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현장스님의 불퇴전 구도(求道)열정,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양관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18. 12:23

 

현장스님의 불퇴전 구도(求道)열정,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양관에서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6, 양관, 2013-05-30)

 

 

승마체험하는 길

 

역사의 고도 돈황에 도착하였다. 유원역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남서쪽 방향으로 140여 키로미터 가량 버스로 이동하여 도착한 것이다. 그런데 길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가이드는 승마체험하는 길이라 하였다. 포장 도로 이긴 하지만 길이 울퉁불퉁 하여 마치 말을 타는 것처럼 출렁거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했다. 승차감이 좋지 않아 가이드가 말한 것을 받아 적을 수 없을 정도로 정도로 울퉁불퉁 하였다.

 

 

 

 

 

돈황은 현대적 도시

 

돈황시에 도착하였다. 원래 일정이라면 점심을 먹고 오늘의 첫 번째 일정 장소인 양관으로 곧바로 이동해야 하나 야간열차의 피로감으로 인하여 호텔에 먼저 들르기로 하였다. 그래서 첵크인을 하고 샤워 시간을 가진 다음 호텔에서 점심을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12시 이전에 호텔에 들어 도착 할 수 있었다.

 

호텔로 들어 가는 길에 본 돈황은 현대적 도시이었다. 막고굴만 연상한다면 오래되고 낡은 것을 연상하기 쉽지만 시내의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가로는 잘 정비 되어 있고 건물도 깨끗하였다. 관광으로 유지하는 도시이어서일까 이곳 저곳에 호텔이 신축되고 있었다. 특히 강가에 짓고 있는 호텔은 5성급이라 한다.

 

 

 

 

 

돈황은 사막 한 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도시의 성격이다. 그런데 돈황에도 강이 있었다. 그것도 맑고 시푸른 강이다. 어떻게 사막 한 가운데 강이 있을 수 있을까? 강이 있긴 있는데 한쪽을 막아 놓았기 때문에 커다란 마치 호수 같은 커다란 강으로 보이는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에 도착하였다. 4성급에 준하는 3성급 호텔이라 한다. 12시 이전이지만 야간열차로 인하여 모두 지쳐 있었기 때문에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였다. 비행기로 이동한 첫날은 호텔에 새벽에 들어가 잠을 못자고, 이튿날은 야간열차라서 잠을 못 잤기 때문에 여행 셋째날은 극도로 피곤하였다. 그러나 샤워를 하자 피로가 좀 가셨다.

 

 

 

 

 

 

 

 

 

 

호텔 방에서 본 모래산

 

호텔방에서 바깥을 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과 마주쳤다. 그것은 모래산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사는 곳을 벗어나면 바로 사막인 것이다. 나무 한 구루 없는 모래 산은 명사산이라 한다. 오후에 명사산-월하천 일정에 잡혀 있는 곳이다.

 

 

 

 

 

기름에 데치고 향신료 냄새 나는 중국음식

 

호텔에서 점식식사를 하였다. 늘 그렇듯이 기름에 데친 것들 뿐이다. 그리고 향신료를 사용하여 특유의 냄새가 났다. 약간 감기 기운이 있는 상태에서 음식마저 마음대로 먹지 못하니 몸이 더 쳐지는 것 같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5 30일 첫 번째 일정을 소화 하기 위하여 양관으로 출발하였다. 양관은 실크로드길에서 서역남로의 출발지이다.

 

양관을 향하여

 

돈황은 실질적으로 실크로드가 시작 되는 곳이다. 그런 실크로드는 크게 두 갈래의 길이 있다. 서역북로와 서역남로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길을 북로라 하고, 남쪽길을 남로라 한다. 지금 양관으로 가는 길은 남로에 해당 된다.

 

첫 번째 일정 목적지 양관은 어디에 위치해 있을까? 위성지도로 보면 다음과 같다.

 

 

 

 

 

위성지도를 보면 돈황에서 양관까지 약65Km 거리이다. 차로 2시간 정도 이동해야 한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구간은 비포장 도로로서 그야말로 사막길을 달려야 한다. 그래서 버스가 시속 30키로 정도 밖에 속도를 내지 못한다.

 

일본에서 만든 영화세트장

 

양관가는 길에 들어서자 가이드가 설명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영화세트장이다. 사막에 영화세트장이 있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가이드는 수 없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검색을 해 보면 가이드가 했던 말이 고스란히 나온다. 스토리는 이렇다.

 

 

돈황고성 세트장

돈황에서 양관으로 향하는 길 주변에 돈황고성 세트장이 있다.
이 세트장은 '돈황'이라는 중일 합작영화를 제작할 때
일본인이 막대한 금액을 투자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과 짧은 기간에 촬영이 끝나버리자 투자한비용이
아까워진 일본인 제작자가 비용의 일부를 중국측이
돌려 줄 것을 요구 했단다.

이에 중국측이 불응하여 그냥 옮겨가라고 하자
일본 제작자는 이 세트장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고
다시 중국측은 이 지역이 청정지역임을 들어
불태울 때 발생하는 막대한 환경비용을 지불하라고 요구해
결국 일본 제작자는 그냥 물러나고 말았다고 한다.

 

(돈황의 영화세트장, 인터넷검색자료)

 

 

 

 

 

 

돈황고성의 영화세트장 이야기이다. 성이 있고 망루가 있어서 설명해 주지 않으면 마치 유적처럼 보일 것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가이드는 차로 이동할 때 많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두 다 메모해 놓았다. 만일 메모하지 않았다면 들은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 중에 놈놈놈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곳 돈황 사막에서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해신을 촬영 했다고 한다.

 

놈놈놈은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촬영 하였는데, 촬영장소가 그 때 당시 관광객들의 코스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방문하면 영화배우들을 만나서 사인도 받고 사진 촬영 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고 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The Good, the Bad, the Weird

 

 

진짜 지평선이란 이런 것

 

양관으로 가는 길은 산이라고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오로지 지평선만 보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김제평야 같은 곳이다. 안성이나 평택평야도 서해안쪽을 보면 산이 거의 없어서 지평선이라 부를 만 하다. 그러나 그다지 지평선 맛이 나지 않는다. 사람이 사는 집이 있고 논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지평선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문명의 흔적이 없는 것이라 본다. 그래서 사람은 물론 그 어떤 생명체도 없는 곳, 그것이 진짜 지평선일 것이다. 바로 양관 가는 길에 보는 지평선을 말한다.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

 

양관 가는 길 도중에 가이드는 옆을 보라고 한다. 자그마한 산이 하나 보였다. 산이라고 하지만 단지 평지에 돌출된 언덕배기에 불과하다. 그런데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산의 형상이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불자로서 반가웠다. 이곳 돈황이 불교와 인연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말해 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잊지 않고 해주는 가이드가 고마웠다.

 

 

 

 

 

 

 

 

 

양관 가는 길에 보는 와불산

 

 

산의 형상을 보니 틀림없는 부처님 모습이다. 왼편을 보면 부처님의 머리가 있는데 이마와 코 부분이 사람의 모습이다. 중간에 배가 보이고 오른편에는 발이 보인다.

 

언덕배기 같은 산의 이름은 와불산이다. 부처님이 누워 있는 형상의 산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와불산이 돈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2011년 중국 정주-낙양-서안 성지순례 당시에도 보았고, 2012년 일본 관서-북큐슈 성지순례에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가이드는 산의 형상을 보라고 하면서 부처님이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하였다. 그 가이드들에게 역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냥 지나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해 준 것이 고마운 것이다.

 

 

 

중국 숭산에서 본 와불산

앞산 너머 왼쳔에 부처님이 옆으로 누운 두상이 보인다.

 

 

 

 

 

일본 아소산 근교의 와불산

저 멀리 왼편에 부처님의 옆모습의 두상과 오른편에 몸체가 보인다.

 

 

 

부처님의 형상을 한 산의 실루엣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자산 법흥사의 적멸보궁이다. 적멸 보궁을 감싸고 있는 산의 실루엣이 부처님의 누워 있는 모습이라 한다. 그래서 실루엣을 쫒아 가다 보면 머리 이마, 코 등을 확인 할 수 있다.

 

 

오아시스에 들어 가면

 

양관에 다가갈수록 오아시스의 푸루름이 점차 가까워진다. 가도 가다 사막 인줄 알았는데 숲이 있는 오아시스를 보자 안도의 마음이 든다. 그 옛날 대상들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오아시스에 들어 가면 다른 세상이 된 것 같다. 사막은 사라지고 온통 초록 뿐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5월 말이어서일까 오아시스는 푸른 생명으로 넘쳐 난다.

 

 

 

 

 

관광용으로 만들어 놓은 성채

 

목적지 양관에 도착 하였다. 오아시스 바로 옆에 관광용으로 만들어 놓은 성채에 도착한 것이다. 성채는 옛 모습으로 복원해 놓았다.

 

 

 

 

 

 

 

 

 

 

 

 

 

 

 

 

 

 

 

 

 

 

 

 

 

 

 

 

 

양관은 문자 그대로 관문이다. 서역으로 나아 가는 현관과 다름 없다. 그래서 서역남로에는 양관(陽關)이 있고, 서역북로에는 옥문관(玉門關, 위먼관)이 있다. 양관은 돈황에서 남서쪽으로 65km에 있고, 옥문관은 돈황에서 서북쪽으로 93km되는 지점에 있다. 옥문관까지 다 보아야 하나 거리가 너무 멀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여행일정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 그러나 양관과 분위기는 비슷할 것으로 본다.

 

 

 

 

 

 

 

 

 

 

 

서역의 영웅 장건(張騫)

 

 

관광용으로 조성된 성안으로 들어 가면 박물관이 있다. 시대별로 유물이 전시 되어 있지만 주로 서역루트 개척에 대한 것이다. 특히 장건에 대하여 설명을 많이 해 놓았다. 그런 장건은 서역의 영웅이다. 성안에는 장건 동상이 있다. 말을 타고 서역을 바로보고 있는 모습이다. 기상이 넘쳐 보이는 모습이다.

 

장건(張騫, ? ~ 기원전 114)은 실크로드를 개척한 인물이다. 기원 전 2세기 중국 한나라 때 여행가이자, 외교관이었다. 그는 한나라 때 서역으로 가는 남북의 도로를 개척하였고, 서역에서 한혈마, 포도, 석류, 복숭아 등의 물품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이드는 장건에 대하여 여러 차례 이야기 해 주었다. 그것은 장건의 삶이 드라마틱 하기 때문이다. 두 번 출사하여 두 번 흉노에게 잡혔고, 두 번 모두 탈출에 성공하였다는 이야기는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이런 장건의 출사 장면이 돈황의 막고굴 32굴에 그려져 있다고 한다.

 

 

 

 

 

장건의 서역 출사도

 

 

 

장건의 출사로 인하여 서역이 개척되었다. 그리고 실크로드가 열렸다. 이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사건이었다. 동서양의 문물과 문화가 교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 보다 가장 큰 사건은 이 실크로드를 통하여 불교가 전래 되었다는 사실이다. 장건이 루트를 개척함으로 인하여 한나라의 세력이 서역까지 뻗게 되었고 그에 따라 서역의 불교가 자연스럽게 전래 된 것이다.

 

중국최초의 절 백마사(白馬寺)

 

중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 된 것은 후한시대이다. AD68년 낙양 인근에 중국최초의 절 백마사가 건립된 것이다. 나라에서 사신을 맞이 하기 위하여 지은 장소가 중국 최초의 절이 된 것이다.

 

 

 

백마사(낙양)

 

 

 

중국에 불교를 최초로 중국에 전달한 사람이 지금의 아프간지방에 해당하는 ‘대월식’에서 온 가섭마등(迦葉眠:Kasyapa Matainga) , 축법란(竺法蘭:Dharmaratna) )이라는 두 스님이라고 한다.

 

 

두 서역승은 장건이 개척한 루트를 통하여 들어 왔다. 그리고 중국으로 들어 가는 관문격인 돈황을 거쳐 갔을 것이다.

 

출입국 관리사무소 같은 양관

 

양관은 옥문관과 함께 서역으로 떠나는 모든 사람들의 출국장소와 같은 것이다. 또 서역에서 들어 오는 사람들의 입국장소와 같은 것이다. 오늘날 공항에서 출입국대와 같은 것이다. 또 세관과 같은 것이다. 서역에서 들어 오는 물품과 나가는 물품을 모두 신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출입국 관리사무소 같은 양관은 그 때 당시 모든 여행객을 통제하였고, 또 감시 하였다. 동시에 국경수비도 역할도 하고 있었다. 성채를 쌓고 군대가 주둔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관광용으로 만들어 놓은 성채이다.

 

 

 

 

 

 

 

 

 

 

 

 

 

 

 

 

 

 

 

 

 

 

진짜 양관의 모습은?

 

그렇다면 진짜 양관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흔적만 남아 있다. 평지에 돌출 되어 있는 야트막한 봉우리에 봉화대 또는 전망대 같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비록 흔적만 남아 있지만 그곳이 최종관광지이다. 그래서 그곳까지 관광지에서 제공하는 전동차를 타고 가야 한다. 걸어서 갈 수 있지만 햇볕이 따가웁고 땀이 나기 때문이다. 또 걷기에는 부담 스런 거리이다.

 

 

 

 

 

 

 

 

 

 

양관의 현대판 전망대

 

 

전망대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들어 갈 수 없다. 그러나 관광객들을 위하여 전망이 좋은 곳에 시설을 마련해 놓았다. 지붕이 있는 현대판 전망대이다.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풍광

 

전망대에 서자 가슴이 후련 하였다. 이제 까지 보지 못하던 장관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오아시스를 제외 하고 사람이 사는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풍광이 끝없이 펼쳐 지고 있다.

 

 

 

 

 

 

 

 

 

 

 

 

 

 

스페셜 전망대에서

 

전망대는 두 개가 있었다. 하나가 메인이라면 또 하나는 스페셜이다. 저 멀리 언덕 위에 세워진 전망대가 눈길을 끌었다. 주어진 시간은 삼사십분에 지나지 않지만 10여분을 남겨 놓고 그곳에 가보기로 하였다.

 

 

 

 

 

 

스페셜전망대에서 본 풍광은 이번 여행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이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장쾌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마침 날씨마저 좋아 저 지평선 끝까지 또렸이 보였다.

 

 

 

 

 

 

 

 

 

 

 

 

 

 

 

 

 

 

 

 

 

 

사막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이제까지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설악산 같은 것이라 여겼다. 기암괴석이 있고 폭포가 있고 아름드리 나무가 빼곡한 국립공원 같은 곳이다. 그러나 이곳 양관 스페셜전망대에서 본 풍광은 인식의 변화를 이르켰다. 사막지형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기련산맥(山脈. 치롄산맥)의 설산

 

스페셜전망대는 사방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방을 둘러 보아도 인공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아시스 지대를 제외 하고 온통 누런 땅의 연속이다. 그리고 남쪽 방향 저 멀리 눈덥힌 설산이 보인다. 가이드가 말하기를 기련산맥(山脈. 치롄산맥)이라 한다. 광대한 황무지 저 너머 기련산맥의 설산이 있다는 것이 더욱 더 신비감을 더해 준다.

 

 

 

 

 

 

 

 

 

 

기련산맥의 만년설은 바로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평선 저 아득한 곳에 마치 신기루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기련산맥은 양관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위성지도를 찾아 보았다.

 

 

 

 

 

사진을 보면 A가 돈황시이고, B가 양관고지이다. 눈덥힌 기련산맥은 양관고지 남쪽 100Km 떨어진 것에 자립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련산맥은 칭짱고원(티벳고원)의 북쪽 기슭에 간쑤성(감숙성)과 칭하이성(청해성)에 걸쳐 북서쪽은 알타이 산맥에 접하고 있다. 산맥은 서북에서 동남으로 달리는데 길이가 2000Km이고, 폭이 200~500Km에 이른다. 지금 양관에서 보고 있는 기련산맥은 서북쪽의 끝자락이라 볼 수 있다.

 

첸원중의 현장 서유기

 

100Km너머에 있는 기련산맥의 만년설이 마치 눈 앞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오아시스를 제외 하고 문명의 흔적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마치 사진속의 달나라나 화성을 보는 듯 하다. 그래서 더욱더 고요하고 적막하다. 단지 바람소리만 들린다. 그 어떤 살아 꿈뜰거리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이런 황막한 분위기를 잘 표현한 것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 여행기를 작성하기 위하여 별도로 구입한 ‘현장서유기’이다.

 

 

 

 

 

 

일체의 상상과 허구를 거부하고

 

현장서유기는 중국의 역사학자가 쓴 책이다. 첸원중이라는 역사학자가 중국 CCTV 학술프로그램 백가강단에서 2007년도에 강의한 현장 서유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런데 책에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일체의 상상과 허구를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 역사의 고증을 거쳐 만든 책이다.

 

현장서유기에 등장하는 현장(玄奘, 602~664)스님은 소설서유기에서 보는 것차럼 우유부단하고 겁쟁이로서의 인물이 아니다.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구도를 향한 용감한 스님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는 역사적으로 현존하는 실증자료에 따라 책을 썼기 때문이다.

 

사막에 대하여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이 있을까?

 

현장서유기에서는 사막에 대한 묘사가 매우 리얼하게 묘사 되어 있다. 현장스님이 옥문관에 있는 다섯 봉하대의 감시를 피하여 사막을 빠져 나갔을 때 맞닥뜨린 것은 막하연적이라는 사막이었다. 오늘날 돈황과 하미 사이에 있는 둘레만 해도 800리에 달한다는 사막이다. 고비사막의 일부분이다.

 

현장스님은 국경을 빠져 나올 때 늙어 빠진 말 한마리에 의지하였다. 그리고 아득히 멀고 넓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 섰을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그곳에는 ‘하늘에 나는 새도 없고 하늘 아래 달리는 짐승도 없는(上無飛, 下無走獸)’곳,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정적만이 감도는, 생명체의 기척이라곤 전혀 없는 곳입니다.

 

(현장서유기, 첸원중지음)

 

 

 

 

 

사막에 대하여 이보다 더 자세하게 표현한 문장은 아직까지 보지 못하였다. 양관고지에서 본 사막의 풍광 역시 그러하였다. 하늘과 땅만 보일 뿐 그 어떤 생명체를 보지 못하였다. 현장서유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하늘에 나는 새도 없고 하늘 아래 달리는 짐승도 없는(上無飛, 下無走獸)”곳이 바로 사막인 것이다.

 

지명수배자 현장스님이 사막에서 경험한 것

 

현장스님이 홀로 구도여행을 감행하였을 때 지명수배자 신세이었다. 당나라 태종 정관의 치 원년 626년에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때 당시 서역의 상황이 좋지 않아 출입을 통제하던 시기라 한다. 지명수배자로서 현장스님이 사막을 건너는 이야기가 책에 생생하게 기록 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현장스님은 의지할 데 없는 홀몸으로 다섯 군데 봉화대를 향해 나아가기에 앞서 거대한 사막지대부터 건너야 했습니다. 이런 사막지대 한 복판에서, 그는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자취(낙타나 말의 똥 무더기, 그리고 죽어 넘어진 말 뼈다귀, 낙타 뼈다귀, 죽은 사람의 뼈)를 바라보면서 전진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장서유기, 첸원중지음)

 


사막에서는 방향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단지 하늘의 별자리를 보고, 뼈 무더기를 보고 앞으로 나아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갖가지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을 것으로 본다. 남겨진 문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고 한다.

 

 

모습을 바꾸고 형체를 옮기면서 순식간에 불현듯이 천변만화로 바뀌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주 뚜렸하기도 하다가도 점점 가까워질수록 희미해졌다.

 

(현장서유기, 첸원중지음)

 

 

이 내용은 현장스님이 직접작성한 문헌자료에 있는 것이라 한다. 오늘날 신기루현상, 즉 이상기후가 연출해 내는 자연현상을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당시 현장스님은 과학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요괴와 마귀의 장난으로 기록해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한다. 이런 기록 내용이 훗날 소설 서유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을 찾기 위하여

 

그렇다면 현장스님이 나라에서 금한 여행을 감행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구도(求道)에 대한 열정이라 본다. 이는 현장스님이 봉화대의 관리에게 붙잡혔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교리가 동녘 땅에 전해지면서 경전에 완전하지 못한 부분이 있고 해석에도 부족한 점이 있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탐내지 않고 어려움과 위험을 두려워 하지 않고 서방세계로 가서 잃어 버린 부처님 법을 구해 오겠다고 맹세한 것입니다.

 

(현장서유기, 첸원중지음)

 

 

이 말은 현장스님이 직접 남긴 글에서 인용한 것이라 한다. 현장스님이 인도로 구도여행을 떠나는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완전하게 전해지지 못하였으므로 부족한 부분을 찾기 위하여 구법(求法)여행을 떠났다는 것이다.

 

모든 불교가 동시에 들어오다 보니

 

현장스님이 활동하던 시기는 7세기 초반에서 중반이다. 이때가 당나라 전성기로서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해당된다. 또한 불교 역시 전성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그 이전에 도입된 불교는 중구난방이었다고 본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불교가 동시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불교역사로 보았을 때 인도에서는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로 단계적으로 전개 되었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공사상과 유식사상으로 발전되었다. 그래서 사상의 사조에 대한 혼란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달랐다. 거의 동시에 인도의 모든 불교문헌이 유입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까지 온갖 불교가 동시에 접하다 보니 교통정리 하듯이 정리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나온 것이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것을 먼저 공부해야 할지 혼란이 생겼다. 이를 교통정리한 것이 6세기 천태지의 대사의 교상판석이다.

 

그렇게 순서를 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혼란 스러웠던 것 같다. 빠진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어서 서로 연결이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역스님들이 전해 주는 불경에 의지 하지 않고 직접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 오기로 중국스님들이 마음 먹은 것이다. 현장스님도 그런 스님 중의 하나 이었다.

 

전래불교와 도입불교

 

이처럼 현장스님이 구법여행을 떠난 것은 잃어 버린 불경을 찾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 그 때 당시 중국불교의 역량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이제까지 서역승에 의존한 불교, 즉 ‘전래된 불교’이었으나 현장스님 같은 분이 나타남으로서 ‘도입하는 불교’로 전환 하였음을 의미한다.

 

 

문화는 물흐르듯이 흐른다고 한다. 문화의 특징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불교가 서역에서 전래 되었을 때 중국의 상황이 그러하였다. 서역에서 불경과 불상을 가져온 서역스님들이 불교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를 불교의 전래라 한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불교문화가 중국문화에 전래 된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중국에 정착하고 난 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중국인들은 불교를 직접 배우기 위하여 인도로 떠났다.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살았던 법현스님(337~422)이 대표적이다. 그 때 당시 불교문헌이 중국에 별로 없었기 때문에 399년 직접 인도로 건너 간 것이다. 그래서 범어를 배우고 많은 불교서적을 가지고 413년 귀국하였다. 7세기의 현장스님 역시 불경을 구하고자 직접 인도로 배우러 떠났다. 오늘날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것과 같은 케이스라 볼 수 있다.

 

이처럼 유학을 가서 스스로 배워온 불교를 도입불교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는 불교문화가 중국에 정착되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의 발로라 보여진다.

 

불퇴전의 현장스님

 

현장스님이 인도로 구법하기 위하여 떠난 시기는 중국에서 불교가 완전하게 정착한 시기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서역승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궁금한 사항이 생기면 인도에 직접가서 배워 오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런 시대의 대표적 인물이 현장스님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구도의 열정으로 가득찬 현장스님이 관리에게 붙잡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소설서유기에서 볼 수 없는 구도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기어코 억류하겠다면 마음대로 처벌하십시요. 나 현장은 끝까지 동쪽으로 한 걸음도 옮기지 않을 것이며, 앞서 품은 마음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必欲拘留, 任卽刑罰, 玄奘終不東移一步以負先心)

 

(현장서우기, 첸원중지음)

 

 

현장스님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해서든지 인도에 가서 불경을 구해와야 겠다는 생각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왔던 동쪽 방향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음을 말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이런 의지 때문이어서일까 현장스님을 붙잡었던 관리들이 국법을 어기고 후원자로 변한다. 현장스님이 몰래 국경을 넘는데 도움을 준 것이다.

이와 같은 현장스님의 모습을 보면 소설 서유기에 등장하는 우유부단하고 겁쟁이의 이미지로 묘사된 것과 전혀 다르다. 역사 속에 등장하는 현장스님은 용기 있는 구도자이었다.

 

현장스님의 구도의 열정은 불퇴전에 가깝다. 구도를 위해서는 한 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각오를 말한다. 그런 불퇴전이 있었기에 목숨을 건 구도여행이 가능하였을 것이다.

 

물러섬이 없는 불퇴전은

 

불퇴전과 관련하여 부처님도 말씀 히셨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물러섬이 없는 불퇴전은 어떤 것일까? 상윳따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불퇴전의 원리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이 시각으로 형상을 보고 그에게 결박의 조건이 되는 악하고 불건전한 기억과 의도가 일어나는데, 수행승들이여, 만약 그것을 환대하지 않고 버리고 제거하고 끝내고 없앤다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나는 착하고 건전한 법에서 불퇴전한다.’라고 알아야 한다. 세존은 이것을 불퇴전의 원리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Parihānadhammasutta-퇴전의 원리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96, 전재성님역)

 

 

부처님 말씀 하신 불퇴전의 원리는 악하고 불건전한 기억과 의도에 말려 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거기에 말려 들면 퇴전하는 것이라 하였다.

 

부처님은 또 불퇴전에 대하여 보름달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깟싸빠여, 예를 들면 한 달의 밝은 전반부에는 밤이 오고 낮이 올 때마다 달의 색깔이 선명해지고, 둥근 모습이 원만해지고, 빛이 밝아지고, 직경과 원둘레가  늘어나는 것과 같다.

 

깟싸빠여,이와 같이 누구라도 착하고 건전한 것과 관련하여 믿음이 있고, 착하고 건전한 것과 관련하여 부끄러움이 있고, 착하고 건전한 것과 관련하여 창피함이 있고, 착하고 건전한 것과 관련하여 정진이 있고, 착하고 건전한 것과 관련하여 지혜가 있다면, 그에게는 밤이 오고 낮이 올 때마다 착하고 건전한 것과 관련하여 퇴전은 없고 성장만이 있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깟싸빠여, 믿음이 있는 인간의 성품을 지니면 그것은 불퇴전이다.

깟싸빠여,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의 성품을 지니면 그것은 불퇴전이다.

깟싸빠여, 창피함을 아는 인간의 성품을 지니면 그것은 불퇴전이다.

깟싸빠여, 정진하는 인간의 성품을 지니면 그것은 불퇴전이다.

깟싸빠여, 지혜로운 인간의 성품을 지니면 그것은 불퇴전이다.

깟싸빠여, 화내지 않는 인간의 성품을 지니면 그것은 불퇴전이다.

깟싸빠여, 원한이 없는 인간의 성품을 지니면 그것은 불퇴전이다.

깟싸빠여, 수행승들이 훈계를 받아들이면 그것은 불퇴전이다.”

 

(Dutiyaovādasutta-훈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16:7,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달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달이 차오르는 것처럼 불퇴전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믿음, 부끄러움, 창피함, 정진, 지혜에 대한 불퇴전의 마음을 내면 마치 달이 차오르는 것처럼 둥글고 원만하게 될 것이라 한다.

 

 

 

 

2013-06-18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