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한손에는 숯불을 또한손에는 똥을 들고,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으려면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0. 26. 11:13

 

 

한손에는 숯불을 또한손에는 똥을 들고,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으려면

 

 

 

비틀즈와 함께 일했던 비서의 이야기

 

요즘 TV를 보면 볼만하다. 무엇보다 고화질이어서 좋다. 큰 화면에 마치 사진 같은 HD화면을 보면 실감이 난다.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공중파 방송은 EBS이다. 주로 다큐프로를 방송하기 때문이다.

 

요즘 EBS에서 EIDF를 방송하고 있다. 일종의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를 말한다. 그다지 시청률이 높지 않은 EBS에서 심혈을 기울이여 방송하는 프로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저녁시간은 오로지 EIDF만 방송한다. 그런 EIDF중에 [프레다,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틀스]’를 보았다.

 

 

 

[프레다,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틀스]

EBS EIDF, 2013-10-24일 방영

 

 

이 영화는 비틀즈와 함께 일했던 비서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1960년대 초반 영국 리버풀의 작은 지하창고에서 앳된 모습의 비틀즈 멤버들의 공연을 보고 반한 16세 소녀가 비틀즈와 함께 성장하며 겪은 에피소드, 숨겨진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화면에서는 앳된 모습의 레논(리듬 기타, 보컬), 매카트니(베이스 기타, 보컬), 조지 해리슨(리드 기타, 보컬), 링고 스타(드럼, 보컬)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중 특히 존 레논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 이유는 그가 1980년 팬으로부터 암살 당하였기 때문이다.

 

비틀즈에 대하여 잘 모른다. 그런데 영화회화 테이프로 영어공부를 하면서 존 레논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교재에서는 뉴스형식으로 존 레논의 사망소식을 전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급적 영어회화테이프 교재를 다 외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존 레논 부분에 대하여 자주 듣다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가수임을 알 수 있었다.

 

회화 테이프에 소개 되어 있는 존 레논의 사망소식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존 레논의 광팬으로부터 살해 되었기 때문이다. 회화테이프에 따르면 존 레논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죽였다라는 뜻으로 되어 있었다.

 

안티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사랑하기 때문에 해어진다라거나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죽였다라는 말을 노래 가사나 뉴스에서 종종 듣는다. 사랑을 해도 너무 사랑하면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기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은 팬들이 많다. 그래서 팬클럽이 생겨나고 공연하는 날이 되면 팬들로 인하여 교통이 마비 될 정도이다. 이렇게 팬들이 많다는 것은 인기가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래서 연예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팬이 많은 것은 즐거운 것임에 틀림 없다. 그러나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팬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안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안티는 어떻게 생겨 나는 것일까?

 

처음부터 안티는 없다고 본다. 인기연예인을 좋아하는 팬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안티로 돌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기 연예인과 전혀 무관한 사람이 안티가 되는 경우는 없다.

 

인기연예인에 대하여 아는 사람, 그것도 매우 사랑하는 광팬이 안티가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자신은 연예인을 미치도록 사랑하는데 연예인이 알아 주지 않을 때, 또는 관심을 보여 주지 않을 때 안티로 돌변하는 것이다. 마치 손바닥을 뒤집듯이 사랑이 한 순간에 증오로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안티는 팬으로부터  그것도 광팬으로부터 안티가 나온다고 볼 수 있다. 존 레논을 살해한 자 역시 존 레논을 미치도록 사랑한 광팬이었다고 한다.

 

막장드라마 같은 세상살이

 

요즘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는다. HD화면으로 제공 되는 고화질의 드라마를 보면 화려 하기 그지 없지만 내용을 보면 온갖 부정적인 요소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과 증오 등 애증이 단골 소재이다. 때로는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도 난무 한다. 이와 같은 사랑과 전쟁스타일의 드라마는 감각만 자극하기 때문에 막장드라마라고 말한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라 본다.

 

흔히 세상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약육강식의 동물세계나 다름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약자는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등치고, 강자는 좀 더 많이 차지 하기 위하여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 과정에서 탈법과 불법이 이루어지고, 중상모략과 권모술수가 난무한다. 그래서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원수가 내일 동반자가 된다. 이처럼 사람들은 살아 남기 위하여 생존하기 위하여 세상을 살아 간다. 마치 사람들은 막장드라마처럼 살아간다.

 

팔풍(八風)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

 

막장드라마 같은 세상을 잘 표현한 말이 있다.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Aṭṭhime bhikkhave, loka dhammā loka anuparivattanti, loko ca aṭṭhalokadhamme anuparivattati. Katame aṭṭha:

Lābho ca alābho ca ayaso ca yaso ca nindā ca pasasā ca sukha ca dukkha ca, ime kho bhikkhave aṭṭhalokadhammā loka anuparivattanti, loko ca ime aṭṭhalokadhamme anuparivattatīti.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여덟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득과 불익, 명예와 불명예, 칭찬과 비난, 행복과 불행이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세상을 전재시키고, 세상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 안에서 전개 된다.

 

(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여덟 가지 세상의 원리가 있다고 하였다. 세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태를 여덟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그것은 1) 이득(lābha)2) 불익(alābha), 3) 명예(yasa)4) 불명예(ayasa), 5) 칭찬(pasasā)6) 비난(nindā), 7) 행복(sukha)8) 불행(dukkha)이라 한다. 이와 같은 여덟가지는 항상 시계추 처럼 왔다 같다 하기 때문에 그리고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기 때문에 팔풍(八風)’이라 한다. 그래서 세속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팔풍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칭찬이 언제 비난으로 바뀔지

 

누구나 칭찬해 주면 좋아 한다. 자신을 치켜 세워 주는데 싫어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칭찬이 언제 비난으로 바뀔지 알 수 없다. 특히 세간에서 그렇다. 이는 인기연예인의 광팬이 순식간에 안티로 돌변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심지어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죽인다라고 하여 자신의 우상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이와 같은 세간의 변덕스런 칭찬과 비난에 대하여 어떤 해법을 제시하였을까?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칭찬이 생겨나면, 그는 ‘이러한 칭찬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누군가 나에게 칭찬을 하였다면 칭찬하였다고 좋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칭찬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원리를 적용하면 나에게 얻어진 이득, 명예, 행복 역시 일시적인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조건이 맞아 잠시 얻은 것일 뿐 조건이 사라지면언제든지 꺼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꾸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글을 쓰다 보면 자꾸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나서 차나 한잔 하자는 것이다. 좀 보자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긍정적인 측면이고 또하나는 부정적인 측면이다.

 

부정적인 것으로 본다면 스님도 아닌 것이 학자도 아닌 것이 넷상에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하여 같잖게보아서 일 것이다. 그래서 네까지것이 쓰면 얼마나 쓴다고 잘난체 하느냐?”하는 심리가 있을 수 있고, 매일 글을 올리는 자가 어떻게 생겼을까?”하는 궁금증도 있어서 일 것이다. 좀 더 거친말로 표현하면 같잖게 글을 쓰는 자의 쌍판데기를 보고 싶다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자꾸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은 전화번호와 이메일을 남겨 놓는다. 하지만 결코 만나지 않는다. 이렇게 오프라인을 거부하는 이유는 비록 직접 겪어 보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법륜스님의 법문에서

 

언젠가 법륜스님의 인터넷법문을 들은 적이 있다. 법문에서 스님은 제자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 법문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법문의 내용에 감동을 받아 제자가 되어야 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을 많이 겪어 본 스님은 한마디로 거절 하였다고 한다. 갑작스럽게 칭찬을 하고 추켜 세우고 떠 받들듯이 말하는 사람치고 오래 가는 경우를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돌아 서면 비난과 비방을 퍼붓기 일쑤라 한다.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제자로 받아 줄 수 없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꼭 스님의 제자가 되아야 겠습니다라고 더욱 더 적극적으로 덤벼 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스님은 더욱 더 도망 가듯이 제자로 받아 줄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거절 당하고 나자 그 사람은 태도가 돌변하여 스님에 대하여 비방하고 비난을 늘어 놓았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매우 많다.

 

오프에서 만나지 않는 이유

 

오프라인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런데 유명연예인도 아니고 스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것이 만남을 거부하는 것에 대하여 같잖게생각할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프라인 모임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상대방에 대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령 좋게 만났을지라도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언제든지 태도가 돌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팬에서 안티가 생겨나듯이 칭찬에서 비난으로 바뀌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 보다 더 쉽다. 그래서 넷상에서 칭찬하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다. 그 칭찬이 어느 순간 비난으로 바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칭찬이 생겨나면, 그는 ‘이러한 칭찬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A8.6)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은 비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글을 하나 올렸는데

 

글을 하나 올렸다. ‘재가법사에 대한 글이다. 오랫동안 수행을 하고 그 수행한 것을 세상에 회향하는 모습이 아름다워 글로 표현하였으나 예상대로 안티성 글을 보았다. 그것도 초기불교를 공부하고 전파한다는 사람의 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원색적인 비난이었다.

 

과연 법사를 알면 얼마나 알기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왜곡해 가며 비난하는 것일까? 더구나 합세한 이의 글을 보면 거의 인신공격에 가까웠다. 자신과 견해가 맞지 않는다 하여 내편이 아니라 하여 자신의 스승이 아니라 하여 마치 입에 도끼를 든듯, 입에 칼을 문듯 난도질하는 것이다. 더구나 근거도 없는 비난과 있지도 않은 사실을 들먹이며 비방하는 것을 보면 차라리 중상모략에 가까웠다.

 

이와 같은 근거 없는 비난과 비방은 전형적인 팔풍에 해당된다. 여덟 가지 세간법에 휘둘리면서 출세간의 여덟가지 원리인 팔정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어도 되어 있지 않은 자들이 초기불교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다.

 

비난이 생겨나면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난에 처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같이 맞받아 쳐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해법을 제시하였다.

 

 

[세존]

 

비난이 생겨나면, 그는 ‘이러한 비난이 나에게 생겨났는데, 그것은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분명히 안다.

 

(세상 원리의 경2, 앙굿따라니까야 A8.6, 성전협 전재성님역)

 

 

이것이 부처님이 제시한 해법이다. 나에게 누군가 비난을 하고 비방을 하고 없는 사실을 마치 있는 것처럼 중상모략하고 음해하였을 때 일시적인 현상으로 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입에 칼을 물고 비난하였다면 그 비난 자체는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그런 비난은 그 사람에게서 비난할 만한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비난한 것이고, 조건이 사라지면 그 비난 한 것 역시 무상한 것이 되고 만다.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입에 도끼를 물고 상대방을 찍을 듯이 덤벼 들지만 상대방이 받아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Purisassa hi jātassa

kuhāri jāyate mukhe,
Yāya chindati attāna

bālo dubbhāsita bhaa

 

[세존]

사람이 태어날 때

참으로 입에 도끼가 생겨난다.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

 

(Kokāliya sutta-꼬깔리야의 경, 숫따니빠따 Sn3.10, 전재성님역)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입에 도끼를 물고 태어난다고 하였다. 이는 말에 의한 언어폭력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이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졌을 때 또는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상대방을 찍는다.

 

이런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부처님 당시에도 육사외도로 대표되는 이교도들이 논쟁을 벌일 때 마치 입에 도끼를 문 것 처럼 서로 죽일 듯이 논쟁을 벌였다. 이는 우다나에서 “싸우고 다투고 논쟁하면서 서로 입에 칼을 물고 찌른다. (Ud6.4)”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손에 도끼와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입으로는 도끼와 칼을 들고 피터지게 싸우는 것과 같다고 본 것이다. 그런 결과는 어떤 것일까?

 

분노의 밥상을 차렸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입에 도끼가 생겨난 것처럼 또는 입에 칼을 물고 논쟁하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만을 해칠 뿐이라 하였다. 이는 정어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리석은 이는 나쁜 말을 하여 그것으로 자신을 찍는다. (bālo dubbhāsita bhaa , Sn3.10)”라 하였다. 이와 같이 남을 해꼬지 하려는 자들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많다. 대표적으로 밥상론을 들 수 있다.

 

어떤 바라문이 분노의 밥상을 차렸다. 부처님 당시 최상위 계층인 바라문 가문에서 부처님의 승가로 연달아 출가하자, 화가 난 바라문이 부처님에게 바보, 멍청이 등의 거친 말로 비난하고 모욕하였다. 이렇게 분노에 가득찬 밥상을 부처님께 바쳤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바라문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그대는 비난하지 않는 우리를 비난하고 화내지 않는 우리에게 화내고 욕지거리하지 않는 우리에게 욕지거리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이 됩니다. 바라문이여, 비난하는 사람을 다시 비난하고 화내는 사람에게 다시 화내고 욕지거리하는 자에게 다시 욕지거리를 한다면, 바라문이여,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는 것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대와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Akkosasutta-악꼬싸까의 경, 상윳따니까야 S7:2,전재성님역)

 

 

분노에 가득찬 바라문이 갖은 욕지거리와 비난과 비방이 담긴 밥상을 한상 차려 부처님에게 내놓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밥상을 받지 않았다. 밥상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욕지거리, 비난, 비방, 근거없는 비난, 음해, 중상모략 등 갖가지 해로운 마음은 모조리 밥상을 차린 자의 것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그대와 그것을 함께 즐기고 서로 교환하지 않습니다. 바라문이여,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 그것은 그대의 것입니다.”라고 말씀 하시면서 밥상을 받지 않은 것이다.

 

넷상에 당한 중상모략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당한 적이 있다. 넷상에서이다. 이를 블로그에 전차녀(cinca,여인 찐짜) 모함과 부처님의 승리, 자야망갈라가타에서라는 제목으로 올려 놓았다.  내용중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이 ,혜성이........진흙속의연꽃....너 왜그렇게사니? 나한테는 그렇게 모질게 독하게 해놓고....너 차라리 자살이라도 해라. 그렇게 살바에야..........내가 너 살며 생각하며.....그것 읽을 때마다 살인충동이 일어난다. 너를 잡아 죽이고 싶어......모두다 사기야 사기.....나한테 진실은 하나도 이야기 하지 않았어.........내가 이복수는 다음생애에 꼭 해주겠어. ....내가 너를 잡아쳐 죽이고 싶지만 .......이를 악물고 참는다. 내 청춘 너 때문에 망가지고 파괴된것 생각하면 ........총이라도 있으면 너같은 인간 기생충을 쏴 죽일텐데 ..........너 이제서야 나타 나가지고 파계승으로 .........나한테 지은죄 어떻게 다 갚을래다 늙어 빠진게 아직도 색은 밝혀요.......그사람 물들이면 죽여버릴거다.사악한 새끼.....지옥에 떨어져라 이 개새끼야.

 

(사라져줬으면........., http://blog.daum.net/vhrvnddmldjsejr/31

 

 

일면식도 없는 사이버 공간에서 악의적이고 소름끼치는 비난과 비방글이다. 이글을 보면 파계승에 대한 증오의 감정이 매우 격함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그 일로 인하여 과거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파계승과 연관시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하고 있다.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기 악의적인 비난과 중상모략이 난무 한다. 정신적 충격을 받아 글을 쓰는 이도 있을 것이고, 취중에 인터넷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 공간은 세상의 축소판과 다름 없다.

 

그런데 소위 초기불교를 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초기불교 주의자들 중에서도 팔풍에 휩쓸리는 듯한 글을  종종 본다. 대상에 대하여 근거없는 비난과 심지어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있는 것처럼 중상모략하는 행위를 말한다.

 

한손에는 숯불을 한손에는 똥을 들고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 하여, 우리 스승이 아니라 하여 근거 없는 주장으로 음해하고 중상모략하는 행위의 결과는 어떤 것일까? 이는 마치 한손에는 숯불을 들고 또 한손에는 똥을 들고 던지려고 하는 것과 같다.

 

여기 한손에 숯불을 들고, 또 한손에 똥을 들고 던지려고 하는 자가 있다. 그리고 입에는 칼을 물고 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를 받아 주지 말라고 하였다. 만약 받아 준다면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욕지거리를 한다고 하여, 그가 비난한다고 하여 받아 준다면 숯불에 데이는 것이 되고 똥범벅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독기를 내뿜는 칼에 맞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고 무대응한다면, 그리고 상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상대방은 자신이 들고 있는 똥으로 인하여 구린내만 진동할 것이다

 

“당신이나 많이 쳐 드세요

 

세상은 팔풍이라 하였다. 이득(lābha)과 불익(alābha), 명예(yasa)와 불명예(ayasa), 칭찬(pasasā)과 비난(nindā), 행복(sukha)과 불행(dukkha) 이렇게 여덟 가지 바람에 따라 사람들은 이리저리 휩쓸려 산다. 그래서 칭찬하면 좋아하고 비난하면 싫어한다. 그러나 여덟 가지 출세간 법인 팔정도에 따른 생활을 하면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칭찬을 하건 말건, 비난을 하건 말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Selo yathā ekaghano              셀로 야타 에까가노

vātena na samīrati               와떼나 나 사미라띠

eva nindāpasasāsu             에왕 닌다빠상사수

na samiñjanti paṇḍitā            나 사민잔띠 빤디따.

 

아주 단단한 바위덩이가

비람에 움직이지 않듯 ,

이와 같이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법구경 Dhp81, 전재성님역)

 

 

현명한 자는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칭찬을 한다고 하여 좋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난을 한다고 하여 싫어 하지도 않는다. 마치 광팬이 안티가 되듯이 칭찬이 언제 비난으로 돌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비난한다고 하여 흔들리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나에게 숯불과 똥을 던지려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대꾸도 안하면 그 숯불은 자신의 손을 지질 것이고 똥을 쥔 손에서 똥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그래서 욕지거리로 가득한 밥상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럴 경우 당신이나 많이 쳐 드세요”가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현명한 님은 비난과 칭찬에 흔들리지 않는다. (Dhp81)”라고 하셨다.

 

 

 

 

2013-10-2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