식의 초기상태는 비움(), 인상없음(無相), 바램없음(無願)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고유한 상태와 그 대상이 열반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열반을 체험 하였을 때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가 된다고 한다. 마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보듯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진다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한다. 어떤 표상이나 바램없이 순수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행복은 열반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열반 그 상태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이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대하여 열반락이라 하여 마치 어떤 주체가 있어서 인식하고 느끼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은 것으로 본다.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

 

법구경 게송으로 본다면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궁극적 행복이라 하였을 때 열반 그 상태, 즉 ‘열반락’을 행복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상락아정 할 때의 열반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글이 말해 준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것이다.

 

 

고통(duhkha)과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게 된 근본 동기. 그런데 이때 ‘득락’을 ‘행복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이 마치 불교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인 듯, ‘행복’이란 말을 자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은 조심해야하지 않을지? 왜냐하면 불교를 믿는 것은 깨치기 위한 것이지 세속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쉽게 이야기해 그것은 일체의 형상은,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실상이 없으며 따라서 무상한 것이며, 무상하다는 것은 공 ()을 의미하며, 공은 곧 무아 (無我)이기 때문에 행복이 붙을 곳이 없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행복 아닌 행복이며, 또 열반이란 행복과 욕망을 포함한 일체의 상()에 대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면, 무아 (無我)에다 불이 꺼진 상태에서 무슨 행복을 얻는다는 것인지? 따라서 ‘이고득락’에서, ‘득락’을 굳이 ‘행복’이라는 표현을 써야할지 잘 모르겠다

 

(이고득락 離苦得樂, 실용 한영불교사전)

 

 

이고득락은 대승불교용어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말하는 열반은 즐거운 것, 행복한 것으로 묘사 된다. 열반락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열반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이므로 알 수 없다. 그런데 열반을 즐거움, 행복으로 느낀다면 상수멸정 상태가 아니라 선정상태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에 대하여 이고득락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고생끝 행복시작이 아니라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 하였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의 소멸을 통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이런저런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모두 다 행복을 이야기 한다.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모든 종교에서도 역시 행복을 말한다.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처님은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만일 불교가 단지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면 다른 종교와 큰 차별이 없다. 그러나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것이 열반이다. 다시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인 행복이라 한다.

 

그렇다면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이 불행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나보다 더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았을 때 나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 없는 윤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나 보다 더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았을 때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2)”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은 자세가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한량없는 윤회속에서 할 것 못할 것 다 해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무슨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 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2)”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이 불행과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본다.

 

 

 

THE HAPPY SAD

 

 

 

사람들은 이런저런 행복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풍덩빠져 노니는 행복 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2013-05-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