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분노다스리기 아홉단계와 보시공덕의 위력

담마다사 이병욱 2014. 1. 22. 18:28

 

분노다스리기 아홉단계와 보시공덕의 위력

 

 

 

육개월만 같이 살면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났을 때 모두 다 좋은 사람들 같다.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상냥하고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다. 그래서 항상 그런 사람이겠거니 하며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겪어 보아야 한다.

 

여러 모임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법우님들 모임이 즐겁다. 이는 이해관계를 떠난 모임이기 때문이다. 거래 관계가 없는 순수한 모임에서 모두 착하고 건전해 보인다. 그래서 대화를 하다보면 천상이 따로 없는 듯하다. 아마 천상이 있다면 이렇게 배려 해 주고 이해해주는 사람들 뿐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법우님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리 사람 좋다고 해도 육개월만 같이 살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실제로 겪어 보아야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감추어진 성격이나 몰랐던 것들이 드러날 때 다시 보게 됨을 말한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얀마에서 수행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 이야기이다. 머리를 깍고 수행을 하는데 처음에는 모두 다 좋은 사람들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육개월 가량 같이 살다 보니 못볼꼴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경계에 부딪쳐 보아야 진면목이 나올 수 있음을 말한다.

 

EBS‘화풀이

 

요즘 EBS에서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것이 있다. ‘화풀이라는 프로이다. 전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한국인들만이 가지고 있다는 홧병에 대한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있는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EBS

 

 

프로중에 어느 모녀지간의 살벌한 화내는 장면을 보았다. 보기에도 낯뜨거운 비아냥, 냉소, 비난 등이 난무 하는데 부모자식지간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이었다. 싸움은 부부간에나 치열하게 하는 것인줄 알고 있었는데 부모와 자식간의 싸움을 보니 마치 남남처럼 싸운다.

 

화풀이 프로를 보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마구 화를 낸다. 그러면 상대방을 자극하여 상승된다. 이른바 말꼬리 잡고 늘어 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싸움을 보면 항상 파국으로 끝난다. 한편이 일방적으로 문을 닫고 나간다든가 하여 끝나는 것을 말한다. 모녀지간의 화풀이 프로도 그랬다. 그런데 약 2주간에 치료로써 놀라운 현상을 보았다. 불과 2주만에 둘도 없는 모녀사이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출연한 어머니는 프로 제작진에게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였다. 무엇이 이렇게 극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일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 기억 나는 것이 칭찬해 주기이다. 과거에 잘못한 것 대신에 잘 했던 것을 떠 올려서 칭찬해 주는 것이다. 그러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이다.

 

사두 사두 사두

 

칭찬해주기를 보면서 사무량심의 무디따(기뻐함)가 떠 올랐다. 무디따는 더불어 기뻐함등으로 번역되는데,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하는 것을 말한다. 마치 내일처럼 기뻐하는 것이다.

 

만일 자신의 아들이나 딸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였다는 부모는 자식 못지 않게 기뻐한다. 그런 기뻐하는 마음을 타인에게도 내는 것을 말한다. 그럴 경우 참 잘하셨습니다””참 잘 되었네요등의 말이 될 것이다. 한마디로 칭찬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빠알리니까야에서 칭찬하는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두(Sādhu)’라 본다. 사두는 ‘Good, excellent, right’의 뜻이다. 우리말로 좋아” “훌륭해” “맞어의 뜻이다. 상대방의 성과에 대하여 치하에 주고 맞장구 쳐 주는 것이다. 또 다른 우리말로 표현하면 그려, 그려가 될 것이다. 긍정하고 인정해 주는 것이다. 한자어로는 善哉 (선재)’라 한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수보리의 찬탄에 대하여 善哉 善哉 (선재 선재)”하였는데, 이는 훌륭하고 훌륭하도다의 뜻으로 번역된다. 

 

이렇게 상대방을 인정하고 긍정하고 맞장구 쳐 주었을 때 싫어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사두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것 같다. 좋은 말을 하였을 때, 법문이 좋을 때, 칭찬할 때 사두 사두 사두라 하여 상대방을 기쁘게 해 준다.

 

사무량심과 화다스리기

 

그런 면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표의 칸을 채울 수 있다. 무디따에 대하여 아직까지 경전적 근거를 찾지 못하였으나 사두라는 말 한마디로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슬로건

실패

자애의 삶

(Metta)

어머니가 외동아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어떤 차별도 없이 중생을 사랑하는 보편적이며 무한한 사랑을 실천한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Sn 1.8)

애정

연민의 삶

(karua)

근심과 번뇌로 괴로워하는 모든 중생에 대한 연민의 태도를 갖는다.

한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 (S15.11)

근심

기쁨의 삶

(mudita)

다른 사람의 성공, 복지, 행복을 축하하고 그것에 공감한다.

참 잘했어요!” (Sādhu)

들뜸

평정의 삶

(upekkha)

인생의 모든 파란과 곡절에서 침착과 평정을 유지한다.

업이 바로 나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다 .(A10.48)

무관심

 

 

EBS에서 제공하는 화풀이프로를 보면서 사무량심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홧병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가르침이 바로 사무량심이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무량심 중에 자애수행에 대한 것은 다름 아닌 화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청정도론에 단계적으로 설명 되어 있다.

 

분노다스리기 아홉단계

 

청정도론에서는 자애수행에 대한 방법이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지애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알아야 될 것이 있다. 서론에서 먼저 성냄의 위험과 인욕을 반조 해야 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냄의 위험을 강조한 것은 무엇일까? 자애수행은 한마디로 성냄의 소멸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내는 자에게 자애의 마음이 나올 수 없다. 마음은 한순간에 오로지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를 내면서 동시에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애수행의 최대의 적은 성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를 다스려야 할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아홉단계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화를 화로써 앙갚음 하지 않는다.

둘째, 연민을 통해 적개심을 가라 않는다.

셋째, 자신을 훈계하여야 한다.

넷째,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한다.

다섯째,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수행한 덕을 반조해야 한다

여섯째, 일체중생에 대하여 나를 한번쯤 낳아준 어머니로 생각한다.

일곱째, 자애수행의 열한가지 이익에 대하여 생각한다

여덟째, 존재를 나()나 나의 것이 아닌 오온, 12, 18계의 요소로 본다.

아홉째, 보시를 통하여 성냄을 제거 한다.

 

 

대부분 분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자애수행을 또 다른 말로 표현 하면 분노다스리기가 될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분노다스리기 첫번째 단계는 화를 화로써 앙갚음 하지 않는다.”에 대한 것이다. 이는 화내는 이에게 화내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상대방이 말꼬리 잡아 공격한다고 해서 따라 공격한다면 똑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분노가 그대를 이기게 하지 말고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

분노가 없고 해침이 없는 자는

항상 거룩한 님 가운데 사네.

산사태가 일어나는 것처럼

분노는 악한 사람을 부숴버리네. (S11.25)

 

 

EBS 화풀이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마치 철천지 원수같아 보인다. 어느 한편이 굴복해야 싸움이 끝날 것이다. 그러나 서로 지지 않으려 한다. 처음에는 가벼운 말다툼을 하지만 나중에는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감정싸움을 변질된다. 그래서 서로 비난하고 담을 쌓고 원수처럼 지낸다.

 

그러나 분노는 결국 자기 자신을 부수어 버린다. 이제까지 쌓아온 공덕을 모두 파괴해 버리기 떄문이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분노하는 자에게 분노하지 말라.”라 하였다. 같이 화내면 똑 같은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에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S7:2)

 

 

싸움을 걸어 오는 상대방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맞받아쳐야 할까? 가르침에 따르면 회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한다. 이런 방법을 실천한다면 절대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해도 가라앉힐 수 없다면

 

청정도론에 따르면 분노다스리기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분노다스리기 네 번째 항목을 보면 업이 각자 자기의 주인임을 반조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단계가 올라 가면 갈수록 점차 고차원적인 방식이 동원된다. 이는 이전 단계에서 분노다스리기에 실패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에서는 이와 같이 해도 가라앉힐 수 없다면이라고 되어 있다. 분노다스리기에 실패 하였을 때 다음 단계를 소개 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연민, 자신훈계, 업이 주인임을 반조, 부처님이 전생에 인욕수행한 공덕 반조, 나를 한번쯤 낳아준 어머니로 생각하는 것, 자애수행의 열한가지 이익에 대하여 소개 하고 있고, 심지어 존재에 대하여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볼 것 까지 요청하고 있다. 이렇게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도 상대방에 대한 분노, 적대감이 사라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최후의 수단으로서 아홉번째 방식이 등장한다.

 

최후의 수단으로서

 

비즈니스를 하는데 있어서 전화와 이메일로만 할 수 없다. 때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대면하면 쉽게 풀린다. 그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을 같이 먹는 것이다. 그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저녁에 술자리를 가지는 것이다. 이렇게 접촉을 하면 할수록 꼬였던 인관관계가 쉽게 해결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원한맺힌 자가 있는데 그 자에게 단지 자애만 방사한다고 해서 풀리지 않을 것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도 상대방이 이를 인지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직접 대면해서 푸는 것이 가장 좋다. 그렇다고 하여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하는 것이 좋다. 청정도론에서는 최후의 수단으로서 보시에 따른 분노다스리기를 제안한다. 이에 대한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요소들을 분석할 수 없을 때 보시를 통해서 [성냄을 제거해야] 한다. 자기의 소유물을 남에게 보시해야 하고 남의 소유물을 자신이 받아야 한다. 만약 남의 생계가 청정하지 못하여 그의 자구를 사용할 수 없다면 자기의 소유물을 보시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할 때 반드시 그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 가라앉는다. 그 사람의 경우도 그가 전생부터 품어오던 화가 그 순간에 가라앉는다.

 

마치 찟딸라 산의 사원에서 발우를 보시받은 대장로의 경우처럼. 탁발음식만 수용하던 장로는 세 번이나 대장로에 의해 거처로부터 쫓겨났지만 ‘존자시여, 이 발우는 8개 금화의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재가자인 저의 어머니께서 보시한 것입니다. 법에 걸맞게 얻은 것입니다. 선량한 청신녀에게 공덕이 되게 하소서’라고 말하면서 발우를 보시로 올렸던 것이다. 이와 같이 보시는 참으로 큰 위력을 가진다.

 

(청정도론, 9 39)

 

 

천번 생각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보다, 백번 전화로 말을 하는 것 보다 직접 대면하는 방법이 가장 확실함을 말한다. 그래서 원한맺힌 자에게 보시를 하였을 때 적개심이 가라않을 것이라 한다. 그래서 쫒겨난 장로 이야기를 예로 들고 있다.

 

보시공덕의 위력

 

지금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직접 찾아 가는 것이다. 빈손이 아니라 선물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보시 공덕의 효과는 엄청난 것이다. 비록 미운 사람일지라도 그가 선물을 내밀었을 때 더구나 상냥하고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대하였을 때 봄눈 녹듯이 적개심이 풀어질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서로 원한이 맺혀 있을 때 누구 한사람이 보시 하였을 때, 보시하는 자나 보시 받는 자나 적개심이 모두 풀어 진다는 것이다.

 

 

“보시는 조어되지 않은 사람을 조어하고

보시는 모든 이로움을 성취시킨다.

보시와 상냥한 말씨를 통해 [시주자는]

편안해지고 [시물을 받는 자는] 머리를 숙인다.

 

(청정도론, 9 39)

 

 

 

201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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