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방송 이사회 막말퍼레이드, 누구책임이 더 큰가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인가
출가와 재가의 막말퍼레이드가 점입가경이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불교방송 이사회에서 스님이사와 재가이사가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파워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지나쳐 독설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그런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 이사A: "아주 행위가 불손하고만, 왜 그렇게 큰소리를 쳐, 당신이 신도야 뭐야, 신도면 신도답게 해. 신도는 저게 무슨 신도야"
스님 이사B : "쳐다보면 어떡할 거요. 한번 더 (물컵으로 탁자를)쳐보지. 이런 사람을 이사라고 인정해야 하는 거요"
스님 이사 C "어디서 법을 개뿔같이 배워 와가지고 언어 폭력이나 하느냐"
재가 이사 A : "무슨 어른이 있어. 당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느냐. 종하 스님 제외하고 나보다 나이가 많느냐. 당신들 다 나보다 어려"
재가 이사 B : "대중이 무슨 대중이야. 불교신도가 대중이지. 당신들 스님들 1만 명이 불교 주인인줄 알아요?"
재가 이사 C : "우리 스님들의 생각이 지금 글러먹었단 말이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하셨어요"
(BBS 이사회 무슨 말 오갔나…진흥원 이사, 스님들에 험담하며 따져, 불교닷컴 2013-05-09)
사진: 불교포커스
대화내용을 보면 도저히 불교인들의 말이라 보여지지 않는다. “개뿔같이” “글러먹었다” 등 시정잡배들이나 할 소리를 불교지도층에서 하고 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인가.
부부싸움하나
불자들은 불교방송 사태에 대하여 잘 모른다. 다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이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를 막론하고 관심있게 본 것은 불교인으로 품위를 손상하는 발언이다. 시정잡배나 조폭 수준의 말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다 똑 같은 사람들이라는 양비론적 시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보면 마치 ‘부부싸움’ 하는 것 같다.
부부싸움에도 단계가 있다
불교TV(BTN)사이트에 ‘김송호박사의 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 프로가 있다. 종영프로이지만 접속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특강에서 김송호 박사는 ‘부부싸움에도 단계가 있다’라는 강의를 하였다. 미국의 가트만 연구소의 가트만박사의 연구보고서 결과를 이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부부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가트만 박사는 3,000쌍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설문조사가 1년동안 행태를 파악하였는데, 외곽에 집을 지어 놓고 CCTV를 설치하여 자원자를 받아 생활하게 한 것이다. 분석한 결과 싸움에도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난-경멸-방어-담쌓기’ 이렇게 네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째, 비난단계이다
남자들의 경우 “당신 왜 맨날 하는 게 그 모양이야?”라고 말하거나, “하루종일 집구석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와 같은 비난의 말을 퍼붓는다. 이렇게 말할 때 여자들은 어떻게 말할까. 여자들의 경우 “아니 말하는 것이 당신 엄마를 꼭같이 닮았어?” 라든가 “왜 하는 것이 없어? 당신이 그러니까 애들도 나를 깔보지” 라고 받아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부싸움에서 비난단계라 한다.
둘째, 경멸단계이다
남자의 경우 “웃기고 있네” “그걸 말이라고 해?” 라고 말한다. 또 여성의 약한 부분, 예를 들면 정치나 사회현안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 대응을 잘 못하면 “야, 그것도 모르냐?”라고 면박을 준다. 좀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머리는 뒀다가 국 꿇여 먹어?” “그런건 네가 잘 보는 TV에는 안나오디?” 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멸하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열받기 시작한다. 여자의 경우 “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있어?” “아니, 꼴에 남자라고” 이렇게 남자를 깔아 뭉게는 발언을 한다. 이 단계가 경멸의 단계이다.
셋째, 방어단계이다
자기방어의 단계라 한다. 예를 들어 여자가 “당신은 맨날 그 모양이야?” “왜 맨날 술만 먹어? 그러니까 그 모양이지”라고 공격하면, 남자들은 “내가 맨날 그랬다고 그래” “일주일에 다섯 번 밖에 안했어” 라고 말하면서 방어모드로 들어간다. 그래도 계속 비난을 하면 “당신은 그러는게 문제야” “당신은 안그랬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방어단계이다. 이제 막판으로 가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당신이나 잘하셔” “그래, 나 이러는 거 이제 알았어?” “나, 원래 그런사람이야!” 라고 말하면서 대든다. 위험수위에 온 것이다.
넷째, 담쌓기 단계이다
남자의 경우 “일절만 해라, 일절만 응?” 라든가 “알았어, 됐어, 이제 그만해!” 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역시 비슷한 말을 한다. “알았거든!” “됐거든!” 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담쌓기이다. 가장 위험수위가 높은 단계이다. 담쌓기 단계에 들어서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표현을 할 수 없다. 그 다음 부터는 각자의 길로 가게 된다. 문제가 심각해지는 단계이다.
바람을 빼 주어야
행복한 부부들도 네 가지 단계를 거칠 수 있다. 그러나 가급적 담쌓기 단계까지 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낮은 단계에서 가라앉힐려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할까?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을 해도 말꼬투리를 잡지 않는 것이다. 감정이 상해 있는 상태에서 말꼬투리를 잡아 시비가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말중에 한 단어를 집어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심한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꼬리를 잡아 대응하고 또 그 말꼬리를 잡아 심한 말을 하면 점점 커져서 “뻥”하고 터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송호 박사에 따르면 바람을 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방법은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비난단계에서는 “그래, 당신말이 맞을 수 있는데 잠깐 그것에 대해서 생각좀 해 보자”라고 말한다. 경멸단계에서는 “내가 심한 말을 했네”라든가, “잠깐, 우리 부드럽게 이야기 하자” 등으로 제의를 하면 점점 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싸움으로 인하여 ‘비난-경멸-방어-담쌓기’ 과정으로 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행복한 부부와 이혼한 부부
행복한 부부와 이혼한 부부의 말하는 방식은 어떤것일까? 두 부류의 경계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에 있다고 한다.
행복한 부부는 긍정5이고 부정1이라 한다. 5대1로 긍정적인 말이 훨씬 많은 것이다. 부정적인 말을 한 번 하면, 긍정적인 말을 다섯 번 이상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혼한 부부는 1.25대1이라 한다. 1.25라는 것은 부정적인 말이다.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이 0.25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보다 강도가 훨씬 더 세다는 사실이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부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쌓인 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긍정적인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풀어지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최소 다섯 번은 해 주어야 풀린다는 것이다. 남자는 1:1이지만, 여자는 1:5인 것이다. 여자는 부정적인 말을 한 번 들었을 때 긍정적인 말을 다섯 번 이상 해주어야 복구 될까말까 한다는 것이다.
원칙을 정해 놓고 싸워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칙을 정하라고 한다. “아무리 싸워도 같이 자야 한다”라든지, “집을 나가지 말자”라든지, “싸움이 붙으면 한 사람이 자리를 피하자”라든지 하여 원칙을 정해 놓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마음이 가라앉으면, 감정이 가라 앉으면 빠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욱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을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합의를 해 놓고, 원칙을 정해 놓고 대화를 하라는 것이다.
지금 경멸단계인가?
BBS 불교방송이사회를 보면 부부싸움 하는 것 같다. 서로 말꼬리를 잡고, 또 말꼬리를 잡아 막말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부부싸움이 비난-경멸-방어-담쌓기 단계라 하는데, 출가와 재가의 부부싸움은 현재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아마도 ‘경멸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경멸단계에사 튀어 나오는 말이 “웃기고 있네” “그걸 말이라고 해?”등의 말이라 하는데, 스님이사의 입에서 “어디서 법을 개뿔같이 배워 와가지고…”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고, 재가이사의 입에서 “스님들의 생각이 지금 글러먹었단 말이요”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다 벌어지면 각자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출가와 재가의 관계가 최악으로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하나
비난 단계를 넘어 서로 경멸하는 말을 주고 받는 단계에 와 있는 출가이사와 재가이사의 파워게임을 바라 보고 있는 불자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이럴 경우 어느 편을 들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울 때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난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출재가의 대립에 대하여 어느 불자는 재가이사의 무례함을 나무란다. 재가자로서 스님에게 막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막말을 나오게 된 요인은 무엇을까. 아마도 재가이사를 무시하는 스님이사의 말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비록 기사의 내용이긴 하지만 어느 스님이사의 “당신이 신도야 뭐야, 신도면 신도답게 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불교에서 스님과 신도의 관계는 상호수직관계, 종속관계이다. 스님은 높은 자리에 있어서 지시하고, 신도는 낮은 자리에 있어서 지시에 따르는 상하관계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불교방송이사스님들도 재가이사스님들을 낮추어 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신도들은 스님을 존중하고 높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출가와 재가는 동등한 관계
그러나 불교방송이사라는 자리는 스님이사와 재가이사가 종속관계가 될 수 없다. 비록 승가와 재가로 신분은 다를지라도 똑 같은 권한과 의무를 가진 법적이사신분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터넷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오로지 하나의 아이디로만 통용되듯이 불교방송 이사회에 속한 출가이사와 재가이사는 법적으로 동등한 관계이다. 이런 대등한 관계는 노사도 마찬가지이다.
노조에서 파업을 일으키면 사용자측과 노조측이 협상테이블에 앉게 된다. 그 경우 회사를 대표하는 사장과 노조를 대표하는 노조위원장은 동등한 관계이다. 상하수직관계, 종속관계가 될 수 없다. 사장은 사용자측의 입장에서 협상에 임하고, 노조위원장은 노동자를 대표하여 협상에 임하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이다.
마찬가지로 불교방송 이사회의 스님이사와 재가이사 역시 동등한 관계이다.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동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상하관계, 종속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에 따르면 “아주 행위가 불손하고만” “쳐다보면 어떡할 거요” “신도는 저게 무슨 신도야”라고 말하는 스님이사의 고압적이고 고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자세라면 재가이사측에서 “당신들 다 나보다 어려” “당신들 스님들 1만 명이 불교 주인인줄 알아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하셨어요” 와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도 곱다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을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발생된 문제라 보여진다.
코메디3탄을 보고
불교방송사태가 일어 났을 때 ‘승가인가 이익단체인가? 율장의 새가사(袈裟)와 함께 제2 빅쿠(Bhikkhu)선언을’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 때 ‘코메디한다’라고 하였다.
코메디 1탄은 방송을 진행하는 스타스님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만 까닥했다는 이유로 불교방송사장을 ‘승가모독’이라 몰아부쳐 파업법회를 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코메디 2탄은 방송스타스님이 생방송중인 여자 아나운서를 쫒아 내고 태연스럽게 방송을 진행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코메디는 계속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예측대로 이번 불교방송이사회에서 스님이사와 재가이사들 사이에 막말하는 코메디3탄을 보게 되었다. 또 어떤 희극을 벌일지 앞으로 코메디 4탄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다.
누구 책임이 클까?
스님이사들과 재가이사들이 막말파동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재가이사들을 비난할 지 모른다. 그래도 스님인데, 그것도 “거룩한 스님께 귀의합니다”와 같이 승보로서의 스님인데, 재가불자이사들이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기사로 접한 것이지만 막말을 보면 스님들이 더 심하다.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폄하하는 말이다. 보도 된 것이 이정도라면 보도 되지 않은 막말은 더 노골적일 수 있다.
그렇게 출가와 재가가 피터지게 싸웠을 때 누가 가장 큰 책임이 있을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스님이사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왜냐하면 출가수행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네.(S9:14)”라는 상윳따니까야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출가수행자의 탁구공만한 허물도 재가자가 눈에는 축구공 보다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명예와 이득과 환대를 바라면
출가자들은 세상을 등진사람들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멀리 떠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산다. 그런데 세상으로 돌아와 각종 감투를 쓰고 있다면 이는 출가정신에 크게 어긋난다. 더구나 명예와 이득과 환대를 바라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이런 상황을 예견해서일까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이득과 명예의 모음(Lābhasakkāra Saṃyutta, S17)’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떤 수행승이 이득과 환대와 명성에 압도되고 마음이 현혹되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배움을 그만두고 환속한다. 새가 돌풍에 맞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의 가사를 빼앗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발우를 빼앗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깔개를 빼앗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바늘쌈지를 빼앗는다.
(웨람바경-Verambasutta-돌풍의 경, 상윳따니까야 S17: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출가자들이 이득을 취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신도들로부터 환대받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런 위험에 대하여 세상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여인의 옷차림으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눈과 코 등 감각기관을 수호하라고 하였다. 항상 사띠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지금 여기에서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인 것을 알아차리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때 불행과 재난에 빠질 것이라 하였다.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부처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대하여 낚시바늘과 같은 것(S17:2)이라 하였다. 낚시 하는 자가 악마라면 낚시 바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다. 그래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라는 낚시바늘에 걸리면 악마가 이끄는대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속에 나와 이득과 명예를 추구하는 출가자는 모두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다름 없다.
2013-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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