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고성에서 탑돌이를 하고, 투루판 고창고성은 불교성지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18, 고창고성, 2013-06-02)
고창(高昌)고성으로
베제클리크 천불동을 보고 난 후 버스는 고창고성으로 향하였다. 베제클리크 천불동과 거리는 불과 13키로미터 밖에 되지 않는다.
서유기로 유명한 화염산과 고창고성은 매우 가깝다. 화염산 아래에 오아시스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성지도로 보면 다음과 같다.
화염산관광지(B)-고창고성(A) 10키로미터
마당에서 자는 위구르족
고창고성 가는 길에 위구족들의 삶의 모습을 보았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집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이다. 흙벽돌로 지은 집으로서 주변의 메마르고 건조한 땅과 어울린다.
아직도 옛날 그대로 흙집에서 살고 있는 현지인들의 집 구조를 보면 중앙의 마당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더운 여름날 잠을 잘 때 마당에다 침대를 놓고 다고 한다. 비가 오지 않은 건조한 지역이어서 모기가 없기 때문에 마당에서 자도 큰 문제가 없다고 한다.
고창고성의 위치
가이드는 고창고성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다. 옛날 중국에서 서안을 출발한 일단의 무리들이 이곳 까지 당도하였는데 너무 힘들고 지쳤다고 한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강에 물이 흐르고 풍요로운 오아시스 지대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강이 흐르지 않지만 그때 당시에는 강이 있어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 가지 않고 이곳에 정착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란을 피하여 서쪽으로 이동하여 정착한 곳이 고창고성지역이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고창은 고대 실크로드 도시로 건설 되었다고 한다. 교역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로 발전하였는데 상인들의 휴식처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 고창고성이 있는 유적은 현재의 투르판 시내에서 동쪽으로 30키로 미터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투루판시(B)-고창고성(A) 30키로미터
고창의 역사
고창고성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 되어 있다.
고창 역사
고창은 기원전 1세기에 건설되었고, 비단길의 중요한 도시였으나 14세기에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가오 왕궁 유적은 도시 외곽에 있으며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고창은 위구르어로는 콰라호자라고 불리며 위치는 신장의 투르판에서 30km 떨어져 있다.
고창은 서부 중국에서 교통의 허브로서 열쇠의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남아있는 문헌 역사 많지 않다. 구전된 이야기들만이 역사를 구체화하기 위해 존재한다. 고고 학적인 유물은 단지 지역주민에 의해 이디쿠샤리라 불리는 교외의 장소에만 있다. 도시의 예술적인 기념비는 A. 폰르콕에 의해 출판되었다.
서기 439년에 북량의 패잔병이 주쿠 우휘와 주쿠 안조우의 지휘아래 고창으로 달아났다. 그곳에서 그들은 서기 460년까지 권력을 유지하였다. 그때 누란에의해 정복되었다. 고창에는 한족이 만가구 이상 있었으며, 460년, 누란은 한족인 칸 보조우를 고창 왕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고차(高車)는 타림 분지내에서 누란의 권력에 도전하며 부상 중이었다. 고차 왕 아푸질루오(阿伏至羅)는 칸 쇼우귀를 죽이고 한족 장맹명(張孟明)을 고창의 속주왕으로 둔황에서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고창은 고차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다.
후에 장맹명은 고창의 백성들의 반란으로 피살되고 마유(馬儒)로 교체되었다. 501년 마유 자신도 전복되고 피살되었으며, 고창의 백성들은 간수성 진쳉의 쿠지아(麴嘉)를 그들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고창, 위키피디아)
고창의 역사는 역사적 기록에 따른다. 기록을 중시하는 중국의 사료에 따라 서역의 변방 고창의 역사가 상세히 알려지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고창이 생겨난 이후는 439년에 북량의 패잔병들이 도착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전란을 피하여 사막을 건너 머나먼 서역으로 피난한 것이 고창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이처럼 북량의 패잔병들이 도착하여 고창국을 건설하여 역사에 등장한다. 이처럼 5세기 중엽 북량의 지방정권 개념의 고창국이 성립되지만 그리 오래 가지 못하였다. 불과 30여년 밖에 권력이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창과 국씨(麴氏) 가문
고창이 유명해진 것은 국씨(麴氏) 가문 때문이다. 한족 출신의 국씨 가문이 고창국에 들어와 왕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명한 ‘국씨 고창국’이다.
국씨 고창국은 501년에 성립 되어 당나라에 망할 때 까지인 640년까지 약 140년간 유지 되었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왜 국씨고창국이 널리 알려 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현장스님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현장스님은 627년 당나라 국경을 탈출하여 구법여행을 떠났다. 그 무렵 국씨 가문의 고창국의 영역은 다음과 같다.
7세기 전반의 고창국
지도에서 좌측 하늘색 부분이 고창(高昌)국이다. 좌로 돌궐이 있고, 위로 철륵이, 동쪽에 작은 나라 이오(연두색)이 있다. 당나라는 이제 막 흥기하려 하고 있다. 현장스님이 구법 여행을 떠났을 때가 927년인데, 이때가 당태종의 정관치 원년에 해당된다. 그런 당나라의 영역은 서역의 경우 돈황까지 이었다. 하서 주랑 구역이 마치 기다란 목처럼 보인다. 7세기 초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이었다.
천정은 반쯤 벗겨져 있고
고창고성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어느 다른 관광지와 분위기가 달랐다. ‘퇴락해 보였다’는 것이 맞을 듯 하다. 고창고성을 소개하는 안내판은 언제 만들었는지 매우 낡고 오래 되어 보였다. 더구나 천정은 반쯤 벗겨져 있어서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인지 의문이 들 정도이었다.
현지인들은 한가롭게 오락을 즐기고
지붕이 벗겨지고 안내판과 건물은 퇴락해 보였다. 입구에는 노점이 있는데 현지인들이 기념품을 팔고 있다. 바로 그 옆에는 현지인들이 모여서 한가롭게 오락을 하고 있었다.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런 광경은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다. 유네스코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관광단지는 입구부터 거대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 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곳 고창고성은 아직 아무런 것에도 등재 되어 있지 않아서인지 막고굴이나 명사산 입구와 대조 된다.
다 허물어져 가는 출입구에 한문이 쓰여 있다. 현장법사가 이곳에 머물러 설법한 장소라는 내용이다.
투루판지구는 위구르족 들이 대부분이다. 거의 70%이상 위구르족인데 특히 도심을 벗어난 지역의 경우 비중이 높다. 이는 열악한 기후조건 등으로 인하여 한족들이 거의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창고성 입구를 보면 위구르족의 토속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입구를 들어 서자
마치 큰집 대문 같은 입구를 들어 서자 한 눈에 고창고성이 들어 온다. 오아시스 한 가운데 두터운 흙으로 된 무더기가 끝 없이 펼쳐져 있다.
위성사진으로 본 고창고성
고창고성을 위성사진으로 보았다. 정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한 변이 2키로 미터 가량 된다. 고창고성에는 인구가 2만명이 살았다고 한다. 중국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중앙에 궁성이 있고 궁성 밖으로 내성과 외성의 구조로 되어 있다.
21세기 정보통신시대에 나귀마차라니!
이렇게 넓은 지역을 어떻게 다 돌아 볼 수 있을까? 더구나 뜨거운 뙤얕볕 아래를 걸어 다니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이동수단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은 놀라웁게도 나귀마차이었다. 21세기 정보통신시대에 나귀마차라니!
나귀 마차는 여러 대 준비 되어 있다. 모두 관광객들을 실어 나르기 위한 것이다. 그런 나귀 마차 1대에 약 4-5명이 타고 정해진 코스를 가도록 되어 있다.
투루판은 낙후된 지역
나귀마차는 투르판에서만 볼 수 있었다. 뜨거운 지역이라 한족은 살지 않고 대부분 위구르족들이 사산다. 그래서일까 대단히 낙후된 지역이다. 투루판 시내에서도 삼륜차와 함께 종종 나귀마차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동차 역할을 하는 힘 좋은 나귀
나귀는 힘도 좋다. 마부를 포함하여 4-5명이 탓음에도 지칠줄 모르고 잘 간다. 느릿느릿 가는 것이 아니라 속도를 내서 가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관광지에서의 전동차 못지 않은 속도이다.
온통 흙으로 된 유적만
나귀 마차를 타고 주변을 둘러 보았다. 온통 흙으로 된 유적만 보인다. 망루 처럼 보이는 것도 있고, 가운데 커다란 굴처럼 된 것도 보인다. 그 때 당시 어떤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고성의 중앙대로
나귀마차는 고성의 중앙대로를 달렸다. 도중에 S자길도 있었지만 폭이 넓은 길이다. 옛날에도 중심 대로 이었을 것이다.
나귀마차는 고성의 중간 부분에서 멈추었다. 주변을 보니 온통 두터운 흙으로 된 구조물만 보일 뿐 녹색의 나무가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다. 그 옛날에도 나무 한 그루 없었을까? 사람이 사는 곳이면 나무가 울창하였을 것이지만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유적 관리 차원에서 심어 놓지 않은 것 같다.
고성에서 보는 풀
그 대신 풀이 보였다. 모래가 아닌 흙으로 된 지역이어서 일까 사막에서 보는 낙타가시풀과 달리 가시가 없다. 동그란 잎사귀에 꽃이 필 듯 봉우리가 맺어져 있다.
저 멀리 화염산이
내려서 주변을 둘러 보니 저 멀리 화염산이 보인다. 서유기의 무대로서 이글 이글 불타오르는 듯한 형상을 화염산이 고창고성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다. 아마도 우리나라 풍수로 따진다면 고창고성의 진산 개념에 해당될 것이다. 그런 화염산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구루 자라지 않는 붉은 사암으로 된 산이다.
뜻밖에 절터 팻말을
나귀 마차에서 내리자 가이드가 인솔하였다. 중요한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 절터 팻말을 보았다. ‘대불사(大佛寺)’라 적혀 있다.
가이드가 인도한 곳은 대불사가 있던 절터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창고성이 단지 패키지 여행 상품에 속해 있는 하나의 볼거리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끄는 곳이 절터라니 매우 놀라웠다.
고창고성은 불교성지
고창고성에 대하여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패키지 여행상품에는 단지 고성을 둘러 보는 것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여행기를 작성할 때 성지 순례 코스에 들어 가지 않았다.
성지 순례 코스는 불교유적이 있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에 막고굴이나 베제클리크 천불동처럼 불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를 따라 가보니 절터로 인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고창고성의 가장 중심부에 있는 곳으로 모든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러야 하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고창고성은 불교 막고굴과 베제클리크 천불동과 함께 불교성지에 해당된다. 왜 불교성지에 해당되는가.
현장스님이 설법한 곳
고창고성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다. 여행을 하면서 그런 고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 더 이상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의 여행 후기를 보아도 자세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렇고 그런 고성인줄 알았다. 그런데 대 반전이 일어났다. 그것은 뜻밖의 경험을 하였기 때문이다.
가이드가 데려간 곳은 대불사이다. 지금은 흔적만 남았지만 그 때 당시 고창고성에서 중심지에 있었던 큰 사찰이었다. 특히 현장스님이 이곳 대불사에 머물면서 설법하였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설법당터가 남아 있다. 비록 부분적으로 복원한 것이긴 하지만 옛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설법당은 최근 복원된 것이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유적에다 사방에 벽을 쌓은 것이다. 그러나 천정은 복원하지 않았다.
고창국왕 국문태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현장스님이 이곳 고창성을 찾은 것은 627년이다. 고창국왕 국문태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방문한 것이다.
현장스님은 구법을 위하여 국경을 탈출 하였다. 당나라 태종 원년인 627년이다. 구법여행을 결심한 것은 전해진 경전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락된 부분도 있고 해석도 부족한 점이 있어서 자신이 직접 원전을 구하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현장스님은 당시 국경 옥문관을 벗어나 500리나 된다는 막하연적이라 불리는 대사막을 말 한필에 의존하여 횡단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국경 너머에 있는 첫 번째 나라인 ‘이오’에 도착하였다.
이오는 오늘날 ‘하미’에 해당된다. 그런데 현장스님이 이오에 도착하던 날 공교롭게도 고창국의 사신이 되돌아 가던 날이었다. 이 사신은 고창국으로 돌아가 국왕 국문태에게 보고 하였다. 그러자 국문태는 당나라에서 온 스님을 국빈으로 초청하였다.
현장스님은 원래 북쪽 방향으로 가려 하였다. 그러나 고창국왕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영접나온 사신을 따라 고창국으로 가게 되었다.
영상속의 고창고성
국문태와 현장스님의 줄다리기
고창국왕 국문태는 현장스님이 고창국에 오래 동안 머물러 주기를 바랬다. 심지어 구법여행을 포기하게 하려고도 하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현장스님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창국의 국사가 되어 지도해 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하지만 현장스님은 구법여행을 하는 목적을 분명히 말하고 받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국문태와 현장스님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마침내 현장스님은 단식을 하게 된다. 경전을 구하러 가도록 놓아 달라는 것이다. 그런 스님의 단식에 국문태는 생각을 바꾸게 된다.
의형제를 맺고
독실한 불교신자이었던 국문태는 스님이 머무는 기간 중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여행을 계속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지원하였다. 이처럼 물심양면으로 현장스님을 도운 이유는 의형제를 맺었기 때문이다. 국문태가 형이 되고 현장스님이 아우가 되어 부처님 앞에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한 것이다.
국왕이 스님의 등받이가 되어
고창국 국왕 국문태와 의형제를 맺은 현장스님은 1개월 간 고창국에 머물렀다. 그때 법회를 열었는데 그 법회장소가 바로 이곳 고창고성에 있는 설법당이라 한다.
현장스님은 국문태의 요청에 따라 대중법문을 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현장스님과 국문태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강론할 때가 되면, 그 때마다 국왕은 몸소 향로를 잡고 스스로 영접하여 법좌에 오르도록 인도하였는데, 국왕은 또 자세를 낮추고 무릎 꿇은 채 디딤판이 되어 법사로 하여금 딛고 오르게 하였다. 날마다 이렇게 하였다.
(신서유기, 첸원중 지음)
첸원중의 신서유기에서 원문을 인용한 내용이다. 현장스님이 강론하려 법상에 올라 갈 때 국문태 국왕이 스스로 ‘등받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광경이다. 일국의 국왕이 법을 설하는 스님의 등받이가 될 정도로 스님에 대한 신뢰가 높았고 불심이 매우 돈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하고
현장스님은 이곳 설법당에서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설했다고 한다. 인왕반야경은 어떤 경전일까? 검색하니 대승불교의 경전이라 한다. 구마라집(鳩摩羅什)과 축법호(竺法護), 양(梁)의 진제(眞諦)가 각각 한역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구마라집의 한역본과 765년 당(唐) 태종(永泰 1)에 이루어진 불공금강의 한역본뿐이라 한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인왕반야경은 “불타가 16개국의 임금에게 불과(佛果)와 십지(十地)의 행(行)을 수호하고, 국토를 지키는 인연을 설하며, 이 경을 지니고 독송한다면 재난이 없어지고 복을 얻을 것”이라는 내용이라 한다.
이와 같이 대승경전을 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현장스님이 대승불교 신봉자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 편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고창국에서 대승불교가 그다지 성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정해 볼 수 있다. 이는 현장스님의 대당서역기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어떤 불교를 신봉하였을까?
현장스님의 대당 서역기는 고창국 바로 서쪽에 있는 아그니국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아그니국에 대한 기록을 보면 “승려 2천여명이 사원 여남은 곳에 머물면서 소승불교의 설일체유부를 공부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그 때 당시 서역에서는 부파불교 중의 하나인 설일체유부가 강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아그니국 보다 더 큰 나라인 고창국 역시 부파불교를 신봉하였음에 틀림 없다. 이는 서역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 소승을 신봉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구 2만명에 승려가 2천명
가이드 말에 따르면 고창고성에는 약 2만명이 살았는데 그 중 2000명이 승려 이었다고 한다. 대부분 소승이라 불리우는 부파불교이었을 것이다. 고창국이 부파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국왕 국문태가 현장스님을 국사로 모시려 하였을 것이다.
만일 현장스님이 소승을 믿고 있었다면 굳이 부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대승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현장스님을 초빙하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현장스님이 1개월 가량 머물면서 설법당에서 대승경전 중의 하나인 ‘인왕반야경’을 설하였다고 보여 진다.
승려들이 살았던 승방터
역사의 현장이 남아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설법당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인구 2만명 중 승려가 2천명이 되었다는 고창고성에서 가장 중심부에 있는 대불사 유적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당시 승려들이 살았던 승방터를 지금도 볼 수 있다.
불탑 감실에서 본 희미한 불상
이처럼 대불사터에는 설법당과 승방터 등 널직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을 보았다. 그때 당시의 불탑이 고스란히 보전 되어 있는 것이다.
일부 복원한 것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원형 그대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붙탑 내의 감실이 그것이다.
감실에는 불상을 모셔 놓는다. 그리고 벽에는 불화를 그려 놓는다. 그런데 그 때 당시의 벽화를 볼 수 있었다.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그 때 당시 불화의 흔적이 보인다.
이번 여행의 최대 수확
이번 고창성을 본 것 중에 최대의 수확이다. 전혀 뜻밖이고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고창고성이 단순히 옛날 성의 흔적이라고만 알고 있었으나 사실을 알고 보니 불교성지이었던 것이다. 그런 흔적을 감실에서 볼 수 있었다. 비록 희미하지만 불상의 흔적이 보였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최대의 수확이라 본다.
탑돌이를 하고
고창고성에서 불교의 흔적을 발견하였다는 것은 놀랍고 감격스런 것이었다. 전혀 예상밖이고 뜻밖이었다. 그래서일까 불자들은 탑돌이를 하였다. 스님의 요청에 따라 탑돌이를 하자 다른 사람들도 동참하였다. 약 10명 가까이 합장을 하며 오른쪽 방향으로 세 바퀴를 돌았는데 돈황 막고굴에 이어 두 번째 불교행사에 해당된다. 고창고성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불교성지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2013-07-3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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