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성지순례기

독경대신 연주소리가, 베제클리크 천불동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7. 26. 15:14

 

독경대신 연주소리가, 베제클리크 천불동에서

 

(실크로드 불교유적 성지순례 17, 베제클리크 천불동, 2013-06-02)

 

 

 

 

화염산 깊은 골짜기에

 

베제클리크 천불동에 도착하였다. 천불동은 화염산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구루 보이지 않는 붉은 사암으로 형성된 화염산 깊은 골짜기에 숨어 있듯이 동굴사원이 있다.

 

 

 

 

 

왜 동굴을 만들었을까?

 

6 2일 날씨는 무척 뜨거웠다. 이날 투루판 지구의 날씨가 40도가 넘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밖에 서 있으면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마치 한증막에 있는 것 같다. 그러다 에어컨이 켜져 있는 버스안에 들어가면 서늘하다. 그러나 흘러 내린 땀으로 인하여 끈적 거리기 때문에 몹시 불쾌하다. 이러기를 여행중에 수 없이 반복하였다. 그럴 경우 차라리 그늘에 있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뜨거운 지역에서는 밖에는 뜨겁지만 일단 그늘 안으로만 가면 서늘하다. 그래서 동굴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 동굴은 여름에는 시원해서 좋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좋다. 이처럼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지고 있는 것이 동굴이다.

 

그러나 무엇 보다 동굴에 있으면 공부가 더 잘 될 것 같다. 우리나라 사찰에도 석굴이 있는데 앉아 있으면 고요한 것이 집중이 더 잘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일까 유명기도처는 해안가나 절벽 또는 동굴과 같이 막다른 곳에 있다.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정신을 차리듯이 공부하는 곳이나 기도처가 동굴과 같은 막다른 곳에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보문사 석실

일명 굴법당이라 한다.

635(선덕여왕 4)에 희정대사가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이후 순조12(1812)에 다시 고쳐 지었다.

 

 

 

한가해 보이는 천불동

 

집표처라 불리우는 매표소 밖에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한국에서 온 사람들과 한족 약간 명만 보일 뿐이다. 이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불동임에도 돈황 막고굴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이다. 막고굴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어 있어서 국가에서 철저하게 관리 되고 있지만, 베제클리크 천불동의 경우 허술한 것 같다. 대부분 위구르 족들이 관리하고 있어서 한가해 보이기만 한다.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오기에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위구르족들의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매표소 밖에는 낙타투어를 할 수 있도록 준비 되어 있고, 매표소 안에는 각종 기념품을 파는 매점이 있다. 특히 매점에서는 한국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짦고 간단한 한국말이다. 대체 얼마나 많은 한국사람들이 오기에 한국말로 하는 것일까? 그러나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날씨가 더워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정도이다.

 

 

 

 

 

 

3층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가며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곡과 가까운 1층에서 부터 통로가 있는 3층까지 층마다 역할이 다르게 설정되어 있다. 1층은 계곡과 가까워서 주거 지역이고, 2층에는 동굴이 형성되어 있는 사원 구역이고, 3층은 사리함이 모셔져 있는 불탑지역이다.

 

 

 

 

 

그런데 출입구는 3층에 있다. 3층에서부터 아래 층으로 내려 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지형의 특성때문이다. 마치 그랜드캐년처럼 땅이 움푹 들어가 계곡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3층 입구에 도로가 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3층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가면서 관람이 시작된다.

 

 

 

 

 

천불동은 사실상 왕실사찰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고창고성과 가까운 곳에 있다. 지금은 흙으로 된 흔적만 남아 있는 고창고성에서 13키로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이렇게 도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왕실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본다. 불교가 융성하던 시기에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사실상 왕실사찰이나 다름 없었다. 이를 위성사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고창고성(A)-베제클리크 천불동(B) 13Km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화염산 깊숙한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풀한포기 나무한 구루 볼 수 없는 황량한 화염산이지만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녹음이 우거져 있다. 이를 위성사진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베제클리크 천불동 계곡 위성사진

 

 

아래로 내려 갔더니

 

3층에서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 갔다. 그러자 동굴이 나타났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동굴이다. 절벽을 파고 들어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이다. 그런데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중이었다. 철재 구조물이 설치 되어 있어서 사진 찍기에 그다지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불교국가 카라코야왕국 (高昌國, 856-1209)

 

동굴을 본 것은 몇 개 되지 않는다. 80여개나 되는 동굴에서 본 것은 20, 27, 31, 33굴 등 대여섯개에 지나지 않는다. 기록되어 있는 동굴 넘버를 보니 정수일박사의 실크로드 기행에 실려 있는 넘버와 일치한다. 지난 2005년  한겨레 신문에서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이라는 제목으로 연재 기사가 있는데, 기사를 보니 기사에서도 이 동굴 넘버 그대로 이었다. 그래서 연재된 기사를 참고하여 글을 작성하였다.

 

가장 먼저 본 것은 20굴이다. 가이드에 따르면 회골고창전기인 10세기에 조성된 것이라 한다. 정수일박사의 글에서는 회골칸국시대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회골은 위구르를 말한다. 투루판에 근거지를 둔 위구르 왕국이다. 이를 역사적으로 카라코야왕국 (高昌國, 856-1209)이라 한다.

 

카라코야왕국은 위구르족들이 북쪽 초원에서 남하하여 원주민인 이란계 민족을 쫒아 내고 세운 왕국이라 한다. 그런 카라코야 왕국은 불교를 신봉하는 왕국이었다. 이는 천산산맥 너머 서쪽에 위치한 같은 위구르족의 카라한 왕조(840~1212)와 대비된다.

 

천선위구르라고도 불리우는 카라한 왕조는 이슬람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래서 천산산맥을 가운데 두고 서쪽에는 이슬람의 카라한 왕조가, 동쪽에는 불교의 카라코야 왕국이 400년간 대치 하고 있었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카라코야왕국은 이슬람의 세력이 동아시아로 진입하는 것을 400년 간 지켜낸 역할을 하였다고 보여 진다. 

 

 

 

카라코야 왕국(高昌國, 856-1209)

좌측 상단의 노랑색 부분이 천산위구르라고 씌여진 부분이

불교를 국교로 하는 위구르족의 카라코야(高昌國)왕국이다.

좌측 상단 모서리의 하늘색 부분은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카라한 왕조(840~1212)이다.

 

 

이렇게 천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두 위구르 왕국이 있었는데, 놀라운 사실은 카라코야왕국이 몽고제국에 멸망하기 이전인 13세기 초반까지 투르판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가 유지 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철저하게 뜯겨진 동굴

 

왕실사찰의 개념이 베제클리크 천불동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20굴에는 왕실용 공양당이 있어서 왕과 왕비가 공양을 올리던 곳이라 한다.

 

왕실의 공양당으로 활용되던 20굴은 철저하게 뜯겨 나갔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유물과 유적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20세기 초 서구열강과 일본의 탐험대에 의하여 벽화가 뜯겨 나가서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수일 박사는 연재기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였다.

 

 

처음 들어간 17굴부터 만신창이다. 원래 전면에 커다란 불상이 각각 좌우로 3좌씩 있었는데, 온데간데 없고 광배 자리만 남아 있다. 천정 벽화도 거의 뜯겨 벽화 속 불상들의 눈은 몽땅 도려내어졌다.

 

( 정수일 실크로드 재발견 <8>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한겨레신문 2005-11-28)

 

 

정수일 박사가 표현한 대로 제대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불상은 흔적도 없어서 단 한 개도 볼 수 없었다. 벽화는 탐험대에 의하여 모두 뜯겨 나가고 그나마 남아 있는 벽화는 눈 부위가 모두 패여 있다. 한 마디로 처참한 광경이다. 승려가 살지 않는 동굴사원이 800년 동안 방치 되었고, 더구나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최악의 약탈자 독일 폰 르콕

 

정수일박사의 여행기를 읽어 보면 벽화를 뜯어간 이야기가 상세히 기록 되어 있다. 특히 독일탐험대 폰 르콕의 이야기를 보면 주인 없는 동굴사원이 어떻게 처참하게 파괴 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폰 르콕은 천불동 1층 주거지역에 살면서 1902년부터 1914년 까지 10여년 동안 서역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그래서 남아 있는 유적중에 온전한 것을 모두 뜯어가서 베를린으로 가져 갔다고 한다.

 

수백상자에 달하는 유물을 가져간 르콕은 성공담에서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20개월 걸려 그것들은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벽화들은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라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학자도 아니고 탐험가도 아닌 무기상에 불과한 르콕의 재물욕에 동굴이 만신창이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르콕이 가져간 유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불행하게도 모두 사라졌다. 베를린 박물관에 있었던 유물이 2차대전 당시 폭격으로 대부분 불에 타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분탕질은 독일인 르콕만이 아니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이 주인 없는 땅, 그리고 주인 없는 동굴에 찾아 와서 쓸만한 것은 모조리 가져 가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에 대하여 후대사람들은 ‘사막의 도적들’ 또는 ‘사막의 악마들’ 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그런 반열에 일본인도 끼여 있다는 것이다. 오타니 탐험대가 그것이다.

 

오타니콜렉션이 어떻게 하여 서울에

 

오타니탐험대 역시 서역을 누비고 다녔다. 1902년부터 1914년 까지 돈황과 투루판 등 서역일대를 탐험하여 막대한 유물을 가져갔다. 그런데 다른 약탈자들과 달리 불교와 관련된 유물을 집중적으로 가져 갔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타니가 승려이었기 때문이다.

 

오타니는 일본 정토종 계열의 서본원사주지이었다. 젊어서 영국유학을 한 학승이었기 때문에 문화재를 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래서 오타니가 가져 간 유물은 한결 같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라 한다. 그래서일까 오타니 콜렉션에 대하여 세계적인 콜렉션이라 평가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타니 콜렉션 대부분이 서울에 있다는 사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을 말한다. 그렇다면 오타니콜렉션이 어떻게 하여 서울에 있게 되었을까?

 

일제 강점기 시절 서본원사 주지이었던 오타니가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자 자신이 수집하였던 막대한 문화재를 사업가에게 돈을 주고 넘겼다. 이 사업가는 그 때 당시 조선총독부에 기증을 하였는데 이는 광산채굴권을 확보하기 위한 뇌물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선총독부에서 보관중이던 오타니콜렉션이 해방과 함께 국고에 귀속되어 오늘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게 된 것이라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더니

 

베제클리크 천불동에 가면 볼 것이 별로 없다. 불상도 없고 온전한 벽화도 볼 수 없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오타니가 뜯어 온 것이 고스란이 보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일요일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블로그에 연재하고 있는 실크로드 관련 글을 쓰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3층에 전시되어 있는 중앙아시아실로 향하였다.  

 

중앙아시아실에는 서역의 문화재가 다수 전시 되어 있다. 오타니 탐험대가 투루판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특히 오타니 콜렉션 1500여점 가운데 40%가 투루판지구에서 가져 온 것이라 한다. 이렇게 많은 유물 중에 전시 되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천불동에서 뜯어 온 것들

 

중앙아시아실에서 가장 간판으로 내 걸고 있는 것은 서원화이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에서 뜯어 온 것들이다. 현지에서는 볼 수 없지만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서원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서원화 단편(국립중앙박물관)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33굴

10-12세기, 1916년 입수

 

 

이 서원화에 대한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제 33굴 우측벽에 그려진 서원화의 왼쪽 하단 부분에 해당한다.  이 벽화의 단편의 오른쪽에는 부처의 광배, 오른발, 연화대좌의 일부가 남아 있다. 벽화의 중앙에는 검은 수염을 기르고 높은 모자에 튜닉, 바지를 입은 인물이 있다. 그는 오른쪽을 향해 합장을 한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그의 옆에는 짐을 실은 낙타, 당나귀, 말이 있다. 같은 주제를 다룬 제20굴 서원화의 명문을 참고하면, 이 인물은 석가모니 전생에 상인의 우두머리로 태어났을 때의 모습으로, 당시 6명의 부처에게 공양을 했다고 한다.

 

(33굴 서원화 설명문, 국립중앙박물관)

 

 

33굴 설명문에 따르면 서원화는 부처님의 전생담에 대한 이야기이다. 부처님이 전생에 상인의 우두머리로 살았을 때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한다.

 

이렇게 서원화에 상인이 등장하는 것은 실크로드가 상인들이 왕래 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인들이 사업번창과 안녕을 사원에서 빌었는데, 그 과정에서 커다란 시주 역할도 하였다고 보여 진다.

 

불상은 온데 간데 없고

 

베제클리크 천불동 내에서는 사진촬용이 금지 되어 있다. 그러나 돈황 막고굴처럼 엄격하지 않다. 위구르족 관리인 몇 명이 그저 서 있을 뿐이다. 사진을 찍어도 제제하지 않는다. 그래서 벽화 몇 장의 사진을 찍어 왔다. 그 중에 33굴 벽화도 있었다. 부처님의 열반을 애도하는 제자들에 대한 벽화이다.

 

 

 

 

33, 부처님 열반을 애도하는 그림

 

 

그림을 보면 윗부분만 남아 있고 아래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윗부분 그림을 보면 좌측에는 보살과 천룡8부등 호법신이 그려져 있고 우측에는 각국에서 온 왕자들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부처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부처님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이슬람의 영향으로 오래 전에 파괴 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뜯어 간 것일까? 석굴사원의 주불이 보이지 않는다. 석굴 사원 그 어디에도 불상은 없다.

 

부처님이 전생에 왕이었을 때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본 베제클리크 동굴 벽화를 계속 보면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전생에 왕이었을 때 공양을 올리는 장면이다.

 

 

 

 

서원화 단편(국립중앙박물관)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

10-12세기, 1916년 입수

 

 

15굴에 있는 서원화 역시 부처님의 전생담이다. 부처님이 전생에 왕이었을 때 과거불은 크세만카라에게 공양을 올리는 장면이다.

 

 

연등불에 파란 연꽃을 공양하는 수메다

 

서원화에는 공양을 올리는 그림이 많다. 상인, , 왕비 등 다양한 공양인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부처님 전생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 중에 연등불에게 공양을 올리는 그림도 있다.

 

 

 

서원화 단편(국립중앙박물관)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

10-12세기, 1916년 입수

 

 

그림을 보면 공양인이 연꽃을 들고 있다. 파란 연꽃이다. 부처님이 전생담 중에서 수메다 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 부처님이 전생에 바라문으로 태어 났을 때 그 때 당시 부처인 연등불에게 파란 연꽃을 공양하고 있는 장면이다. .

 

갑옷을 입은 왕의 모습

 

서원화를 보면 부처님의 과거 전생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그 중에 부처님이 전생에 갑옷을 입은 왕이었을 때 모습도 보인다.

 

 

 

서원화 단편(국립중앙박물관)

투루판 베제클리크 석굴 제15

10-12세기, 1916년 입수

 

 

갑옷을 과거전생의 부처님 모습이다. 과거불인 타모누다에게 보물과 음악을 공양했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것은 장물(臟物)일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수 많은 서역 유물이 전시 되어 있다. 대부분 오타니 탐험대가 가져 온 것들이다. 그래서 현지에서 볼 수 없었던 유물을 서울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역의 유물은 세계 각지의 박물관에 흩어져 있다고 한다. 그래서 정수일 박사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어이없게도 이들 유물 대부분은 제자리에 없고,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 박물관에 뿔뿔이 흩어졌다. 엄격히 말하면, 역사의 현장을 증언하기 위해 후세에 남겨진 참유물(遺物)이 아니라, 무연고지로 흘러가 변조된 ‘유물(流物)’이고 편취된 장물(臟物)일 따름이다. 

 

( 정수일의 실크로드 재발견 <8> 문명의 용광로 투루판, 한겨레신문 2005-11-28)

 

 

사막의 도적들 이라 불리우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의 탐험대에 의하여 약탈된 유물은  참유물이 아니라 한다. 전세계 각지 박물관에 흩어져 있는 유물은 장물(臟物)이라 하였다.

 

장물이란 무슨 뜻일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강도, 절도, 사기 등 재산죄에 해당하는 범죄 행위에 의하여 부당하게 취득한 타인 소유의 물품, 불필요하거나 남는 물건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불법으로 반출된 유물에 대하여 장물로 본 것이다. 그런 논리로 따진다면 서울에서 보는 베제클리크 벽화 도 장물에 해당되는 것일까?

 

이것이 떼어 간 자국입니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에 가면 처참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돈이 될 만한 것,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것 등은 모조리 떼어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어서 볼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떼어 간 흔적은 남아 있다. 그래서 가이드는 이것이 떼어 간 자국입니다라고 설명한다. 문화재를 설명하기 보다 약탈흔적을 보여 주는 것이 또 하나의 볼거리임을 알 수 있다.

 

 

 

 

 

동굴에 벽화절취 흔적이 남아 있다. 자로 잰듯이 정교하게 떼어간 모습이다. 대략 가로와 세로가 1미터 가량된다. 이렇게 정방형으로 절취한 것은 운송하기 좋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눈은 모조리  패여 있고

 

남아 있는 벽화는 온전한 것이 없다. 불상은 오래 전에 사라졌고 남아 있는 불상벽화를 보면 얼굴이 짖이겨져 있고 눈은 모조리  패여 있다.

 

 

 

 

 

 

 

 

 

 

 

 

 

 

 

 

 

 

누가 이렇게 하였을까?

 

누가 이렇게 하였을까? 불교가 13세기 까지만 유지 되었기 때문에 그 후 들이 닥친 이슬람의 소행으로 본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 홍위병 난동 또한 한 몫 했을지 모른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불교가 없다. 단지 훼손된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11세기와 12세기에 전성기를 누렸던 카라코야왕국(고창국)이 사라짐에 따라 불교 역시 사라졌다. 그래서 동굴에서 승려들이 떠나고 동굴은 버려 졌다. 이렇게 주인 없이 800년이 흘렀다.

 

 

 

 

 

지금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관광지가 되었다. 수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와서 남겨진 유물을 보고 있다. 그러나 볼만한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유물을 훼손하고 뜯어간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전통악기를 연주 하는 위구르 할아버지

 

이처럼 볼만한 것이 별로 없는 베제클리크 천불동에 볼만한 것이 있다. 관람객들의 눈길을 한 눈에 사로 잡는 할아버지가 그것이다. 일반적으로 연주하는 할아버지로 잘 알려져 있는 위구르인이다. 가이드에 따르면 항상 이곳 천불동에 머물면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연주하며 먹고 산다고 한다. 그래서 천불동을 방문한 사람치고 이 할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라 한다.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행후기를 기록한 블로그에는 항상 이 할아버지의 사진을 볼 수 있다.

 

 

 

 

 

독경대신 연주소리가

 

베제클리크 천불동은 한 때 불교의 성지이었다. 수 많은 승려가 살고 있었고 수 많은 시주와 공양인들이 있었다. 그래서 승려들의 독경소리가 끊임 없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러나 13세기 이후 이곳은 버려 졌다. 그래서 불상은 온데 간데 없이 모두 사라졌고 불상벽화는 대부분 눈이 패여 젺다. 그리고 사막의 약탈자들에 의하여 가치 있는 문화재는 모두 사라졌다.

 

이렇게 텅텅 비어 있다 시피한 옛 동굴 사원에 독경 소리 대신 위구르 할아버지의 연주 소리가 들린다. 처음 듣는 참으로 독특한 운율이다.

 

 

 

 

 

2013-07-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