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불상 대신 빠알리니까야, 비천(飛天)의 도시 돈황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26. 12:30

 

불상 대신 빠알리니까야, 비천(飛天)의 도시 돈황에서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9, 막고굴 비천, 2013-05-31)

 

 

 

막고굴은 어두컴컴하다. 자연채광외에 그 어떤 인공적인 빛이 없다. 그래서 가이드가 레이져봉으로 특정 부위를 비추어 설명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들을 때 뿐이다. 불상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그림이 있는지 메모해 놓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인도스타일의 427번 굴

 

17번 굴 장경동을 보고 나서 427번 굴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427번 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머지 굴도 마찬가지이다.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메모해 놓았으나 워낙 빨리 지나갔으므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427번 굴을 검색해 보았다. 유튜브에 427번 굴에 대한 중국어 동영상을 찾을 수 있었다.

 

 

 

 

427동영상

Dunhuang: Mogao Cave 427 (敦煌: 莫高窟 427)

 

 

 

메모해 놓은 것과 유튜브동영상을 보면서 기억을 되살려 나갔다. 427번 굴의 특징은 삼세불이었다.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 이렇게 삼세불이 표현 된 것이다.

 

 

 

427번 삼세불

좌측이 과거불, 중앙이 현세불(석가모니불), 우측이 미래불(미륵불)이다.

 

 

 

427번 굴은 언제 조성되었을까?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북주시대라 한다. 북주(北周, 557~581)는 중국 남북조시대(439~589) 당시 선비족 우문 (宇文)씨가 건국한 왕조라 한다. 왕조로서의 불과 24년 밖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북주시대에 건립된 석굴이 여럿 있다.

 

 

 

560년 경의 북주

좌측의 하늘색이 북주영역이다.

 

 

북주의 영역이 중국 서쪽에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돈황이 북주의 세력권안에 들어 간 것이다. 이 시대에 427번 굴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한족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불의 우측에 있는 보살의 옷을 자세히 보라고 한다. 이를 유튜브 동영상에서 캡쳐 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불 우측보살

 

 

 

 

 

 

현재불 우측보살 옷 상세

 

 

 

사진을 보면 보살의 옷이 인도스타일이다. 보관을 쓰고 영락목거리를 하고 화려한 의상을 입은 관세음보살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427번 굴이 초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에 조성된 굴일수록 서역이나 인도스타일이 많이 남아 있다.

 

회랑식 구조의 428번 굴

 

다음으로 428번 굴로 이동하였다. 428번 굴도 역시 위진남북조시대인 북주시대에 조성되었다. 그래서일까 불상이 매우 소박해 보인다. 아직 중국인 얼굴은 아니다. 428번 굴의 특징은 회랑식으로 되어 있다. 중앙에 큰 기둥이 있고 그 기둥안에 불상을 모셔 놓았다. 그래서 기둥 주변을 돌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전 보다는 발전된 형태라 한다.

 

428번 굴에 대한 동영상은 NHK에서 제작된 실크로드에서 커팅 하였다.

 

 

 

428번굴(NHK 실크로드, 1980년)

 

 

 

 

 

회랑식 기둥

 

 

 

이와 같은 회랑식 구조는 이후 조성된 석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동굴을 더 크고 넓게 만들려면 중앙에 회랑식 기둥이 있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428번 굴의 벽화는 불교이야기로 꾸며져 있다. 주로 부처님의 전생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인도풍이 주류를 이룬다. 벽화를 보면 세밀화가 아니라 굵고 거칠게 터치한 방식이다. 그래서 단순하고 소박해 보인다. 

 

 

 

 

 

왜 검은 얼굴일까? 251번 굴

 

다음으로 이동한 것은 251번 굴이다. 메모만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 내었다.

  

251번 굴도 북주시대에 조성되었다. 미륵불을 모셔 놓었다. 불상의 가사를 보면 전형적인 인도스타일이다. 벽화를 보면 검은 얼굴이 많다. 불상도 검은색이고 보살상도 검은 색이다. 인도에 검은 피부를 한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가이드에게 물어 보았더니 변색 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아미타불

변색되어 검게 보인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상은 원래 밝은 색깔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치 변색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인물상이 마치 흑인처럼 검게 보인다.

 

스님스타일의 아미타불, 249번 굴

 

249번굴로 이동하였다. 249번 굴도 북주시대의 것이다. 249번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동영상 파일을 보았다. 메모한 것과 동영상을 보니 기억이 난다. 메모에 스님스타일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249번 굴 동영상자료

 

 

메모에 따르면 249번 굴은 미륵불을 모셔 놓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특이 하게도 두상이 삭발한 스님상이다.

 

 

 

 

 

 

비천(飛天)의 도시 돈황

 

막고굴에는 수 많은 비천상이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굴에 비천상이 있는데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점 세련되어 간다. 그렇다면 비천상은 어떤 연유로 등장하게 되었을까? 자료에 따르면 비천상의 원형은 고대 인도신화에 등장하는 건달바긴나라라고 한다. 팔부중의 하나로 불교에 포섭되어 천악신과 기악신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막고굴의 비천상

 

 

 

현재 막고굴에는 270여개의 석굴에 비천상이 있고 숫자는 총4500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돈황은 비천의 도시같다. 도시 곳곳에 비천상이 있기 때문이다. 돈황시내 한 복판에도 있고, 역안에도 있다. 그리고 공공장소에도 비천상이 있다. 그래서 비천은 돈황의 상징이다.

 

 

 

돈황 유원역 비천상

 

 

 

 

 

돈황 막고굴 공원의 비천상

 

 

 

우리나라에도 비천상이 있다.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함께 비천상도 함께 들어 온 것이다. 아마도 돈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한국형 비천상은 어떤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비천상은 상원사 동종이다. 상원사 동종은 725년 주조 되었다. 돈화에서 보는 것과 유사하다. 이와 같은 한국스타일의 비천상은 우리나라 동종에서 범종에서 볼 수 있고 사찰의 벽화나 조상에서도 볼 수 있다.

 

 

 

 

상원사 동종의 비천상

 

 

 

호랑이 같지 않은 호랑이

 

249번 굴에서 또 하나 특이한 그림을 보았다. 그것은 호랑이이다. 그런데 호랑이가 전혀 호랑이 같지 않은 것이다.

 

 

 

249번 굴의 호랑이

 

 

 

말을 탄 사람이 활을 들고 호랑이를 사냥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 대상이 호랑이라 한다. 마치 호랑이가 아니라 마치 고양이 같다. 호랑이를 왜 이렇게 대충 두리뭉실하게 그려놓었을까? 한족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돈황에는 호랑이가 없다고 한다. 화가들이 한번도 호랑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으로 그린 것이라 한다. 그래서 호랑이가 고양이처럼 그다지 무섭지 않고 우스꽝스럽게 표현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사중인 다층누각

 

막고굴은 355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굴을 조성한 사람은 승려 낙준이라 한다. 오호십육국시대 전진의 지배하에 있을 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석굴은 이곳 돈황을 지배한 북양, 북주, , , , 서하,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 까지 1000 여년간 조성되었다. 그래서 굴마다 시대별로 특색이 있다.

 

막고굴은 명사산 동쪽 벼랑에 남북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다. 길이가 1.6키로 미터에 달한다. 비록 몇 개 되지 않지만 북쪽에 있는 동굴을 보고 남쪽에 있는 동굴을 보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그런데 중앙에 다층의 커다란 전각이 공사중이었다. 그럼에 따라 막고굴의 상징을 보지 못하였다.

 

 

 

 

 

 

 

 

 

 

여행지에 가면 언제나 느끼는 감정이 있다. 그것은 다시 오게 될까 하는 의문이다. 우리나라 전통사찰이 800여 군데 되는데 다 보려면 평생걸려도 보지 못한다. 그래서 한 번 갈 때 마다 다시 오기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외국에서 본 성지 역시 다시 올지 알 수 없다. 막고굴의 상징과도 같은 다층누각과 그 안에 대불을 보지 못하여 유감이다. 돈황에 다시 온다면 그 때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륵대불을 접하고

 

공사중인 다층누각을 지나자 한족 가이드는 관람객들을 지하로 인도하였다. 갑자기 왜 지하로 데려 가는 것일까? 그런데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상상도 못한 불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대반전이다. 영화 식스펜스의 반전 못지 않다. 지금까지 작은 동굴에서 작은 불상과 벽화만 보다가 갑자기 대불과 마주친 것이다. 그것은 높이 26미터에 달하는 미륵대불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보는 미륵대불은 고개를 위로 젖혀 쳐다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한 없이 크게만 보인다.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에 NHK 실크로드(1980) 동영상에서 필요한 부분만 커팅하였다.

 

 

 

미륵대불(130번굴)

성당시기 작품으로 높이가 26미터에 달한다.

 

 

 

반전이라고 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반전장면은 예상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대불에 대한 사전지식이나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갑잡스럽게 맞닥뜨렸기 때문에 반전으로 본 것이다.

 

왜 대불을 만들었을까?

 

당나라 시대 중국인들은 왜 이렇게 커다란 대불을 만들었을까? 낙양에 있는 용문석굴의 대불도 거대하고, 다른 곳에 있는 석불도 역시 거대하다. 이와 같은 거대 불상을 조성한 이유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거대불상을을 포함하여 수 많은 불상, 벽화를 만들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신심의 발로일까? 아니면 기복을 위하여 조성해 놓은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경외심일 것이라 생각된다.

 

전세계적으로 불자들은 불상 앞에서 절을 하거나 예배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를 우상숭배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유일신교에서는 불상에 절하는 행위에  대하여 우상숭배라 할 것이다. 특히 어떤 형상도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교에서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슬람권에 있는 불상들은 하나 같이 목이 잘리거나 파괴된 채로 있다.  

 

불상에 절을 하고 복을 비는 행위는 우상숭배로 비칠 수도 있다. 불상에 절을 하고 합격기원을 바라는 등의 기복행위를 말한다. 이는 돌덩이로, 쇠붙이, 나무에 절하고 복을 비는 것과 하등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불상 앞에 예배하는 행위 모두에 대하여 우상숭배로 볼 수 없다. 그것은 돌덩이, 쇠붙이, 나무 그 자체에 예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자들이 불상에 예배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경외심 때문이다.

 

높이 26미터에 달라는 거대한 불상을 보면서 기복을 한다면 그 불상은 우상이다. 그러나 거대불상을 보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경외심을 일으킨다면 부처님을 앞에 두고 있는 것과 같다.

 

불상 대신 빠알리니까야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리이고 훌륭한 것인 줄 안다면 굳이 불상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굳이 예배의 대상을 찾는다면 부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경전이라 볼 수 있다. 경전을 열어 보면 언제든지 부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맹률이 높고 글을 모르는 시기에 불자들은 불상을 보면서 신심을 내었을 것이다.

 

요즘은 불상을 접하지 않아도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부처님의 원음이 담긴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 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상 대신 빠알리니까야라 볼 수 있다. 하나의 게송에서 느끼는 감동이 26미터에 달하는 대불에서 느끼는 경외심 보다 더 크다.

 

 

Upanīyati jīvitamappamāyu

jarūpanītassa na santi tāā
Eta
bhaya marae pekkhamāno

lokāmisa pajahe santipekkhoti.

 

[세존]

삶은 덧없고 목숨은 짧으니,

늙음을 피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쉴 곳이 없네.

죽음의 두려움을 꿰뚫어 보는 사람은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 고요함을 원하리. (S1:3)

 

 

게송에서 세속의 자양을 버리고(lokāmisa pajahe)라는 말이 있다. 세속의 자양을 뜻하는 로까미상(lokāmisa)은 로까(lokā)와 아미사(āmisa)의 복합어이다. 아미사(āmisa)는 날고기, 음식, 미끼, 유혹물, 물질, 세속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다. 윤회의 동력이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아미사에 대한 주석을 보면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의 모든 윤회의 존재, 즉 집착의 대상적 세계라 하였다. 좁은 의미로는 생존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말한다. 즉 네 가지 필수품인 의복, 탁발음식, 와좌구, 의약품을 지칭한다. 그리고 고요함(santi)은 궁극적 고요함을 뜻하는데, 그것은 바로 열반을 지칭한다.

 

 

 

2013-06-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