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청정한 자의 견해가 진리이다, 논쟁의 최전선에서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16. 12:30

청정한 자의 견해가 진리이다, 논쟁의 최전선에서

 

 

 

글을 쓰다 보면 본의 아니게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그럴 경우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일 아니면 가급적 실명을 거론 하지 않으려 한다. 영문 이니셜 등으로 처리 하여 보호 한다. 또 하나 글을 쓰면서 당혹스러운 것이 있다. 그것은 일부에 대하여 전체인 것처럼 오해 할 때이다. 그럴 경우 “”~수 있다거나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등의 표현을 한다. 일종의 빠져 나갈 구멍이다. 이 모두가 글을 쓰면서 한번쯤 지적 당하였기 때문이다.

 

보통불자로서 글을 써 온지 구 년 째 되었다. 그러다 보니 글을 꾸준히 보고 있는 법우님들이 많다. 그것도 일이년이 아니다. 이렇게 수 년 동안 지켜 보아 왔기에 대충 성향을 파악하였을 것이라 본다. 비록 이름이나 얼굴 심지어 이메일 등 신상에 대하여 일체 공개하지 않지만 대충 어떠한 사람일 것이라고 대충 짐작할 것이라 여겨진다. 왜냐 하면 글은 그 사람의 얼굴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조각상처럼 잘 생긴 장동건을 연상시킨다면 낭패를 보기 쉽다. 차라리 이상하고 괴상하게 생긴 이외수를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을 듯 하다.

 

 

 

 

 

점네개님의 첫 번째 글

 

글을 쓰다 보니 오해도 많이 받는다. 주로 최근에 방문한 사람들로 부터이다. 일부 글을 보고 마치 전체인 것처럼 오해 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오해를 받을 만한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겸허하게 수용한다 

 

악의적인 비방이 아닌 글은 절대로 삭제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서 점잖게 비판을 가하였을 때 이를 유심히 지켜 본다. 그런데 최근 방문한 법우님으로 부터 점잖게 충고 하는 글 몇 편을 접하였다. 그런 글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연꽃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흉내만 내는 사람입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가르침을 골수에 새겨 언제 어디서나 가를침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고
흉내만 낸다면 자가당착에 빠진겁니다.

미친 놈들 끌어 모으지 마세요

 

(.... , http://blog.daum.net/bolee591/16155789, 2014-01-02)

 

 

이런 글을 받았을 때 매우 당혹스러웠다. 불교에 대한 글을 쓰는 불자로서 당연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는데, 흉내만 내는 사람이 아니냐고 하였을 때 당황스러웠다. 법으님은 왜 이런 문제를 제기 하였을까?

 

본문 글을 보니 가지 마음의 해탈,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과  의미는 같은데 표현만 다른 이라는 제목이다.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나산띠경(S1.34)에 대하여 번역비교한 글이다. 올린 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단지 경전에 근거한 글쓰기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흉내만 낸다면 자가당착에 빠진겁니다.”라고 하였다.

 

자가당착이라는 말은?

 

자가당착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구체적으로 뜻을 잘 모른다. 그래서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자가당착 [自家撞着]

한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않고 모순이 됨

 

 

국어사전을 보니 모순된 말을 하는 것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언행일치가 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점네개(.....)’ 법우님은 왜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하였을까? 이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미친 놈들 끌어 모으지 마세요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오해인 것 같다. 한번도 끌어 모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블로그라는 것이 있어서 글을 쓴 것 뿐이고, 블로그의 특성상 방문하는 사람들이 글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블로그에 글을 쓰고 글을 남겨 놓은 행위는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따라서 어떤 목적을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체 정보도 알리지 않고 광고도 싣지 않는다. 또 오프라인 모임도 거부한다. 그럼에도 미친 놈들 끌어 모으지 마세요”라는 글을 보았을 때 이는 미리 짐작 하여 판단한 오해로 본다. 

 

차단을 뚫고 또 들어 오는

 

언젠가 어느 법우님이 있었는데 사사건건 의견을 달리 한 적이 있었다.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도배하다시피 하였다. 같은 내용을 카피 하여 갖다 붙이는 식이다. 이런 경우 하나만 남겨 두고 삭제를 한다. 그런데 점점 도가 심하였다. 그래서 차단시켰다. 그런데 차단을 뚫고 또 들어 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차단 하였건만 또 들어 오는 것이다. 더 확실하게 차단하는 방법은 관리자 모드에서 블로그와 IP주소를 모두 차단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자 이번에는 다른 IP로 들어 왔다. 이런 일을 몇 번 당하디 보니 댓글을 폐쇄 하는 것까지 고려 하였다. 

 

그러나 현재 블로그 시스템상 댓글을 폐쇄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글이 올려져 있으면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밝힐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악의적인 신상에 대한 비방이나 광고는 삭제의 대상이 된다. 그 외 어떤 글도 삭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글은 그 사람의 얼굴이고 인격이기 때문에 글을 보는 사람들이 판단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각적으로 답변하지 않는다

 

글을 올리고 나면 댓글을 유심히 살펴 본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답변하지 않는다. 첫번째 이유는 답글을 달 여유가 없고 두번째 이유는 깊이 있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메모해 두었다가 나중에 본문에서 다룬다. 그래서 댓글은  단지 보고 마는 것으로 지나치는데 이점에 있어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글을 써 본 사람이 안다고 한번 글씨기가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 먹고 글을 쓴다고 하였을 때 이리 저리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그래서 글을 올려 주신 분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글을 썼다는 자체가 자신의 시간을 일부로 할애 하여 정성을 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방문하는 모든 님들에게 정성껏 답글을 달아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하여 다시 한번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 대신 칭찬과 격려의 글 대신 비판의 글이나 질문에 대해서는 시간적 여유를 두고 본문글로 답한다. 이번에 올린 점네개님의 글도 그런 케이스에 속한다.

 

점네개님의 두 번째 글

 

점네개님은 위에 올린 글을 필두로 세 개 더 올려 주셨다. 점네개님의 두 번째 글은 다음과 같다.

 

 

연꽃님 경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됐네요.

"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
이 말씀은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 복덕도 쌓지않고 탐진치에 이끌려 행위 하였을 때 이고,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
이 말씀은 청정한 삶을 살고 복덕을 쌓아지만 나도 모르게 잘못을 했을때 인 경우를 말씀 하신 겁니다.

 

(... , http://blog.daum.net/bolee591/16155793, 2014-01-06)

 

 

점네개님이 주신 글이다. 그런데 필명이 점네게에서 점세개로 바뀌었다. 그러나 논조가 같고 더구나 IP주소가 같기 때문에 점네게님이라 본다.

 

기본적으로 동의하지만

 

점네게님은 경에 대한 이해가 잘못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올린 글“운명은 바꿀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설을 다시 보았다. ‘소금덩어리 경(A3.99)’에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업설을 설명한 것이다. 고대인도의 전통적인 업설과 부처님아 말씀 하신 업설을 대비하여 설명 하였는데, 이는 각주에 쓰여 있는 내용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벌레 밟아 죽인 이야기를 곁들였다.

 

그런데 점네개 님은 사람은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어떠한 업을 짓던지,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는 전통적인 업설에 대하여 복덕을 짓지 않아 탐진치에 따른 견해라 하였다.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라는 부처님의 업설에 대하여 청정한 삶을 살고 복덕을 쌓아지만 나도 모르게 잘못을 했을때 인 경우라 하였다.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업설에 대하여 나도 모르게 잘못을 했을 때 해당되는 것이라는 견해에 대하여 동의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업설은 의도가 개입된 것만 해당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겪어야 하는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업을 지으면, 그러한 이러이러한 것에 따라 과보를 받는다.”에 대하여 나도 모르게 잘못을 했을때 인 경우를 말씀이라고 한 것은, 업이 행위나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말로 오해 하기 쉽기 때문이다. 아마도 올린 글을 끝까지 읽어 보지 않고 내린 결론이라 보여진다.

 

점네개님의 세 번째 글

 

점네개님이 세 번째 올려 주신 글은 매우 격앙되어 있는 듯 하다. 갑자기 나타난듯이 보이는 분이 올려 주신 글은 다음과 같다.

 

 

이 사람들아 , 너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냐, 연꽃을 따르는 사람이냐
정신들 챙겨라

세상에 대하여 대처할 자세를 말씀하신 `톱에 대한 비유의 경`을 새기도록

 

 

(...., http://blog.daum.net/bolee591/16155797, 2014-01-08)

 

 

불로그가 개설 된지 햇수로 10년 되었다. 2005년에 개설 되었으니 만으로는 9년 이다. 블로그가 개설 되고 2006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 하였으니 만으로 8년이다. 그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였고 수 많은 사람들이 글을 남겼다. 그중에 일부 법우님들은 일이년이 아니라 수년동안 글을 남겼다.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격려도 해 주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도 해 주었다. 이렇게 관심 있게 지켜 보아 주신 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 드린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은 누구 보라고 쓰는 것이 아니다. 보통불자의 일상적인 글쓰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공감하는 글, 무어라도 하나 건질 수 있는 글을 쓰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누가 보거나 말거나 글을 쓴다. 누가 뭐하 하든 말든 오늘도 내일도 쓸 뿐이다. 쓰는 글이 학자의 논문도 아니고, 스님의 법문도 아니기 때문에 자유롭게 글을 쓴다. 그래서 미천한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B’ ‘삼류글쓰기라고 스스로 천명한 바 있다.

 

댓글을 보면 점네개님은 상당히 격앙되어 있는 것 같다. 단도직입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냐, 연꽃을 따르는 사람이냐라고 일갈 하였기 때문이다. 올린 글을 보니 “그대들의 참회를 받아 들이네” 진정으로 뉘우칠 이다. 상윳따니까야 번역비교를 한 글이다. 순서대로 올린 글에 지나지 않음에도 대단히 격앙 되어 있는 것은 아마도 글의 제목만을 보고서 판단한 듯 보인다. 진정한 참회에 대하여 경전의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한 것일 뿐인데 이곳을 방문한 모든 님들에게 누가 되는 것 같아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톱에 대한 비유의 경을 찾아 보니

 

점네게님은 톱에 대한 비유의 경을 소개 하였다. 이 경을 읽고서 세상에 대하여 대처하는 자세를 가질 것을 충고하였다. 그렇다면 톱에 대한 비유의 경은 어떤 가르침일까? 찾아 보니 맛지마니까야에 실려 있는 ‘Kakacūpamasutta(M21)’이다. 수 많은 비유가 실려 있는 경으로서 이미 읽어 본 경이다. 경의 제목이 암시 하듯이 경의 말미에 톱에 대한 비유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양쪽으로 날이 선 톱으로 도둑이나 강도가 사지를 조각조각 절단하더라도, 그때에 만약 그 정신을 타락시킨다면, 그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여기서도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배워야 한다. ‘나의 마음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고, 추악한 말을 뱉지 않을 것이고,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분노하지 않고 이 사람의 이익을 위해 불쌍히 여길 것이다. 그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이 사람을 채우리라. 이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세상을 광대하고 멀리 미치고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자애로운 마음으로 채우리라.’라고 이와 같이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배워야 한다.

 

(Kakacūpamasutta- 톱에 대한 비유의 경, 맛지마니까야 M21,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잘 표현 되어 있다.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사지가 절단 내는 상대방에게라도 화를 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는 다름 아닌 자애의 실천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 본 사지절단 이야기

 

사지절단 이야기는 금강경에서도 보인다. 가리왕이 사지를 절단 내었을 때도 인욕하였다는 인욕바라밀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청정도론에 따르면 자애수행하는데 있어서 이 문구와 유사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27.

예를 들면, 「실라와 자따까」에서 실라와 왕이 자신의 왕비에게 간통을 한 나쁜 대신이 적의 왕을 불러들여 3백 유순이나 되는 왕국을 점령할 때 그것을 방어하기 위해 출동한 대신들에게 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공동묘지에 땅을 파고 천명의 대신들과 함께 목까지 묻혔을 때 마음으로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시체를 뜯어먹기 위해 재칼들이 와서 땅을 파헤쳐 주어서 영웅적인 힘을 발휘하여 목숨을 구하여 야차의 신통으로 자기의 궁전에 들어갔을 때 자기의 침상에 적의 왕이 잠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고 서로 맹세를 하여 친구로 여기면서 말했다.

 

“남자는 포부를 가져야 하고

현자는 싫증내지 않아야 한다.

나는 내가 원하던 대로 되었음을 보노라.

 

 

28.

「칸띠와디 자따까」에서는 우치한 까시 왕이 ‘사문이여, 당신은 어떤 교리를 설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인욕을 설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왕이 가시 박힌 매로 채찍질하게 하고 손발을 자를 때에도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29.

이미 성년이 되어 출가한 자가 이와 같이 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쭐라담마빨라 자따까」에서는 아직 자리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할 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전단향으로 목욕한

왕국의 계승자 담마빨라

그의 팔이 잘립니다.

왕이시여, 제 숨이 넘어갑니다.

 

라고 그의 어머니가 탄식하는 와중에도 왕이었던 그의 부친 마하빠따빠는 마치 죽순을 자르듯이 그의 손발을 자르게 했지만 그는 조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했을 때 ‘지금이 마음을 잘 제어할 때다. , 담마빨라여. 지금 그대의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한 아버지, 머리를 자르는 사람, 탄식하는 어머니, 그대 자신, 이 네 사람 모두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라고 굳게 결심한 뒤 조금도 화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청정도론, 9장 거룩한 마음가짐, 자애수행, 27~29, 대림스님역)

 

 

청정도론에 여러 가지 사례가 언급되어 있다. 위 언급된 내용은 앞 부분에 있는 세 가지에 대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전생에 보살로서 삶을 살았을 때 인욕’한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 번째 이야기를 보면 머리가 잘려지는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았는데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애수행이라는 것은 결국 성냄을 제거 하는 것을 뜻한다. 탐진치 삼독에 있어서 분노를 제거 하는데 있어서 자애수행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성냄이 소멸 된 자에 남아 있는 것은 자애일 것이다.

 

화를 내는 자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다

 

톱의 비유의 경에서도 부처님은 자애를 강조 하였다. 비록 사지가 절단 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분노의 마음을 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심지어 비구건 비구니건 마음으로 화를 내고 절단하는 것을 참지 못한다면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라 하였다. 톱의 비유의 경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큰 경(M28)’에도 나온다. 사리뿟따존자가 부처님이 말씀 하신 톱의 비유를 예들어 자애의 마음을 낼 것을 설명하고 있다.

 

톱의 비유의 경을 알려 주신 점네개님에게 감사 드린다. 다시 한번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고 본다. 만일 사소한 것이건 중대한 것이건 분노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닐 것이다.

 

점네개님의 네 번째 글

 

점네개님의 네 번째 글이다. 가장 최근에 주신 글이다. 그런데 숫따니빠따의 작은 전열의 경전문을 올려 주셨다. 편의상 올려주신 글만 보면 다음과 같다.

 

 

연꽃님 아전인수에 자가당착에 빠지지 않았나 돌아 보시길,
그리고 실참수행을 하시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 , http://blog.daum.net/bolee591/16155804, 2014-01-13)

 

 

올려 주신 글을 보면 자가당착에 대하여 다시 한번 언급하였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대한 충고라 본다. 또 아전인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혹시 아전인수격으로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성찰해 볼일이다. 그리고 실참수행을 강조하였다. 글만 쓰는 것 보다 수행도 하라는 것으로 받아 들인다.

 

사실 글을 쓰다 보면 자가당착, 아전인수 등과 같은 말을 많이 듣는다. 이는 모든 정보가 오픈 되고 공유 되는 인터넷글쓰기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보인다. 특히 최근 방문한 님들로부터 주로 듣는다. 오랫동안 방문한 님들은 역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덜 하나 방문한지 얼마 되지 않는 님들은 보통불자의 글쓰기에 대하여 불편해서 일 것이다. 그래서 교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수행을 하지 않고 교학만 이야기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너무 교학에 몰두 하지 말고 수행도 겸하라고 점잖게 충고하는 글도 많이 접한다.

 

논쟁의 최전선에서

 

점네개님은 격려의 말씀도 해 주셨다. 너무 교학이나 교리에 몰두 하지 말고 수행도 함께 하여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는 말이다. 이는 자비마음을 내고 사무량심을 닦으라는 것으러 들린다.

 

이렇게 격려의 말과 함께 점네게님은 작은 전열의 경전문을 올려 놓았다. 이 경은 숫따니빠따 제4 12번째에 해당된다. 모두 20개의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도 놓칠 수 없는 금쪽 같은 가르침이다. 그래서 일부만 올려 놓는 다는 것이 무례를 범하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그래서일까 점네게님은 전문을 올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에 확연하게 닿는 게송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질문자]

 “저마다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살며,

논쟁하면서, 달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이렇게 안다면 진리를 아는 것이다.

이것을 비난한다면, 그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여러 방식으로 주장합니다. (stn878)

 

 그들은 이렇듯 다투고 논쟁하며

‘저 사람은 어리석어 현명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들 가운데 누구의 말이 진실한 것입니까?” (stn879)

 

 [세존]

“만약 남의 가르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리석고 야비하며 지혜가 뒤떨어지게 됩니다.

모두 이러한 견해만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어리석고 지혜가 뒤떨어진 것입니다. (stn880)

 

 그러나 만약 자기의 견해로 인해 깨끗해지고,

완전히 청정한 지혜를 가진 자,

현명한 자, 슬기로운 자가 된다면,

그들의 견해는 그처럼 똑같기 때문에,

그들 가운데 결코 지혜가 뒤떨어진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stn881)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는 까닭에,

나는 그것을 두고 ‘이것은 진리이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저마다의 견해를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어리석은 자라고 취급하는 것입니다.” (stn882)

 

(Culaviyuha sutta-작은 전열의 경, 숫따니빠따 Sn4.12, 전재성님역)

 

 

작은 전열의 경은 질문자와 부처님의 대화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경의 제목이 전투적이다. ‘viyuha’라는 말을 전열(戰列)’로 번역하였는데, 이는 전쟁터에서 전선의 배열을 말한다. 논쟁에서 최전선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위의 게송은 경의 첫 부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서로 논쟁하는데 있어서 누구의 말이 진실한 것일까? 그래서 질문자가 누구의 말이 진실한 것입니까?”라고 부처님에게 묻는다. 그러자 부처님은 가장 청정한 자라는 취지로 말씀 하셨다. 탐진치가 소멸 된 청정한 자가 자신의 견해를 말하였을 때 이를 진리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탐진치로 가득찬 자가 아무리 자신의 견해를 진리라고 주장하더라도 진리로 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청정하지 않은 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이야기 한다면 어리석은 자라 하였다.

 

가장 청정한 자의 견해가 진리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청정에 이르는 길이 진리임을 알 수 있다. 욕심 부리고 성내고 시기 하고 질투 하는 등 오염원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아무리 자신의 견해가 진리라고 주장하여도 그것은 결코 진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Eka hi sacca na dutiyamatthi
Yasmi
pajā no vivade pajāna,
Nāna te saccāni saya
thunanti
Tasmā na eka
samaā vadanti

 

[세존]

 “진리는 하나일 뿐, 두 번째 것은 없습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들과 다투는 일이 없습니다.

각기 다른 진리를 찬양하므로

수행자들이 동일한 것을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stn884)

 

 

부처님은 진리는 하나라 하였다. 이는 다름 아닌 청정한 자의 진리를 말한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소멸하여 청정하게 되었을 때 그 상태에서 말하는 자의 말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전투하는 것처럼, 입에 도끼를 물고 논쟁을 펼치는 자들이 청정하지 않다면 진리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 육사외도가 대표적이라 본다.

 

점네게님에게 감사드리며

 

인터넷시대를 맞이하여 보통불자가 넷상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런 글쓰기에 대하여 격려와 칭찬도 받지만 비판과 비난의 글도 받는다. 격려와 칭찬을 받을 때는 고무 된다. 그러나 비판과 비방의 글을 접하였을 때 불편하다. 그러나 글을 쓰는 대가로 당연히 받아야 할 업보라 본다.

 

새상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마치 사람들 생김새가 모두 다르고 성향 또한 다르기 때문에 다영한 견해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칭찬도 있을 수 있고 비난도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넷상에서 글을 쓴다면  비판이나 비난은 당연히 감내 해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서로 배운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글을 쓴다고 하여도 글쓴이의 능력과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는 글을 접하였을 때 고마운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점네게님의 글은 비판적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뒤돌아 보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본다. 글을 주신 점네게님에게 감사드린다.

 

 

 

2014-01-16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