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3. 12:57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 

 

 

HD시대를 맞이 하여

 

종종 영화를 본다. 그렇다고 하여 시내에 있는 영화관에 가서 보는 것은 아니다. TV에서 보여 주는 영화를 본다. 특히 EBS에서 보여 주는 영화를 본다.

 

요즘 TV에서 영화를 볼만하다. 그것은 옛날과 달리 화질이 좋기 때문이다. HD 시대를 맞이 하여 광폭의 커다란 화면에 HD화질로 영화를 보면 보는 맛을 나게 한다. 그런 영화중에서도 한국영화가 있다. 60년대에 제작된 흑백영화이다. 주로 최은희, 엄앵란, 신성일이 단골로 출연하는 영화 들이다.

 

흑백영화를 볼 때 유심히 살펴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주인공들의 얼굴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대한 것이다. 거리나 집, 집기, 그리고 산하대지 같은 것들이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오늘날과 비교해 본다. 물질적 풍요가 극에 달한 요즘과 흑백영화시대를 비교 해 보면 격세지감이다. 그리고 세상이 상전벽해가 된 듯한 느낌이다.

 

비록 영화이긴 하지만 그 때 당시 환경을 보면 굶주리고 헐벗고 사는 듯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안쓰럽기만 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때 당시의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를 마음껏 누리는 오늘날 사람들 보다 덜 행복하였다고 볼 수 있을까?

 

아사자가 속출한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헐벗고 다니거나 굶주리는 사람들을 볼 수 없다. 거리에 나가 보면 모두 잘 차려 입고 모두 행복한 듯한 모습이다. 그러나 도시의 이면에는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

 

거리에서 폐지를 주어 파는 노인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이런 노인 빈곤층이 이제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뉴스에 따르면 OECD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의 노인빈곤층이 1위라 한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에 의지 하여 삶을 영위하는 노인들이 많고 갈수록 늘어 나는 추세라 한다.

 

이렇게 노인 빈곤층이 늘어나서 만일 굶어 죽는 사태가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국가망신에 해당 될 것이다. 명세기 선진국 가입 클럽이라는 OECD회원국인데 아사자가 발생하였다면 국가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만일 아사자 나왔다면 전세계의 조롱거리가 될 것이며 동시에 북한과 동급으로 취급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정부에서는 가난한 노인들이 굶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애를 쓰는 모습이다. 그러나 지급 되는 연금은 최소에 그친다. 그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돈만 지급 된다. 그런 돈으로 노년기의 삶을 영위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인 것이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HD화면으로 제공 되는 TV에서는 모두 행복한 모습만 보여 줄 뿐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것은 애써 감추려 하는 것 같다.

 

거리에서는 잘 차려 입은 멋진 사람들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모두 다 스마트폰 보기에 열중이어서 정보통신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렇게 시대는 점차 화려해지고 풍요러워진다. 그렇다면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들이 반드시 행복하다고 볼 수 있을까? 지금 가난하게 산다고 하여 하여 반드시 불행하다고 볼 수 있을까? 대체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잠을 잘 자는 행복

 

오늘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 본다. 부처님의 친설이라 불리우는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 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만 뻗치면 가르침을 접할 수 있다.

 

앙굿따라니까야에 행복에 대한 것이 있다. 행복도 행복 나름이지만 잠을 잘 자는 것에 대한 행복이 있다.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이다.

 

 

kacci bhante bhagavā sukhamasayitthāti?

 

[알라바까]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잘 주무셨습니까?”

 

 

Eva kumāra sukhamasayittha, ye ca pana loke sukha senti, aha tesa aññataroti.

 

[세존]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āavakasutta-알라와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35,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알라비시에 있을 때이다. 알라비는 사왓티와 라자가하 사이에 있는 도시 또는 나라이름이라 한다. 이 도시의 왕과 주민을 보두 알라와까라 불렀는데 알라와까의 왕자가 부처님게 잠을 잘 잤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고 있다. 그러자 부처님은 잠을 잘 잤다고 말하고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

 

눈만 감으면 코를 고는 사람이 있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이다. 보통사람들은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다 보면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잠을 못 이룬다. 그러나 잠자리에 눕자 마자 잠을 자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한편으로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질투가 나기도 한다. 이는 좋은 측면과 좋지 않은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잠 잘 자는 사람에 대하여 좋은 면으로 본다면 걱정과 근심이 없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잠을 잘 자는 사람에 대하여 도를 깨우쳐 공부가 잘 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부정적 측면으로 본다면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일 수 있다. 세상이 망하든 흥하든 나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단순무식형일 수 있다. 이렇게 잠을 잘 자는 사람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을 수 있다.

 

길거리에서 노숙한 부처님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을까? 이어지는 알라와까의 질문을 보면 보통사람들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알라와까는 부처님에게 ““세존이시여, 겨울밤은 춥습니다. 더구나 서리가 내리고는 주간입니다. 소의 발굽으로 다져진 바닥은 딱딱하고, 나뭇잎으로 만든 잠자리는 너무 얕고, 나뭇가지에 잎사귀는 아주 드믈고, 황색가사는 아주 얇고 북풍은 차갑습니다.(A3.35)”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다른 지방으로 이동할 때 머무는 곳이 숲속의 노지(露地)’임을 알 수 있다. 경에 쓰여 있는 내용을 파악해 볼 때 부처님은 길거리에서 노숙을 한 것이다. 더구나 북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이다. 그래서 서리가 내리고는 주간입니다.”라 하였다.

 

인도에서 서리가 내리는 주간

 

인도에서 ‘서리가 내리는 주간(antaraṭṭhako himapātasamayo)’은 어떤 계절일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antaraṭṭhako himapātasamayo : ‘서리가 내리는 사잇 팔일간’이란 말인데, Mrp.II.225에 따르면, 마가(Magha : 12-1월)월의 마지막 4일과 파구나(Phagguna: 2-3월)월의 처음 4일간을 말한다.

 

(각주, 전재성님)

 

 

사왓티시가 있었던 인도 지방에서의 겨울에 대한 설명이다. 특히 서리가 내리는 주간은 1월말과 2월 초임을 알 수 있다. 이때가 가장 추울 때라 한다.

 

이렇게 서리가 내리는 것에 대한 표현이 맛지마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사자후에 대한 큰경’에서 부처님은 “사리뿟따여, 나는 한겨울 차가운 밤에 서리가 내리는 팔일간이 찾아오면, 나는 노지에서 밤을 지새우고 숲에서 낮을 보냈다. 그리고 뜨거운 여름의 마지막 달에 나는 노지에서 낮을 보내고 숲에서 밤을 지냈다.(M12)”와 같이 말 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인도가 우리나라 보다 위도가 아래이어서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혹한기는 없지만 노지에서 서리를 맞으며 잔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것임에 틀림 없다.

 

천상락을 누리는 자들

 

이렇게 서리가 내리는 차가운 밤에 부처님은 노지에서 노숙하였다. 그런데 부처님은 아주 잘 잤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만큼 잠을 잘 자는 사람도 없을 것이라 하였다. 대체 부처님은 어떤 이유로 잠을 잘 잔 것일까? 먼저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세존]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왕자여, 내가 그대에게 질문하건데 마음에 들면 대답하기 바랍니다.

 

왕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상에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안팍으로 잘 장식되고 바람이 없고 빗장이 잘 꿰어지고 창문이 잘 잠기어진 저택이 있고, 그곳에 흑모의 담요가 깔리고 백모의 담요가 깔리고 꽃무뉘의 양모가 깔리고 까달리 사슴의 털로 된 최상의 모포가 깔리고 그 위에 덮개가 씌여지고 양쪽에 붉은 베개가 놓여있는 침대가 있는데, 거기서 호마유의 등불을 밝히고 네 명의 부인들이 성심껏 시중을 든다고 합시다.

 

왕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잠을 잘 자겠습니까? 아니면 어떻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
āavakasutta-알라와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35,전재성님역)

 

 

누구나 바라는 것이 오욕락이다. 식욕, 성욕, 안락욕, 명예욕, 권력 이렇게 다섯 가지 욕망을 말한다. 이런 오욕락을 추구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목숨을 건다. 그래서 식욕이 충족되면 다음단계는 성욕을 충족시키고, 더 나아가 명예를 얻고 궁국적으로 권력까지 쟁취하고자 한다.

 

하지만 오욕락을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오늘날 큰 부자나 권력자들이 해당될 것이다. 부처님 당시라면 왕족이나 큰 부자를 뜻하는 장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왕족이나 장자들은 크고 편안하고 안락하게 생활 하였다. 더구나 부인도 여럿 두어서 천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다.

 

이런 천상락은 부처님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경에 따르면 출가하기 이전에 왕자로서 삶을 살 때 세 개의 궁전을 두고 살았다고 한다. 하나는 우기를 위한 것이고, 하나는 겨울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여름을 위한 것이라 한다. 이중 우기궁전에 대한 묘사를 보면 마간디야여, 그러한 나는 우기의 궁전에서 사는 사 개월 동안 궁녀들의 음악에 탐닉하여 밑에 있는 궁전으로는 내려오지 않았습니다.(M75)”라고 되어 있다.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있다면

 

이렇게 부처님은 이미 왕자로서 천상락을 경험한 바 있다. 그래서 알라와까 왕자에게 천상락을 누리는 왕자나 장자의 아들에 대하여 그는 잠을 잘 자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다. 그러자 왕자는 세존이시여, 그는 잠을 잘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이는 잠을 잘 자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 때 잠을 잘 잘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세존]

왕자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에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생겨나면, 그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타면서 괴롭게 잠을 자지 않겠습니까?”

(
āavakasutta-알라와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35,전재성님역)

 

 

차가운 겨울 바람을 막아주고 난방이 잘 되어 있는 포근한 잠자리가 있다. 더구나 네 명의 부인까지 있을 때 행복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탐욕으로 인한 고뇌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또한 탐욕으로 인한 성냄이 발생하였다면 과연 잠을 잘 수 있을까? 탐욕과 성냄에 불타오른다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잠을 잘 수 없음을 말한다.

 

하우스푸어에게 밤은 길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한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가지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이다. 지금 20평형 아파트에 살고 있다면 30평형에 사는 것이 꿈일 것이다. 그래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30평형대로 입성하게 된다.

 

그렇다고 거기서 끝나는 것일까? 50평형대를 사는 사람의 집을 구경하고 나서 50평형대를 갖기 위한 꿈을 꾼다. 그래서 무리하게 대출하여 마침내 꿈에 그리던 50평형대를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입주 하는 그 순간부터 집값이 폭락하기 시작한다. 부동산 거품이 빠짐에 따라 가격이 반토막 났다면 어떻게 될까? 소위 깡똥아파트가 되었을 때 매달 지급 되는 이자로 인하여 하우스푸어가 될 것이다. 그런 50평형대의 궁전 같은 아파트에서 사는 자는 잠이 잘 올까? 하우스푸어에게 밤은 긴 것이다.

 

하늘에서 황금비가 쏟아 진다고 해도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다. 아흔 아홉간을 가진 자는 한칸을 더 채워서 백칸을 가지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더 큰 목표를 향하여 돌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더 높이 올라 갔을 때 행복할까?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Na kahāpaavassena               나 까하빠나왓세나

titti kāmesu vijjati,            띳띠 까메수 윗자띠
Appass
ādā dukhā kāmā             압빳사다 두카 까마

iti viññāya paṇḍito.             이띠 윈냐야 빤디또

 

참으로 금화의 비가 내려도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만족은 없다.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안다.

 

(Dhp 186, 전재성님역)

 

 

물질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자들이 있다. 오로지 돈만 있으면 행복하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런 자들은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는 법이 없다. 설령 하늘에서 황금비가 쏟아 진다고 하여도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사는 자라고 하여 마음도 부자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마음은 늘 가난할 수 있다. 큰 집을 분양 받아 놓고 매달 이자부담에 허리가 휘어지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말한다. 자신이 저지른 탐욕으로 인하여 잠못 이루는 밤이 된다면 그것은 고통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욕망에는 쾌락은 적고 고통뿐이라 (Appassādā dukhā kāmā. Dhp 186)”라 한 것이다.

 

부처님은 왜 잠을 잘 잤을까?

 

부처님은 노지에서 잠을 잤다. 그것도 북풍이 부는 서리가 내리는 추운 밤 길거리에서 잠을 잔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라고 말씀 하셨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잠을 잘잤을까? 이어지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세존]

왕자여, 그 장자나 장자의 아들은 탐욕으로 인한 고뇌로 불태우면서 괴롭게 잠을 자게 만드는, 그 탐욕이 여래에게는 버려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왕자여, 나는 잘 잤습니다.”

 

(āavakasutta-알라와까의 경, 앙굿따라니까야 A3.35,전재성님역)

 

 

부처님이 잠을 잘 자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탐욕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냄과 어리석음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종려나무 그루터기가 뿌리 뽑힌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이렇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소멸 된 자에게 있어서 그 어떤 조건에서라도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서리가 내리는 추운 노지일지라도 숙면을 취하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노숙자들은 주로 지하철 대합실에서 잠을 청한다. 바닥에 종이 박스를 깔고 비닐을 덮고 자는 것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잠을 잘 잔다. 더 이상 욕심낼 것도 없고 더 이상 성낼 것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궁전 같은 방에서 자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돌아 올 어음을 막아야 한다. 그 어음을 막지 못하면 부도가 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고 이 사회로부터 자취를 감추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어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비록 궁전 같은 침실일지라도 노숙자의 잠자리 보다는 못할 것이다.

 

행복지수를 극대화 하려면

 

목표를 낮추어 잡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가장 마음이 편한 것은 모든 것을 내려 놓았을 때이다. 지금 집착하고 있는 것을 포기 하였을 때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해 진다. 이렇게 내려 놓고 버리고 집착하지 않을 때 평온을 맛 본다. 이는 행복지수에서 분모에 해당되는 욕망을 최소화 하였기 때문이다. 분자에 해당 되는 욕망충족은 그 어떤 것이 되든 상관 없다.

 

행복지수는 욕망분의 욕망충족, 이를 욕망분의 소유라 한다. 이는 행복지수=소유/욕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이 등식에서 분모에 해당되는 소유는 사람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 지금 10억을 가진 자가 있는가 하면 백만원 가진 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자나 가난한 자가 있듯이 분모에 해당되는 소유는 매우 다양한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지수를 극대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소유를 극대화 하는 것이다. 분자를 늘리는 것을 말한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욕구를 최소화 하는 것이다. 분모를 줄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분자는 고정 되어 있을지라도 분모가 줄어 들기 때문에 행복지수는 높아 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사람들은 분자도 늘리고, 동시에 분모도 늘리려 한다. 그러다 보니  행복지수가 높아지지 않는다. 욕심을 부리면 부릴수록 오히려 행복지수는 낮아 지는 것이다.

 

지금 궁전 같은 집에 살고 있더라도 잠 못이루는 밤이 많아진다면 행복지수는 낮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욕심 많은 자는 황금비가 내려도 결코 행복하지 않는 것이다.

 

목구멍 포도청론과 소욕지족(少欲知足)

 

지금 가난한 자가 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하다. 그러나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지금 수중에 비바람을 면할 정도의 집한칸이 있지만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에 행복지수는 올라 간다.

 

‘소욕지족(少欲知足)’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출세간적 삶의 방식이다. 내부의 욕심을 극소화 하여 행복을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분소의를 입고 노지에 잠을 자고 하류 한끼를 먹더라도 감관은 맑고 깨끗한 것이다.

 

소욕지족을 추구하는 자들은 잠을 잘잔다. 그러나 대욕을 바라는 자들은 잠을 잘 못 잘 것이다. 그래서 잠 못 이루는 자에게 밤은 길고(Dhp60)”라는 법구경 구절이 있다. 긴밤을 고뇌로 보내는 것은 올바른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에게 윤회는 아득하다.( dīgho bālāna sasāro , Dhp 60)”라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목구멍 포도청론은 통하지 않는다.

 

 

 

 

 

少欲知足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가르침을 모르기 때문에 매번 똑 같은 일을 반복한다. 행복이라는 것이 물질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한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 질 것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개념을 바꾸면 잠을 잘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욕망을 내려 놓는 것이다.

 

그래서 욕망을 최소화 하였을 때 행복지수가 올라가 다리 뻗고 마음놓고 잠을 잘 잘 것이다. 부처님이 노지에서 잠을 잘 자는 것도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내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는 잘 잤습니다. 나는 세상에서 잠을 잘 자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A3.35)”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Sabbadā ce sukha seti brāhmao parinibbuto,

Ye na limpati kāmesu sītibhūto nirūpadhi.

 

Sabbā āsattiyo chetvā vineyya hadaye dara,

Upasanto sukha seti santi pappuyya cetaso'ti.

 

 

“모든 악을 버린 진정한 바라문

감각적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편안하고 재생의 근거를 놓아버린 사람

그는 잠을 잘 자노라.

모든 갈애를 끊고 마음의 근심을 잠재우고

마음을 고요함으로 향하게 한 뒤 평온하게 잘 자노라.”

 

(A3.35, 초불연 대림스님역)

 

 

[세존]

감각적 욕망에 오염되지 않고

청량하고 집착이 없고

완전한 적멸을 성취한

거룩한 님은 언제나 잠 잘자네.

 

모든 집착을 부수고

마음의 고통을 극복하고

마음의 적멸을 성취한 님은

고요히 잠 잘자네.”

 

(A3.35, 성전협 전재성님역)

 

 

 

2014-02-03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