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는 마음의 고향
매일매일 가르침을 접하면서
매일매일 가르침을 접하고 있다. 비록 책을 통하여 접하고 있지만 이렇게 매일 접할 수 있는 힘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만일 소설이나 컬럼, 에세이라면 매일 접할 이유가 없다. 한번 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와 같은 경전의 문구는 언제 보아도 새롭다. 아무때나 아무곳이나 열어 보아도 공감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를 보면 해법이 들어 있다. 지금 여기에서 고민하고 있었던 내용이 신기 하게도 아무곳이나 열어도 답이 있는 것이다. 그런 답은 항상 현실의 삶과 거꾸로이다. 현실의 삶이라는 것이 많이 소유하고 축적하여 미래를 걱정없이 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에 담겨져 있는 가르침은 이와 정반대이다. ‘욕심내지 마라’ ‘성내지 마라’ 등의 이야기로 되어 있어서 자꾸 비워 낼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세상의 흐름과 거꾸로 갈 것을 말하기 때문에 끌리는 것이다.
정법이 사라졌을 때
법구경이나 숫따니빠따를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래서 일부 ‘수호경’은 외우기도 한다. 한번 외워 놓으면 도망가지 않는다. 아무리 힘들게 모아 놓은 재산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지고 만다. 사랑을 맹세한 연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심한다. 그러나 한번 외워 놓은 것은 절대 도망가지 않는다. 그래서 평생친구와 같다. 그리고 든든한 동반자와 같다. 그래서 경전을 매일 접한다.
그런데 이런 경전의 가르침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라 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2500년전에 부처님이 출현하여 위없는 가르침을 펼치셨지만 앞으로 수천년, 수만년이 흐른 후에 남아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가르침을 지켜 내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있겠지만 가르침이 점차 변질되어 원형을 잃어 버렸을 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텅비게 된 것과 같고 암흑의 시대가 될 것이다.
정법이 사라진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깜깜한 어둠과도 같을 것이다. 그것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같은 것이다. 비행기를 타면 밤중에 보는 하늘을 볼 때가 있다. 그런데 밖은 매우 어둡다. 이는 단순한 어둠을 뜻하는 ‘black’ 이 아니다. 한자어 검을 玄(현) 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광막한 어둠’이다. 그래서 영어로 ‘vast blackness’이라 한다. 이렇게 정법이 사라져 버렸을 때 그 끝을 알 수 없는 광막한 어둠과 같은 것이라 본다.
오랜 세월 한량없는 세월 동안 광막한 암흑시대가 계속 되다가 언젠가 빛이 보이기 시작 할 지 모른다. 부처가 출현한 것이다. 다시 부처가 출현하여 정법을 펼치는 것이다. 이미 원리로서 정해져 있는 법을 누군가 발견하는 것이다. 이 발견자를 ‘부처’라 한다. 그래서 붓다왐사에서는 과거 25불이 소개 되어 있다. 그 이전에도 부처가 출현하였겠지만 기록 되어 있는 숫자는 25명이다. 그런데 디가니까야에서는 과거칠불이라 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 되어 있다.
과거칠불 이야기
디가니까야에 ‘비유의 큰 경(Mahāpadānasutta, D14)’이 있다. 이 경에 과거칠불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과거에 출현하였던 일곱분의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하여 차례로 과거로 소급하여 일곱분의 행적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Ito so bhikkhave ekanavutokappo yaṃ vipassī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loke udapādi.
[세존]
“수행승들이여, 지금으로부터 구십일 겁 전에 세상에 존귀하신님, 거룩한 님, 올바로 깨달은 님이신 비빳씬이 이 세상에 출현했다.
(Mahāpadānasutta-비유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4,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위빠시(Vipassī) 붓다가 출현한 것은 91겁전이라 한다. 이어서 경에서는 31겁전에 시키(Sikhī)붓다, 역시 31겁전에 웻사부(Vessabhū)붓다, 현겁에 까꾸산다(Kakusandha)붓다, 또 현겹에 꼬나가마나(Koṇāgamana)붓다, 또 현겁에 깟사빠(Kassapa)붓다, 또 현겁에 고따마(Gotama)붓다가 출현하였음을 밝혀 놓았다.
과거칠불의 행적을 보면
그런데 경에서는 이들 부처님의 출신성분과 성씨, 수명, 상수제자 등을 밝혀 놓았고 심지어 깨달음을 이룬 나무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명기 하여 놓았다. 이에 대한 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과거칠불 |
출현시기 |
출신 |
성씨 |
수명 |
위빠시 (Vipassī) |
91겁전 |
왕족 |
꼰당냐 |
팔만 세 |
시키 (Sikhī) |
31겁전 |
왕족 |
꼰당냐 |
칠만 세 |
웻사부 (Vessabhū) |
31겁전 |
왕족 |
꼰당냐 |
육만 세 |
까꾸산다 (Kakusandha) |
현겁 |
바라문 |
깟사빠 |
사만 세 |
꼬나가마나 (Koṇāgamana) |
현겁 |
바라문 |
깟사빠 |
삼만 세 |
깟사빠 (Kassapa) |
현겁 |
바라문 |
깟사빠 |
이만 세 |
고따마 (Gotama) |
현겁 |
왕족 |
고따마 |
백 세 안팍 |
표를 보면 출신, 성씨, 수명이 구체적으로 기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경전에 묘사된 칠불에 대한 것을 더 보면 다음과 같다.
과거칠불 |
보리수 |
상수제자 |
시자 |
위빠시 (Vipassī) |
빠딸리 pāṭali |
칸다와 띳사 khaṇḍatissa |
아소까 asoka |
시키 (Sikhī) |
뿐다리까 puṇḍarīka |
아비부와 삼바와 abhibhūsambhava |
케망까라 khemaṅkara |
웻사부 (Vessabhū) |
살라 sāla |
소나와 웃따라 soṇuttara |
우빠산따 upasanta |
까꾸산다 (Kakusandha) |
시리사 sirīsa |
비두라와 산지와 vidhurasañjīva |
붓디자 buddhija |
꼬나가마나 (Koṇāgamana) |
우둠바라 udumbara |
바이요사와 웃따라 bhiyyosuttara |
솟티자 sotthija |
깟사빠 (Kassapa) |
니그로다 nigrodha |
띳사와 바라드와자 tissabhāradvāja |
샅바밋따 sabbamitta |
고따마 (Gotama) |
앗삿타 assattha |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sāriputtamoggallāna |
아난다 ānanda |
과거칠불은 공통적으로 ‘깨달음의 나무’라 불리우는 ‘보리수’아래서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런데 보리수 이름이 각기 다르다. 또 과거칠불은 공통적으로 두 명의 상수제자를 두었는데 이름이 모두 명기 되어 있다. 그리고 비서실장과도 같은 시자를 두었는데 시자이름이 구체적으로 명기 되어 있다. 이밖에도 과거칠불의 보모 이름도 보이고 왕도명도 보인다. 이렇게 매우 구체적으로 과거칠불의 행적이 묘사 되어 있다.
과거칠불은 왜 공통점이 많을까?
그런데 의문이 든다. “왜 과거칠불은 모두 공통점이 많을까?”에 대한 것이다. 더구나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과거불의 행적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적과 동일하다. 과연 이를 믿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제자들에게도 든 것 같다. 그래서 경에서는 ‘수행승들의 의문’이라 하여 별도의 문단이 있다. 거기에서 제자들은 부처님에게 “그들의 태생도 기억하고 이름도 기억하고 성도 기억하고… 제자들의 모임도 기억하는 것입니까?(D14)”라고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고 하였다. 이는 부처님의 특별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라 본다.
부처님은 오신통을 넘어 육신통을 갖추었고 전생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전한다. 이는 초기경에서 “한생 전, 두생 전,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우주 수축의 여러 겁, 우주팽창의 여러 겁, 우주수축과 팽창의 여러 겁 전까지.”와 같은 정형구로 나타난다. 이는 일체지자로 부처님은 과거 전생을 모두 꽤뚫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들은 전생의 삶에 대한 법담을 더 듣고 싶은가?(D14)”라고 말씀 하시면서 칠불의 구체적인 행적에 대하여 말씀 하신다.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행적과 동일 한 것이다.
과거불은 왜 하나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 행적과 같을까?
그렇다면 또 의문이 든다. “왜 과거불은 하나 같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행적과 같은 것일까?”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Atha kho bhikkhave vipassī bodhisatto tusitā kāyā cavitvā sato sampajāno mātukucchiṃ okkami. Ayamettha dhammatā.
수행승들이여, 보살이었을 때 비빳씬은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에서 사라져서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며 어머니의 모태에 들었다. 이것은 이 경우의 원리인 것이다.
(Mahāpadānasutta-비유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4, 전재성님역)
과거불이 한결 같이 동일한 행적을 보이는 것에 대하여 ‘원리(dhammatā)’ 라 하였다. 그래서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Dhammatā esā bhikkhave, D14)” 라고 하여 이야기가 진행된다. 과거칠불의 행적이 동일한 것은 하나의 원리라는 것이다. 그런 원리는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와 같이 확정된 원리로서 대표적인 것이 ‘연기법’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Katamo ca bhikkhave, paṭiccasamuppādo? 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ṇaṃ uppādā vā tathāgatānaṃ anuppādā vā tathāgatānaṃ ṭ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accay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라고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세계는 원리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원리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빳짜야경-Paccayasutta-조건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20,전재성님역)
이렇게 부처가 출현하지 않든 출현하든 이미 ‘원리로서 확정되어 있는 법’이 연기법이다. 그 연기법을 발견한 자들이 과거 부처님들이다. 그래서 그 어느 부처님이 출현하여도 항상 똑 같은 법을 설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연기법이고 곧 사성제, 팔정도 등의 가르침이다.
과거부처님들의 행적을 보면 역시 동일하다. 이는 원리로서 확정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부처님들이 출현하여 이미 확정 되어 있는 원리를 발견한 것이 ‘정법’이다. 그리고 정법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시대를 ‘정법시대’라 한다.
왜 여러 부처님이 출현하였을까?
그런데 또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부처님이 여러 분 출현하였을까?”에 대한 것이다. 만일 과거칠불 중에 가장 먼저 거론 된 61겁 전의 위빠시붓다의 정법이 살아 있다면 굳이 다음 부처가 출현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붓다가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위빠시붓다는 61겁전에 출현하였다. 그런데 30겁이나 지난 후인 31겁전에 시키붓다가 출현하였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정법이 사라졌음을 뜻한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정법이 사라져 정법시대가 끝났기 때문에 한량 없는 세월이 지난후에 다시 부처가 출현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비록 부처가 출현하더라도 정법이 오래 가지 않음을 말한다. 더구나 현겁에서는 까꾸산다, 꼬나가마나, 깟사빠, 고따마붓다가 연이어 출현하였다. 이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우리는 ‘행운의 겁’시대에 살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출현할 멧떼이야(Metteyya,미륵)붓다 까지 합하면 현겁에 무려 다섯 분의 부처가 출현하는 것이 된다. .
그런데 현겁에 이렇게 많은 부처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정법이 끊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지만 정법이 존속되지 않고 완전히 잊혀졌기 때문에 부처가 출현한 것이다. 정법이 살아 있는 시대에는 또 다른 부처가 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법시대란?
우리는 현재 정법시대에 살고 있다. 부처님이 출현하여 원리로서 확정 되어 있는 법을 펼치신 법이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정법시대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특징으로 한다고 한다.
첫째,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빠알리 삼장)이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둘째,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수행을 할 수 있는 팔정도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셋째, 깨달음을 통하여 열반을 성취한 성자가 있으면 정법시대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하면 일반적으로 정법시대라 본다. 빠알리 삼장, 팔정도, 사쌍팔배의 성자 이렇게 세가지가 갖추어져 있을 때 가르침이 살아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 세가지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인도에서 왜 불교가 사라졌나?
기원을 전후하여 인도에서 대승운동이 일어났다. 기존 부파불교의 폐해를 비판하며 재가불교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보살로서의 삶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대승보살사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별도의 대승경전을 편찬하였고, 실천수행방법으로서 육바라밀수행을 택하였다. 그리고 보살도를 이루기 위하여 윤회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이처럼 윤회하며 보살행을 하는 자에 대하여 보디삿트바(보살)이라 한다. 이는 깨달은 중생을 말하며 한자어로 유정각이라 한다. 유정각은 성자가 아니다. 성자가 되면 윤회가 끝나버리기 때문에 중생으로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디삿트바는 중생이다. 따라서 깨달은 중생인 유정각은 부처를 이룰 때 까지 사아승지 하고도 십만겁 동안 공덕을 닦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세생생 윤회하며 중생의 삶을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기를 거부하고 깨달은 중생, 즉 보살의 삶을 살기로 서원한 것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운동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다. 끊임 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마하야나가 주류로 되었을 때 결국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는 요인이 되었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하여 힌두이즘으로 사라졌다고 하였다. 왜 사라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빠알리삼장, 팔정도, 성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브라만교에서 환골탈태한 힌두교가 차지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정법이 사라진 인도에서는 마치 부처가 출현 하기 이전 브라만시대로 되돌아 간 듯한 것이다. 이렇게 정법이 사라진 것은 암흑시대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정법은 사라지지 않았다. 스리랑카로 전승된 정법이 명맥을 유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의 불교말살 정책
초기불교를 접하면서 스리랑카를 알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마성스님의 논문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마성스님이 1998년에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스리랑카의 불교 법난사’라는 논문이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막 관심을 가질 때 본 것이다. 그래서 팔리문헌연구소사이트에 실려 있는 글을 퍼다가 블로그에 올려 놓았다.
2007년에 ‘스리랑카의 불교 법난사’라는 제목으로 그대로 올려 놓았다. 이 논문을 읽고서 비로소 정법을 지켜 내기 위한 피눈물 나는 여정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서세동점시절 포루투갈, 네덜란드, 영국으로 이어지는 사백년 가량 되는 식민지 시절에도 정법을 지켜 내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감동받았다. 이중 영국인의 불교말살정책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영국인의 불교말살 정책
영국인들이 세일론의 불교를 탄압했던 방법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불교를 박해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영국인들은 겉으로는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펼치는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매우 지능적이고 치밀하게 불교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영국은 1차적으로 싱할라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다음으로 세일론에서 불교를 완전히 절멸시킬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영국인들이 불교를 말살하고자 했던 목적은 종교적으로 세일론을 기독교화 하는데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식민지 통치를 유지하는데 불교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영국인들은 불교를 말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했다. 그 첫째가 불교도 내부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스님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둘째는 기독교 선교 활동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세일론을 기독교화 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교육을 통해 불교는 저속한 종교라고 비하시키고, 기독교는 문명화 된 종교라고 세뇌시킴으로써 개종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즉 교육의 기독교화 정책을 실시했던 것이다. 넷째는 제도적으로 불교도들에게 불이익을 줌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기독교도에 대한 우대 정책을 실시했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정책과 음모를 통해 불교를 말살하고자 시도되었다.
(마성스님, 스리랑카의 불교 법난사)
논문에 본 영국인들의 불교말살 정책을 보면 과거 일제를 떠올리게 한다. 문화정책이라는 유화책으로 결국은 창씨개명 등으로 동화정책을 펴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그럼에도 불교가 말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거꾸로 불교가 널리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인에 의하여 빠알리 원전이 로마나이즈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법을 지켜낸 스리랑카에 대하여 테라와다불교의 종주국, 또는 종갓집이라 한다.
“싱할리어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정법을 지키기 위한 스리랑카 비구들의 피눈물나는 이야기를 또 보았다. 그것은 대림스님이 번역한 청정도론 해제에서 본 것이다. 해제글에서 대림스님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그들은 소승이라든지 은둔불교라든지 아공법유라든지 부처님 가르침을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든지 하는 그들을 향한 어떠한 비난이나 도전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부처님이 직접 설하신 법을 올바르게 이해(빠리얏띠)하고 그것을자신에게 적용시켜 잘못된 견해를 극복하고 바른 도를 실천하여(빠때빳띠) 괴로움에서 벗어나(빠띠웨다) 부처님이 보이신 해탈열반을 직접 실현하는 것이었으며 이런 출가 생활이 이웃이나 불교도 들에게 가장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세상의 위없는 복전(福田, punnakkhetta)이 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기 때문이다.
(대림스님, 청정도론 해제)
스리랑카에 전승된 정법이 살아 남은 이유는 비구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오로지 지켜 내고 이를 실천하는 것에 ‘올인’하였음을 말한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대륙의 사상이나 학파 등에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택한 것이 있었다. 대림스님의 글에 따르면 “대사의 교리적 체계를 담고 있는 주석서들은 모두 싱할리어에 갇혀있었기 때문에”라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힌두교나 마하야나 등 변화무쌍한 대륙의 사조에 물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싱할리어로 가두어 두면 변형되지 않은채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BC3세기 마힌다 장로의 불교전승이래 붓다고사가 활동하는 5세기에 이르기 까지 빠알리삼장은 원본훼손 없이 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혹독한 기근으로 인하여
이렇게 빠알리삼장은 상할리어로 가두어 전승되어 왔다. 그런데 싱할리로 가두게 된 원인은 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대륙의 새로운 사조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그 때 당시 스리랑카의 극심한 기근으로 인하여 싱할리어로 기록 될 수밖에 없었음을 말한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84년에서 94년 사이이다. 4차 결집이 마무리 되고 난후 12년간 대기근이 들었는데 이때 불법의 미래를 걱정하여 체계적으로 문서화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기근이 어느 정도이었을까? 이에 대하여 일아스님의 책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이때 까지 기근이 계속되어 너무 극심한 기근으로 사람들은 [아사한] 인간의 고기를 먹었다. 연로한 장로는 굶주림으로 정신이 뒤집힌 그런 사람들의 먹이가 되었다.
(삼모하위노다니-논장 위방가의 주석서, 일아스님의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 경전’)
이렇게 혹독한 기근으로 인하여 불교의 지도자들은 불교의 미래가 위험에 빠졌음을 보았다. 이제까지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던 빠알리삼장에 대한 전승이 위기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500명의 장로 비구들이 지방장관의 후원아래 ‘알루위하라(Alu-vihara)’승원에 모여 삼장과 주석서를 싱할리어로 옮긴 것이다. 이렇게 싱할리어로 가두어 두었기 때문에 변화무쌍한 대륙의 사조에 물들지 않고 정법이 지켜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스리랑카 노동자를 만난적이 있는데
종종 스리랑카사람들을 본다. 글로벌시대에 스리랑카사람들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사는 안산시와 연결 되어 있는 전철4호선에서 많이 본다. 우리나라로 돈을 벌기 위하여 온 노동자들이다. 언젠가 가무잡잡한 피부를 특징으로 하는 스리랑카인과 대화를 한적이 있다. 청년이 행선지를 물어 보기에 대답을 해 주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에 대하여 묻자 스리랑카라 하였다. 초기불교에 대하여 막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반가워서 불교도임을 밝히고 짧은 영어로 몇 마디 나누었다.
이렇게 한국에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많다. 대부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인데 대부분 불교국가에서 노동자들로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끼리 공동체를 이루어 살기도 한다. 특히 불교공동체의 경우 ‘연등축제’에서도 볼 수 있다.
국제화된 연등축제 행렬에서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네팔, 몽골 등 불자공동체가 참여한다. 주로 노동자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날 만큼은 기를 펴고 사는 것 같다. 그래서 대로를 행보하는 행렬을 보면 한껏 고무 되어 있고 행복해 보인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이 ‘스리랑카불자공동체’이었다. 윗몸을 벗은 채 열정적인 몸동작으로 독특한 춤을 추는 무용단을 보면 마치 국제페스티벌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스리랑카 불자공동체(2008년 연등축제)
스리랑카 사람들을 보면 반갑다. 더 이상 가무잡잡한 피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전에는 피부에 대한 편견이 있었으나 스리랑카의 법난사에 대하여 알게 되고 정법을 지켜 내기 위한 눈물겨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피부에 대한 편견은 없어졌다. 오히려 우리나라 민족 보다 더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이천년 이상 정법을 지켜 낸 것에 대한 ‘경의’이다. 그래서 스리랑카는 마치 마음의 고향과도 같이 생각된다.
무엇이든지 스리랑카에 대한 것이라면 관심을 가지고 된다. 특히 EBS 다큐인 ‘세계테마여행’에서 스리랑카에 대한 것을 방송하면 매우 유심히 지켜 본다. 비록 스리랑카에 가 보지 못하였지만 책이나 TV프로 등을 통하여 많이 접하였다. 그래서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순례해야 할 코스라 생각한다.
스리랑카를 짝사랑하다 보니
이렇게 스리랑카를 짝사랑하다 보니 스리랑카와 관련된 많은 글을 쓰게 되었다. 또 스리랑카를 동경하다 보니 스리랑카의 유적과 불자들의 생활, 자연환경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 동안 수 많은 순례기를 접하면서 폴론나루와, 시기리야 등 지명이 익숙하게 되었다. 특히 스리랑카를 여행하여 사진으로 기록을 남긴 ‘악까까소(akkakaso)’빅쿠의 사이트를 접하게 되었는데 많은 사진을 확보 하였다. 2006년 스리랑카 웨삭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진을 바탕으로 하여 ‘음악동영상’을 만들었다. 그것은 ‘라따나경(보배경, Sn2.1)’이다. 음성은 Imee Ooi의 라따나경 음악을 배경으로 하고, 영상은 스리랑카의 유적과 불자와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스리랑카를 배경으로 한 라따나경
스리랑카는 마음의 고향
스리랑카는 마음의 고향이다. 정법을 지켜내어 오늘날 까지 정법시대가 이어지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 정법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과거칠불이야기에서 본 것과 같이 부처님이 출현한다는 사실 자체가 정법이 오래 지속 되지 않음을 말한다. 그럼에도 정법을 오래 동안 지속 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정법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그런 정법은 ‘보배’와 같다. 이 세상 어느 것과 견줄 수 없는 보배인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대표적 수호경인 라따나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ṃ kiñci vittaṃ idha vā huraṃ vā 양낀찌 윗땅 이다 와- 후랑 와-
Saggesu vā yaṃ ratanaṃ paṇītaṃ, 삭게수 와- 양 라따낭 빠니-땅
Na no samaṃ atthi tathāgatena 나 노 사망 앗티 따타-가떼나
Idampi buddhe ratanaṃ paṇītaṃ 이담삐 붓데 라따낭 빠니-땅
Etena saccena suvatthi hotu. 에떼나 삿쩨나 수왓티 호뚜
이 세상과 내세의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
여래에 견줄 만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 안에야말로 이 훌륭한 보배가 있으니,
이러한 진실로 인해서 모두 행복하여지이다. (stn224)
2014-01-12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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