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드라마후기

“운명은 바꿀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설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5. 15:35

 

운명은 바꿀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설

 

 

 

데드 맨 워킹을 보고

 

영화 데드 맨 워킹을 보았다. EBS에서 방영된 영화이다. 그런데 이전에 한 번 보았던 영화이다. 그럼에도 EBS에서 보여 주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데드 맨 워킹(1995)’은 사형수와 수녀에 대한 이야기이다. 미성년자를 강간하고 더구나 살해한 흉악한 사형수가 사형 집행을 몇 일 앞두고 수녀와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데드 워킹(Dead Man Walking, 1995)

 

 

여기서 데드 맨 워킹이라는 말은 사형수 입장!(Dead Man Walking!)이라는 말이라 한다. 사형집행을 앞두고 간수가 사형수를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영어 ‘Dead Man’이라 하였다. 이는 사형수를 일컫는 말인데 비록 살아 있긴 하지만 이미 죽은 것과 같다고 보아 사형수에 대하여 데드맨이라 하였을 것이다.

 

영화 데드 맨 워킹을 다시 한 번 보니 이전에 보았던 장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그런데 빠알리니까야를 접하고 난 후 다시 보니 불교적 관점에서 영화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사형수에게 약물주사를 놓는다. 기존의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사형집행방식인 것이다. 이는 사형수를 고통없이 보내기 위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죽어 가는 사형수와 사형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영상을 오버랩 시켜 놓았다. 이 부분을 보고 불교에서 말하는 업의 표상이라는 말이 떠 올랐다. 사람이 임종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 죽음의 마음이 일어나는 데,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사형집행을 지켜 보는 수녀의 안타까운 모습도 보여 주었다. 사형수에게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라는 의미로 보였다. 왜냐하면 죽어 가는 사형수가 끔찍한 살인 장면이 떠 오르는 것 보다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면 좀더 나은 세상에 태어나게 하려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불교적 관점에서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에서는 임종의 마음상태에 따라 내세가 결정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임종시에

 

영화에서는 사형수가 죽어 갈 때 살인장면을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이는 사형수의 마음에 일어나는 표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여진다. 이런 장면을 보고서 아비담마논장의 사몰심을 연상시켰다. 아비담마 논장에서 마지막 죽음의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맞이 하는 자에게 임종시에 다음 중 어떤 하나가 업의 힘에 의해 여섯 가지 문 가운데 어떤 하나로 나타난다.

(1) 상황에 따라서 [임종할 사람이] 바로 다음 생에서 직면하게 될 재생연결을 생산할 (kamma)’이나

(2) 이전에 업을 지을 때에 인식한 형상등이나 그 업을 지을 때에 사용한 기구인 업의 표상(kamma-nimitta)’이나

(3) 바로 다음 생에서 얻거나 경험하게 될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a)’[나타난다]

 

(아비담마, 5 35절 죽을 때의 표상, 대림-각묵스님역)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임종시 ‘업(kamma)’업의 표상(kamma-nimitta)’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a)’이 나타난다고 한다.

 

업의 힘에 의해

 

만일 누군가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면 일생일대의 가장 잊혀질 수 없는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중대한 사건이므로 마지막 죽음의 마음도 지배할  것이다. 그래서 표상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영화에서도 사형수가 강간하고 살해하는 장면을 오버랩 시켜 놓았다. 이를 아비담마적으로 해석한다면 임종시 나타나타는 업의 표상(kamma-nimitta)’을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영화제작자가 아미담마를 읽어 보았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임종시 마지막으로 떠 오르는 장면은 일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임에 틀림 없다. 그것이 살인이라면 그 사람의 임종순간까지 마음을 지배하여 죽는 그 순간까지 끔찍한 살해 장면이 오버랩 될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임하였을 때 가급적 아름다운 장면을 떠 올리라고 한다.

 

그러나 죽어 가는 자에게 있어서 선행장면을 자신의 의지로 떠 올리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아비담마에서는 업의 힘에 의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다는 것을 말한다. 악업이 중하였을 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끔찍한 악업이 떠 오를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는 임종시 뿐만 아니라 평시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서는 시도 때도 없이 발현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죄의식에 대하여

 

그래서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M129)’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수행승들이여,

이를테면 커다란 산봉우리의 그림자가 저녁 무렵에 지상에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어리석은 자가 의자 위에 올라앉거나 침대 위에 올라 눕거나 땅바닥에서 쉬거나 할 때, 그가 과거에 저지른 악한 행위, 즉 신체적 악행, 언어적 악행, 정신적 악행이 있다면,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

 

(발라빤디따경-Bālapaṇḍita sutta-어리석은 자와 현명한 자의 경, 맛지마니까야 M129, 전재성님역)

 

 

이 경은 범죄를 저지른 자의 심리, 죄의식에 대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자는 자신의 행위가 문득문득 떠 오를 것이다.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떠 오르는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에 대하여 그것들이 그때마다 그에게 걸리고 매달리고 드리워진다.(M129)”라 하였다. 이는 신구의 삼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것을 말한다.

 

또 경에사는 죄의식에 대하여  산그림자의 비유로 표현 하였다. 해질 무렵 산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질 때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심지어는 공포를 느끼는데 이는 죄를 저지르고 몰래 숨어 사는 것과 같은 이치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가 시도 때도 없이 떠 오를 때 괴로움을 겪는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중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그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의식 깊숙이 무의식세계까지 지배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 임종의 순간 역시 지배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이 떠 올랐을 때 그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재생연결식이 일어나 다음생의 존재로 태어난 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형수에게 끔찍한 강간장면과 살해장면에 대한 영상을 오버랩 시켰다면, 죽어가는 사형수의 마지막 죽음의 마음은 끔찍한 범죄장면이다.

 

겁에 질린 여자에게 얻는 쾌락은 적다

 

영화에서는 끔찍한 범죄장면도 보여 주었다. 데이트 중이던 10대 남녀를 사탕수수밭에서 등뒤에서 총으로 쏘아 죽이고 여자는 성폭행까지 한 사건이다. 이렇게 순간적인 성적 충동과 질투, 적개심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데 과연 그런 상태에서 성적욕망이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Apuññalābho ca gatī ca pāpikā,
Bhītassa bhītāya ratī ca thokikā,
Rājā ca da
ṇḍa garuka pa
eti -
Tasmā naro paradāra
na seve.

 

죄악을 얻어 나쁜 곳에 떨어진다.

두려워하는 남자가 겁에 질린 여자에게 얻는 쾌락은 적다.

왕 또한 무거운 벌을 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남의 아내를 범하지 말지니. (Dhp 310)

 

 

게송에서 두려워하는 남자가 겁에 질린 여자에게 얻는 쾌락은 적다.”라고 하였다. 순간적인 성적충동으로 인하여 성폭행 하였을 때 겁에 잔뜩 질린 여자에게서 얻는 쾌락은 적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에서는 끊임 없이 성폭행사건이 일어날까? 그것은 어리석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짧은 쾌락 뒤에 긴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 이래 이런 일이 끊임 없이 계속 되어 왔고 지금 이순간에도 계속 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그럼에 따라 피해자가 속출하고 가해자는 그에 따른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끊임 없이 똑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은 결국 인간의 무지때문이다. 그런 무지는 어리석음이고 이런 어리석음이 탐욕성냄으로 발현 되어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 지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괴로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

 

영화에서는 죽어 가는 사형수와 범죄장면을 계속 오버랩하여 보여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죄가 너무 무거운 것이다. 그래서 죽어 가는 사형수가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행위에 압도당하는 것이다. 아무리 수녀가 자신의 얼굴을 내밀며 구원하려 하여도 살인죄가 너무 중하기 때문에 의식세계는 물론 무의식세계까지 압도 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아마도 지옥과 같은 악처에 태어났을 것이라 본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자는 과보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인 이 세상에서도 괴로움을 받고, 죽어서도 악처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저 세상에서도 괴로움을 받는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악행을 저지른 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슬퍼하니

이 세상에서 슬퍼하고 사후에도 슬퍼한다.

자신의 업의 더러움을 보고

비탄에 빠지고 통탄에 빠진다. (Dhp15)

 

 

악행을 하면, 두 곳에서 괴로워하니

이 세상에서도 괴로워하고 저 세상에서도 괴로워한다.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하고

나쁜 곳에 떨어져 한층 더 고통스러워한다. (Dhp17)

 

 

행위를 하고 난 다음 그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는다. 그래서 자신이 지어서 자신이 받는다고 하여 자업자득또는 자작자수라 한다. 악행이든 선행이든 신구의 삼업으로 지은 행위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자신이다. 따라서 악행을 저질렀을 때 , 내가 악을 지었다라고 아는 것이다. 설령 몰래 저지른 악행일지라도 평생 안고 가는 것이다.

 

그런데 범죄가 너무 중하여 의식은 물론 무의식까지 지배당하였을 때 꿈속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그래서 죄를 저지른 자들은 두 발 뻗고 잠을 자지 못한다고 한다. 반면 얻어 마진 사람들은 다리를 뻗고 잘 수 있다. 그래서 차라리 얻어 맞을 지언정 때리지는 말라고 한다. 이런 원리는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근거 없는 비방이나 비방을 하였을 때 중상모략을 하는 자는 자신이 스스로 악행을 하였음을 알 것이다. 따라서 악행에 대한 과보로서 두 발 뻗고 잠을 못잘것이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잠을 잘 잘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행위를 하지 말것을 말씀 하셨다.

 

부처님 가르침을 일찍 만났더라면

 

살아 오면서 수 많은 일을 겪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다. 업은 행위이다. 행위는 의도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의도된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런 업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를 회상하면 부끄럽고 창피하게 생각한다.

 

왜 이런 부끄럽고 창피한 업을 지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찍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과거에 지은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 떠오를 때마다 부처님 가르침을 일찍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자문해 본다. 특히 조직생활하면서 지은 잘못에 대하여 후회가 많다. 상명하복의 조직생리상 잘못되고 부적절한 지시일지라도 목구멍포도청론을 든다면 거부할 수 없다. 따라서 그 과정에 있어서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참회한다.

 

업에는 선업도 있고 불선업도 있다. 그런데 선업 보다 불선업이 더 크게 부각 된다는 것이다. 과거를 되돌이켜 보면 좋았던 것 보다 후회스런 일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거를 회상하면 후회나 회환의 감정이 더 앞선다. 그래서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라고 후회하고 그때 좀 더 잘했어야 되는 건데라며 회환의 마음이 든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것에 연연하면 불선업을 짓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아비담마 논장에 따르면 후회(kukucca)’해로운 마음부수(akusala-cetasika)’으로 분류 된다. 그것도 성냄에 뿌리 박은 해로운 마음이다. 그럼에도 후회스런 것은 항상 부처님 가르침을 일찍 만났더라면이다.

 

전통적인 업설

 

그렇다면 과거에 지은 악업을 소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좋은 방법은 악업 보다 선업을 더 많이 짓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을 월등히 많이 지었을 때 악업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마치 소금덩이의 비유와 같다.

 

앙굿따라니까야 에 소금덩어리의 경(A3.99)가 있다. 이 경은 과거에 지은 죄악에 대한 행위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소금덩이 비유에 앞서 경에서는 먼저 잘못된 업관이 언급되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되지 않는다.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이것은 전통적인 업설이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서 옛날부터 받아들이던 숙명론적업설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표현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모든 행위에 대하여 업으로 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나가다 모르고 벌레를 밝아 죽였어도 이를 업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업에 대한 과보를 받는 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행위한 그대로의 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은 결코 불교의 교리가 아님을 말한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설은?

 

그렇다면 불교의 업설은 어떤 것일까?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경우에 청정한 삶의 가능성이나 괴로움의 종식을 이룰 가능성이 시설된다.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설은 의도된 행위에 대한 것이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인 행위에 있어서 의도가 일어난 행위에 대하여 업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능동적인 업관은 기존의 수동적 또는 숙명론적 업관과 매우 차별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가다 벌레를 밝아 죽였다고 할지라도 죽이려는 의도가 개입 되지 않았다면 살생업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업의 개념을 말씀 하셨기에 부처님에 대하여 개혁가또는 혁명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세상의 고정관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죄를 저지른 사람도 자신의 신구의 행위에 따라 얼마든지 운명을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업이란 대체 무엇일까?

 

적은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간다니!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따르면 법은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깨달은 이 진리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탁월하고, 사유의 영역을 초월하고, 극히 미묘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것이다.(S6.1)”이라 하였다. 이와 비슷한 말이 청정도론에도 있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현자들만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사성제, 업의 법칙, 재생연결식, 그리고 연기법 이렇게 네 가지이다. 이렇게 네 가지 중에 업의 법칙이 있다. 이런 업의 법칙은 범부의 눈으로 보기 힘든 것이라 한다. ‘지혜의 눈(法眼)’을 가진 현자들만이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이런 업에 대한 미묘한 가르침이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사람은 적은 죄악을 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동일한 적은 죄악을 지어도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읽으면 읽을수록 난해하다. 더구나 깜짝놀랄만한 문구가 보인다. 그것은 적은 죄악을 지어도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라는 말이다. 이는 불자들의 상식을 뒤집어 엎는 말이다. 이제까지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살인과 같은 중죄를 지어야 지옥에 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적은 죄악을 지어도 지옥에 떨어진다 하니 놀라운 말이다. 대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숙명론이나 결정론이 배제 되는 이유

 

적은 죄를 지어도 지옥에 간다면 사소한 잘못을 범해도 지옥에 갈 수 있다는 말인가!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여도 지옥에 가고 삿된 음행을 해도 지옥에 갈 수 있는 것이다. 반드시 살인과 같은 중죄를 저지른 자만이 지옥행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가장 기본적인 도덕적 덕목인 오계준수를 하지 않으면 악처에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해코지하고 중상모략하고 시기질투하는 마음을 가져도 지옥에 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 아무렇게나 살 수 없어도 되는 대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왜 이와 같이 말씀 하셨을까? 이는 각주에서 주석을 참고한 설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각주에 따르면 세 가지 업의 과보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불자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잘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현세에 겪어야 하는 업

둘째, 다음 생에 겪어야 하는 업

셋째, 아주 먼 생에 겪어야 하는 업

 

 

첫번째와 두번째를 보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돌을 던지면 유리창이 깨지듯이 시간에 따른 순차적 업의 과보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현생이든 내생이든 지은 업에 대한 과보를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업의 과보를 받으면 효력이 상실될 것이다. 그래서 각주에 따르면 업보의 작용에 필요한 조건이 결여되면 효력을 상실한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세 번째인  아주 먼 생에 겪어야 하는 업이다. 지금 의도된 행위를 지었는데 이 업의 과보가 지금 당장 나타나지 않고 그렇다고 다음 생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 다음 생에 과보로서 나타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은 아주 먼 생에 겪어야 하는 업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는 말은 들어 맞지 않는 것이라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업과 과보라는 것이 마치 빨래줄 처럼 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는 전재성님의 상윳따니까야 해제글 연기고리의 계열은 단지 선행적 요소가 후행적 요소를 야기하는 인과과정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고리들 상호관계는 선형적이라기 보다는 수반적이고 복합적이다.”라고 언급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전재성님의 초기불교의 연기사상에서와 같이 중요한 연기의 특징이 그것의 무시간성이다라든가 시간이란 그 자체로서는 없고, 연속이 다소간 잘 조절된 연속적인 업과 불연속적 업들이다.”로 설명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연기라는 것이 반드시 뒤이어 일어나지 않음을 말한다. 조건이 성숙 될 때 일어남을 말한다.

 

지금 의도된 행위를 지어도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면 과보로서 나타나지 않는 다. 업이 익어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은 먼 다음생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것이 업의 불가사의한 속성이다. 이렇게 업보라는 것이 순차적인 시간을 수반하지 않고 단지 업보가 무르익었을 때 발현한다면 이는 숙명론이나 결정론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아주 먼 생에 겪어야 하는 업에 대한 것은 숙명론이나 결정론이 배제된다.

 

적은 죄악을 짓고도 지옥에 가는 이유

 

경에서는 적은 죄악을 지어도 지옥에 간다고 하였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지옥행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끄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몸을 닦지 않고 계행을 닦지 않고 마음을 닦지 않고 지혜를 닦지 않아, 협소하고 적은 도량을 지니고 있어 작은 것에서 유래한 큰 고통스런 삶을 산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그것이 그를 지옥으로 이끈다.”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부처님 가르침은 명쾌하다. 적은 죄악을 지어도 지옥행을 면할 수 없는 것은 닦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다. 되는 대로 막행막식 하며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것 다하며 동물처럼사는 자에게 해당된다. 이렇게 막 사는 사람은 지혜가 없고 어리석기 때문에 삶의 과정에서 무수한 신구의 삼업을 지을 것이다. 그것이 오계를 어기는 것이 되었을 때 비록 적은 죄악일지라도 지옥행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옥행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그렇다면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을지라도 지옥행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부처님이 괴로움도 이야기 하였지만 괴로움의 소멸방법에 대해서도 동시에 말씀 하셨듯이 지옥행을 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똑같이 적은 죄악을 지으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몸을 닦고 계행을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 협소하지 않고 큰 도량을 지니고 있어 무량한 삶을 산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은 똑같이 죄악을 지으면,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으므로 미래에는 그것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데, 하물며 많이 나타나겠는가?”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경에서 현세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을 지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과거에 지은 업이 효력상실됨을 말한다. 어떻게 효력이 상실되었는가? 효력상실하기 위한 의도적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에서는 몸을 닦고 계행을 닦고 마음을 닦고 지혜를 닦아라고 표현 되어 있다.

 

이렇게 새로운 선업을 지으면 과거에 지었던 업이 효력상실된다. 따라서 미래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에 받는 것은 선업에 대한 과보이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선업을 지으면 절대 악처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숙명론적이고 운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업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소금덩어리 비유

 

그래서 부처님은 소금덩어리 비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신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소금덩어리를 갠지스강에 던져 넣는다고 하자.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갠지스 강의 물은 그 소금덩어리 때문에 짜져서 마실 수 없는가?”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소금덩이를 갠지스강에 던져 넎는다고 하여 갠지스강이 짜지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적은 죄를 지었는데 마치 갠지스강만큼 큰 선업을 지었다면 효력이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현세는 물론, 내세, 먼 내세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능동적으로 해석한 업관이다. 이렇게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말한다.

 

무전유죄의 비유

 

그런데 작은 죄를 지어도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경의 후반부에 마치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연상시키는 비유가 있다. 먼저 무전유죄에 대한 것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어떤 사람이 양을 훔쳤을 때에는 양주인이나 양도살업자가 그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약탈하거나 마음대로 처리 할 수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가난하고 재물이 없고 재산이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양을 훔쳤을 때에는 양주인이나 양도살업자가 그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약탈하거나 마음대로 처리 할 수 있다.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이 구절은 무전유죄에 대한 설명이다. 범죄를 저질러 교도소에 들어 간 자가 있는데 너무 가난하여 변호사를 선임할 수 조차 없다. 그럴경우 구형된대로 형기를 살아야 한다. 소설 레미제라블 처럼 비록 빵하나 훔친 죄일지라도 돈이 없으면 수십년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작은 죄를 지은 자가 죽어서 지옥에 가는 이치와 같다. 아무런 선행공덕을 쌓아 놓지 않았을 경우 빵하나 훔친 것에 불과한 작은 죄업일지라도 그 과보는 수미산만큼 커서 지옥행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유전무죄의 비유

 

그런데 부처님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유전무죄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양을 훔쳤을 때에는 양주인이나 양도살업자가 그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약탈하거나 마음대로 처리 할 수 없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어떤 사람은 부유하고 재물이 많고 재산이 많거나 왕이거나 왕의 대신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사람이 양을 훔쳤을 때에는 양주인이나 양도살업자가 그를 죽이거나 포박하거나 약탈하거나 마음대로 처리 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두려움에 떨며 합장하며 이와 같이 주인님, 제게 양이나 그 양의 값을 돌려 주십시요.’라고 빌 것이다.”

 

(Loaphalasutta-소금덩어리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99, 전재성님역)

 

 

이번에는 유전무죄의 비유이다. 범죄를 저지른 자가 부자이거나 왕또는 대신과 같은 권력자일 경우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잘 봐달라고 빌 것이라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비록 현생에서 지은 잘못이 있긴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선업 공덕을 많이 쌓고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었다면 과거의 지은 죄업에 대한 효력이 상실됨을 말한다. 그래서 현생은 물론, 내생, 그 이후의 내생에서조차 효력이 상실되어 소멸됨을 뜻한다. 그래서 작은 죄를 저질렀어도 지옥에 떨어지지 않음을 말한다. 설령 살인과 같은 중죄를 저질렀어도 구원 될 수 있다. 그런 좋은 예가 있다. ‘앙굴리말라이야기이다.

 

앙굴리말라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부처님당시 앙굴리말라가 있었다. 연쇄살인범으로서 부처님 마저 살해하려 한 극악무도한 범죄자이다. 그런데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와 안정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아라한이 되었다. 살인죄를 저질렀으므로 인과법칙에 따르면 당연히 지옥에 태어나야 하나 어떻게 불사의 경지에 이르렀을까? 이것이 최대의 미스터리이었다.

 

그러나 그런 의문은 경을 자세히 읽어 봄으로써 풀렸다. 그것은 앙굴리말라경(M86)에서 내가 태어난 이래”라는 문구 때문이다. 이는 다름 아닌 거듭 태어남이다. 그것도 성자로 태어난 것이다. 부처님으 가르침을 실천하여 중생에서 성자로계보가 바뀜에 따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마치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어 출가하면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앙굴리말라는 비록 연쇄살인자이었지만 부처님의 교단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이전의 앙굴리말라와는 다른 자이다. 이전에는 살인자이었으나 부처님의 교단에서는 아라한이 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가르침을 따르면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불가능한 것이 있었다. 앙굴리말라가 돌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번뇌 다한 아라한으로 거듭 났음에도 현생에서 살인업에 대한 과보를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가 업의 과보로 수년, 아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그대가 지금 여기서 받는 것이다.(M86)”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일까? 앙굴리말라가 아라한이 되어 다음생과 다음 생에 이어지는 어떤 생에서 체험되는 과보를 피해 갈 수 있었지만, 현세에서 체험될 수 있는 과보는 피해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각주에 따르면 거룩한 님의 경지를 얻기 이전에 행한 행위의 현재적인 과보를 감지하는데 민감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앙굴리말라이야기를 보면 지금 죄업으로 가득찬 인생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전혀 다른 삶을 살아 갈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앙굴리말라의 사례를 보면 죄업에 가득찬 인생들에게도 희망을 준다.

 

부처님은 혁명가

 

흔히 듣는 말이 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라는 말이다. 이는 불가사의한 업에 대한 것이다. 어쩌면 업의 탓이라고 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 숙명론적이고 운명론적으로 들린다. 이렇게 업타령을 하는 것이 보통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숙명론적인 업설을 부정하였다. 이는 경에서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A3.99)”라는 전통적인 업설을 부정한 것이다. 그 대신 부처님은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고 하여 능동적인 업설을 말씀 하셨다.

 

이렇게 부처님이 주장한 업설이 전통적인 업설과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는 세 가지 업의 과보 중에 아주 먼 생에 겪어야 하는 업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기존의 숙명론적 업설과 다른 것이다. 이러한 업설은 또 한편 불가사의한 업으로도 설명되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전통적인 숙명론적이고 운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업설 대신에 누구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혁명적인 업설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을 혁명가로 본다.

 

 

 

2014-01-05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