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부처님에게 오체투지 하는가
인내력 없이 읽기 어려운 대승경전
대승경전을 읽다 보면 빠알리니까야와 다른 점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호칭이다.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법할 때 “빅카웨(bhikkhave)”라 한다. 이는 “비구들이여” 또는 “수행승들이여”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대승경전을 보면 빅쿠를 뜻하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금강경을 보면 “선남자선여인”이라 되어 있고, 법화경을 보면 “선남자야(운허스님역)”으로 되어 있고, 화엄경을 보면 “불자들이여(법정스님역)”라고 되어 있다. 최근 번역 되어 나온 전재성님의 십지경을 보면 “승리자의 고귀한 님이여”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대승경전에서는 “비구들이여”라는 호칭을 볼 수 없다. 왜 그럴까?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을 가지고 있다. 공통적으로 한문경전으로서 우리말로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지루하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 반복되어 있고 수 많이 열거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화엄경을 번역한 법정스님은 해제에서 “사실 80권 화엄경을 읽어내기란 어지간한 인내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역화엄경, 법정스님)”라고 하였다. 이는 소설처럼 재미 있는 것도 아니고 비현실적 묘사에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는 장광설에 질리고 말았기 때문이라 하였다.
큰마음 먹고 산 것이 있다. 전재성님이 번역한 ‘십지경-오리지널화엄경’이다. 기존 한문번역물과 달리 산스크리트어를 직접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한문투의 독특한 문체는 보이지 않으나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법정스님 지적대로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마치 SF환타지 소설을 보는 것 같고, 열가지로 설명되는 내용을 보면 질리고 만다. 그래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아 책장의 장식용으로 꼽혀 있다.
이렇게 대승경전이 재미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본다. 대승보살사상의 이념이 너무 거창한 나머지 거기에 압도당하여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손이 자주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대승보살사상은 출발은 매우 좋았다. 그것은 기존 불교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와 초기불교의 ‘원융’을 시도 하는 각산스님
요 몇 일 각산스님의 강의를 흥미롭게 들었다. 간화선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불교와 초기불교와 ‘원융’을 시도 하며 나름대로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키고 있는 스님의 강의를 불교방송사이트(http://www.bbsi.co.kr/) 에서 보았다. 불교방송 ‘TV’파트에 저장되어 있어서 다시보기로 볼 수 있다.
동국대 정각원에서 강의한 15개의 동영상 강좌중에 12번째 ‘견성성불’이 있다. 이 강좌에서 스님은 몇 가지 중요한 말을 하였다. 이는 아직까지 한국불교 스님들의 법문에서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있는 사실을 솔직하게 소개한 스님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2600년전 대영웅의 공덕으로
스님은 두 가지의 길이 있다고 하였다.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을 말한다. 그런데 스님은 성불의 길을 택하였다고 하였다. 대승불교 전통이 있는 한국불교에서 당연한 선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왜 성불의 길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소상하게 밝혔다. 먼저 스님은 복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2600년 전에 복을 많이 지닌 대영웅이 있었는데 그 어른은 가셔도 모든 스님들 먹고 살잖아요. 무위도식으로. 여러분들 다 갖다 바칩니다. 우리가 잘 났습니까? 그런 복을 지었어요. 그런데 빠제까 붓다는 그런 복을 짓지 못하였기 때문에 승가를 만들지 못합니다.
복이 있어야 사람을 두고 이끌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바라밀 봉사를 했느냐에 따라서 사람이 많이 모이고, 내가 남을 위해서 살았냐에 따라서 목숨도 바치고 내 신체의 일부도 기증해 버리고, 아내와 처자식 다 포기 해 버리고, 이런 복덕 때문에 삼마삼붓다가 되는데 그 길을 가기 위한 자를 보살이라 이래 했습니다.
(각산스님, 제12회 견성성불-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2013-12-27)
각산스님의 목표는 뚜렸하다. 그것은 부처가 되는 것이다. 아라한이 되기를 포기하고 부처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보살행을 들고 있다. 보살로서 살며 공덕을 많이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재산과 처자식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고, 신체의 일부도 바칠 수 있어야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서원을 세웠을 때 공덕을 쌓을 수 있고, 그 공덕의 힘으로 부처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의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고 하였다. 그래서 2600년전 대영웅의 출현으로 인하여, 그 분의 공덕에 힘입어 스님들이 먹고 살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선방생활을 그리워 하는 스님들
종종 스님들의 법문을 듣다 보면 선방을 그리워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특히 주지소임을 맡고 있는 스님들이 그렇다. 그렇다면 왜 선방을 그리워 할까?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참선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느 스님은 공개된 법문에서 “선방에서 놀다가..”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스님들에게 있어서 선방은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가 보다.
영남불교대학을 일군 스님도 지금 선방에 들어가 있는데 3년을 목표로 무문관 수행중이라 한다. 지난 20년간 유치원에서부터 양로원에 이르기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완벽한 불교복지시스템을 구축해 놓고 할일을 다 해 마친 스님에게 있어서 무문관 3년은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 간 같은 느낌이다. 이렇게 스님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힘들 때 선방생활을 떠 올리는 것 같다.
그런 선방생활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위도식한다고. 그래서 결재가 끝났을 때 공부에 진척이 없을 때 “밥값 내놓아라”라는 노스님의 호통을 듣기도 한다고 한다. 이처럼 출가하면 스님들은 의식주 걱정을 내려 놓는데 이는 시주자의 보시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부처님에게 공덕을 돌려야 한다.
분명한 사실은 2600년전 출현하였던 부처님이 지은 공덕의 힘이 지금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지금 무위도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스님들은 부처님 공덕으로 먹고 살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부처님에게 가장 감사 해야될 사람들은 스님들이라고 본다. 그래서일까 아침 저녁으로 예불올리고 절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본다.
유정각이 아라한 보다 위에 있는 이유는?
법화경에 ‘삼승’이라는 말이 있다. 성문-연각-보살을 말한다. 이 삼승에 대하여 방편이라 하고 일불승을 진실이라고 한다. 그런데 삼승을 보면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 ‘보살’이다. 아라한을 뜻하는 성문승과 스스로 깨달았지만 법을 펼칠 수 없는 연각승 보다 위에 있다. 그렇다면 윤회하는 깨달은 중생의 뜻인 보살 또는 유정각이 아라한 보다 위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각산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승불교가 기존 스님들이 아비달마적인 번쇄한 이론만, 출가자의 위주로만 불교를 진행하니까 여러분들 입장에서 ‘아니 왜 수행자 출가자 스님들만 이 성문이라는 집단의 승가가 너희들만의 전유물이냐’ 그래서 불교개혁운동이.. 보살운동을 하면 부처가 된다. 그래서 우리가 재가집단이 출가를 하면.. 똑 같은 가사를 입고 머리를 깍고 그래서 모여서 집단화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파적 입장에서 보살행을 해야 부처가 되기 때문에 연각 성문은 이승이라 합니다. 낮은 것이다. 다 자기들만 이루고 가벼렸지 않느냐. 대승을 할려면 보살행, 보살행을 하지 않으면 부처가 안되기 때문에 윤회하며 현자수준의 범부인 유정각이 성자 수준 위에 있는 이유입니다.
(각산스님, 제12회 견성성불-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2013-12-27)
유정각은 윤회하는 현자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윤회하는 존재에 대하여 아라한 보다 상위에 놓은 것은 아비달마 불교의 폐해 때문이라 하였다. 오로지 자신의 구원에 관심만 있는 전문수행자 집단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어 대승운동이 일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재가자들이 주도한 것이 대승불교이다. 그래서 재가자들은 스스로 머리를 깍고 승복을 입고 전혀 다른 조직을 만든 것이다. 더구나 경전까지 새롭게 만들게 되었다. 대승보살사상의 이념을 구현할 경전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로 찬술된 대승경전에서 깨달은 중생, 즉 윤회하며 사는 현자에 불과한 유정각을 성문승 위에 올려 놓은 것은 너무나 당연 스러운 것이라 보여 진다. 그래서 대부분 대승경전에서는 성문승을 이승이라 하여 보살승 아래에 두었고, 또 성문승들이 믿는 불교에 대하여 ‘소승’이라 하여 스스로 차별화 하였다.
여덟 가지 수기조건
이렇게 재가자들이 주도하여 새롭게 일으킨 불교에서는 아라한이 되기 보다 부처가 되기로 서원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살로서의 삶을 말한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에 수기를 받아 무량한 세월동안 보살도를 닦아 부처를 이루었듯이, 그 길로 가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되려면 조건이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각산스님은 여덟 가지 수기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여덟 가지 수기조건
1) 사람이어야 한다.
2) 남자이어야 한다.
3) 은둔자이거나 비구이어야 한다.
4) 평등심을 얻어야 한다.
5) 선정을 얻어야 한다.
6) 부처님을 친견해야 한다.
7) 수기를 받아야 한다.
8) 일체중생을 위해 헌신해야 한다.
이것이 부처가 되기 위한 여덟 가지 수기조건이다. 이중 세 번째의 ‘은둔자이거나 비구어야한다’라고 하였다. 이는 정법이 없을 때는 은둔자로 살고, 정법이 있을 때는 비구로 살아야 됨을 말한다. 특히 비구가 되기 어려움을 말한다. 부처님의 과거 전생을 보면 비구로서 삶을 살았을 때는 열번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정법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힌두이즘을 불교적 입장에서 갖다 넣었어요”
네 번째 항목을 보면 ‘평등심’을 얻어야 된다고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각산스님은 꽤 길게 설명하였다. 중요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평등심이란 것은 뭐냐?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존재하지 않아요. 여러분들이 명칭을 붙여서 힌두이즘을 불교적 입장에서 갖다 넣었어요. 여러분들 힘드는데 기독교 믿고 힌두교 믿고 이러면 거기에도 뭔가 좋은게 있기 때문에 습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33화신으로 이루지잖습니까? 여러분들 필요한데는 나타난다는 뜻이에요.
여러분들 필요한대로 나타나려면 니다 내다 따지고 좋은 놈 나쁜 놈 따져갔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너와 내가 다르지 않구나’를 먼저 깨쳐야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집에서 삶이 바뀝니다. 여성으로서 보살이 아니고 평등심, 너와 나가 다르지 않다 전부다 ‘내 입장에서 내 에고에서 형성됐구나’라고 보는 순간 여러분은 평등심을 얻습니다. 그럴때 시비분별이 사라집니다.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나와 버립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같이 부르면 나타납니다. 평등심을 얻었기 때문에 나타나고 해주어야 합니다.
(각산스님, 제12회 견성성불-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2013-12-27)
평등심을 설명하면서 놀라운 말을 하였다. 그것은 관세음보살에 대한 이야기이다. 스님은 “힌두이즘을 불교적 입장에서 갖다 넣었어요”라고 말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어느 스님의 법문에서도 이와 같은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본문 글에 현혹 되지 말고”
일반적으로 불자들은 관세음보살을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인다. 부처님의 화신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논문이나 자료에 따르면 관세음보살은 ‘시바신’이라는 것이 밝혀 졌다. 그래서 불자들이 조석으로 독송하는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사실상 시바신의 자비행을 찬탄하는 것이라 하여 충격을 주고 있다. 이런 사실에 대하여 몇 차례 글을 올렸다. 그러자 어느 네티즌이 다음과 같은 댓글을 달았다.
본문글에 현혹되어 주력수행을 멈칫하시는 분이 있다면 본문글에 현혹되지말고
하시던 주력수행 꾸준히 하시라고 권고합니다.
코카콜라에 집중하든
집세기에 집중하든
호흡에 집중하든
새소리에 집중하든
백골관에 집중하든
느낌에 집중하든
촛불에 집중하든
다라니에 집중하든
집중수행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수행법은 모두 집중을 하기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편, 다라니는 400음절의 조화가 이루어내는 공명음을 통해 선정에 들어가는 수행법입니다.
다라니의 뜻이 중요한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다라니 수행법은 뜻을 통해 이루어내는 삼매가 아니라
400음절의 조화로 이루어내는 ‘공명음’이 삼매를 유도하기 때문입니다.
예로 관셈보살을 염불한다하면 관셈보살을 생각하며 관상 집중하여 삼매를 이루어 내지만
다라니는 400음절 공명음의 ‘진동’이 삼매를 이루어 내므로 뜻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 뜻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가를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라니 수행으로 삼매를 얻으신 일제시대때 수월스님이 계십니다.
수월스님이 진흙연꽃님 보다 모자라 존경을 받는 것 아니실 것 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돌맹이 비유경을 그대로 믿고
기도를 하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노파심에서 말씀 드립니다.
저 경은 본인이 지은 악업은 본인이 받는다는 악인악보의 원리를 전하는
멧세지 일뿐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나 저 경이 전부가 아닙니다.
중아함 염류경을 보면 한웅큼의 소금을 대야에 넣은 것과
갠지즈강에 넣은 것과는 소금맛이 다르다고 나옵니다.
즉 악행을 저지른 사람도 본인의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과보를 변화 시킬수 있다는 내용으로
그것은 업은 실체가 없으므로 변할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본인은 물론이고 누군가라도 노력해주면 바뀔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돌맹이경 비유가 전부가 아니오니 저 내용에 올인하지 마시고
하시던 기도 더욱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본문글은 수행에 실질적인 체험이 없고
돌맹이 경의 내용은 부분에 불과한데 전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보여
본문 글은 전체적으로 편협적인 글로 보입니다.
(H님 댓글, 뜻도 모른 채 “나모라 다나다라…” 신묘장구대다라니의 불편한 진실에서)
H님에 따르면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수행은 집중수행을 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시바신을 찬탄하는 내용이 문제가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본문에 실려 있는 글에 현혹되지 말기를 당부 하였다.
실제로 기도에 대하여 일종의 사마타수행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김진태 교수는 대담기사에서 “일반 불자들이 주로 하는 기도 역시 사마타 수행으로 전환시켜 집중력을 기르면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불교닷컴 2013-12-31)”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기복을 바라는 기도에서 사마타수행으로서 기도를 하였을 때 놀라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댓글을 주신 법우님의 주장이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시바신을 찬탄하는 내용일지라도 이를 집중으로 전환하였을 때 무언가 이루어 낼 수 있음을 말한다. 마치 돋보기를 이용하여 태양빛을 집중하였을 때 연기가 나듯이 사마타 수행으로 인한 집중의 힘을 무시할 수 없음을 말한다.
기독교에도 좋은 것이 있으면
각산스님은 관세음보살사상이 힌두교로부터 습합된 것임을 솔직하게 말하였다. 이는 이제까지 신묘장구대라라니에 대하여 “내용이 너무 깊고 묘한 것이어서 다른 언어로 그 뜻을 번역하면 본래의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가 너무 편협하고 잘못된 의미로 훼손되어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라고 설명한 것과 다르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한 이유는 뭔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힌두교의 신에 대한 찬탄이지만 받아 들였음을 말한다.
더구나 각산스님은 “여러분들 힘드는데 기독교 믿고 힌두교 믿고 이러면 거기에도 뭔가 좋은게 있기 때문에 습합이 이루어집니다.”라 하여 기독교에도 좋은 것이 있으면 받아 들일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대승의 가장 큰 장점이라 본다. 이는 대승이 기존 아비달마 불교를 비판하면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본다. 그래서일까 대승불교는 끊임 없이 변화해 갔다.
이렇게 변화해 가며 진화해 가는 것이 대승불교라 한다. 그래서 마성스님은 세미나에서 “테라와다 불교는 전통을 고수해야 하고, 대승불교는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진흙속의연꽃 2013-11-26)”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대승불교는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어느 불교 학자는 현시대에 맞는 대승경전이 찬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도법스님은 ‘생명평화경’이라는 새로운 경전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대승불교에서 힌두교의 신을 받아 들여 습한 시켜 놓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끊임 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일어 날 수 있는 일이라 보여 진다.
수메다존자의 전체투지(全體投地)
여덟 가지 수기 조건 중에 여섯 번째 항의 ‘부처님친견’과 일곱번째의 ‘수기를 받을 것’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이는 같은 맥락이라 보여 진다. 부처가 되려는 자는 살아 있는 부처님을 찾아 뵙고 수기를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수기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스님에 따르면 “나는 다음 생에 부처님이 재세시에 태어 나겠다”라고 서원을 세우면 된다고 한다.
수기에 대한 대표적 이야기는 디빵까라 부처님(연등불) 당시 수메다존자의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담인 수메다 존자이야기를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물웅덩이에 자신을 몸을 던져 그 위로 부처님이 밝고 지나가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현자 수메다(Sumeda)는 부모가 돌아가시자 막대한 부를 물려 받았다. 그러나 그 재산이 결코 만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아니라고 깨달은 그는 그 재산을 버렸다. 그리고 숲으로 들어가서 수행자가 되었다. 그는 곧 명상수행으로 깊은 선정을 얻게 되었고, 비범한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디빤까라붓다(Dapankara Buddha)가 람마와띠 마을에 올 것이라는 소식을 수행자인 수메다가 들었을 때 붓다가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준비 하였다.
붓다가 도착할 때까지 그는 여전히 길 주변을 정리 하고 있었지만 움푹패인 더러운 물 웅덩이가 있어서 미래의 붓다가 되기를 맹세한 그는 거기에 엎드리기로 하였다.
그의 옆에는 수밋따(sumitta)라 불리우는 젊은 아가씨가 연꽃 여덟송이를 들고 있었는데, 이중 다섯송이를 수행자에 주고 그녀 자신은 3송이를 들고 있었다.
디빤까라붓다 가 도착 하고 이런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을 때 수메다는 미래의 붓다가 될 것을 수기 하였고, 젊은 아가씨 수밋따는 그의 동료이자 조언자가 될 것이라고 또한 말씀 하셨다.
( http://phramick.wordpress.com/2009/07/24/life-of-the-buddha/에서 번역함)
이는 영문자료를 번역한 것이다. 글에서 물웅덩이에 몸을 던지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의 몸을 생각하지 않고 몸을 던져 부처님이 지나 갈 수 있도록 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이렇게 몸을 던지는 것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오체투지’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자들이 절하는 방식은 매우 공손하게 한다. 바닥에 몸을 대긴 하지만 사뿐히 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티벳에서는 이와 다르다.
티벳식 전체투지(全體投地)는
우리나라에 오체투지가 있다면 티벳불교에서는 ‘전체투지’가 있다. 몸의 다섯 군데만 땅에 대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를 땅에 엎드리는 방식이 전체투지이다. 이 전체투지에 대하여 ‘티벳식 전체투지와 테라와다식 오체투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런데 청전스님 법문에 따르면 티벳식 오체투지가 수메다 존자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작년 말 방한한 스님이 동국대 정각원 토요법회에서 법회한 동영상 파일을 보았는데, 스님에 따르면 티벳식 전체투지가 수메다존자가 물웅덩이에 몸을 던진 것에서 유래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최상의 신심에 대한 표현이 전체투지라 한다. 이런 전체투지는 티벳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데 다른 불교전통과 다르다. 블로그에 올려 놓은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머리위에 합장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수리(crownhead)’에 얹는 방식이고, 또하나는 ‘앞이마(forehead)’ 위에 얹는 방식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정수리에 합장하는 방식은 티벳식 예법이고, 이마에 합장하는 방식은 테라와다식 예법이라 한다.
티벳의 경우 앞이마가 아닌 정수리에 두손을 모은다. 이때 두손바닥을 밀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무리는 형태이다. 초펠스님의 글에 따르면 두 손바닫을 딱 붙이는 방식은 외도들이 기도할 때나 하는 합장방식이라 한다. 그래서 손바닥 가운데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 안에 두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이를 하트(♥)모양이라고 하고 연꽃모양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하트모양으로 만든 두 손을 정수리 위로 죽 올린다. 그리고 정수리(crown head)를 터치하고 이어서 차례로 눈썹사이의 이마(brow), 목(throat),가슴(heart) 순으로 터치한다.
이와 같은 4단 터치 방식에 대하여 초펠스님의 설명에 따르면, 정수리를 터치하는 것은 부처님의 32상 중에 가장 뛰어난 정수리의 ‘육계’에 대한 것이고, 눈썹사이를 터치하는 것은 는 이마에 나 있는 ‘흰털’때문이고, 목을 터치하는 것은 ‘부처님의 목소리’를 의미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가슴을 터치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과 같아지기를 바래서라고 하였다.
그런데 위키피디의 Prostration에 따르면 3단 터치 방식을 소개 하고 있다. 3단 방식은 정수리와 목과 가슴에 대한 터치를 말한다. 정수리를 터치 하는 것은 ‘구루 린포체(Guru Rinpoche)’ 의 깨달은 ‘몸’에 귀의하는 것을 말하고, 목을 터치 하는 것은 구루 린포체의 깨달은 ‘말’에, 가슴을 터치 하는 것은 구루 린포체의 깨달은 ‘마음’에 귀의 하고 공양을 올리는 행위라 한다. 이는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루 린포체는 일반적으로 ‘빠드마삼바바(Padmasambhava)’를 지칭한다.
이와 같이 4단 터치 또는 3단 터치를 한다음 예배를 하는데, 마치 나무를 자르면 쓰러듯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몸을 던지는 행위를 말한다. 이를 전체투지(全體投地)라 한다. 자신의 옷이나 몸을 아끼지 않고 몸을 죽 펴서 전신이 땅바닥에 닿게 예배하는 방식이다.
(티벳식 전체투지와 테라와다식 오체투지, 진흙속의연꽃 2013-01-06)
티벳식 전체투지는 옷이나 몸을 아끼지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 불자들이 법당에서 사뿐하게 공손하게 하듯 절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나무토막이 쓰러지듯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연등불이 출현 하였을 때 수메다 존자가 물웅덩이 자신의 옷과 몸을 아끼지 않고 던진 것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바라밀을 닦을 것인가?
부처가 되려고 서원한 자는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여덟 가지 수기조건 중에 마지막 여덟 번째 항목이 ‘일체중생을 위해 헌신할 것’에 대한 내용이 있다. 그래서 ‘일체중생을 위해 헌신 복덕을 쌓으리라’고 서원을 세워야함을 말한다. 그것도 4아승지 하고도 십만겁동안이다. 이토록 한량 없는 공덕을 쌓아야 부처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각산스님에 따르면 복은 4아승지 겁동안 짓지만 깨침은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이 깨침이 견성이라 한다. 따라서 견성하였다고 하여 부처가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4 아승지 겁 동안 복덕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공덕을 쌓아야할까? 십바라밀을 쌓아야 함을 말한다. 십바라밀에 대하여 세가지로 요약하여 다음과 같다.
1)기본바라밀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 처자식을 포기하는 것
2)중간바라밀
내 신체 일부를 중생을 위해서라면 헌신 할 수 있는 것
3)최고바라밀
몸마저도 중생을 위해서라면 다 주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 처자식을 포기하는 것이 기본이라 한다. 부처가 되려고 마음 먹은 자는 가지고 있는 재산을 모두 포기하고 처자식을 부양하지 말아야 함을 말한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 헌신해야 함을 말한다.
더구나 자신의 신체일부를 헌신할 수도 있어야한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가끔 스님들의 손을 보면 단지 한 것을 볼 수 있다. H스님이 대표적이다. 그런 공덕이어서일까 스님이 불사한 선원을 보면 동국대 정각원만한 건물이 무려 18동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최고바라밀을 하려 한다면 자신의 온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의 전생담에서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보살로서 삶을 살 때 동물로도 태어난 적이 있는데 이 때 자신의 몸을 불속에 던져 스스로 먹이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처럼 부처가 되려고 하는 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 모든 것을 중생을 위하여 던질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용수보살에 대한 쇼킹스토리
각산스님의 강의는 매우 솔직하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알려 준다. 부끄러운 사실에 대하여 숨김 없이 그대로 말한다. 이런 법문을 한번도 들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놀랍다’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각산스님의 표현에 따르면 ‘쇼킹하다’라는 말을 하였다. 어떤 사실이 쇼킹한 것일까? 스님은 용수보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래 대승불교는 용수 나가르 주나, 중론의 대가이지요. 철학적으로 대가일지 몰라도 그 분 출가자 아니에요. 쇼킹할정도입니다 제가 이래 이야기하면. 사실을 알자 이거죠.
출가자라는 의미는 사마나, 이것은 사문이라고 불교에서 이야기 합니다. 세속을 버리고 머리 깍고 지내면 출가입니다. 신부, 수녀님도 출가자 입니다. 그런데 비구가 아니다 이말입니다. 227계나 250계를 3사7증에 의해서 받아야 정식 비구, 비구니 들을 수 있다 이말이에요.
그런데 용수보살은 유일한 용수보살전이라는 고려전자대장경에 하나 뿐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머지는 신화적으로 이야기 해 놓았습니다. 산속에 탑에 나아가 스스로 삭발하고 출가 하였다. 그래서 이분은 ‘비구가 아니구나’ ‘스님이 아니구나’이렇게 알았지. 그런데 저의 이야기를 누가 듣겠습니까?
(각산스님, 제12회 견성성불-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2013-12-27)
참으로 쇼킹한 말이다. 용수보살은 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출가자인 것은 맞는데 불자들이 알고 있는 스님이 아닌 것이다. 단지 스스로 머리를 깍고 출가한 출가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출가자의 개념으로 신부나 수녀도 해당된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비구는 삼사칠증제에 따라 250계를 받아야 하는데 용수보살은 그 어떤 자료에서도 비구라는 증명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쇼킹하다고 하였고 이런 사실을 대부분 불자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머리를 깍고 출가한 용수보살
이렇게 각산스님은 용수보살이 비구가 아니라 단지 재가신분의 출가자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자료를 발견하였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이야이기이다.
히라카와 아키라(평천?, 1915-2002)은 십주비바사론을 가지고 용수보살이 출가자가 아니라는 것을 밝혀 내었다. 그분은 혼자 스스로 출가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이 제머리 못 깍는다’ 내 혼자서 머리깍아 놓고 ‘중이다’ 하면 안된다 이말이야. 스님이라는 칭호를 붙여서는 안됩니다. 출가자일수는 있어도. 그래서 정식출가가 이루어야 여러분 복덕이 이루어집니다. 그분이 나름대로 뛰어난 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승불교의 시조로서 제2의 붓다라고 칭호를 붙이게 됐습니다.
(각산스님, 제12회 견성성불-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2013-12-27)
용수에 대한 검색을 하면 불분명한 자료만 접하게 된다고 한다. 출생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어서 단지 ‘?150년~?250년’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남겨 진 자료도 부족하여 항상 신화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히라카와 아키라 (平川彰 , 1915-2002)에 따르면 용수가 비구 또는 스님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히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십주비바사론’에 따른 것이라 한다. 그래서 용수는 ‘혼자 스스로 출가’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용수는 ‘힌두교 논사’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스스로 머리를 깍은 자들도 겉보기에는 비구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각산스님에 따르면 스스로 머리깍은 자에 대하여 비구나 스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주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수는 중론을 저술하는 등 뛰어난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승불교에 있어서 시조로 보고 있다. 그래서 용수에 대하여 제2의 석가로 칭한다고 한다.
대승불교에서 삼귀의를 하지 않는 이유
대승불교의 시조 용수의 비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용수는 스스로 머리 깍고 출가자가 되었을 뿐 승단에 귀의한 증명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각산스님은 용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또 말하고 있다.
지금 대승불교는 용수라는 걸출한 인물이 이런식으로 불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새로운 불교운동을 하면서 나름대로 하는데 삼귀의를 하지 않습니다. 삼귀의 대상은 성문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승의 경우), 보살중을 대상으로 삼귀의를 했고 227계를 대상으로 하지 않고 십선도를 계율로 삼아가고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개 발전시킨 것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찬술경 범망경 십중 사십팔경계를 이야기 합니다. 십중대계를 보면 십선도를 응용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에 세친 등 소승의 아라한 등이 들어 오면서 이렇게 만들어져가 좋은 말로 우리는 원융불교 통불교 이래 됩니다. 이렇게 알고는 들어가야 됩니다. 이정도 되시는 분들이라면.
(각산스님, 제12회 견성성불-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2013-12-27)
용수는 승단에 들어 간 적이 없기 때문에 기존 불교에 따르지 않았음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삼귀의를 들 수 있다.
용수를 시발로 한 새로운 불교운동, 즉 대승불교에서는 삼귀의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불법승 삼보에 있어서 성문에 해당되는 승가에 귀의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로지 보살승에만 귀의하는 새로운 삼귀의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계율에 대한 것이다.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든 마하야나주의자들
대승주의자들은 기존 승단에 들어가지 않은 재가자로 이루어진 승단이다. 따라서 재가승단에 맞는 계율을 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이 동아시아 불교에서 볼 수 있는 범망경이라 한다. 이 범망경은 10가지 대계와 48가지 소소한 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10가지에 대하여 십중대계라 하여 보살승이 지켜야할 계율이라 한다. 그런데 이 십중대계라는 것이 십선도를 응용한 것이라 한다. 범망경 십중대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살생하지 말라
2. 주지 않는 것을 훔치지 말라
3. 음행하지 말라
4. 거짓말을 하지 말라
5. 술을 팔지 말라
6. 사부대중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7.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8. 자기 것을 아끼려고 남을 욕하지 말라
9. 성내지 말고, 참회하면 잘 받아 주어라
10.삼보를 비방하지 말라
(범망경 십중대계)
십중대계를 보면 오계를 기본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보살승이 지켜야 할 계율이다. 소승이라 불리우는 250가지 소승비구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대승보살승은 비구가 아니라는 말이다.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은 출가자일지라도 비구계를 받지 않았으므로 비구가 아닌 것이다. 우리말로 스님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고 출가하여 공동체를 구현하였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지향하는 대승보살 이념을 구현하기 위하여 새로운 경전을 찬술하였다. 또 공동체의 규율에 해당되는 계율을 만들었다. 그래서 기존의 250가지 비구계를 따르지 않고 십선도를 응용한 십중대계라는 별도의 계율을 만들었다.
이런 십중대계와 사십팔경구계를 합하여 대승보살계라 하는데 특이한 점은 스님이나 재가불자나 똑같이 수계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스님들은 대승보살계와 함께 비구계도 동시에 수계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비구계는 거의 지켜지고 있지 않다고 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스님이나 재가자나 똑같이 대승보살계를 수지한다면 한국불교는 보살승단 또는 재가승단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마하야나주의자들은 경전도 다르고 계율도 다르고 더구나 삼귀의 대상이 다른 불교를 만들었다. 이것이 대승불교이다. 그래서 대승보살승은 소승비구승과 확실히 차별화 되었다.
성불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마하야나주의자들이 기존 불교와 전혀 다른 불교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은 매우 높았다. 그것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사상이다. 그래서 누구가 보살도를 닦으면 부처를 이룰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런 대승보살사상을 이어 받은 불교가 동아시아 불교이다. 그래서 동아시아 불자들은 모두 부처가 되기를 발원한다. 따라서 사홍서원에서도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라 하여 “일체중생을 모두 건지오리다”라고 거창한 발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각산스님도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견성성불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깨친다 생각합니다. 그것은 즉심즉불로 들어 가는 것이지.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위대한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부처이지 그 부처 말고 뭐가 있노?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무상정득각자의 입장에서 깨쳤는데 그 분과 같이 마음에 번뇌가 없다를 포함시킨다면 문제가 없지만, 보통 석가모니 부처님같이 되는 줄 알고 다 합니다.
그런데, 노!(No). 석가모니부처님같이 정득각자가 되려면 보살행을 해야 하고 아라한이 되면 안되! 여러분들이 아라한이 되어 버리면 이 자리에서 되돌아 오지 않는 생사를 초월해 버립니다. 아라한이 되기 이전 단계때 다음시간에 다루지만 남방불교 교리 체계에서 위빠사나 16단계 지혜에서 상카루뻭카라고 11번째 단계가 아까 평등심을 얻는 단계입니다.
거기에서 내가 도를 더 닦아 버리면 아라한이 되어 버리고, 내가 거기에서 도를 멈추고 보살행을 닦기로 하면 거기서 수행이 멈추어지게 됩니다. 정확하게 수기를 받아 버리면 도를 더 닦아도 안깨치게 되고, 우리 같은 사람은 ‘다음에 내가 부처가 되고 싶다’그러면 저는 여기서 멈추고 보살행을 위주로 가야 하는데 다음 생에 태어나가지고 이 논리를 모르고 닦다가 나도 모르게 수기 받기 전에 서원을 안세우면 저도 나도 모르게 수다원, 아라한으로 가버립니다.
그래서 맞든 안맞든 부처가 되려면, 그와 같이 보살에서 아라한의 가느냐, 아니면 보살행을 닦느냐 그 위치를 알아나야 합니다.
(각산스님, 제12회 견성성불-각산스님의 초기불교와 간화선 통합수행, 불교방송 TV, 2013-12-27)
각산스님은 성불의 길과 아라한의 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누군가 성불의 길로 가고자 한다면 상카루뻭카라단계에서 멈추라고 한다. 이는 청정도론에 따르면 16단계 위빠사나 지혜중에 11번째 단계로서 ‘현상에 대한 평등의 지혜’이다. 그런데 모르고 이 단계를 지나치면 그대로 아라한의 길로 가게 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으므로 부처가 되기로 발원한 자는 11단계 지혜에서 멈추고 보살도를 닦아야 함을 말한다.
사업이나 정치를 하려거든
각산스님의 강의를 듣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스님들이 놀고 먹는 것 같아도 굶지 않는 것은 2600년전 부처님의 복덕 때문이라 한다. 그 공덕의 힘이 지금까지 미치고 있어서 스님들이 의식주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은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사업이나 정치를 하려는 사람은 덕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아무나 사업 또는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한다. 지금 잘 나가는 사람은 과거에 공덕을 쌓아 놓았기 때문에 그 힘으로 잘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부지런히 공덕을 쌓아 놓으면 미래가 좋다는 것을 말한다.
공덕 중에서도 최상의 공덕이 보살행이라 한다. 그런데 부처님처럼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부처가 되기로 서원한 후에 무려 4아승지 겁 하고도 10만 겁 동안 보살행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의 몸을 던져 가면서 보살행을 한 것이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기차길에서 사람을 구하고 죽은 사람도 보살행을 한 것이라 볼 수 있고, 광주민주화 운동에서 불교학생회장을 하다 총탄에 죽은 ‘김동수 열사’ 역시 보살행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김동수열사에 대하여 불교계에서는 김동수보살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고 있다.
이렇게 부처님은 보살행을 하기로 서원하여 수 많은 생을 살면서 축생 등을 마다 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투신하였다. 그래서 2600년 부처가 되어 정법의 시대를 이루었다. 그래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정법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우리는 왜 부처님에게 오체투지 하는가
이렇게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에서는 부처님 가르침 대로 따라 가면 된다. 그런데 더 큰 서원을 세우는 이들이 있다. 부처가 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4아승지 겁이라는 한량 없는 기간동안 온몸을 바쳐 보살행을 실천 하려 한다.
더구나 아라한이 되기를 포기 하면서 까지 동물로 태어나는 것을 감수 하면서 보살행을 하려 하는 것이다. 이런 숭고한 정신이 있다면 언젠가 정법이 소멸 하였을 때 부처가 되어 수 많은 존재들이 혜택을 입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법이라는 것이 영원히 존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의 이법으로서 사성제, 팔정도, 연기법 등과 같은 정법은 항상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 변질 되면 결국 사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정법이 없는 상태로 오랜 세월 지속 되다가 마침내 부처가 출현한다. 그래서 다시 정법시대가 되어 생사 없는 열반을 성취하여 구원 받게 된다. 이러기를 반복 하는데 초기경에 따르면 과거에 25불이 있었다고 한다. 정법시대에 이런 이유로 불자들은 부처님에게 오체투지 또는 전체투지 한다고 볼 수 있다.
정법시대가 되었을 때의 감동
이렇게 부처가 되기로 발원하여 부처가 된자는 25불로서 매우 희유한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가 되기를 발원하였다는 마치 깜깜한 밤에 등불 같은 것이다. 정법이라는 것이 순간적으로 번쩍이는 순간에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사실 자체는 커다란 사건이다. 그래서 초전법륜경에서 꼰단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법의 눈이 열렸을 때 감동을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세존의 말씀에 환희하고 기뻐했다.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세존께서 이와 같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에 땅위의 신들은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도…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
축복 받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
창조하고 기뻐하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
다른 신들이 만든 것을 누리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
하느님의 세계의 신들도…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 (S56.11)
2014-01-10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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