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상상의 동물, 돈황박물관에서 본 진묘수(鎭墓獸)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10. 14:41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상상의 동물, 돈황박물관에서 본 진묘수(鎭墓獸)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12, 돈황박물관, 2013-05-31)

 

  

돈황에서 머문 날은 5 30일과 5 31일 이틀간이다. 불과 이틀에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것을 보았다. 그 중 핵심은 양관, 명사산-월하천, 막고굴 이렇게 세 곳이다. 나머지 돈황박물관, 백마탑, 한나라고성유적, 돈황야시장은 단지 관광상품에 넣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래도 기록은 남겨야 한다. 기록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왜 기록을 남겨야 하는가

 

기록의 중요성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만일 기록이 없다면 역사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의 생활, 문화, 풍습 등도 알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기록의 남겨 놓았기에 오늘날 그런 사실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현장대사의 대당서역기는 불멸의 역사기록서이다.

 

대당서역기는 황제의 명을 받아 기록된 것이다. 현장대사가 18년간 구법여행을 마치고 돌와와서 당태종 이세민과 대면하였는데, 당태종은 서역의 정세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서역에 대하여 듣고 보고 느낀 것에 대하여 기록할 것을 명하였다. 그래서 1년에 걸쳐 완성된 것이 대당서역기이다.

 

대당서역기에는 각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상황과 지리등이 매우 상세히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황제의 관심사 위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개인적인 이야기는 빠져 있다. 그래서 대당서역기를 보면 대장정의 첫걸음을 아그니국에서부터 시작한다.

 

아그니국은 오늘날 신장위구르 자치구 카라사르를 말하는데, 투루판과 쿠차 사이에 위치해 있다. 그렇다면 소설 서유기의 모티브가 되었던 현장대사의 개인적인 이야기는 어떻게 전승되어 왔을까? 첸웬중이 지은 현장서유기에 따르면 제자들이 기록을 남긴 것이라 한다.

 

현장스님이 공식적으로 남긴 것은 대당서역기이지만, 제가 혜립괴 언종 두 사람이 남긴 기록물이 있는데 그것은 현장스님의 전기에 해당되는 대자은사 삼장법사전이라 한다. 제자들이 현장스님을 따라다니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옮겨 써서 완성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현장스님이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스님이 입적하고 난 다음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역과 관련하여 정사에 해당되는 대당서역기가 있고 유사에 해당되는 대자은사 삼장법사전이렇게 두 종류의 기록물이 있는 것이다. 마치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형태이다.

 

제자들이 작성하였다는 대자은사 삼장법사전에는 현장대사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고 한다. 81난과 타국 승려들과 법거량 이야기, 그리고 각국의 전설 등이 마치 야담처럼 실려있다고 한다. 만일 그런 이야기들이 기록으로 남겨 지지 않았다면 고창국에서 고창국왕 국문태와 의형제를 맺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오늘날 까지 전해져 올 수 없었을 것이다.

 

돈황석굴문물보호연구진열중심

 

막고굴을 견학하고 난 다음 건너편에 있는 돈황석굴문물보호연구진열중심이라는 긴이름을 가진 전시관으로 이동하였다. 줄여서 연구진열(硏究陳列)’이라 부르기로 한다.

 

 

 

 

 

 

 

 

 

 

돈황의 페인터(Painter)와 아티스트(Artist)

 

연구진열은 일종의 학습장이라 볼 수 있다. 막고굴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그리고 불상과 벽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막고굴의 예술품을 만든 화가와 아티스트들은 어디서 왔을까? 이에 대하여 하나의 지도를 보여 주고 있다.

 

 

 

 

지도를 보면 크게 서역, 중원, 티벳 이렇게 세 방향에서 화공들이 왔음을 알 수 있다.

 

막고굴 초기의 작품은 서역의 화공들이 주도 하였다. 이는 불교의 전파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수당이전의 작품을 보면 인도풍이 강하다.

 

중국에서 들어온 경우는 두 가지 케이스이다. 한 부류는 추방자로서 중원으로부터 추방당한 관리나 세력을 따라 이주한 예술가 그룹이다. 또 한 부류는 중국 황제의 명을 받아 공식적으로 들어온 예술가그룹이다. 당나라 시절 측천무후 집권 당시 대불조성시기와 일치 한다. 대체적으로 중국화 된 불상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티벳과 몽고에서도 예술가들이 들어 왔다. 티벳점령시절, 서하(Western Xia)와 원나라(Yuan Dynasty)시절이다. 이 시기의 작품을 보면 새로운 작품 스타일과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것들이다. 예를 든다면 금강환희보살상이 대표적이다. 남녀합일상을 말한다.

 

 

 

 

 

막고굴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막고굴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설명문이 있다. 영문으로 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 Chiselers who dug and excavated cave out of the cliff.

2. Stonecutters who handled stone materials and stone tools, and also dug caves.

3. Bricklayers who built wooden or earthen structures.

4. Carpenters who built structures and also made repaired wooden tools.

5. Sculptors who created the statues.

6. Painters who painted the caves and statues.

 

 

총 여섯 단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석굴을 파는 사람들(Chiselers)이다. 이들의 역할은 낭떠러지에 있는 석굴을 만들기 위해 정 등을 이용하여 실제로 굴착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말로 굴착공으로 옮길 수 있다. 가장 중노동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굴의 형태가 완성되면 두 번째 단계는 암반을 다듬는 작업이다. 이를 스톤커터(Stonecutter)라 하였는데 우리말로 석공이다.  돌을 다루는 도구를 이용하여 불상이 놓일 위치와 벽, 천정 등 동굴을 매끈하게 다듬는 작업이다.

 

세 번째 단계는 나무와 흙을 이용하여 벽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를 브릭레이여(Bricklayer)라 하였는데 벽돌공이라는 뜻이다.

 

네 번째 단계는 나무를 다루는 연장을 사용하여 구조물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를 카펜터(Carpenter)라 하였는데 우리말로 목공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형상을 만드는 사람이다. 이를 스컬터(Sculptor)라 하는데 조각가를 말한다.

 

여섯 째 단계는 동굴과 형상에 대하여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다. 이를 페인터(Painter)라 하는데 화가라 한다.

 

불상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처럼 하나의 동굴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굴착공, 석공, 벽돌공, 목공, 조각가, 화가 이렇게 여섯 단계의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이는 막고굴의 지형과 관련이 있다.

 

막고굴이 있은 벼랑은 왕모래가 진흙 등과 섞여 이루어진 역암이라 한다. 그래서 용문석굴처럼 불상을 조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그래서 벽면에 흙을 발라 벽화를 그렸고, 중앙 공간에는 강바닥에서 채취한 흙을 이겨 불상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불상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돈황박물관에서 산 책인돈황과 실크로드에 따르면, “흙으로 만든 소상은 나무골재에 풀새끼를 묶고 강바닥에 침전된 고운 점토를 삼베나 모래 등과 섞어 형상을 만들고, 이 위에 백토로 마감한 뒤 색채나 금박을 입혀 아름다운 상을 만든 것으로 이른바 채소라 부른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과정을 보여 보여 주는 실물이 있다. 다음과 같은 돈황연구진열에 있는 다음과 같은 사진이다.

 

 

 

 

 

그림의 재료는

 

화가들은 어떤 도구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을까? 이에 대해서도 실물을 통하여 상세하게 알려 주고 있다.

 

 

 

 

그림에 사용되는 원료는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다. 푸른색을 내려면 푸른색 돌에서 채취하고, 붉은 색을 내려면 붉은색 돌에서 채취함을 나타내고 있다.

 

벽화를 만드는 과정은

 

벽화를 만드는 과정은 어떤 것일까? 이것 역시 순서대로 보여 주고 있다. 설명문에 따르면 Coarse mud layer(거친 진흙층, 조초니층), Fine mud layer(미세진흙층, 세니층), Powder layer(백분층) 이렇게 세 단계가 있다.

 

 

 

 

돈황석굴문물보호연구진열중심관에서는 별도의 가이드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그저 둘러 보면 된다.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한 눈에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막고굴을 벗어나 돈황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돈황 분위기에 맞는 돈황박물관

 

돈황박물관은 돈황시내에 있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최근 지어진 것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돈황의 분위기에 맞는 건물형상이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에서 가는 곳 마다 박물관이 있었다. 그래서 박물관 견학이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었는데, 가이드는 아는 한도에서 설명해 주었다.

 

법우님의 도움을 받아

 

어느 박물관이든지 유물은 시대순으로 진열되어 있다. 그래서 고대에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전시되어 있는데, 중국의 경우 중국 역사순으로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에서 본 것들은 한 번 지나치면 그만이다. 그래서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 놓으면 남는다. 박물관에서는 플레시를 터뜨리지 않는 한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디카의 성능이 좋지 않아 박물관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그래서 법우님의 도움을 받았다. 성능이 좋은 전문 카메라로 찍어 놓은 사진을 가져 온 것이다.

 

최근 만들어진 박물관

 

최근에 만들어져 그런지 몰라도 돈황박물관은 무척 크다. 그리고 전시되어 있는 유물도 많고 내용도 풍부하다. 서역에서 우루무치 박물관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고 한다.

 

 

 

 

 

 

 

 

 

 

 

 

 

 

청대 돈황성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엇일까? 절에 가면 사천왕상이라 할 것이다.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의 형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천왕상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금강역사상이다.

 

금강역사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사천왕상 보다 금강역사상이 사찰 입구를 지키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런데 이번 실크로드 여행에서 금강역사상 보다 더 무서운 존재를 보았다. 그것은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鎭墓獸)라 한다. 고대 중국인들은 무덤에 악귀가 들어 오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 입구에 가장 무섭다는 상상속의 동물을 만들어 둔 것이다.

 

 

 

진묘수(鎭墓獸)

무덤을 지키는 상상속의 동물

 

 

 

무열왕릉의 진묘수

 

돈황박물관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박물관에서 진묘수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매우 기괴하고 무섭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 진묘수를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무령왕릉을 지키는 진묘수이다. 이를 보면 무섭다기 보다 귀엽게 생긴 모습이다.

 

 

 

백제 무열왕능 진묘수

 

 

사람과 짐승의 형상을 한 괴수

 

그런데 무열왕능에서 보던 것과 비슷한 상상속의 동물도 보인다. 돈황박물관에서 본 사람과 짐승의 형상을 한 괴수이다.

 

 

 

 

 

영화의 괴수 보다 더 무서운 진묘수(鎭墓獸)

 

그러나 오리지날 진묘수의 무서움에는 못미친다. 무덤을 지키는 무서운 형상의 진묘수를 보니 그것은 영화에서 보던 괴수 보다 무서운 형상이다.

 

 

 

 

 

 

 

 

불상을 보면

 

돈황박물관에  갔었지만 지나치면서 보았기 때문에 특별한 기억이 없다. 다만 남겨진 사진을 통하여 그런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정도이다. 많은 사진 중에 불상에 대한 것을 모았다.

 

 

 

 

 

 

 

 

 

 

 

 

 

 

 

 

 

 

 

 

 

 

 

 

 

 

 

 

 

 

 

 

 

 

 

 

 

 

 

 

 

 

 

 

 

 

 

 

 

 

 

 

 

 

 

 

 

 

 

 

 

 

한국사람이 얼마나 많이 오길래

 

돈황박물관에서 유심히 본 것 중의 하나는 설명문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한글설명이 있다는 것이다. 한문과 영문과 함께 우리말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어는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매우 많이 다녀 간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한다고 볼 수 있다.

 

 

 

 

 

 

 

 

 

 

 

혜초스님이 보이지 않는다

 

돈황박물관에서 본 것 중에 돈황을 거처간 고승의 명단이 있다. 실크로드를 왕래 하면 반드시 돈황을 거쳐 가야 하는데 명단을 보니 17명이다. 가장 먼저 온 사람이 안식국의 안세고이다. 왕래기간을 보니 148년에서 171년으로 되어 있다. 17번 째는 동천축(동인도)의 사람인데 사진이 흐려서 이름이 분명치 않다.당나라 시절인 732년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 16번째는 현장스님으로 627에서 643년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혜초스님은 보이지 않는다.   

 

 

 

 

 

혜초는 우리나라 스님일까?

 

혜초스님(704-787)은 해로를 이용하여 인도로 갔고, 돌아 올 때는 서역을 경유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때가 727년이다. 그렇다면 돈황에 들렀을 텐데 명단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혜초스님은 돈황을 방문하지 않고 곧바로 장안으로 간 것일까?

 

언젠가 공중파 방송에서 혜초스님에 대한 특집을 다룬 적이 있다. 그때 방송된 것 중에 기억나는 것은 혜초스님의 국적에 대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상식은 혜초가 신라사람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방송에 따르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말하였다. 혜초라는 법명은 중국에서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혜초가 신라스님이라고 알려 졌을까? 위키 백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우선 혜초의 고국은 여행기가 발견된 지 7년 후인 1915에 처음으로 일본 학자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에 의해 밝혀졌다. 그 전에는 다만 그가 밀교승으로 불공(不空, Amoghavajra, 705~774) 삼장의 제자라는 것만 알려졌을 뿐, 그의 국적은 미지로 남아 있었다. 다카쿠스 준지로는 당대 밀교 최성기의 중요 문헌인 원조(圓照)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代宗朝贈司空大瓣正廣智三藏和尙表制集)》 속에 수록되어 있는 사료를 인용하여, 혜초는 신라인으로서 유년기에 당나라에 들어가 중국 밀종(密宗)의 시조인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 삼장을 사사하고 불경의 한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고 고증하였다.

 

(혜초, 위키백과)

 

 

혜초가 신라고승이라는 것은 당대 밀교문헌인 대종조증사공대판정광지삼장화상표제집에 수록되어 있는 사료를 근거로 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방송에 따르면 사료에 실려 있는 혜초와 왕오천축국전의 저자 혜초와 동일인물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혜초가 신라 성덕왕 시절의 고승이었다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런 혜초는 신라에 귀국하지 않았고 중국 오대산에 머물며 불경을 번역하면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카페식 박물관

 

돈황박물관은 다른 박물관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박물관 중앙에 매점이 있다는 것이다. 각종 기념품을 팔고 있는데, 심지어 옷가지도 팔고 있다. 그리고 카페식으로 되어 있어서 앉아 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 무료로 차와 음료수도 제공된다.

 

 

 

 

 

 

 

 

 

 

 

 

 

 

 

 

 

 

 

 

 

 

 

 

 

 

 

 

 

 

구마라습의 백마탑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백마탑이다. 백마탑은 서역 역경승 구마라습과 관련이 있다. 구라마습이 장안으로 가던 길에 타고 가던 애마가 죽었다. 그곳이 돈황이다. 그래서 이를 기리기 위하여 백마탑을 세웠다고 한다.

 

 

 

 

 

 

 

 

 

 

백마탑은 그다지 인기 있는 관광지가 아니다. 그저 10여분 둘러 보고 지나치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다른 관광지처럼 시끌 벅적하지도 않고 볼만한 구경거리도 없다.

 

 

 

 

 

 

 

 

 

 

볼 것 없는 한나라 고성

 

한나라 고성은 정말 볼 것이 없다. 버스가 잠시 멈추고 볼 사람은 보고 오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관광상품 명단에는 들어 있다.

 

 

 

 

 

 

 

 

 

 

 

 

 

 

 

야시장에 갔더니

 

돈황에 야시장이 있다. 야시장도 관광상품에 포함 되어 있다. 야시장 역시 한 번 둘러 보는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 돈황 첫날 저녁에 둘러 보았다.

 

 

 

 

 

 

 

 

 

 

 

 

 

 

주로 공예품을 팔고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직접 작품을 만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모두 막고굴에 있는 예술품을 소재로 한 것들이다.

 

 

 

 

 

 

 

 

 

야시장에는 양고기 꼬치구이를 파는 곳도 있다. 도로 중앙에 테이블을 마련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이날 강행군으로 너무 피곤하여서일까 아무도 야시장에 앉아 있지 않았다.

 

 

 

 

 

돈황을 떠나며

 

가급적 여행지에 대한 기록을 빠짐없이 남기려 한다. 비록 사소한 곳일지라도 이동한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하였을 경우 누군가에게 필요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돈황을 떠나는 날이다. 이틀간 일정으로 강행군하여 볼만한 것은 다 보았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 하미로 가기 위하여 유원역으로 향하였다. 돈황 북쪽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유원역으로 가는 길목에는 여전히 황량한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2013-07-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