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이슬람교 영역에서 불교사원을 보다니! 홍산공원의 대불사(大佛寺)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13. 18:37

  

이슬람교 영역에서 불교사원을 보다니! 홍산공원의 대불사(大佛寺)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3, 홍산공원, 2013-05-29)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 첫째 날에 있어서 마지막 일정은 홍산공원(山公)이다. 우루무치 시내 중심가에 있는 홍산공원이 이번 여행 일정에 포함된 것은 하나의 구색용이라 보여진다. 떠나는 날 비행기 타는 시간이 너무 많이 남기 때문에 시간 때우기용으로 집어 넣은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홍산공원으로

 

홍산공원 일정은 여행 마지막날 비행기 타기 전에 계획 되어 있다. 그런데 일정을 당기어 여행 첫날 구경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첫째 날 천산천지에 이어 박물관 견학이 끝나고 홍산공원으로 향하였다.

 

홍산공원은 우루무치 시내 중심가에 있는 공원이다. 평지가 아닌 산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남산과 같이 높은 산이 아니라 동네 뒷산 정도 되는 야트막한 산이다. 그러나 올라가면 우루무치 시내가 한눈에 보여서 전망이 매우 좋다.

 

 

 

 

 

 

 

 

 

 

 

 

 

 

 

 

한족과 구분 되는 위구르족들

 

평일임에도 홍산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사람들의 옷차림이다. 그것은 위구르인들이다. 위구르 여인들의 옷차림을 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한족과 구분 되는 것은 머리에 스카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구르 전통의상을 입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나무에 헝겊을

 

홍산공원 올라 가는 길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무에 헝겊을 매달아 놓은 것이었다. 등산로에서 볼 수 있는 산악회나 길안내 헝겊 같은 것이다. 대체 어떤 내용이 쓰여 있을까? 가까이 다가서 보니 소원을 담은 문구가 보였다.

 

 

 

 

 

 

 

 

 

 

 

 

이슬람교 영역에서 불교사원을 보다니!

 

홍산공원 올라가는 길에 뜻밖에 놀라운 것을 보게 되었다. 절이 있었던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위구르인들이 몰려 사는 신장지역은 이슬람교 영역인데 불교사원을 보다니! 너무 뜻밖이었다.

 

 

 

 

 

 

 

불교사원 이름은 대불사(大佛寺)’이었다. 대불사라는 이름은 들어 보지 못하였으나 이곳 신장에서는 흔한 절이름이라 보여진다. 투루판에 있는 고창고성에도 대불사라는 절 이름이 있고, 교하고성에도 대불사라는 절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 신장에서는 절 이름을 대불사라 하는가 보다.

 

 

 

 

 

 

 

 

하지만 대불사는 들어 갈 수 없었다. 이번 여행일정에 포함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밖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대불사는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입장료는 5위안(800)이다.

 

 

 

 

 

 

 

 

 

 

 

 

 

 

 

 

 

13세기까지 불교국가

 

13세기 이전까지 이곳 신장지역은 불교국가이었다. 불교를 신봉하는 카라코야(고창국) 왕국이 856년부터 1209년까지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카라코야 왕국은 위구르인들이 세운나라이다. 반면 천산산맥 서쪽, 지금의 중앙아시아에서는 같은 위구르족인 카라한 왕조(840~1212)가 있었다. 위구르 제국이 세 개의 나라로 분열된 뒤 생겨난 왕국들이다. 그런데 몽고침략으로 두 왕국이 망하기 전까지 천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가 500년간 지속 되었는데, 천산산맥 서쪽의 카라한 왕조는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었고, 천산산맥 동쪽의 카라코야(고창국) 왕국은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카라코야(고창국)과 카라한 왕조

좌측 상단 노랑부분이 불교국가인 카라코야(고창국)이고,

좌측 상단 끝 부분인 하늘색이 이슬람의 카라한 왕조이다.

 

 

 

이렇게 같은 위구르족이지만 천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무려 500년 동안 이슬람과 불교가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왕국은 몽고제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그리고 몽고제국의 차카타이칸국에 의하여 불교를 신봉하였던 신장지역은 13세기 이후 이슬람을 믿게 된다.

 

홍산공원의 대불사(大佛寺)

 

13세기 이후 신장 지역은 이슬람을 신봉하여 왔다. 그런데 홍산공원에서 불교사원을 본 것은 매우 뜻밖이었고 놀라웠다. 신장의 수도라 불리우는 우루무치가 한족의 영향권이어서 그런것일까? 그렇다면 신장지역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일까?

 

 

 

 

 

 

 

 

 

 

 

 

신장의 성도이자 가장 살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는 곳이 우루무치이다. ‘아름다운 목장을 뜻하는 우루무치는 사막이 아닌 초원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천산산맥 가운데 자리 잡고 있어서 해발고도가 높다. 그래서 타림분지와 같이 해발 고도가 0미터 이하인 지역에 비하여 기후 조건이 좋다. 그래서 불교국가 이었던 카라코야왕국에서는 투루판을 겨울수도로, 베쉬발릭(우루무치)를 여름수도로 하였다고 한다.

 

 

 

우루무치 위성지도

오른편에 만년설이 있는 설산이 있다.

해발 3800 미터 이상에서는 눈이 녹지 않기 때문에 여름에도 눈덮힌 산을 볼 수 있다.

 

 

 

우루무치는 한족들 세상

 

신장지역에서 위구르족이 45%로서 다수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한족이 40%로서 2위이다. 그런데 신장의 성도인 인구 268만명의 우루무치 인구구성비를 보면 한족이 75%를 차지하고 있고, 위구르족은 고작 12%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루무치 시내는 중국의 어느 도시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우루무치가 신장위구르 자치주 중심도시라 하지만 한족들 세상이나 다름 없다.

 

 

 

 

 

 

 

 

 

 

 

 

공공장소의 간판을 보면

 

중국어 간판이 주류를 이루고 한족이 거리를 가득매운다. 그러나 소수민족인 위구르족을 고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공공간물의 간판을 보면 위구르어가 먼저 나오고 다음 한자어가 나오는 식이다.

 

 

 

 

우루무치 역의 간판

위구르어가 먼저 표기 되어 있고 한자가 뒤따른다.

 

 

 

 

 

우루무치 인민병원

 

 

저 멀리 설산이 보이고

 

야트막한 동네 뒷산과 같은 공원이 홍산공원이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가면 우루무치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그것도 저 멀리 만년설이 있는 설산이 보인다. 우루무치시내가 천산산맥 가운데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우루무치 시내

저 멀리 만년설을 이고 있는 천산산맥의 설산이 보인다.

 

 

 

 

청나라 시대에 건립된 진용탑(鎭龍塔)

 

홍산에는 특별한 유적이 하나 있다. 그것은 청나라 시대에 건립된 탑이다. 이를 진용탑(鎭龍塔)이라 한다. 진용이라는 말은 용을 제압하였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홍산탑이라 불리우는 진용탑은 어떤 이유로 건설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가이드가 설명을 해 주었으나 다  알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후기를 작성하면서 인터넷 검색을 해보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탑을 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옛날 우루무치에 비가 자주 오고 남북을 가로질러 흐르던 강(현재: 和平渠)이 범람하여 주민들이 수시로 피해를 입었다. 사람들이 원인을 조사해 보니 강 속에 사는 용의 조화였다. 사람들은 서왕모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서왕모가 용을 두 동강 내 이곳 홍산과 건너편 야마리크산(雅瑪里克山)에 묻었다. 이후 더 이상 비가 와 강이 범람하는 일은 없어졌다.

(진용탑전설)

 

 

 

 

 

 

 

 

 

 

 

 

 

 

 

용은 상서러운 상징인가?

 

동아시아에서는 용이 상서로운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역에서는 정반대의 이미지이다. 인간과 자연에 피해를 주는 이미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방 테라와다불교 전통에서 수호경이라 불리우는 자야망갈라가타(Jayamangalagatha)에 따르면 신통제일 목갈라나 존자가 난도빠난다(Nandopananda)라 불리우는 사악한 용을 물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대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Nandopananda-bhujaga vibudha mahiddhi 

난도빠난다 부자강 위부당 마힛딩

Puttena therabhujagena damāpayanto           

뿟떼나 테라부자게나 다마-빠얀또

Iddhūpadesa-vidhinā jitavā munindo           

이두-빠데사 위디나- 지따와-무닌도

Ta tejasā bhavatu te jayamagalāni          

땅 떼자사-바와뚜 떼 자야망갈라-

  

간교하고 영험한 난도빠난다 용
뱀으로 변화시켜 제자인 장로 길들이듯,
성자들의 제왕 신통력 보이시어 섭수하셨네.

이 위대한 힘으로 승리의 행운이 제게 임하길 바라옵니다.

(자야망갈라가타 7번 게송)

 

 

이는 청정도론에서 난도빠난다(Nandopananda) 용왕 길들인 이야기로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처럼 인도불교 전통에서는 중국과 달리 용은 상서로운 것이 아니라 사악한 것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 되면서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장으로 변한다.

 

이처럼 중국과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용은 서역에서 사악한 것의 상징이다. 그래서 홍수를 일으키는 용의 몸을 두 동강 내어서 하나는 홍산에 묻고, 또 하나는 건너편의 야마리크산(雅瑪里克山)에 묻었다고 한다. 홍산과 야마리크산(雅瑪里克山)을 위성사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홍산과 야마리크산(雅瑪里克山)

A가 홍산이고 B가 야마리크 산이다.

 

 

 

서유럽의 도시를 보는 듯

 

홍산 진용탑에서 보는 우루무치시내 풍경은 장쾌 하였다. 랜드마크 빌딩을 보니 마치 서유럽의 도시를 보는 듯 하였다.

 

 

 

 

 

 

 

 

 

 

 

 

 

 

 

아편전쟁의 임칙서상이 왜 여기에

 

진용탑에 이르기 전에 커다란 인물상이 있다. 임칙서석상이다. 임칙서는 아편전쟁(1839-42)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아편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1830년대 아편이 유행하자 청조에서는 임칙서를 광동성에 파견한다. 아편의 폐해를 알고 있었던 임칙서는 외국상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을 몰수 하여 모두 불태워 버린다. 그러자 영국이 이를 빌미로 광저우를 공격하였고 아편전쟁이 시작 되었다. 그 결과 영국이 아편전쟁에서 승리 하였다. 그렇다면 임칙서의 상이 머나먼 신장에 서 있게 되었을까? 이는 아편전쟁의 책임을 임칙서에 물어 신장으로 좌천하였기 때문이다.

 

 

 

  

신장에 도착한 임칙서는 선정을 베풀고 개혁을 실시했다. 하천을 정비하고 수로를 개척함에 따라 우루무치ㅡ 투루판, 하미, 쿠차 등이 녹화 되었다. 이런 이유로 임칙서의 석상이 홍산공원에 서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한족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신장의 원주민 입장에서 한족은 지배자이었기 때문이다.

 

1755년 청나라 군대가 진주하면서

 

신장지역이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청나라시대이다. 1755년 청나라 군대가 진주하면서 신장의 지배가 시작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주로 중국이 천하통일을 이루던 시기이다. 한나라, 당나라 같은 시기이다. 그래서 안서도호부와 같은 관부를 두고 직접 통치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분열하던 시기에는 독립하였는데 위구르제국(744-840)이 좋은 예라 볼 수 있다. 이후 위구르족의 카라코야(고창국, 856-1209)이 성립되어 500년간 유지되었다. 이때 까지 신장에서는 불교를 신봉하였다. 그러나 몽고제국을 거치면서 이슬람화 되었다. 그러다가 청나라 시대에 이르러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족이 아닌 만주족의 지배이었다.

 

 

  

청나라 전성기의 영토

지금의 중국영토 보다 훨씬 더 넓다.

서쪽으로 중앙아시아 일부까지 확대 되었다.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

 

현재 중국에서 가장 민감한 정치적 이슈는 티벳이다. 티벳에서 분리독립을 요구하며 분신등 극한 투쟁을 하며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불안한 지역이 신장이라 한다. 위구르인들의 독립열기가 고조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 같은 곳이다. 실제로 2009년 신장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였는데 197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는 지역의 경제 주도권을 한족이 장악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위구르족들은 한족의 지배에 저항하여 왔다.

 

신장지역은 신장위구르자치주라 불리운다. 그러나 위구르족들은 아직도 동투루키스탄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는 1933년 한때 동투르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 처음으로 건국되었고, 1944년 동투르키스탄공화국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팽덕회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이 우루무치에 진주함으로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병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위구르족을 중심으로 한 소수민족은 한족의 지배에 반대해 꾸준히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

 

외제차와 나귀마차

 

우루무치 바자르시장에는 군인들이 배치 되어 있다. 그리고 운동장에서 군인들이 훈련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겉으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갈등이 쌓여 있는 곳이 우루무치를 비롯한 신장지역이다. 그것은 경제적으로 너무나 차이가 나고 소수민족들이 겪는 한계때문이다. 투하유전이라 하여 투루판과 하미사이에 유전지대를 볼 수 있다. 이 유전 개발로 인하여 한족들은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래서 벤츠, 아우디 등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한족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투하(투루판-하미)유전지대

중국 3대 유전지대 중의 하나이다.

 

 

 

이 이지역의 원주민 위구르족들은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포도농사 등에 의지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나귀마차를 몰고 다닌다. 외제차와 나귀마차만큼 한족과 위구르적과의 감정의 골은 깊은 것을 알 수 있다.

 

 

 

투루판 위구르족 야시장

 

 

 

 

2013-06-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