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지화(持花)보살은 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까? 막고굴 보살상과 화공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28. 14:17

 

지화(持花)보살은 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까? 막고굴 보살상과 화공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10, 막고굴 보살상, 2013-05-31)

 

 

 

호텔로비에서 본 그림

 

돈황에 있는 호텔로비에서 매력적인 그림을 보았다.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걸려 있는 그림은 보살상이었다. 돈황 막고굴에 있는 보살상을 현대의 작가가 그려 놓은 것이다. 막고굴을 견학 하기 전에 본 그림이다.

 

보살상을 보니 이제까지 보았던 것과 달랐다.  얼굴형태와 눈모양새가 우리나라 보살상과 다른 것이다. 고개를 약간 우측으로 비틀고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있는 묘한 모습이다. 작품명칭을 보니 57호굴의 보살상을 현대 화가가 그려 놓은 것이다. 그림제목을 ‘57호굴 지화(持花)보살이라 하였다. 연꽃을 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라 본다. 지화(持花)보살은 왜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까?

 

 

 

지화(持花)보살

양광대주점 호텔로비의 보살상

57호굴의 지화보살상을 현대작가가 그린 그림.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이번 막고굴 순례에서 57호굴은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유튜브에 57굴에 대한 동영상 파일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의문의 보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이를 캡쳐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57호굴 지화(持花)보살상

 

 

 

57호굴의 지화보살상은 초당시기의 작품이다. 초당시기라면 7세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측천무후의 집권시기와 일치한다. 당의 세력이 가장 강할 때이고 조정의 후원을 받은 불교문화가 활짝 꽃핀 시대이다.

 

57호굴의 보살상을 보니 현대작가가 그린 보살상과 차이가 있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더 많이 젖혀져 있고, 눈을 아래로 내려 뜨고 보는 방향 또한 다르다. 현대작가가 아무리 잘 그린다고 해도 원본을 따라 갈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책의 표지 인물로 선정된 보살상

 

돈황에서 책을 두 권 샀다. 막고굴을 견학하고 나서 산책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나서 산 책을 보면 특징이 있다. 그것은 한 보살이 하이라이트 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표지를 보면 공통적으로 하나의 보살상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보살상은 어떤 것이길래 하이라이트 되고 있는 것일까? 자료를 찾아 보니 45호굴에 있었다. 이번에 보지 못한 굴이다. 그러나 매우 유명한 보살상인 것 같다. 책의 표지 인물로 선정된 것도 그렇고 기념품 가게에서도 볼 수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여체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히는 듯한

 

기념품 가게에서 산 책을 열어 보았다. 우리말로 된 것이다. 중국 어느 관광지에서나 우리말로 된 책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만큼 많이 다녀 가기 때문일 것이다. 책 제목은 돈황과 실크로드이다. 중국에서 출판된 것(서안지도출판사)이다.

 

책을 열어 45굴의 보살에 대한 설명을 보았다. 마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설명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마치 우리나라 사람이 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가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으므로 알 수 없다. 45굴 보살상에 대한 소설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제45호굴에 들어서자마자 여체의 아름다움에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굴입구에 보면 정면, 그러니까 서쪽에 위치한 감실 안에 늘어선 칠존상의 소상들 중 부처의 좌우에 석가의 제자인 가섭과 아난과 함께 서 있는 보살상을 본 순간의 충격이 그러했다.

 

(돈황과 실크로드, 서안지도출판사, 작자미상)

 

 

여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45굴의 보살상을 보고서 여체를 생각한 것이라 보여진다.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책의 이곳 저곳을 보아도 글을 쓴 이의 이름을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중국책을 번역한 것일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책의 편자를 보면 중국인 두도성왕서경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인쇄와 제작도 해천전자도서개발공사로 되어 있어서 중국에서 발간된 것이 분명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이 쓴 글같기도 하다. 책을 읽어 보면 우리나라 문화재와 비교 설명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책은 중국에서 발행되었는데, 내용은 한국사람이 쓴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마치 에로틱 소설을 보는 듯

 

첵의 작가는 45호굴의 보살상을 보는 순간 여체의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듯하였다고 하였다. 참으로 노골적인 표현이다. 보살상이 여체모양으로 생기지도 않았음에도 지나친 상상력을 발휘 한 것 같다. 이어지는 작가의 상상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엷은 미소를 띤 채 약간 허리를 비틀면서 배꼽을 드러낸 채 관능미를 한껏 과시하는 것이 아닌가. … 기울인 고개와 가볍게 구부린 허리는 묘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옷은 젖가슴을 반쯤 덮을 정도다. 그래서 하얀 피부의 상반신이 거의 다 드러났다. 배꼽 아래의 배와 허리의 선과 풍만감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

 

(돈황과 실크로드, 서안지도출판사)

 

 

이쯤 되면 마치 에로소설을 읽는 것 같다. 보살상에 대한 작가의 상상력이 지나치게 에로틱함을 알 수 있다. 모르는 사람들이 이 부분만 본다면 틀림 없이 19금에 해당되는 에로소설로 볼 것임에 틀림 없다. 작가가 묘사한 대로 45굴 보살상이 그토록 관능적일까?

 

45굴 보살상은 그토록 관능적일까?

 

45굴 보살상은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에 책의 표지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박물관에 별도로 소상이 만들어져 전시되고 있기도 하다.

 

45굴에는 두 개의 보살상이 있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오른쪽과 왼쪽에 있다. 그 사이에는 아난과 가섭이 있다. 그리고 보살상옆에는 사천왕상이 있다. 그래서 순서를 보면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편에 가섭-보살-사천왕상-금강역사 순이고, 오른편으로 아난-보살-사천왕상-금강역사 순이다.

 

 

 

 

45굴 소상

우측 끝에서 두 번째가 채색보살상이다.

 

 

 

 

45굴 채색보살상

 

 

  

그리고 1980년에 방영되었던 NHK실크로드에서도 소개 되어 있다. 45굴 보살상에 대한 부분만 커팅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45굴 보살상

NHK실크로드(1980년)

 

 

 

45굴 보살상을 보면 그 어디에도 관능미를 볼 수 없다. 그리고 여체의 아름다움도 볼 수 없다. 고개를 약간 비틀고 눈은 아래로 내려뜨며 옆을 바라 보고 있는 모습이 57굴의 지화보살과 유사하다.

 

보살은 아름답다!

 

45굴의 모습을 보면 전형적인 인물배치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배치는 당나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에서 볼 수 있다. 그런 구도는 용문석굴 봉선사동에서도 볼 수 있다.

 

 

 

 

용문석굴 봉선사동

좌측에 가섭-보살-사천왕-금강역사의 순으로 서 있다.

 

 

 

용문석굴 봉선사동에도 보살상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시기에 조성된 것이다. 막고굴 45굴 조성시기와 비슷한 초당시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용문석굴 봉선사동의 보살상을 보면 화려하기 그지 없다. 좌측에 있는 보살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용문석굴 봉선사동 우측보살

 

 

 

좌측보살은 섬세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예술의 걸작이라 한다. 파손없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 되어 있는데,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런 보살의 모습을 보면 아름답다.

 

최측근 가섭과 아난

 

중국 용문석굴과 막고굴을 보면 공통적인 것이 눈에 띈다. 그것은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배치된 인물상에 대한 것이다. 대체적으로 불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가섭과 아난이 있고, 그 다음에 보살순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을 최측근에 배치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 법당에 가보면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두 빠져 있다. 그 대신 보살이 좌우에 배치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부처님 좌측에 관세음보살이고, 우측에 지장보살이 협시불로 되어 있다. 그 어디에도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다와 깟사빠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 조성된 것을 보면 반드시 부처님의 제자가 최측근에 배치되어 있고 보살은 그 다음임을 확인 할 수 있다.

 

환희심을 일으키는 수월관음도

 

용문석굴이나 막고굴에서 보살상을 많이 볼 수 있다. 대체로 화려한 보관을 쓰고 ,보석으로 장식된 영락목거리와 속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천의(天衣)를 입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보살은 화려하게 장식하였을까?

 

우리나라에 수월관음도가 있다. 달이 높이 떠 올라서 휘엉청 밝은 가운데 관세음보살이 물가의 벼랑에 앉아서 선재동자에게 법을 설하는 장면으로 묘사 되어 있다. 그런 수월관음도 중에 가장 잘 알려진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불화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고려 1310년, 견본채색, 430cm×254cm  일본 가가미진자(鏡神社) 소장

 

 

 

수월관음도를 보면 예술의 극치이다. 마치 관세음보살을 천인처럼 아름답게 묘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만 보아도 환희심이 일어날 것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中性)

 

지금 관세음보살을 친견한다면 그 느낌은 어떤 것일까? 보관을 하고 영락목거리와 천의를 걸친 천인의 모습을 한 아름다운 관세음보살에서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는 관능미를 느낄 수 있을까? 관능미를 느끼기 보다 쳐다 보기만 하여도 환희심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그 순간 만큼은 탐진치가 소멸되어 일시적으로 청정한 상태가 될 것임에 틀림 없다. 왜 그럴까? 관세음보살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욕계, 색계, 무색계 이렇게 3계로 나눈다. 이중 욕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이다. 그런 욕계는 성의 구별이 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구가 매우 강하다. 또 욕계에는 욕계천상도 있는데, 이 세계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극대화된 세계를 말한다. 그러나 색계와 무색계에서는 성의 구별이 없다. 따라서 모두 중성이라 볼 수 있다. 선정삼매에 들면 감각적 욕망 등 오장애가 극복 되는데 바로 그런 세계가 색계와 무색계 세계이다.

 

색계와 무색계를 통틀어 가장 수승한 천상이 정거천이라 본다. 불환자들이 태어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천상에 사는 천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아마도 보살이 있다면 그런 곳에 사는 존재들일 것이라 생각된다. 탐진치가 거의 소멸되고 천인처럼 아름다움 용모에 천의를 걸친 존재들을 말한다. 그런 중성적인 존재에게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는 관능미를 느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천상의 존재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천인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천인은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어느 정도로 아름다울까? 아주 좋은 예가 있다. 법구경 13번과 14번에 실려 있는 인연담을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그들이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에 도착하였을 때 신들의 제왕 제석천을 기다리고 있는 오백 명의 비둘기 같은 발을 지닌 구족천녀(鳩足天女)를 보여 주었다.

 

세존께서 이 두 광경을 보여주고는 존자 난다에게 이와 같이 난다여, 누가 더 아름답고 더 보기에 좋고 더 청정한가? 싸끼야 족의 아내 자나빠다깔리야니인가 오백 명의 구족천녀인가?’라고 물었다.

 

난다는 세존이시여, 자나빠다깔리야니는 귀와 코를 잃고 꼬리를 잃은 탐욕스런 원숭이만큼이나 못났습니다. 자나빠다깔리야니는 천상의 오백 명의 구족천녀에 비교하자면, 계산에 미치지 못하고, 부분에도 미치지 못하고, 부분의 부분에도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법구경 Dhp13-14번 인연담, 전재성박사)

 

 

13번과 14번 인연담은 부처님의 이복동생 난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난다가 출가하였으나 여전히 아내에 대한 미련이 있는 것을 보고서 부처님이 삼십삼천의 천녀들을 보여 준 것이다.

 

천녀들을 보고 나서 난다는 자신의 아내의 미모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고 청정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신의 아내의 미모는 천인과 비교하였을 때 마치 원숭이를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아름다운 것은 성()스런 것이다!

 

인연담을 보면 욕계천상의 천녀의 아름다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욕계천상보다 더 수승한 색계천상의 천인의 아름다움은 어느 정도일까? 이는 수월관음도를 보면 알 수 있다. 수월관음도는 천상의 존재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월관음도를 보면 남성도 아니고 중성도 아닌 중성의 이미지이다.

 

중성의 이미지를 가진 천인의 아름다움은 결코 관능적일 수 없다. 중성에서 관능미를 느낀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책의 작가는 마치 에로 소설을 보듯이 관능미 등을 운운하였으나 이는 불교적 상식이 없어서라고 보여진다.

 

화려한 치장을 한 아름다운 보살의 이미지는 중성이기 때문에 결코 관능미를 느낄 수 없다. 그대신 환희심을 유발할 수 있다. 아름다우면서도 청정한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라만 보고 있어도 구원받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관세음보살의 화려한 치장과 천인의 용모는 성스런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름다운 보살을 바라 보기만 해도 해탈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보살의 아름다움이란 다름 아닌 성스런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럴 때 적용할 수 있는 말이 아름다운 것은 성()스런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채색보살상의 아름다움

 

45굴에서 보는 보살상을 일반적으로 채색보살상이라 한다. 색체가 들어간 보살상을 말한다. 그런 보살상을 보면 천인의 얼굴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보통인간의 얼굴이 아니라 천상에 사는 존재의 얼굴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 천인의 얼굴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청정하기 까지 하다. 그래서 아름다움과 청정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름아닌 천인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45굴 채색보살상

   

 

 

우리나라 보살상과 다른 점은?

 

막고굴에서 본 보살상을 보면 우리나라 보살상과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얼굴모양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수월관음도를 보면 천인의 얼굴을 잘 표현 하고 있지만 고개를 바로 들고 있다. 그리고 무표정하다.

 

그러나 돈황에서 본 유명한 보살상을 보면 이와 다르다. 고개를 갸웃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시선도 다르다. 눈을 아래로 내려 뜨면서 정면이 아닌 측면을 바로 보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57굴의 지화보살도 그렇고, 45굴의 채색보살상도 그렇다.

 

왜 이처럼 얼굴을 삐딱하게 해 놓은 것일까? 왜 눈을 아래로 내려 깔고 보는 듯 할까? 57호굴의 또 다른 보살을 보면 다음과 같다. 편의상 보관보살로 이름붙여 보았다.

 

 

 

 

 

 

 

 

57굴 보관보살

 

 

 

왈칵 눈물을 쏟을 뻔한 도선사 석불

 

막고굴에 있는 유명보살상은 한결같이 고개가 갸웃하고 눈을 아래로 내려뜨며 옆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 모습에 대한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화가들은 왜 이런 모습의 그림을 그렸을까?

 

도선사에 가면 유명한 석불상이 있다. 도선국사가 주장자를 쳐서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석불전에는 수 많은 기도객들로 만원이다. 영험있기로 소문난 기도도량이기 때문이다. 그런 석불상을 자세히 보면 표정이 있다.

 

 

 

도선사 석불

 

 

석불의 눈을 보면 착잡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민의 감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일까 처음 이 석불을 마주 하였을 때 왈칵 눈물이 나올 뻔 하였다. 마치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늘 강조하는 중생에 대한 대비(大悲)의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중생의 아픔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듯한 표정

 

돈황석굴에서도 표정이 있는 보살상을 보았다. 얼굴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중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종의 연민일 것이다. 도선사 석불처럼 안쓰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을 보여 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고개를 갸웃하며 마치 옆을 쳐다 보듯이 내려 보는 모습을 보면 무표정한 수월관음도와 비교 된다. 중생의 아픔에 반응을 보이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57굴 보살상

 

 

 

하지만 현대미술가들은 이런 연민과 자애의 표정을 제대로 못살리고 있는 듯하다. 막고굴 기념품가게에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보면 아름다운 것만 표현 하였을 뿐 중생의 고통을 아파하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기념관에서 파는 그림

57호굴의 보관보살상을 흉내낸 것이다.

미화 4000불(4백만원)의 가격표가 매겨져 있다.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민초 화공들의 손끝에서

 

막고굴의 벽화와 소상의 보살상을 보면 천인의 모습이다.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천상의 존재를 표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것도 욕계가 아니라 색계천상이라 본다. 남성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성도 아닌 중성 이미지로서의 보살상의 아름다음은 성스런 것이다. 그것은 관능미가 배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살상은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청정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보살상을 만든 사람들은 누구일까?

 

후기를 작성하면서 검색을 하다보면 이런 저런 자료를 많이 접한다. 돈황에 대한 것을 검색하다 정수일박사의 실크로드 순례기를 발견하였다. 한겨레신문에 연재한 것이다. 순례기에서 돈황의 막고굴 화가들에 대하여 언급된 기사를 발견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막고굴에 남은 불후의 화폭들 하나하나는 모두 천대받고 멸시당하는 민초 화공들의 손끝에서 나왔다. 인류의 거룩한 문명들은 모두 노동하는 민초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일시에 천하를 발호하던 군주도 죽으면 한 줌 흙이 되어 쓸모 없는 해골만 남기지만,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공장들은 불후의 작품을 남겨놓는다. 돈과 권력만을 능사로 여기며 학문과 예술, 민중을 업신여기는 세태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5> 오아시스 육로의 병목 둔황, 한겨레신문 2005-11-07)

 

 

막고굴에 그려진 예술품들은 모두 이름 없는 민초들이 만든 것이라 한다. 그래서 아름답고 훌륭한 예술품을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막고굴 바로 옆에 동굴속에 살았다고 한다. 마치 작업장 옆에 임시 숙소가 있듯이 막고굴옆 동굴에서 집단으로 기거한 것이다. 그런 동굴 거주지를 지금도 볼 수 있다.

 

 

 

화공들의 집단거주 동굴

 

 

 

그곳에서 그들은 어떻게 살아 갔을까? 장경동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공장은 재주를 배울 필요가 없나니(工匠莫學巧) / 재주가 있으면 남의 부림이나 받게 된다(巧卽他人使). / 내 몸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 신세이고(身是自來奴) / 아내 역시 벼슬아치들의 노비로다(妻亦官人婢).”라는 문구가 있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어서 그림을 그리지만 부림을 받고 노예와 같은 신세로 살고 있는 것에 대한 한탄이다.

 

 

정수일박사의 글에 따르면 천하를 발호하던 군주도 죽으면 한 줌 흙이 되어 쓸모 없는 해골만 남기지만,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공장들은 불후의 작품을 남겨놓는다.”라고 하였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며 풍족하게 살다간 사람들은 후대에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지만, 고단한 삶을 살아는 소시민 서민들일지라도 삶의 흔적을 남겨 놓으면 누군가 기억해 줄 것이다.

 

작품을 통하여 감응하게 된다면

 

도선사 석불의 안쓰러운 표정은 바라 보는 이로 하여금 눈물을 왈칵 쏟게 만들 것 같다. 그것은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잘 표현한 이름 없는 석공의 작품이다.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막고굴 역시 보는 이로 하여금 자비심을 느끼게 만든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석공과 화공은 영원히 살아 있는 셈이 된다. 작품을 통하여 감응하게 된다면 그 생명은 영원한 것이라 본다.

 

 

 

 

2013-06-2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