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천상천하유아독존,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 어떻게 다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3. 5. 10. 14:06

 

천상천하유아독존,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 어떻게 다른가

 

 

 

부처님오신날이 머지 않았다. 부처님오신날로부터 일주일 이전에 개최되는 불교인들의 최대축제인 연등축제가 내일로 다가왔다. 이런 때 늘 말하여지는 것은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 무엇일까?”이다.

 

 

2012년 부처님오신날(청계사)

 

 

부처님오시날을 앞두고 각종단에서는 종정스님의 법어를 발표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는 “일상속에서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참선을 생활화해야함을 강조하였다. 반면 태고종에서는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인류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진리의 마음과 눈으로 자비와 지혜가 넘치는 청정한 안락정토를 만들어 인류가 하나의 자유공동체로 살아가는 무위자연의 세상을 이루고자”라는 법어를 발표하였다. 비교적 부처님오신날에 적합한 법어라 생각된다.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까닭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법사들은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 무엇일까?”라며 법문한다.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행복이다. 중생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하여 부처님이 이땅에 오셨다고 말한다.

 

대다수 법사들은 행복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쓰여져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는 구절을 근거로 든다.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한 목적, 부처님이 가르침을 펼치신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경에서는 이익안락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익에 대한 빠알리어는 히따(hitā)이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유익한, 이익, 친구’ 등으로 번역된다. 영역에서는 welfare(복지)라 하였다. 안락에 대한 빠알리어는 수카(sukhā)이다. 행복이라는 뜻이다. 영역에서는 ‘good of many’ 이라 하였다. 다수를 위한 좋은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빠알리어 ‘hitāya sukhāya’는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또는 ‘복지와 다수를 위한 좋은 일을 위하여’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 뭇삶들의 행복을 위하여 오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행복은 어떤 것일까?

 

한문 탄생게(誕生偈)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가장 많이 거론 되는 또 다른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탄생게일 것이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천상천하유아독족(天上天下 唯我獨尊)’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게송이다. 풀이하면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라는 뜻이다.

 

한문탄생게에는 문구가 더 붙어 있다는 것을 아는 불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문구이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자를 행복이라 번역할 수 있다.

 

빠알리어 수카(sukhā)에 대하여 행복으로 번역하지만 때에 따라 지복(至福), 안락으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편안케 하리라라는 행복케 하리라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문제가 있다.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초월적인 존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우리를 편한케 하여 주거나 행복을 주는 초월적인 존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문 ‘아당안지(我當安之)’를 “편안케 하리라”라고 번역하면 기복적인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부처님에게 기도를 하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는 존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가이드(안내자)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은 결코 신격화된 존재도 아니고 초월적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만능해결사가 아니다.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에 대한 묘사를 보면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라는 정형구를 볼 수 있다. 외도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귀의 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문구를 보면 부처님은 소원을 들어 주는 대상이 아니라 마치 ‘가이드(안내자)’와 같은 역할임을 알 수 있다. 여행을 가면 가이드가 안내를 하듯이 부처님은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병을 고쳐 주는 의사이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다. 이처럼 가이드로서, 의사로서, 스승으로서 부처님이 행복을 말한 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을 통한 행복을 말한다.

 

빠알리니까야를 통하여 가르침을 접하였을 때 마음속으로 기쁨과 희열과 행복과 안락을 느꼈다면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고 한 것이 물질적인 이익과 행복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한 이익과 행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역 탄생게를 보면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처럼, 마치 부처님이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줄 것 같은 부처님, 그리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처럼 초월적인 부처님으로 묘사 되어 있다. 과연 한역탄생게는 타당한 것일까?

 

빠알리 탄생게(誕生偈)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서 한역탄생게뿐만 아니라 또다른 탄생게가 있음을 알았다. 한역탄생게의 원조격이라 볼 수 있는 부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다.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경(D14)’에 한역 탄생게와 유사한 말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Dhammatā esā bhikkhave. Sampatijāto bodhisatto samehi pādehi patiṭṭhahitvā uttarābhimukho1 satta padavītihāre  gacchati setamhi chatte anuhīramāne , sabbā ca disā anuviloketi , āsahiñca vācambhāsati: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Ayamettha dhamm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이 경우의 원리인 것이다.

 

(마하빠다나경-Mahāpadāna Sutta-비유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4,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화자로 되어 있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을 회상하면서 91겁전에 탄생한 과거칠불중의 하나인 위빠시(vipassī)붓다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런데 경을 보면 한문경전과 다르다. 한역경전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 탄생하자마자 직접 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경에서는  91겁전의 위빠시붓다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위빠시 붓다를 비롯하여 고따마붓다에 이르기 까지 과거칠불의 행적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태어남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다. 이는 깨달음의 내용이 똑같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보여진다. 역대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으로서 모두 같은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한문탄생게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 이야기가 아니라 91겁전의 위빠시붓다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탄생게를 비교해 보니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는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부분도 있다.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비 고

한문경전

수행본기경, 강신품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대승보살사상

디가니까야

마하빠다나경(D14)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

근본가르침

 

 

한문게송 유아독족(唯我獨尊)에 해당되는 말이 가장 뛰어난 님(agga), 가장 훌륭한 님(jeṭṭha), 가장 선구적인 님(seṭṭha)’이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러나 다음 구절로 넘어가면 전혀 다른 말이 되어 버린다. 빠알리니까야에 한문게송에 대응되는  ‘삼계개고(三界皆苦)’와 ‘아당안지(我當安之)’라는 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라는 문장이 보인다. 이는 아라한 선언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Khīā jāti, vusita brahmacariya, kata karaīya, nāpara itthattāyā)”의 마지막 구절에 해당된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빠알리탄생게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Pps.IV.185에 따르면, 이 사건의 각각의 양상은 부처님의 최후의 성취들의 조건의 전조로서 설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단단하게 발을 땅위에 딛고 서서’라는 것은 네 가지 신통력의 기초(catuiddhipada, 四神足)에 대한 전조였다.

 

‘북쪽으로’라는 것은 대중을 뛰어넘는 것을 말하고, ‘일곱발자욱’은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sattabhojjahanga, 七覺支)를 성취하는 것을 말하고, ‘흰 양산’은 해탈의 우산을 성취하는 것을 말하고,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는 장애 없는 전지의 지혜의 획득을 말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 것은 가르침의 퇴전할 수 없는 수레를 굴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라는 것은 ‘남김이 없는 열반의 세계(無餘涅槃)’에 드는 것을 말한다.

 

(빠알리 탄생게 설명, 전재성박사)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한문탄생게에서 볼 수 없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열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빠알리탄생게에서는 아라한 선언의 마지막 부분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되어 있지만, 한문게송에서는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 하여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로 된 것이 다르다.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한국불교

 

이렇게 다른 이유는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 때문이다. 부처님은 탄생게를 통하여 불교의 근본적은 목적이 열반에 있음을 말하였다. 또 모든 행복의 종착지 역시 열반이라 하였다. 그런 열반은 괴로움의 소멸이자 동시에 윤회의 종식이다.

 

그러나 한문탄생게를 보면 열반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괴로움에 처한 중생을 편안케 해주리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중생의 행복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여러 행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반대승불교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빠알리 게송에서는 완전한 열반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대승의 게송에서는 중생구제에 역점을 둔 것이 다르다. 이것이 탄생게에서 볼 수 있는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가장 큰 차이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지향하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과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 보니 탄생게의 내용도 달라졌고, 그에 따라 스님들의 법문도 달라졌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문에서 열반에 대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안락과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그런 법문이 하나 있다.

 

법륜스님의 한문탄생게 해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법륜스님이 탄생게에 대하여 법문한 것을 어느 블로그(법륜스님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에서 보았다. 2011년에 법문한 것을 보면 천상천하유아독족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에 대하여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였다.

 

법륜스님이 말한 탄생게에 대한 설명을 빠알리니까야 각주와 비교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태어나자 마자 일곱발자국을 걸었다.

 

 

    

 

법륜스님 법문

(2011년)

부처님이 일곱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이 육도윤회에서 벗어 났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육도윤회에서 벗어남

빠알리니까야 주석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sattabhojjahanga, 七覺支)를 성취하는 것을 말함

칠각지 성취

 

 

2)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

 

 

    

 

법륜스님 법문

(2011년)

더 이상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을 천하의 세계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탁소리 해석: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 존엄의 엄숙한 선포이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존재의 존엄성 선포

빠알리니까야 주석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 것은 가르침의 퇴전할 수 없는 수레를 굴리는 것을 말함

불퇴전의 가르침수레를 굴리는 것

 

 

3) 삼계개고아당안지: 뭇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이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법륜스님 법문

(2011년)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목탁소리 해석: 동체대비심( 大悲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동체대비

빠알리니까야 주석

-

 

 

 

이와 같이 비교를 하여 보았으나 탄생게가 전반부만 유사할 뿐 후반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

 

법륜스님의 행복론

 

한문탄생게를 통하여 대승불교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함일까? 이는 법륜스님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행복한 세상은 불교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불법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세상입니다. 깨우치지 못한 자들도 어여삐 여겨서 고통이 덜한 세상을 만들어서 그들 또한 안온하게 살게 해주자. 이것이 불교에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유입니다.

 

(법륜스님, (법륜스님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 희망플레너)

 

 

법륜스님의 법문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법륜스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선사들 법문의 공통적 특징이다. 어느 법사든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 하신 궁극적인 행복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법륜스님은 한문탄생게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행복이라 한다. 행복의 종류도 여럿 있지만 열반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부만 알려주고 정작 알려 주어야 할 것은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부처님은 분명히 궁극적 행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표가 해탈과 열반의 실현에 있다는 것을 위빠시붓다의 탄생게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를 들어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은 일상적인 행복만 설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 그리고 시계생천으로 설명되는 내생의 행복도 설하였다. 그러나 현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못지 않게 궁극적 행복도 설하였다.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행복이 출가수행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은 출가용 가르침과 재가용 가르침을 구분하여 따로 가르친 것일까?

 

부처님은 초심자나 재가자들에게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쉬운 가르침부터 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재가자일지라도 법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 사성제를 설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재가자인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세상에 재가신자는 발생과 소멸에 대한 고귀하고 통찰력 있는 지혜를 갖추고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성취합니다.(S55:3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재가불자라도 삼귀의-오계-믿음-보시—지혜로 이어지는 단계적인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마치 비가 내리면 온 대지를 골고루 적시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남김 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재가의 차별 없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것이다. 이말은 전도선언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이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 의미있고 형식을 갖춘 법이라는 정형구가 빠알리니까야 도처에 등장한다. 이 정형구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설명에 따르면 단하나의 게송이라도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에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라 하였다. 또 내용이 서론, 본론, 결론으로 되어 있어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라 하였다.

 

그런데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라는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부분만 따로 떼어내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떤 특정목적을 위하여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한문탄생게는 일부만 알려진 것이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의 가르침에 위배 된 것이다. 따라서 아당안지와 같이 내가 편안케하리라하며 부분적인 행복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것이라면 열반에 대해서도 당연히 알려 주어야 한다. 법사들이 불자들에게 단지 행복에 대해서만 말하기 보다 열반에 대해서도 남김 없이 알려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라 본다.

 

 

 

2013-05-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