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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손에, 대당서역기와 현장대사(玄奘大師)

담마다사 이병욱 2013. 6. 22. 14:42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손에, 대당서역기와 현장대사(玄奘大師)

 

 

 

여행을 다녀 와서 후기를 작성하고 있다. 더 잘 쓰기 위하여 이런 저런 자료를 찾고 있다. 특히 인터넷 검색을 이용하여 원하는 자료를 찾고 있다. 그런 과정에서 매우 감동적인 동영상파일을 발견하였다.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현장대사(玄奘大師)’이다. 삼장법사로 알려져 있는 현장스님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프로이다.

 

단 한마디의 대화도 없지만

 

영상자료의 제목을 보니 玄奘大師 13 —在線觀看佛學視頻網로 되어 있다. 2009년 중국에서 제작된 프로이다. 유튜브는 물론 다른 동영상사이트에서도 수 없이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중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준 프로 같다.

 

유튜브에는 32분씩 모두 3편이 올려져 있다. 그러나 원래 90여분 짜리 한 프로이다. 1시간 30여분에 걸친 현장스님의 일대기에서 수 많은 장면이 출연자와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출연한 배우들의 대화는 단 한마디도 없다. 오로지 남성 나레이터의 설명만 있을 뿐이다. 물론 중국어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한자 자막 아래에 영어자막이 함께 있어서 내용을 아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이연걸을 닮은 연기자

 

세 편의 다큐프로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현장스님의 구도에 대한 열정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대사 한마디 없어도 보는 이로 하여금 스님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는 연기자의 모습이다.

 

현장대사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는 겉보기에 이연걸을 닮았다. 겉으로 보기에 틀림 없는 이연걸이다. 그래서 더욱 흥미를 가지고 보았다.

 

 

  

  

영상다큐속의 현장스님

(玄奘大師 13 —在線觀看佛學視頻網)

 

 

 

 

이연걸()에 대하여

 

이연걸()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1963년생으로서 중국출신 싱가포르의 영화배우, 무술인으로 나와 있다.

 

이연걸은 1963년 중국 랴오닝성에 출생하였다. 8살 때부터 무술을 배웠는데 중국 전국 무술대회에서 5회 연속 우승한 무술의 달인이다. 그런 영향이어서일까 1982년 영화 소림사로 배우가 되었다.

 

 

 

 

이연걸()

 

 

이연걸은 영화배우로서 무술인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연걸은 독실한 불교신자라는 사실이다. 이연걸은 불교에 매우 심취한 불자배우라 볼 수 있는데, 그는 앞으로 10년간 세계각지를 돌아 다니며 불교다큐멘타리를 찍어 불교를 세계에 알리겠다고 밝힌바 있다. 그래서 기사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불교에 호기심을 갖고 있고 가르침을 받고 싶어하나 방도를 모른다”면서 다큐멘터리를 통해 일반인들도 쉽게 불법과 대사들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게 만들겠다고 하였다. 이를 두고 중국의 어느 신문은 이연걸의 이러한 변신에 대하여 당나라 고승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17년 걸려 천축(天竺, 인도)을 다녀와 불경을 번역한 삼장법사(현장)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기에 이번 다큐프로 현장대사에서 보이는 이연걸의 얼굴에 주목하였다.

 

이연걸이 아니라 왕신원(王新源)

 

다큐프로 현장대사에서 주인공 역할을 하는 배우와 이연걸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이연걸임에 틀림 없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다큐 프로 3편의 마지막 부분을 보았다. 하지만 이연걸이 아니었다. 현장역에는 왕신원(王新源, Wang Xinyuan)으로 되어 있다.

 

왕신원은 1981년 생으로 산동성 출신이다. 중국사이트에서 검색한 것을 보면 왕신원은 2006년 현장지로(玄奘之路) 라는 프로에 출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마치 중국 여자배우 류효경이 측천무후전문이듯이 왕신원이 현장스님역 전문인 것 같다. 

 

 

 

 

왕신원(王新源)

현장지로(玄奘之路, 2006년)

 

 

 

 

세 편의 다큐프로를 보면서 현장역이 이연걸인 줄 알았다. 그러나 다큐프로를 다 보고 난 다음 자막을 보고 나서 왕신원인 것을 알았다. 이연걸과 왕신원이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큐프로를 보는 내내 세계적인 액션배우이자 독실한 불교신자인 이연걸로 착각하면서 본 것이다.

 

다큐 현장대사에서 현장역의 왕신원은 이연걸과 너무 닮았다. 누구나 착각 할 수 있다. 그런데 진짜 이연걸이 현장역을 맡았다면 어색할 것 같다. 이연걸은 올해 만50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역을 맡은 왕신원은 올해 32세이기 때문이다. 현장스님이 구법여행을 떠난 것은 28세이었기 때문에 2009년 당시 28세의 왕신원이 더 적합하였으라 보여 진다.

 

절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다큐 현장대사에서 현장역 배우는 단 한마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액션으로 보여 준다. 그것은 공손히 합장하며 머리 숙여 절 하는 것이다. 그 광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왕은 물론 시주 등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진실한 마음으로 절하는 것으로 대사를 대신한다.  

 

 

 

 

 

 

 

 

 

 

1편 동영상

 

93분으로 되어 있는 다큐프로는 세 파트로 나누어져 유튜브에 실려 있다. 1편에서는 현장스님의 출생에서부터 다루고 있다. 10세 때 부모를 잃고 절에서 생활을 하는 장면도 나온다. 절에 맡겨져 자란 것이다. 일종의 동진출가라 볼 수 있다.

 

 

 

 

玄奘大師 1/3 在線觀看佛學視頻網

 

 

 

인도로 가고자 한 목적은?

 

그렇다면 현장스님이 인도로 가고자 한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에서 알 수 있다.

 

 

현장은 지식을 찾아서 그의 첫번째 여행을 떠났다. 그는 수 많은 불경을 섭렵하였다. 그리고 불법의 대의를 알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는 퍼즐 맞추기외 같은 문제에 봉착하였다. ‘현장법사전기에 따르면 어떤 경전은 내용이 누락 되어 있고, 번역 또한 혼란을 주고 있다. 그리고 부정확하다. 어느 누구도 불교의 정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보통사람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스스로 수행으로 성불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되어 있다.

 

(현장대사 1, ‘玄奘大師 13 —在線觀看佛學視頻網’)

 

 

1편에 실려 있는 영문자막을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현장스님이 구법여행을 떠난 목적이 잘 설명되어 있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 왔지만 그것이 진짜 불교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경전을 보면 미싱된 부분이 많아 마치 퍼즐맞추기 하는 것 같고, 서역승이 번역한 것을 보면 정확하지 않아 혼란만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인도에 가서 불교를 배워 오겠다고 발심하는 것이다.

 

 

 

 

 

 

 

죽음의 막하연적

 

1편 동영상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사막을 횡단하는 장면이다. 1 32분 중에 무려 9분이 할애 되어 있다. 현장스님이 몰래 국경을 빠져 나와 늙은 말 한마리에 의지하여 막하연적(莫賀延磧)이라는 고비사막을 건너는 장면이다.

 

 

 

막하연적(莫賀延磧)

옥문관에서 하미에 이르는 400키로미터에 달하는 고비사막이다.

A가 옥문관이고 B가 하미이다

 

 

 

 

 

 

 

현장스님의 81()

 

현장스님은 구법여행을 하면서 난관과 죽을 고비를 수 없이 겪는다. 그래서 이를 모두 모으면 81가지라 한다. 그래서 81()이라 한다. 81난이 후대 소설 서유기의 모티브로 사용된다.

 

81난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이 막하연적이라 불리우는 사막에서의 난관이다. 400키로 미터에 달하는 사막을 말한필에 의존하여 건너 갈 때 거의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갔었기 때문이다.

 

   

 

 

 

 

 

 

 

 

 

 

 

 

 

 

 

 

9분에 이르는 막하연적 이야기

 

9분에 이르는 막하연적 이야기는 생명과 같은 물을 잃은 것에서 시작 된다. 오로지 말한필에 의존하여 거친 고비사막을 건너고 있는데 취급 부주의로 생명이나 다름 없는 물이 그만 사막에 쏟아지고 만 것이다. 그래서 거의 죽음에 문턱에 이르고 갖가지 환각과 환청, 신기루를 보게 된다. 그렇게 몇 일을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내다가 극적으로 오아시스를 발견한다. 이런 난관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 서유기의 모티브가 되었을 것이다.

 

 

 

 

 

 

 

 

 

 

 

 

 

 

 

 

2편 동영상

 

현장스님은 막하연적에서 기적적으로 빠져 나오게 된다. 그리고 국경 너머에 있는 이오에 도착한다. 오늘날 하미를 말한다. 국경을 벗어 났으므로 더 이상 추격을 받을 필요가 없다. 국경을 넘기 전에는 수배자 신세이었으나 이제 자유의 몸이 된다.

 

 

 

 

玄奘大師 2/3 在線觀看佛學視頻網

 

 

고승으로서 대우를 받고

 

현장스님은 국경 밖 서역에서는 극진히 대우 받는다. 그 때 당시 서역은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였으므로 국경 밖에서 전혀 문제가 없었다. 특히 서역에서는  당나라 고승으로서 대우를 해주고 있다. 이는 현장스님은 이미 월경하기 이전에 중국에서도 학문적의 성과를 인정받은 스님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기에 고창국에서 스님을 모시로 온다. 국사로서 대우이다. 그래서 제2편에서는 고창국에서 일어 났던 일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한다.

 

 

 

 

 

627년 서역정세

 

현장스님이 구법여행을 떠난 해가 627년이다. 이 해가 당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해로서 정관의 치 원년이다. 이때 까지만 해도 당의 세력이 돈황까지 밖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현장스님이 죽음을 무릎쓰고 막하연적사막을 건너 하미에 도착하였을 때 안심한 것이다. 하미에서 서쪽으로 300여키로 떨어져 있는 투루판 지역 역시 아직 당나라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던 곳이다. 그것 투루판에 한족의 유민이 세운 고창국이 있었다. 627년 당시 역사 지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도를 보면 서역에 있어서 당의 세력권은 하서주랑에 한정되고 있다. 마치 목처럼 보이는 것이 하서주랑이다. 길고 좁은 복도 같은 길이 있는 지역이라 하여 하서주랑 또는 하서회랑이라 한다. 그래서 중국 역사책을 보면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영역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실크로드의 관문을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그 목젖에 해당되는 지역이 돈황이다. 돈황에서 부터는 북로, 남로, 중로 등 여러 갈래의 길이 있기 때문이다.

 

지도를 보면 연두색깔의 이오(하미)627년 당시 아직 당나라의 영토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 그 서쪽에 있는 하늘색의 고창 역시 독립국가임을 알 수 있다. 627년 당시 현장스님이 구법을 떠날 때 이들 서역 나라들은 모두 불교 국가들었다.

 

고창성의 설법당 유적

 

7세기 초반의 고창국은 현재 투르판에 위치해 있었다. 이번 실크로드 여행기간 중에 방문한 곳이다. 지금도 그 때 당시 도시의 모습이 남아 있다. 비록 폐허로 변했지만 그 때 당시 고창성은 번영의 시기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현장스님이 3개월간 고창성에 머물면서 대중들에게 설법하였던 설법당을 지금도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고창성 설법당

현장스님이 고창에서 3개월간 국빈으로서 머물면서 설법한 장소이다.

 

 

 

 

  

폐허의 고창성

저 멀리 서유기의 무대 화염산이 보인다.

 

 

 

화염산을 배경으로한 고창성

 

다큐프로에서는 현장스님 당시 고창성을 영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저 멀리 보이는 화염산을 배경으로한 고창성이다. 화염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다. 멀리서 보면 마치 불타는 것처럼 보여서 화염산이라 한다. 서유기에도 등장하는 화염산은 투루판지구내에 있다.

 

 

 

 

 

 

 

 

 

영상속의 고창성(투루판)

저 멀리 화염산이 보인다.

 

 

고창국왕 국문태

 

천산산맥 아래에 있었던 고창국은 한족의 유민이 세운 나라이었다. 현장스님이 방문하였을 당시 국문태라는 국왕이 통치 하고 있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이었던 국문태는 현장스님을 고창국으로 초청하였다. 국빈으로 초청한 것이다. 그리고 국사가 되어주기를 간청하였다. 가이드 설명에 따르면 그 때 당시 고창성은 인구가 2만명이었는데 승려가 2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부처님전에 의형제를 맺고

 

현장스님은 고창국왕 국문태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였다. 스님은 구법하러 인도로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머물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 것이다. 설득에 실패하자 국문태는 현장스님을 기도록 놓아 준다. 그대신 자신과 의형제를 맺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래서 부처님 전에 국문태와 현장스님은 의형제를 맺는다.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이렇게 의형제를 맺게 되자 국문태는 현장스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그래서 여행을 잘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 준다. 현장스님이 고창성을 떠날 때 25명에 달하는 수행자와 승려를 붙여 주고, 갖가지 물품과 30필의 말을 제공한다. 의형제를 맺은 동생에게 불편함이 없게 한 것이다. 그리고 거국적으로 여행이 잘 되기를 기원해 주고 환송해 준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손에

 

 

만일 현장스님이 구법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국문태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져 올 수 있었을까? 현장스님의 기록이 있었기에 국문태라는 이름이 알려진 것이다. 서역의 작은 나라, 불교를 신봉하는 나라 고창국에서 의형제를 맺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 것은 현장스님이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당서역기라는 후기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편 동영상

 

3편 동영상은 주로 인도에서 수학하는 현장스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란다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최고의 지위까지 오르는 모습이 묘사 되어 있다.

 

 

 

 

玄奘大師 3/3 在線觀看佛學視頻網

 

 

 

영상속의 나란다는

 

오늘날 사진속에서 보는 나란다 대학은 폐허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영상속에서 보여주는 나란다 대학은 환상적이다.

 

 

 

 

 

 

 

 

 

 

 

 

 

 

 

 

 

 

 

 

 

 

 

 

 

나란다에서 5

 

현장스님은 나란다대학에서 5년을 보냈다. 배울 만큼 배운 현장스님은 나란다대학을 떠난다. 그리고 5년 동안 인도 각지를 여행한다. 후에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이런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대당서역기에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대당서역기는 어떤 동기로 작성되었을까?

 

 

 

 

 

 

 

 

 

 

서유기의 모티브가 되는 것이 대당서역기이다. 그런 대당서역기를 현장스님이 스스로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아마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스님이 서역으로 구법활동하는 과정에서 일어 났던 일에 대하여 보고 듣고 느낀 것에 대하여 스스로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현장대사 동영상을 보면 여지없이 깨진다.

 

18년만에 장안으로

 

현장스님은 서역으로 구법여행을 떠난지 18년만인 645년 장안으로 돌아 온다. 떠날 때는 혼자 몰래 국경선을 넘었지만 돌아 올 때는 유명인이 되었다. 장안을 출발하였을 때는 이십대 후반이었지만 되돌아 왔을 때는 중년이 되었다.

 

 

 

 

 

현장스님의 서역순례도

출발시 서역북로를 활용하였고, 귀국시 서역남로를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장스님의 인도 순례도

 

 

 

당태종과의 대면

 

현장스님이 장안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은 급속히 퍼졌다. 스님이 장안에 도착하였을 때는 환영인파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유명인사가 된 현장스님을 당태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스님은 장안에서 당태종이 머물고 있었던 또 하나의 수도인 낙양으로 향하였다. 그래서 당태종과 현장스님의 대면이 이루어졌다.

 

 

 

 

 

 

당태종의 관심사는

 

영상자료에 따르면 당태종은 불교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고 한다. 당나라를 실질적으로 건국한 당태종의 관심은 서역에 있는 나라들의 동향에 대한 것이었다. 당태종이 서역을 정벌하여 영토를 천산산맥 부근까지 확장하긴 하였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세력은 돌궐이었다. 돌궐이 있는 한 실크로드 무역로에 대한 안정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태종 이세민은 현장스님으로 하여금 서역에서 보고 들은 것에 대하여 책을 쓰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태종의 명령을 받아

 

당태종의 명령을 받은 현장스님은 서역에서의 19년간의 경험을 책으로 썼다. 그 과정에서 당황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현장스님은 낮에는 번역작업을 하고, 밤에는 책을 썼다. 네 시간 밖에 자지 않고 저술에 몰두한 결과 1년 만에 책이 완성되었다. 당태종과 약속한 책이다. 그 책이름을 대당서역기(Great Tang Record of the Western Regions)’라 하였.

 

 

 

 

 

대당서역기로 인하여

 

오늘날 대단히 희귀본으로 간주 되고 있는 기록물에는 서역에 대한 갖가지 정보가 담겨 있다. 당태종은 책을 보고 나서 책의 서문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당태종은 처음으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대당서역기로 인하여 당나라에서 불교문화가 화려 하게 꽃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우리말로 번역되어 방영된다면

 

실크로드여행 후기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현장대사 영상자료이다. 중국어로 되어 있지만 영어 자막이 되어 있어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이런 영상물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방영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이는 한 개인의 구법에 대한 열정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중파방송으로 방영되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 보여진다.

 

공중파방송이 어렵다면 불교TV에서라도 방영이 된다면 불자들의 신심을 일으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물론 영상물이 중국에서 제작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자부심을 강조하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불교적 관점에서 본다면 한 개인의 원력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보여진다.

 

 

2013-06-22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