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숨겨진 문화코드

담마다사 이병욱 2013. 1. 7. 19:02

 

 

초대받지 않은 손님에 숨겨진 문화코드

 

 

 

타임캡슐 같은 영화

 

연일 계속되는 영하의 날씨에 집안에 갇혀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일요일 오후 평소 즐겨보는 EBS에서 영화를 보았다. 타이틀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 1967)’이다. 196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가 영화의 배경이다. 금문교(Golden Gate Bridge)가 내려다 보이는 저택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사건에 대한 것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1960년대 흑백갈등이 심하였던 시대에 시대의 모순과 위선, 그리고 시대의 아픔을 다룬 영화이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Guess Who's Coming to Dinner, 1967

 

 

 

영화를 보면서 60년대 미국의 생활방식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때 당시 유행하던 복장과 헤어스타일, 그리고 자동차 등이 마치 그 때 당시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 같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한 편의 영화는 그 시대의 타임캡슐과도 같은 것이다.

 

 

 

 

 

 

영화에 불상(佛像)

 

그런데 화면을 통하여 슬쩍 슬쩍 짧게 보여 주는 것이 있었다. 백인 중산층의 가정의 거실에 놓 있는  불상(佛像)’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보여 주었는데 하나는 일반불상이고 또 하나는 팔이 여러 개 달린 천수관음상이었다. 매우 짧게 보여 주었지만 일본불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신문사 사장인 백인 중산층의 가정에 왜 일본불상이 있었을까. 그리고 영화 제작자는 왜 불상을 슬쩍 슬쩍 보여 준 것일까. 여러 의문이 들었다. 아마도 영화 제작자는 후대를 위하여 메시지를 남겨 두려 한 것처럼 보였다. 일종의 문화코드라 볼 수 있다. 60년대 가장 진보적 도시라고 불리웠던 샌프란시스코 당시의 모습을 알리려 했던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와 불교는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60년대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일본불교가 대유행이었다고 한다. 검색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선불교가 서양에 전해진 것은 1960년대로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를 필두로 하여비트 선(Beat Zen)’을 전한 비트의 문인들 중 하나인 앨런 와츠(Ellen Watts)라는 달변의 미국인이 앞장섰다. 그들은 신비주의를 강조하고 의도적으로 불교라는 말과 불교적 색채를 삭감했다. 정통 수련을 한 적도, 승가에 들어온 적도 없었던 다이세츠와 와츠는 미국 대중의 구미에 맞게 불교를 전하여 불교 확산에 큰 공헌을 했다.

이들이 낭만적이고 철학적인 면을 강조한 불교를 전했다면 얼마 후 샌프란시스코에 자리잡은 스즈키 순류 선사(禪師)는 수행 중심의 선불교를 전파했다. 이상과 같이 선불교 전파의 초기역사를 보면 일본인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과 서양에서도 일본 선불교에서 선을 배우고 그를 삶에 적용, 발전시키게 되었다.

(21세기, 일본식 '젠()' 문화와 만나다, 고대신문, 2007 03 11)

 

 

 

 

고대신문에 따르면 미국에 선불교 열풍을 일으킨 사람이 스즈키 다이세츠(鈴木大拙, 1870-1966))와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19041971)선사라고 한다. 특히 스즈키 순류의 경우 1961년에 샌프란시스코에 선원을 열어 수행중심의 선불교를 미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가장 진보적인 도시로서 반전운동과 반문화 운동의 중심지이었다. 마약과 LSD 등으로 특징지워진 반문화 저항운동 중심지에서 일본의 선사들은 젊은이들에게 마약대신 좌선을 해 보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진보적인 백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선불교문화가 파급 되어 갔다고 한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는 영화가 1967년도에 출시된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이라 보여진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는?

 

영화에서 놀라운 대사를 들었다. 흑인 청년과 흑인 아버지의 대화에서 태생에 대한 내용이다. 흑인청년이 백인처녀와 결혼하려 하자 흑인 아버지가 반대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자신이 우편배달부로서 12 km를 걸어 다녀 자녀들을 교육 시켰다는 점을 강조 한다. 이에 대하여 흑인청년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이야기 한다. 아이를 낳았으니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자신은 빛을 갚아야 할 채무자가 아니라고 한다. 또 자신을 부모의 소유물로 여기지 말아 줄 것을 말한다. 그러면서 아이를 낳은 부모는 빛진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채무자임을 말한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 대하여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로 설정한 영화의 대화장면은 놀라운 것이다. 아이를 갖는 순간 부모는 채권자가 아닌 채무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져야 된다는 말인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흔히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그럴수 있느냐?”라는 말이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이다. 특히 결혼하여 사는 자식에게 하는 말이다. 부모가 아들을 낳아 기르고 교육시켜서 결혼시켜 놓았더니 쳐다 보지도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과 아쉬움과 억울함에 대한 감정표현이라 볼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은 부모가 자식에 대하여 소유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내가 낳고 내가 길렀으니 나의 소유물로 보는 것이다.

 

자식을 소유물 개념으로 본다면 부모는 자식에 대하여 빚을 받을 권리가 있는 채권자의 입장이 된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나온 존재이기 때문에 빚진자로서 채무자의 입장이 된다. 더구나 길러주고 교육까지 시켜 주고 결혼까지 시켜 주었다면 그 은혜는 한량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구도를 깨 버린다.

 

자식의 독립

 

영화에서 흑인 청년은 흑인 아버지에게 채권자가가 아니고 채무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이 선언으로 인하여 영화에서는 대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이전까지는 부모가 결혼승낙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흑인청년의 독립선언으로 인하여 분위기가 반전 된 것이다. 그렇다면 독립선언이 왜 중요할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보다 보면 종종 부모와 자식간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럴 때 스님이 항상 하는 말은 스므살 이상 되는 자식에게 지나친 간섭을 하지 말라고 한다. 지나친 관심과 간섭을 한다는 것은 내 뜻대로 하겠다는 발상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식을 자신의 소유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십세 이상이 되면 내버려 두라고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독립에 대한 것이다. 스므살 이상이 되면 부모로부터 독립을 시켜 스스로 앞날을 개척하게 나가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보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독립시켜 주는 것이다.  이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볼 수 있다.

 

어미새의 역할

 

자연 다큐 프로를 보면 새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룬다. 봄이 되어 새들이 짝을 짓고 알을 낳아 부화 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프로를 보면 어미새들이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것을 알 수 있다. 암컷새와 수컷새가 열심히 먹이를 물어와 새끼들에게 먹이는 장면을 보면 인간들의 행위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 새끼들이 다 자랐을 때, 날 때쯤 되면 더 이상 먹이를 물어다 주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 있도록 둥지에서 몰아 내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새끼들은 하늘을 날게 되고 스스로 먹이를 찾아 나선다. 새끼들이 둥지를 떠남으로서 어미새의 역할이 끝난 것이다.

 

나이 스무살이 되면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 보통이다. 자식에 대하여 평생 책임의식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그런 밑바탕에는 강한 소유욕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낳으니 나의 소유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키운 부모는 채권자이고 자식은 빚을 갚아야 채무자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계가 평생을 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나한테 그럴수 있느냐?”라고 한탄할 것이다. 그러나 법륜스님의 말처럼 나이 스므살이 되었을 때 독립시켜 버리면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마치 둥지를 떠난 새끼새들을 바라보는 어미새의 입장과 같이 된다.

 

그렇게 되지 못하였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영화에서는 자식이 나는 부모님의 소유물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스스로 독립선언을 한다. 이런 말은 부모가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독립시켜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자식이 독립선언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자식에 대한 빚진자로서 부모를 해방시켜 준 것이다.

 

숨겨진 문화코드

 

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흑백인종간의 화합에 대한 영화이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1960년대 중반의 미국에서 17개 주에서 인종간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진보적이라는 캘리포니아에서 조차 흑백간의 결혼은 터부시 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영화를 통하여 흑백간의 갈등시대에 흑백간의 결혼문제를 제기함으로서 시대의 모순과 위선과 거짓을 이슈화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숨겨진 문화코드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코드가 바로 불상이다.

 

영화에서 진보적 성향의 백인 중산층 가정의 거실에 있는 불상과 천수관음상을 매우 짧게 보여 주었다. 이는 영화가 보여 주고자 하는 대표적 문화코드라 보여 진다. 무신론자인 백인 중산층 가정에 불상이 있는 이유는 그 때 당시 선불교의 영향이라 보여지고, 중산층 가정에 불상 하나 정도 있는 것이 진보적이고 지성을 상징함이라 보여 진다.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

 

영화에 나온 불상은 형태로 보아 명백히 일본불상이다. 일본불상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영화 도중에 일본레스토랑도 보였기 때문이다. 일본풍으로 꾸며진 레스토랑에서 놀랍게도 기모노를 입은 여종업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60년대 중반 반문화의 거점과도 같았던 샌프란시스코에서 일본 선불교의 영향이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교가 영화에까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흑인청년의 독립선언이라 보여진다.

 

영화에서 흑인 청년이 독립선언을 한 것은 부모로부터 독립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60년대 반문화의 정서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 보여진다. 보수적인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 있던 미국 사회에서 독립선언을 한 것이 마치 기독교의 신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을 선언 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와 같은 것으로 본다면, 기성세대의 방식으로 보았을 때 창조주는 채권자이고 피조물은 채무자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흑인청년은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로 될 수 없다고 독립선언을 하였기 때문에 역전된다. 즉 창조주는 더 이상 채권자가 아니라 빚진자로서 채무자가 되고, 피조물은 더 이상 창조에 대한 빚을 갚아야 할 채무자가 아니라 창조주에게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채권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신의 속박으로 부터 해방에 대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1960년대라는 반전운동, 반문화운동 시대에 있어서 기성세대대에 대한 저항시대 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영화에서는 흑백간의 갈등과 화해를 다루고 있지만, 동시에 보수주의에 대한 반발 내지 주류문화에 대한 저항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 문화코드가 불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2012-01-07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