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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거꾸로 솟구칠 때, 어떻게 사무량심을 실천할 것인가?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13. 15:11

 

피가 거꾸로 솟구칠 때, 어떻게 사무량심을 실천할 것인가?

 

 

 

노교수의 근혜사랑

 

지난 번 대선 당시 재미있는 동영상을 보았다. 진보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올려진 박근혜후보를 지지하는 동영상이다. 마치 개그프로를 보는 것처럼 우습기도 하여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는데 최근 불통논란을 빚고 있는 현실을 보았을 때 마치 미래를 예측하는 선견지명 동영상처럼 보였다. 그래서 유튜브를 검색해 보니 올려져 있음을 확인 하였다.

 

‘‘ 중의 꽃~ 근혜님 꽃~ 노교수의 '박근혜 찬가’라는 제목으로 올려져 있는 동영상을 보면 조회수가 무려 16만명에 달한다. 그렇다면 개그맨 보다 더 웃기는 동영상은 어떤 것일까?

 

동영상을 보면 노교수가 박근혜찬가를 부르고 있다.  초반부에서는 스스로 만든 후보에 대한 찬탄의 시를 읊고 있다. 마치 유일신을 찬양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후반를 보면 꽃중의 꽃을 개사하여 노래를 부르고 있다. 노래의 가사를 보면 "꽃 중의 꽃~ 근혜님 꽃. 8천만의 가슴에 피어라, 피어라,~”라고 되어 있는데, 노교수의 근혜사랑이 절절하다. 그리고 닭살이 돋을 정도로 간절해 보인다.

 

드라마 정도전을 보았는데

 

최근 사극을 재미 있게 보고 있다. 좀처럼 드라마를 보지 않지만 이렇게 사극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월요일과 화요일 MBC에서 방영하는 기황후때문이다. 이제 기황후 광팬이 되어 방송되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영향이어서인지 최근 KBS에서 주말에 방송되는 정도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드라마가 막 시작 되고 있는 정도전은 고려말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의미 있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은 최선과 차선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태후가 섭정으로 나온다. 나이 어린 우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우왕 뒤에 있는 반투명 커튼을 사이에 두고 대신들과 대화를 나눈다. 친명파와 친원파로 나뉜 상황에서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에 대한 것이다. 이때 태후는 명나라와 관계설정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친원파의 수장은 반드시 최선이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고 최악이나 차악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최선이 안되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합니다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반드시 명나라와의 관계에만 올인 할 것이 아니라 비록 쇠퇴하긴 하였지만 원나라와의 관계도 중시해야 함을 말한다.

 

이 장면을 보았을 때 현정부의 불통문제가 떠 올랐다. 불통이 이슈화 되자 드라마의 소재로도 활용 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든 것이다. 법과 원칙만을 강조하는 불통이미지의 대통령에 대하여 태후와 대비시킨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대신의 입을 빌어 최선만이 능사가 아니라 차선을 선택해야 함을 말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해법을 제시한 것이 아닌지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아니되옵니다

 

드라마 정도전에 이어 역사저널 그날을 보았다. 사회자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 출연하여 역사적 사건에 대한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하는 프로이다. 이 프로 역시 정도전 이야기를 다루었다. 바야흐로 정도전 신드롬이 생겨날 조짐을 본다.

 

정도전은 조선의 기틀을 잡았다. 특히 왕을 견재하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왕이 잘못하면 신하들이 직언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극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아니되옵니다라는 말이라 한다.

 

조선왕조 실록을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조선시대 신하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아니되옵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통하지 않으면 집단으로 몰려가 큰소리로 아니되옵니다라고 합창했다고 한다. 이것은 일종의 시위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왕에게 직언을 할 수 있는 기개를 가졌다고 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가 오백년 가게 되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일이라 한다. 그런데 이 프로를 보자 역시 현 정부의 불통에 대한 것이 떠 올랐다.

 

요즘 대통령의 불통에 대하여 이슈가 되고 있다. 도무지 소통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원칙만 강조할 뿐 좀처럼 상대방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신 주변에는 비위 맞추려는 사람들로 넘쳐 나는 것 같다. 이는 지난 해 말 철도파업이 일어 났을 때 알 수 있다.

 

작년 파업 당시 대통령은 장관들을 질책했다. 그러자 경제를 맡고 있는 수장이 철도노동자의 연봉이 칠천만원이고 철밥통이고 하는식으로 깍아내리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갈등이 있으면 대화로서 풀려고 하려 하기 보다 약점을 들추어 내어 타격을 가하려는 치사한면을 보여 주었다. 이런 면모는 조선시대 대신들의 아니되옵니다를 크게 외친 것과 비교 된다.

 

불통 이미지의 정부를 보자 어느 노교수의 박근혜찬가가 떠 올랐다. 주변에 온통 근혜찬가를 부르는 자는 넘쳐 나지만 정작 아니되옵니다라고 말하는 자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통이라는 말이 이슈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최선차선그리고 다름틀림의 차이를 잘 모르는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틀리다다르다는 다르다

 

글을 쓰면서 종종 지적 받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문법에 대한 것이다. 최근 지적 받은 것은 ‘짓다’와 ‘짖다’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받침이 있을 때 이를 잘 구별하여 사용해야 하나 종종실수를 한다. 짓다집을 짓다에 사용되고, ‘짖다개가 짖다에 사용된다고 알아 두면 다음에 실수 하지 않을 것 같다. 또 하나 지적 받는 말은 수밖에이다. 처음에는 수 밖에 하여 띄어 썼으나 어느 법우님이 지적해 주어 붙여서 수밖에라고 붙여 쓰고 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도움 받은 것은 틀리다다르다에 대한 것이다.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아무 생각없이 틀리다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였다. 그랬더니 어느날 어느 법우님이 글을 남겨 주셨다.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라고 써야 한다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제까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에 대하여 틀리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틀리지 않을 수 있다. 다만 나와 생각이 다를 뿐이다. 그 이후로 틀리다다르다를 구별하여 사용 하였다. 이렇게 틀리다다르다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진선미(眞善美)와 위악추(僞惡醜)

 

최선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어로 ‘最善’ 또는 ‘最先’이라 한다. 이는 ‘가장 좋고 훌륭함’ 또는 ‘여럿 가운데 가장 앞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최선이라는 말을 남발하면 도그마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하였을 때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불통의 이미지로서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선은 최악과 대비 되는 말이다. 그래서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조에서 탄생된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특히 종교적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이는 진선미(眞善美)’에서도 볼 수 있다.

 

진선미를 추구하는 것이 유일신교 종교이다. 이때 진은 절대진을 의미하며 절대위와 대비된다. ‘절대선절대악을 바탕으로 하고, ‘절대미절대추가 있어야 성립한다. 그래서 진선미를 추구한다는 것은 반대로 위악추(僞惡醜)’를 버려야 하는 것으로 된다. 따라서 진선미를 추구하면 할수록 위악추는 멸절되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최선은 최악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종교, 특히 유일신교에서는 최선을 추구한다. 그래서 최선이 아니면 진리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최선, 절대선이 아니면 종교가 성립 되지 않는다. 이렇게 최선이라는 용어는 종교적 용어이다. 왜냐하면 진리라는 것은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선이라는 말이 정치에 사용 되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정치에서 최선을 추구해서 안되는 이유

 

정치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따라서 정치라는 것은 반드시 정치인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서 정치를 할 수 있고, 회사에서 정치를 할 수 있다. 심지어 불교종단에서도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종단정치라는 말도 있다. 이때 정치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데 정치인들을 보면 늘 싸우는 것 같다. 이런 싸우는 모습이 보기 싫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서로 싸우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넌센스이다. 물론 폭력을 동반한 싸움은 하지 말아야겠지만 정치에 싸움과 논쟁이 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정치행위라는 라는 것이 갈등의 표출을 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정치하는 곳에서 최선만을 이야기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로지 법과 원칙만을 내세우며 최선을 강조하였을 때 정치는 실종된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말한다. 다양성의 사회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원칙만을 강조하는 정치라면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정치에서 원칙과 최선만을 강조하였을 때 들을 수 있는 말은 네가 틀렸다일 것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옳은 것이고 상대방이 이야기 하는 것은 틀려먹었다라고 보기 때문에 불통이 되는 것이다. 이는 틀리다다르다를 구분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한다. 따라서 정치에서는 최선이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좋은 정치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드라마에서도 말했듯이 최선을 다하라는 태후의 말에 최선이 아니라 차선이다라고 응수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왜 차선을 추구해야 하는가? 그것은 카운터파트가 있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것은 반드시 상대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고 협상이 필요한 것이다. 밀고 당기고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고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이다. 이렇게 주고받기하는 것이 정치이다. 그래서 정치는 항상 최선이 아니라 차선을 추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최선은 종교에서나 추구하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아 하고 싫어함이 분명한 사람

 

최선 보다 차선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이다. 반대로 종교는 최선을 추구해야 한다. 이렇게 최선과 차선은 쓰임새가 다르다. 그럼에도 극한적 투쟁으로 치닫는 것은 상대방을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마음 바탕에 분노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어느 법우님이 있다. 그법우님 하는 말 중에 자신은 좋아 하고 싫어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은 무척 좋아하고 한번 싫어 하는 마음이 생기면 상대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어느 법우님이 있다. 여성법우님이다. 이 법우님은 모임에 나오지 않는다. 이유는 꼴보기 싫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자신에게 싫은 소리를 한 어느 법우님과 함께 하는 것이 싫어서 나오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렇게 좋아함과 싫어함이 분명한 사람들이 많다. 특히 여자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심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말하는 것은 틀린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는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으로 싫어 하게 된다. 꼴도 보기 싫어서  그 사람 때문에 법회모임에 나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좋아함과 싫어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한번 싫은 마음이 일어나면 이것이 미움으로 발전되고 심지어 증오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이 못마땅하게 보여서 시기하고 질투한다. 이렇게 일거수 일투족 못마땅하다 보니 심지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램을 갖게 된다. 이렇게 미음이 증오로, 증오에서 저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정치권에서도 볼 수 있다.

 

주디를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기억나는 정치인의 저주발언이 있다. 1998년 소설가 출신 국회의원인 김홍신이 거짓말쟁이 김데중대통령의 주디를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한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업용 미싱발언 사건이다. 

 

미싱발언은 너무나 유명해서 지금도 키워드 검색하면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지나쳐 저주한 것이다. 다시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입을 봉해 놓겠다는 무시무시한발상이다.  이는 틀림과 다름을 구분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분노, 시기. 질투, 저주로 표출된 것이다. 불교에서 그토록 경계하는 탐진치 삼독 중에 하나인 성냄에 대한 것이다.

 

피가 거꾸로 솟구칠 때

 

아침에 전화를 받았다.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이다. 주차를 어떻게 하여 길레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해 놓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점점 목소리톤을 높이며 화를 내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모욕당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당장 반격하여야 했다. 그러나 참았다. 짤막하게 설명하고 알았다고 말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이런 주차문제로 인한 트러불은 누구에게나 겪는 일이다.

 

이렇게 한발 물러 선 것은 화를 냄으로 인하여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몇 해 전 불국사에서 당한 사건 때문이기도 한다. 그 때 당시 법당보살로 받은 수모로 인하여 감정이 폭발하여 법우님들에게 못볼 꼴을 다 보여 주었다.  그야말로 쪽이 다 팔린 것이다. 평소에 탐진치를 소멸해 가는 과정이 깨달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경계에 부딪쳤을 무용지물이 돠었다. 무참하게 깨진 것이다.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앙칼진 목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전화를 끊고 잠시나마 숨고를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한 이유는 일종의 도망가기작전이다. 그 자리를 무조건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에도 나와 있다. 모든 번뇌의 경(M2)에 따르면 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고,(M2)”라는 구절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일단 피했다. 이렇게 인터벌을 주면 분노가 누그러진다. 그 다음에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이지만 좋아하고 싫어함에 대한 구별이 명확하다. 그래서 한번 싫으면 싫은 것이다. 비록 표출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에 싫어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 TV를 볼 때 일어난다. 싫어 하는 사람이 나오면 채널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보았을 때 사람에 대하여 미워하는 감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미움, 시기, 질투는 아비담마에 따르면 성냄을 뿌리로하고 있다. 대상에 대하여 밀쳐 내려는고유의 특성이 발현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냄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어떻게 사무량심을 닦을 것인가?

 

화가 났을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은 사무량심이다. 왜냐하면 사무량심을 닦는 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성냄을 소멸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자애와 연민수행이 그렇다. 이런 사무량심을 한 구절로 요약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슬로건

실패

자애의 삶

(Metta)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차별도 없이 중생을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실천한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Sn 1.8)

애정

연민의 삶

(karua)

근심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의 태도를 갖는다.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 (S15.11)

근심

기쁨의 삶

(mudita)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한다.

들뜸

평정의 삶

(upekkha)

인생의 모든 파란과 곡절에서 침착과 평정을 유지한다.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다 .(A10.48)

무관심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일어날 때 성냄의 마음이 일어날 수 없다. 한순간에 마음은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Sn 1.8)”하며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절대로 미움의 마음이 일아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원한 맺힌 자에게는 잘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럴 경우 효과적인 것이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 (S15.11)”라고 연민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러면 미움이 누구러질지 모르겠다. 그래도 안되면 어떻게 해야할까?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자비를 강조한다. 이때 자비는 사무량심에서 멧따()’까루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자비심을 가지게 되면 성냄이 사라진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자비만 이야기 하지 않는다. 빠알리니까에서는 항상 자애, 연민, 기쁨, 평정 이렇게 네 가지가 항상 함께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자애 또는 자비만 이야기한다면 제대로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기쁨과 평정의 마음을 갖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마음을 닦지 않는다면 반쪽짜리 밖에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닦아야할까?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꿰메 버린다고 하였을 때 평정심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사무량심에서 평정에 대한 것을 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부처님은 업이 자신의 주임임을 반조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다.(A10.48)”라고 항상 되새겨여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런 비난 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당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업이 자신의 주임임을 반조하였을 때 마음의 평정을 찾을 지 모른다.

 

그런데 사무량심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세 번째항의 ‘기뻐함(mudita)’이라 본다. 예를 들어 원한 맺힌 자가 성공을 이루었을 때 과연 이를 기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이다. 사무량심에서 기뻐함이라는 것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원수의 성공에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에 대해서이다. 소설가 김홍신이 비록 미싱발언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원한 맺힌 자가 신간에 대하여 축하고 하고 공감하는 메시지를 보냈다면 놀랄만한 일이 될 것이다. 이 경우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될 것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사람은 경계에 부딪쳐 보아야 알 수 있다. 그 이전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아무리 도를 많이 닦고 성인군자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막상 경계에 부딪치면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성내는 것이다. 그런데 화를 내면 모든 것이 파괴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도 화를 내면 멀어지고, 오랫동안 거래해 왔던 거래선도 모두 끊어지고 만다. 이렇게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이제까지 쌓은 공덕을 모조리 파괴해 버리고 만다.

 

극단적으로 미워하는 사람들은 특징이 있다. 그것은 틀리다다르다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화를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나와 다름을 안다면 미워 할 일도 화낼 일도 없다. 사무량심의 실천은 사람들의 얼굴이 서로 다르고 성향 또한 서로 다르듯이, 가장 먼저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2014-01-1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