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문명가로지르기에 성공한 불교,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8. 3. 15:59

 

문명가로지르기에 성공한 불교, 투루판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19, 아스타나 고분군, 2013-06-02)

 

 

 

고창고성에서 뜻밖에 불교유적을 발견하고 감격하였다. 단순한 성터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중심지에 대불사(大佛寺)’라는 큰 사원이 있었고, 더구나 그곳에서 현장스님이 머물면서 강론하였던 설법당까지 있었다. 그래서 그곳이 불교성지라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고창고성순례를 마친 일행은 아스타나 고분군으로 향하였다.

 

아스타나 고분군(阿斯塔那古墓)은 어디에

 

6 2일 마지막 일정은 아스타나 고분군(阿斯塔那古墓)’이다. 아스타나 고분은 당나라시대 이곳 투르판 분지의 중심지었던 고창고성 부근 포도밭 한 가운데 위치 하고 있다. 이곳이 위구르 족 중심지이긴 하지만 한족의 무덤인 것은 역사적으로 한족이 지배하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스타나 고분군은 구체적으로 어디에 위치하고 있을까? 위성지도로 검색해 보았다.

  

 

 

고창고성(A)-아스타나고분군(B) 2.2키로미터

 

 

 

위성지도를 보면 아스타나고분군은 고창고성 북쪽에 위치 하고 있고 2.2Km 떨어져 있다.

 

한족스타일의 입구

 

아스타나 고분군에 도착하였다. 입구는 한족스타일이다. 기둥과 기와 지붕이 중국전통방식이다. 이곳 고분군이 한족출신 귀족의 무덤이라는 증거일 것이다. 그런데 다 쓰러져 가는 고창고성의 입구와 너무 대조적이었다.

 

 

 

 

 

 

 

 

 

 

 

 

한국관광객만 보이고

 

입구를 들어 서자 바로 옆에는 아스타나 고분군에 대한 안내판이 보였다.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알기 어렵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막고굴이나 명사산-월아천과 같은 유명관광지의 경우 영어와 한글이 표기 되어 있어 불편함이 없었으나 이곳 투루판의 경우 한글로 설명된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한국 관광객들만 보였다. 6 2일이 일요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관광객들을 보지 못하였다.

 

 

 

 

아스타나 고분 안내판

 

 

계절별 온도를 보니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나무로 만든 표지판에 계절별로 온도가 표시 되어 있다. 이곳 투르판 지역이 여름이 되면 중국에서 온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위함일 것이다.

 

 

 

 

 

온도를 보니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리는 것 같다. 겨울에는 춥고 여름은 무척 더운 곳이다. 12월과 1월과 2월의 경우 영하의 날씨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봄철에 해당되는 4월이 되면 온도가 무려 30도까지 치솟는다.

 

6월의 날씨을 보니 45도까지 치솟아 있다. 가이드에 따르면 62일의 날씨는 거의 38도가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자 마자 그 따가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더욱 더 놀라운 사실은 7월달이 최고조라는 것이다. 표를 보니 50도 가까이 된다.

 

중국신화속의 인류시조 복희여와상

 

입구를 빠져 나오면 곧바로 마주치는 것이 있다. 아스타나 고분군의 상징이라 볼 수 있는 복희여와상이다. 십이지신상과 함께 조성되어 있다. 이 복희여와상을 보니 이곳이 한족의 무덤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수일 박사의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에 따르면 중국 신화에 인류 시조로 전하는 ‘복희여와도’가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한겨레신문 2005-11-28)”라는 내용이 있다. 중국신화속의 인류시조로 전해져 오는 복희여와도가 이곳에서도 발견 되었다는 것이다.

 

서울에도 복희여와도가

 

그런데 이곳에서 발견된 복희여와도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 3층 중앙아시아 전시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복희여와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7세기 작품

 

 

 

 

이 복회여와도에 대한 설명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와 여와를 소재로 삼은 그림이다. 중앙에 두 신이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뱀의 모습을 하고 등장하며, 왼쪽이 여와, 오른쪽이 복희이다. 각각 컴퍼스와 구부러진 자를 들고 있다. 이는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으로 이루어진 중국의 전통적인 우주관과 관련된 상징물이다.

 

배경에는 해와 달, 별자리가 그려져 있어 하나의 소우주를 재현하고 있다. 중국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얼굴과 손에 보이는 음영표현, 해와 달의 형상화 방식에서 중앙아시아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복희여와도 설명문,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복희여와도를 보면 한몸에 두 개의 사람이 있는 형상이다. 마치 일심동체로 표현되는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얼굴 형상이 서역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이 그림이 서역, 즉 투루판에서 만들어졌음을 말한다. 설명문에 7세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나라가 이곳에 안서도호부를 두고 지배 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복회여와도가 왜 서울에 있을까?

 

그렇다면 투루판에 있는 복회여와도가 왜 서울에 있을까? 그것은 1900년 초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가져 온 것이다. 오타니가 서역을 돌면서 예술적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가져 간 것이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중국인들은 사막의 도적들이라는 극한 표현을 한다.

 

서역에서 가져온 수 많은 유물과 문화재를 오타니 컬렉션이라 한다. 그런 오타니 컬렉션의 상당수가 서울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승려 출신 오타니가 어려움에 처하자 가지고 있던 유물을 사업가에게 팔고, 사업가는 광산채굴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에 뇌물성으로 기부 한 것을 연유로 하고 있다. 해방과 함께 조선총독부에 남아 있던 오타니컬렉션이 국고에 귀속됨에 따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서역의 유물, 특히 투루판 지역에서 출토된 많은 양의 유물을 접할 수 있다.

 

중국 관리들의 무덤

 

아스타나 고분군은 간단히 둘러 보는 장소이다. 그래서 두 개의 무덤 밖에 보지 못하였다. 72TAM215 72TAM216이다. 그런 무덤은 커다란 봉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무덤이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평지에 흔적만 보인다. 그래서 땅속으로 들어 가야 볼 수 있다. 땅속으로 계단이 설치 되어 있어서 마치 동굴에 들어 가는 것 같다.

 

 

 

 

 

 

 

 

 

 

 

 

 

 

 

 

 

 

 

무덤을 설명하는 표지석을 보면 당나라시대(618-907)의 것이다. 중국역사상 가장 영토가 넓었던 시대이다. 그래서 이곳 투루판이 있는 서역까지 모두 당나라가 지배하였다. 투루판에는 당나라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당나라 관리가 파견되어 직접통치하였다. 그래서 관리들의 무덤이 남아 있는 곳이 바로 아스타나고분군이다.

 

투루판은 어떤 지역일까?

 

이번 실크로드 여행을 하면서 가장 관심있게 본 지역이 투루판이다. 투루판이 서역의 중심지이자 또한 실크로드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투루판 지역은 어떤 지역일까? 정수일 박사는 투루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 하였다.

 

 

한편, 성터·고분벽화에서도 이질 문명들의 융합상을 찾아볼 수 있다. 교하고성의 장묘구역에서는 괴수가 호랑이 목을 물어뜯는 북방 유목문화의 공예 문양인 동물투쟁도, 서역 교류를 시사하는 채도가 나왔다. 토욕구와 베제클리크 천불동 벽화에는 서방의 비천상 모습이 뚜렷이 보이며, 중국 신화에 인류 시조로 전하는 ‘복희여와도’가 아스타나 고분군에서 출토되었다.

 

여러 역사적 사실들로 미루어 마니교나 경교 등 서방 종교는 투르판의 고산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동전을 멈췄다. 중국 왕조가 직접 통치한 최서방 지역으로서 유교를 비롯한 중화문명도 이곳을 넘어 본격적인 서전은 하지 못했다. 북방 유목문화도 대체로 이곳을 남전(南傳)의 경계선으로 삼는다. 이는 뜨거운 분지인 투루판이 주위 여러 문명들을 받아들여 녹이고 응고시키면서 특유의 지역 문화를 만들어냈음을 말해주고 있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8>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정수일박사)

 

 

정수일 박사의 실크로드 여행기에 따르면, 실크로드의 중심지 투루판은 문명의 용광로와 같다고 하였다. 이때 용광로라는 표현은 좋은 의미라기 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것은 모든 문명이 이곳 투루판 분지를 넘어 서지 못하고 그대로 용해되어 버리고 만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이 이곳을 지배 하였지만 이곳을 넘어 더 이상 서진 하지 못하였음을 예로 들고 있다. 또 이슬람 세력이 동진해 올 때 역시 이곳 투루판 분지를 넘지 못하였다.

 

투르판 분지를 넘지 못하고

 

인종적으로 보았을 때도 모두 투루판 분지에서 멈추었다. 인도유럽어족이 이곳에 들어 왔지만 더 이상 동진을 하지 못하고 멈춘 곳도 이곳이고, 한족이 융성하여 이 곳을 지배 하였지만 역시 이곳을 넘지 못하였다. 이는 종교도 마찬라지라 한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을 비롯한 여러 유적에서 불교와 관련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경교, 즉 기독교와 관련된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날개 달린 천사의 벽화가 발견되기도 하고 경교와 관련된 경서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교는 이곳을 넘지 못하였다. 경교가 비록 장안등에서 흔적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주류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뜨거운 타틀라마칸 사막을 넘지 못하고 용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슬람교 역시 이곳 투르판 분지를 넘지 못하고 더 이상 동진 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곳 투루판 분지에서 모든 문명이 멈추어 서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투루판 지구는 동서양 어떤 문명이든지 이곳을 넘어 설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이곳 만의 독특한 지형탓일 수 있다.

 

투루판은 가마솥 분지

 

투루판은 가장 뜨거운 지역이라 한다. 이는 바다에서 가장 먼 지역이고 해수면 보다 더 아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또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 쌓여 있고 동서 120Km, 남북으로 60Km에 달하여 사막 속 분지형이다. 이와 같은 지형에 대하여 가이드는 가마솥 분지라 하였다.  가마솥 처럼 뜨거운 지역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고도가 낮고 태양열이 주위로 발산되지 않다 보니 한여름의 낮기온이 보통 50도를 넘는다고 한다.

 

 

 

 

투루판 지구

투루판시(A)-아이딩호(艾丁湖, B)

 

 

 

모든 문명, 모든 인종, 모든 종교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멈추는 곳이 투루판이라 한다. 그러다 보니 투루판 지역은 온갖 문화가 융합되어 있다. 그래서 곳곳 마다 문화유적이 산재 되어 있는데 세계적으로 유적 밀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투루판의 역사

 

이처럼 문화의 용광로 같은 역할을 하는 투루판지역은 또한 각 민족들이 흥망성쇠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그렇다면 어떤 민족들이 이 지역을 거쳐 갔을까? 그리고 역사는 어떤 것일까? 정수일 박사는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투루판 박물관에 전시된 코뿔소 화석, 춘추전국시대 미라 등은 이 곳의 유구한 역사 문화를 말해준다. 7천년 전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산 흔적이 있으며, 3천년 전부터 정착 농경이 시작되었다.

 

원래 토착민들은 텐산 산맥 북쪽에서 유목하다 남하한 이란계 차사인(車師人)으로 전한 시대(기원전 3~기원후 1세기)에 야르호(교하고성)를 도읍 삼아 차사전국을 세웠다.

 

그후 한나라와 흉노가 번갈아 통치하다 5세기 중엽 북량이 지방정권을 세운다. 그러다가 한족 출신의 국씨(麴氏) 고창국이 들어서 640년 당에 멸망될 때까지 140여 년간 통치한다.

 

9세기 중엽부터는 북쪽 초원에서 남하한 위구르족이 차지했으며, 13세기 초 몽골군에게 점령되어 차카타이 칸국의 지배를 받았다. 17세기 중엽부터 청나라가 설치한 중가르부에 속했다가 1881년 신장성이 신설되자 행정구역으로 독립했다.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8>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정수일박사)

 

 

투르판 지역은 주인이 자주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민족이동이 자주 있었는데, 처음 이곳에 산 사람들은 이란계의 차사족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서양사람들과 유사한 민족이다. 이는 우루무치 박물관에서 누란의 미녀 미이라도 확인 할 수 있다.

 

 

 

누란 미녀 미이라상

 

 

  

누란의 미녀

 

누란의 미녀 미이라는 서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푸른 눈과 금발을 특징으로 한 미이라가 왜 이곳에서 발견된 것일까? 누러 때문이다. 일본인들이 복원해 놓은 누란의 미녀상은 다음과 같다.

 

 

 

누란의 미녀 복원상(우루무치 박물관)

 

 

 

누란은 투르판 지구내인 선선()에 위치해 있다. 지금은 선선이라 하지만 옛날에는 누란에 누란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선지역을 누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누란지역에 살았던 민족이 눈이 푸르고 금발인 서양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누란의 미녀는 3800년 전의 것이다.

 

하지만 이란계 차사족들은 타클라마칸을 넘지 못하였다. 만일 그들이 타클라마칸을 넘어 계속 동진하였다면 중국대륙에서도 눈푸른 서양사람을  볼 수 있을 것이고 우리나라 까지 넘어 왔을지 모른다. 그러나 서양인들은 더 이상 동진을 하지 못하고 가마솥 분지라 불리는 이곳 투루판에서 멈추었다. 그래서 누란의 미녀가 발견된 곳은 서양인들의 동진의 한계지점을 보여준다.

 

국씨 고창국 140

 

투르판 지구는 한족이 융성함에 따라 주인이 바뀐다. 한나라 시절 서역의 영웅이라 불리우는 장건(張騫, ? ~ 기원전 114)의 출사에 따라 이후 투루판 지역이 한나라의 영토에 편입된 것이다.

 

이어서 위진남북조시대에 북량의 지방정권이 이 지역에 세워지게 된다. 439년에 북량의 패잔병이 투루판에 도착하여 세운 지방 정권을 말한다. 그러나 단명하고 이어서 한족 출신의 국씨 가문이 501년부터 당나라에 망하기 이전인  640년까지 140년간 이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이를 역사적으로 국씨고창국이라 한다. 현재 고창고성을 근거지로 한 고창국을 말하며 위구르어 콰라호자라 한다. 627년 국문태 국왕이 통치하던 시절 현장스님이 이곳을 방문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나라 전성기에 6도호부가 있었는데

 

서역을 지배한 당나라는 투루판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설치한다. 당태종이 당나라 군대를 주둔시키고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통치한 것이다.

 

당나라시절 전성기에는 6도호부가 있었다. 전략적 요충지에 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민족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제도를 말한다. 동쪽은 만주와 고구려를 통괄하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서쪽은 타림분지까지 이어지는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남쪽은 베트남 등 인도차이나 지역까지 아우르는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북쪽은 외몽골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를 설치하였다. 이중 안동도호부가 우리나라와 관계가 있다.

 

안동도호부가 설치된 때가 668년이다.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빼앗은 지역을 통치 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수도 이었던 평양성에 설치한 것이 안동도호부이다.

 

당나라에서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한반도 전체를 중국영토로 편입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신라의 반발에 부딪쳐 불과 8년만에 평양에서 쫒겨 난다. 그래서 거점을 요동성으로 옮겨 안록산의 난을 계기로 756년 폐지 될 때 까지 100년 가까이 존속하였다.

 

투루판 지역을 점령한 당나라 역시 도호부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당현종 시절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안사의 난 이후 급격하게 쇠퇴하였다. 이 때 고구려 유민출신인 고선지 장군이 안서도호부를 기반으로 서역원정을 나서는 등 활약을 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한족이 투르판지역을 지배하던 시기이다. 그 이후 역사에서 이 지역을 지배한 민족은 위구루족이다. 9세기 중엽부터 북쪽 초원에서 남하한 위구르족이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불교국가 카라코야고창국

 

당나라가 망하고 무주공산이 된 투르판지역을 지배한 민족은 북쪽에서 내려온 유목민족인 위구르족이었다. 역사적으로 오르콘 위구르제국이라 한다. 744년 건국되어 840년 망할 때 까지 140년 간 중앙아시를 포함하여 카스피해에서 만주지역까지 초원을 지배하였다.

 

오르콘 위구르제국이 840년 망하자 세 개로 분리된다. 그 중에 하나가 카라코야왕국(856-1209)이다. 투루판을 근거지로 한 불교왕국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고창국이라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고창국은 두 개이다. 하나는 한족 출신의 국씨 가문이 세운 국씨고창국(501-640)이고, 또 하나는 위구르족이 세운 카라코야고창국( 또는 천산위구르, 856-1209)이다. 두 왕국 모두 고창고성을 근거지로 하여 성립된 국가이다. 공통적으로 불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국교로 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창고성과 10여키로 미터 떨어지 있는 화염산 골짜기에 동굴사원을 조성하였는데 이것이 베제클리크 천불동이다.

 

불교왕국 카라코야고창국은 몽고의 징기스칸에 의해 멸망한다. 철저하게 파괴당한 흔적이 현재 볼 수 있는 고창고성과 교하고성이다. 이후 투르판 지역은 차카타이칸국에 예속되었다. 이것이 투르판 지역이 이슬람화 되기 이전까지의 역사이다.

 

아스타나고분군은 당나라 관리의 무덤군이다. 투루판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으므로 투르판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었다. 그래서 대신이나 관리들의 이곳에서 죽었을 때 무덤을 만들었다. 모두 중국식이다.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

 

무덤은 공개된 것 중에 두 개를 보았다. 첫번째 무덤은 관리의 무덤이다. 그러나 사진촬용을 금지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인터넷에서 사진을 확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이드가 말한 것을 기록한것과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면 ‘옥인(玉人), ‘금인(金人), ‘석인(石人), ‘목인(木人)’ 이렇게 네 종류에 대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는 공자묘에서 볼 수 있는 네 성인에 대한 이야기라 한다.

 

 

 

 

 

옥인(玉人)과 금인(金人)

 

 

 

 

 

석인(石人)과 목인(木人)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정수일박사의 여행기에 따르면 흰 옷 입은 옥인은 청렴결백을, 입을 삼중으로 막은 금인은 언행신중을, 석인은 돌처럼 결심이 굳어 흔들리지 않는 결심부동을, 목인은 거짓이 없이 바르고 곧은 무위정직(無僞正直)을 뜻한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중국에서 파견된 관리가 비록 머나먼 타국에서 죽음을 맞이 하였을지라도 유교적 윤리관이 반영된 무덤을 조성하여 주었음을 알 수 있다.

 

투루판에서 볼 수 없는 꽃이 벽화에

 

두 번째 무덤은 상인의 것이다. 이는 무덤의 벽화에 그려진 꽃으로 알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이곳 투루판에서 볼 수 없는 꽃이 벽화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꽃 화초

출처: http://yul6629a.tistory.com/661

 

 

그림을 보면 투루판 지역에서 볼 수 없는 오리가 있다. 그리고 화초 역시 이 지역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화초는 날씨가 더운 지역의 것이라 한다. 그래서 중국의 소주지역의 상인이 이곳 투루판에서 상업활동을 하다가 죽자 무덤에 고향의 화초를 그려 넣은 것이라 하였다.

 

지도책 보기를 좋아 해서

 

어려서부터 지도책 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각국의 나라이름은 물론 수도이름까지 줄줄이 외울 정도이었다. 교과서를 받으면 가장 먼저 펼쳐 보는 것이 사회과부도책이었다.  빳빳하고 질 좋은 종이에 녹색 등으로 표현된 지도책을 보면 마치 세계일주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사회과부도책에는 지도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것도 있었다. 이를 역사부도라 한다. 그래서 역사부도를 보면서 세계 각국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리와 역사 과목은 항상 성적이 좋았다.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복학하고 나서 부터이다. 잔디밭에 앉아 있는데 책장사가 접근하여 책을 사라고 권유하는 것이었다. 20권 가까이 되는 대세계사전집이다. 페이지를 보면 두 컬럼으로 되어 있고 사진이 풍부 하게 실려 있어서 마치 소설책을 읽는 것처럼 재미 있었다.

 

대세계사전집에서에서 특별히 관심있게 본 것이 중앙아시아의 역사이다. 역사의 흥망성쇠 뿐만 아니라 민족의 흥망성쇠가 매우 역동적으로 표현 되어 있어서 읽으면 읽을수록 맛이 났다. 더구나 그 때 당시 NHK에서 제작된 실크로드가 방영되기도 하여 중앙아시아관련 부분을 여러 번 읽었다.

 

이처럼 지도책을 보면서 지명을 읽히고 역사책을 보면서 역사를 알게 되자 언젠가는 꼭 가보아야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침내 시절인연이 되자 그런 꿈이 실현 되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 서역의 중심 투루판에 서 있게 되었다.

 

기독교도 이슬람도 타클라마칸을 넘지 못하였다!

 

그런데 투루판에 대하여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그것은 정수일 박사의 실크로드 여행기를 통해서이다. 앞서 언급 되어 있지만 정수일 박사는 투루판지구에 대하여 서방종교도 중국문명도 멈춘 경계선라는 부제로  마니교나 경교 등 서방 종교는 투르판의 고산 장벽을 넘지 못한 채 동전을 멈췄다.”라고 표현 하였다. 중화문명도 이곳을 넘어 본격적인 서전은 하지 못했다.”라고 하였다.

 

이는 투루판지역이 문화의 용광로이자 동시에 문화의 무덤임을 뜻한다. 불을 숭배하는 이란의 마니교와 기독교의 일파인 경교가 투르판을 넘지 못하고 멈추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전통종교인 유교 역시 이곳을 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투루판은 이슬람을 믿고 있다.

 

당나라 시대 투루판은 당나라의 안서도호부가 있던 곳이다. 그런데 고구려 유민 출신의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에서 751년 이슬람 군대에게 패한후 천산산맥 이서는 이슬람왕국이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투루판지역이 이슬람화 된 것은 원나라 이후 13세기 부터이다. 그러나 이슬람도 투루판지구를 넘지 못하였다. 더 이상 동진하지 못하고 투루판에서 멈추어 버린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마니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투루판에서 멈추었다. 그렇다면 투루판, 타클라마칸을 넘어간 종교는 어떤 것일까?

 

오로지 불교만이 타클라마칸을 넘었다!

 

계란형으로 되어 있는 타림분지는 바다에서 가장 먼 지역이다. 또한 해수면 보다 낮기 때문에 매우 뜨거운 지역이다. 그런 중심에 투루판이 있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이 지역을 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이 지역으로 들어 왔지만 더 이상 동진을 하지 못하고 멈추어 선 곳도 이곳 투르판이다. 이는  누란의 미녀 미이라가 증명한다. 또한 전세계적으로 삼대 종교라 불리우는 기독교와 이슬람은 투루판을 넘지 못하였다.

 

 

 

타클라마칸 사막

B가 투루판이고 A가 돈황이다.

 

 

그러나 불교는 투루판을 넘었다. 그래서 불교가 중국을 포함하여 한국과 일본에 전파 되었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투푸판에서 멈추었지만 불교만이 문화의 무덤 같은 곳을 빠져 나와 동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정수일박사는 하지 않았다. 분명히 불교가 투르판을 넘었음에도 한겨레신문 컬럼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자이기도 한 정수일박사가 공개적으로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컬럼의 행간을 읽어 보았을 때 아마도 정수일 박사는 세계 3대 종교 중에 오로지 불교만이 타클라마칸을 넘었다!”라고 표현 하지 않았을까?

 

이종문화간의 문화 가로지르기에 성공한 불교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 해 볼 때 종교의 종착지로 볼 수 있는 타클라마칸의 투루판을 넘은 종교는 불교가 유일하다. 그래서 동아시아 각국이 불교를 믿는 불교국가가 되었다. 기독교나 이슬람은 넘지 못하는데 왜 유독 불교만이 솥단지 같은 지역을 넘어 갔을까? 그것은 불교가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리를 말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민족을 넘고 언어를 넘고 지형을 넘어 오늘날 우리나라에까지 이른 것이라 볼 수 있다.

 

대륙을 넘고 민족을 넘어간 유일한 종교가 불교라 한다. 왜그럴까?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였는데 중국으로 전파 되었다. 이는 민족간의 이동이다. 이에 대하여 동국대 김종욱 교수는 “이종문화(Intercultural)간의 문화 가로지르기(Intercross)에 성공하였다.( 불교로 이해하는 현대철학)”라고 표현 하였다. 인도인과 중국인은 인종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다. 그럼에도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에서 전파된 것은 종교 역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이라 한다. 하지만 유일신을 신봉하는 셈족의 기독교나 이슬람교는 결코 중국에 전달되지 않았다. 투루판에서 막혀 버린 것이다.

 

인도와 중국은 문명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또 언어학적으로 이질적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건너가 대륙간 문화이동이 이루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불교가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보편 타당한 진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보편 타당한 진리

 

 예를 들어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고성제를 설하였을 때 누군가 이에 대하여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생노병사 등 팔고에 대하여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또 부처님이 집성제와 멸성제, 도성제를 설하였을 때 받아 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아무도 진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받아 들일 수밖에 없는 진리인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진리는 창조주나 절대자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라고 말하는 연기법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tamo ca bhikkhave, paiccasamuppādo? 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a uppādā vā tathāgatāna anuppādā2 vā tathāgatāna 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accay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빳짜야경-Paccaya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연기법에 대하여 부처가 출현하거나 출현하지 않거나 이미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 한다. 그런 진리를 부처님이 발견한 것이다. 창조주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금 여기서 와서 보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불교가 민족간 가로지르기, 언어간 가로지르기, 대륙간가로지르기 등 문명 가로지르기(Intercultural, Intercross)에 성공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런 좋은 예가 중국과 동아시아에 불교가 전파 된 것을 말한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대륙에서 불교를 수용한 것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불교 르네상스 시대

 

오늘날 불교는 유럽과 미국에서도 매우 인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불교가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고 하다.  불교가 유일신 종교를 대체할 새로운 대안으로 떠 오르고 있는 것이다.

 

불교가 진리의 종교이고 보편타당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민족간, 언어가, 대륙간 문명 가로지르기(Intercultural, Intercross)에 성공한 것이라 보여진다. 그 시발점이 투루판이라 보여진다. 마니교, 경교(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투루판에서 멈추어 버렸지만, 유일하게 불교만 중국으로 넘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명가로지르기에 성공한 종교가 불교라 한다

 

 

 

2013-08-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