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그들은 완전 도둑놈들입니다” 막고굴 장경동과 오오타니 콜렉션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24. 16:12

 

“그들은 완전 도둑놈들입니다” 막고굴 장경동과 오오타니 콜렉션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8, 막고굴 장경동, 2013-05-31)

 

 

 

이번 실크로드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돈황과 투루판이다. 특히 돈황이 절정이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막고굴(莫高窟)이 있기 때문이다.

 

막고굴은 어디에

 

5 31일 첫 일정지인 막고굴로 향하였다. 돈황시내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26키로미터 지점에 있다. 위성지도로 보면 사막 한 가운데 있다.

 

 

 

막고굴 위성지도

A가 돈황시이고, B가 막고굴이다.

 

 

 

막고굴 지역을 더 확장해 보면 남쪽(B)의 동굴지역과 북쪽의 박물관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박물관지역은 막고굴을 설명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대규모 단지이다.

 

 

 

B가 막고굴이고, 오른편은 박물관지역이다.

 

 

 

돈황시 천불동

 

막고굴은 중국 깐쑤성(감숙성)에 돈황에 있는 대표적인 천불동이다. 그래서 198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중국에서는 돈황시 천불동이라 불리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막고굴로 불리운다.

 

 

 

막고굴에 가려면 사막을 가로 질러야 한다.

 

 

 

 

 

작업자들의 동굴

막고굴 오른편에 있는데 화가등 작업자들의 숙소라 한다. 

 

 

 

 

 

 

 

 

 

 

 

막고굴과 박물관지역 사이에 강이 있다.

 

 

 

 

 

 

 

 

 

 

 

 

 

 

 

 

 

 

 

 

 

 

 

 

 

 

 

 

 

 

 

 

2의 막고굴을 만든다고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박물관 지역에 제2의 막고굴을 만들것이라 한다. 막고굴의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라 한다. 그래서 모조 막고굴을 만들어 견학하게 하고, 진짜 막고굴은 점차적으로 폐쇄 할 것이라 한다.

 

모조막고굴이 완성되는 시기가 언제 될지 모르지만 앞으로 어느 때 돈황에 가면 가짜막고굴을 견학하게 될지 모른다. 그런 조짐은 이미 보인다. 박물관에 진짜 막고굴과 똑 같은 모조 막고굴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수나라 시절 만들어진 제419굴에 대한 모조 막고굴은 다음과 같다.

 

 

 

 

 

 

 

 

 

 

 

 

 

 

 

모조 막고굴(제419굴)

막고굴 건너편 박물관 내에 설치 되어 있다.

 

 

 

모조 막고굴을 보면 진짜 막고굴과 거의 똑같다. 크기, 형상, 색깔, 심지어 지워진 부분까지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한족 전문가이드

  

막고굴에 들어 가기전에 가이드가 당부한 것이 있다. 사진을 절대 찍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또 큰 가방을 들고 가도 안된다고 한다. 이렇게 안되는 것이 많은 것이 막고굴이다. 그래서일까 막고굴 내에서의 설명은 가이드 몫이 아니라 전문가이드의 몫이다. 우리말을 할 줄 하는 한족가이드이다.

 

한족 전문가이드는 우리말이 서투르다. 우리나라 관광객을 위하여 우리말로 말하긴 하지만 마치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줄줄이 말한다. 질문을 하면 막혀 버리기 때문에 가급적 질문을 하지 말라고 가이드는 당부한다. 우리말 공부를 한지 몇 년 되지 않았서 어려운 단어가 나오면 말의 흐름이 끊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녹음기가 멈추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한다.

 

전문가이드는 이어폰을 나누어 주었다. 막고굴내에서 큰 소리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소곤 거리듯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막고굴 한족 전문가이드(오른쪽 검은 색 옷)

 

 

 

천년만에 발견된 장경동

 

막고굴은 아주 깜깜하다. 아무런 전기 시설이 없어서 가이드가 레이져 광선이 나오는 도구를 이용하여 특정 부분을 비추어 설명한다. 이렇게 막고굴은 엄격하게 통제 되어 있다. 그래서 개방된 곳만 보여 준다. 메모해 놓은 것을 보니 336-335-337, 16, 17(장경동), 427, 428, 251, 249, 237, 148, 130(미륵대불), 158(열반상)을 보았다.

 

 

 

 

 

 

 

 

 

 

 

 

가장 관심있게 본 것은 17굴에 있는 장경동이다. 1900년 돈황석굴을 지키던 태청궁 도사 황원록이 발견한 것이다. 16굴을 청소하다가 이상한 공명을 듣다 발견하였다고도 하고, 담배를 피우다가 연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발견하였다고도 한다.

 

17굴이라 불리우는 장경동은 작은 굴이다. 길이가 2.6미터이고 높이가 3미터로서 16굴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이라 볼 수 있다. 천년전에 아무도 볼 수 없도록 벽을 만들고, 그 벽에는 벽화까지 그려 넣어서 누구도 찾을 수 없도록 해 놓았다. 왜 그렇게 하였을까?

 

동굴을 왜 막아 놓았을까?

 

막고굴은 카메라 촬용이 허용되지 않는다. 오로지 가이드의 나지막한 설명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막고굴을 보고 왔어도 사진 한 장 남길 수 없다. 그래서 1980 NHK에서 방영되었던 실크로드에서 돈황과 관련된 프로가 있는데, 그 중 장경동에 관한 부분을 커팅하였다. 그리고 동굴을 막은 이유에 대한 대화부분을  녹취하였다.

 

 

동굴을 막아버린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서하가 돈황을 침공했을 때 경서와 서화를 묻었다는 설로 1036년 경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의 설은 서하가 돈황을 지배한 후 즉 1054년 경인데, 서하는 불교를 믿었으니 서하가 침공했다고 해서 숨길필요는 없었다는 거죠. 그 당시 서방에서 이슬람교도가 들어 왔는데 그들로부터 보호하기 의해 봉한게 아니냐는 겁니다.

(중국인 학자, NHK실크로드-1980)

 

 

 

 

 

NHK실크로드(1980) 장경동 부분

 

 

 

17번 굴을 막아 버린 이유에 대하여 서하의 침공과 이슬람의 침공의 위협으로부터 불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서하는 불교국가이었다. 서하가 돈황을 점령하고 나서도 돈황석굴은 계속 만들어 졌고, 서하왕실에서도 불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왜 막아 놓았을까?

 

장경동(17)의 봉쇄는 이슬람의 전파와 관련이 있다. 11세기 당시 돈황은 서하가 지배하고 있었는데, 송나라는 서하가 골칫거리었다. 서하가 거란과 동맹을 맺으면 매우 위태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서역의 이슬람 왕조인 하라칸은 송나라에게 서하를 쳐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송나라가 동의하자 불교도들은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지금이나 그때나 불교와 이슬람은 상극이다. 이슬람이 발흥하는 지역이면 예외 없이 불교가 씨가 마를 정도로 황폐화 되기 때문이다. 어떤 우상도 인정하지 않은 이슬람교에서 마치 우상숭배하는 종교처럼 보이는 불교는 도저히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슬람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불교가 초토화 된다. 이는 역사적으로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1세기 서역도 마찬가지이었다. 천산산맥 너머의 중앙아시아는 원래 불교국가이었으나 751년 탈라스전투에서 패배한 이래 이슬람의 수중으로 넘어 갔다. 그리고 불교의 흔적은 모조리 사라졌다. 이런 사실을 알아서일까 그 때 당시 돈황의 불교도들은 보호조치를 취하였다. 이슬람교도들이 쳐 들어 오면 모든 것이 불태워져 버릴 것이기 때문에 천불동에 있는 경전, 불상, 문서를 모조리 석실에 넣고 벽으로 봉쇄 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천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들은 완전 도둑놈들입니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장경동은 관광객들의 필수관람 코스가 되었다. 그러나 장경동 17번 굴은 텅 비어 있다. 다만 방중앙에 당나라 고승 홍변의 소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 많던 문서는 다 어디 갔을까? 한족 전문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외국에서 다 가졌갔다고 하였다. 1900년 문서가 발견된 이래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에서 온 학자들이나 여행가 들이 대부분 가져갔다고 한다. 1907년 영국인 스타인은 왕도사에게 양한마리 값을 주고 헐값에 7,000 점을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나 한족 출신 여성가이드는 팔았다지만 거짓말해서 훔쳐 가져 갔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영국인이 훔쳐 갔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해 1908년에는 프랑스인 펠리오가 왔다. 중국 연구자로 알려진 펠리오 역시 왕도사를 회유하여 추가로 7,000점을 가져 갔다고 한다. 그래서 5만점에 달하는 자료 중에 남아 있는 것은 8000여점에 불과하다고 한다.

 

돈황과 서역에서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불화, 경전등을 엄선하여 훔쳐 간 자들을 사막의 도적이라 한다.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스웨덴의 헤딘, 독일의 르콕, 미국의 워너, 일본의 오오타니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이들이 고고학적 발굴로 인하여 인류문화에 기여한 바도 없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역사와 유물을 강탈한 파렴치범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족 출신 전문가이드는 단호하게 우리나라 말로 그들이 훔쳐 갔습니다또는  그들은 완전 도둑놈들입니다라고 감정 섞인 말을 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오오타니 콜렉션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 박물관을 종종 찾는다. 주로 우리나라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외국유물 전시실도 있다. 그 중에 특히 눈의 띄는 것은 서역전시실이다. 왜 서역문화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다량있는 것일까?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서역문화재를 보고 무척 신기해 하였다. 우리나라와 서역이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매우 다양한 벽화, 불상 등 갖가지 서역 문화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이번 실크로드 여행 후기를 쓰면서 풀렸다. 그것은 일본인 오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소장해 놓은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서역실

오오타니가 약탈해온 서역문화재가 다수 전시되고 있다.

 

 

 

오오타니는 중국인이 말하는 사막의 도적중의 하나이다. 돈황 등 서역에서 수 많은 유물들을 가져 갔기 때문이다. 그때가 스타인이나 펠리오가 활동하던 1900년에서 19014년 사이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오오타니는 승려출신이라 한다. 정토종 계열의 서본원사 주지승이자 학승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오타니가 영국런던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중앙아시아 탐험에 나선 것은 27세 부터라고 한다. 그래서 1902년에서부터 1914년 까지 중앙아시아 탐험을 하였는데, 그때 돈황과 쿠차 등에서 수 많은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 간것이다.  

 

그렇다면 오오타니가 약탈하다시피 가져간 문화재가 어떻게 하여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남게 되었을까? 이는 오오타니가 주지로 있었던 서본원사의 파산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화재를 그 때 당시 재벌인 구하라에게 팔았다고 한다. 그것이 1916년 구하라의 고향친구인 테라우치 총독이 있는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준 것이 아니라 조선광산채굴권에 대한 뇌물 성격으로 준 것이다. 이 문화재들이 해방후에 한국국고에 귀속된 것이다. 그래서 오오타니 컬렉션 중 1/3은 한국에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컬한 서역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서역의 문화재를 볼 수 있다. 그 중에 벽화도 볼 수 있다. 천불동에 있는 벽화를 뜯어 온 것이다. 이번에 확실하게 안 사실이지만 오오타니가 서역 천불동에서 약탈해 온 것이다. 그런 약탈 흔적은 투루판 베제클릭 천불동 계곡에 가면 볼 수 있다. 자로 잰듯이 잘라간 흔적들이다.

 

 

 

투루판 베제클릭 천불동

사막의 도적이라 불리우는 학자와 탐험가들이 벽화를 통쨰로 뜯어간 흔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서역 문화재를 볼 수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오타니가 약탈해간 것이 일제강정기때 조선총독부에 남게 됨에 되고, 해방후 국고에 귀속되었는데, 이런 약탈문화재에 대한 소유권은 어디에 있을까? 만일 중국에서 돌려 달라고 하면 돌려 주어야 할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수 많은 서역문화재는 돈황과 하미 박물관에서 본 것과 다름이 없다. 수적으로나 질적으로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래서 서역 문화재를 보기 위하여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더구나 벽화의 경우 투루판 베제클릭 천불동에는 없지만 국립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그리고 현지의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마치 돈황박물관의 분원과도 같은 분위기이다. 사막의 도적 오오타니가 약탈해간 문화재를 우리나라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이 역사적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다.

 

 

 

2013-06-24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