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무엇이 윤회하는가? 스타트렉의 공간이동과 불교의 윤회

담마다사 이병욱 2014. 2. 10. 20:18

 

무엇이 윤회하는가? 스타트렉의 공간이동과 불교의 윤회

 

 

 

태란습화의 유래

 

금강경에서 대승정종분을 읽으면 우주적 스케일의 감동을 받는다. 이는 소유일체중생지류 약란생 약태생 약습생 약화생 약유색 약무색 약유상 약무상 약비유상비무상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라는 구절 때문이다.

 

구절을 보면 삼계의 모든 중생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특히 생물학적으로 보았을 때 태란습화이렇게 네 가지로 분류 된다. 그런데 태란습화는 오로지 금강경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일까?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Catasso kho imā sāriputta yoniyo. Katamā catasso? Aṇḍajā yoni, jalābujā yoni, sasedajā yoni, opapātikā yoni,

 

사리뿟따여, 이러한 네 갈래 태어남이 있다. 네 갈래란 어떠한 것인가?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이다.

 

(Mahāsīhanāda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사자후에 대한 큰 경에서 네 가지의 태어남(四生)’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다. 즉 태생(Aṇḍajā yoni), 난생(jalābujā yoni), 습생(sasedajā yoni), 화생 (opapātikā yoni) 이렇게 네 가지 종류이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태란습화에 대한 오리지널은 빠알리니까에서 유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홀연히 생겨난다는데

 

사생에서 화생을 제외 하고 모두 아는 것들이다. 그러나 화생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경에서는 어떻게 설명 되어 있을까?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Katamā ca sāriputta opapātikā yoni? Devā nerayikā ekacce ca manussā ekacce ca vinipātikā. Aya vuccati sāriputta opapātikā yoni.

 

사리뿟따여, 화생이란 어떠한 것인가? 사리뿟따여, 신들이나 지옥의 뭇 삶들이나 특수한 인간이나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이 생겨나는데, 사리뿟따여, 이것을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이라고 한다.(*282)

 

(Mahāsīhanāda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전재성님역)

 

 

화생 하는 것에 대하여 신들(Devā), 지옥의 뭇삶(nerayikā), 특수한 인간(ekacce ca manussā),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ekacce ca vinipātikā)이라 하였다. 신들이나 지옥의 뭇삶은 이해가 되는데 특수한 인간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은 어떤 뜻일까?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에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다. 역자의 생각으로는 특수한 인간은 아마도 중음신을 의미하고 특수한 타락한 영혼은 아귀나 아수라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불분명하다. ‘홀연히 태어나는이라는 화생이라는 말이 어렵기 때문에 부연설명한 것이다.

 

(282번 각주, 전재성님)

 

 

각주에 따르면 이 구절에 대한 주석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전재성님은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유는 ‘홀연히 태어나는’문구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홀연히 태어나는’이라는 말은 ‘opapātikā’에 대한 번역이다.

 

 

 

Opapātikā에 대하여 PCED194에서는 ‘arisen without visible cause’라 설명 되어 있다. ‘눈에 띄는 이유 없이 일어난’ 뜻이다. 또 ‘born spontaneously’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자발적으로 태어난’의 뜻이다. 한자어 사전을 보면 ‘化生的이라 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화생이라는 것이 부모 없이 스스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또 갑작 스럽게 출현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화생에 대하여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사리뿟따여, 무엇인 화생인가? 사리뿟따여, 신들, 지옥에 태어난 자들, 몇몇 인간들, 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을 화생이라 한다.

 

(M12,  대림스님역)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특수한 인간’이라 번역된 ekacce ca manussā에 대하여 ‘몇몇 인간들’이라 하였다. 또 ‘특수한 타락한 영혼들이라 번역된 ‘ekacce ca vinipātikā’에 대하여 ‘몇몇 악처에 태어난 자들’이라 하였다. 이는 ekacc에 대하여 ‘특수한(성전협)’과 ‘몇몇(초불연)’이라고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ekacc의 뜻은 ‘some; certain; a few, (), ()一部的, , 一部’라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인간들’, ‘어떤 타락한 자들 ‘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영역은 어떻게 번역 되어 있을까? 빅쿠 냐나몰리와 빅쿠 보디가 공역한 MDB에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What is spontaneous generation? There are gods and denizens of hell and certain human beings and some beings in the lower worlds; this is called spontaneous generation.

 

(MDB, 빅쿠 냐나몰리와 빅쿠 보디역)

 

 

 MDB에 따르면 화생에 대하여 ‘spontaneous generation’라 하였다. 이를 직역하면 자발적인 세대라 번역할 수 있다. 부모 없이 스스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특수한 인간또는 몇몇 인간이라고 번역된 ‘ekacce ca manussā’에 대해서는 certain human beings’라 하였다. ‘어떤 인간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ekacce ca manussā’어떤 인간 존재일까?

 

중음신은 있을까?

 

전재성님의 각주에 따르면 ‘ekacce ca manussā’에 대하여 특수한 인간이라 하였다. 그리고 각주에서는 중음신으로 보지만 불분명한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주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부처님가르침에서는 중음신이 인정 되지 않는다. 연기법칙에 따라 곧바로 법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하였을 때 간격이 없기 때문에 무간이다. 중음신이 있을 수 없는 이유이다.

 

‘ekacce ca manussā’ 관련 하여 MDB에서는 각주가 없다. 초불연에서도 각주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각주가 보이지 않지만 전재성님은 281번 각주에서 화생에 대하여 여기서 화생이란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화현하는 것을 말한다.(281번 각주)”라고 하였다.

 

화생이란 순간적으로 생겨남을 뜻한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중음신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특수한 인간(성전협)’ 또는 몇몇 인간(초불연)’, ‘certain human beings(MDB)’ 이라 번역 되는 ‘ekacce ca manussā’에 대하여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정보의 덩어리, 식온(識蘊)

 

화생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생겨남을 뜻한다. 그런데 전재성님은  사리뿟따여, 이것을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나는 화생이라고 한다.(,Aya vuccati sāriputta opapātikā yoni M12)”라 하였다. 하지만 빠알리어 문구에 마음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는다. MDB에서는 “this is called spontaneous generation. (이것은 자발적 세대라 불리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서 마음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다. 초불연에서도 화생이라 한다라고 하였을 뿐 마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재성님은 마음에서 홀연히 생겨난것이라 하였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법구경 1번 게송에서도 정신이 사실들의 선구이고 정신이 그것들의 최상이고 그것들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것이니라 하였다. 여기서 정신이라고 번역한 것은 마노(mano)이다. 일반적으로 마음을 뜻하는 말이 찟따’, ‘윈냐나’, ‘마노인데 때에 따라 구별 없이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법구경 1번 게송에 대하여 마음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

 

오온에서 마음을 윈냐나라 한다. 이를 한자어로 이라 한다. 그런데 이식은 단지 하나의 마음이라기 보다 덩어리로 본다. 그래서 의식의 덩어리라는 뜻으로 식온이라 한다. 전재성님은 이를 의식의 다발이라 하였다. 마치 근육이 다발로 뭉쳐져 있는 것처럼 의식(윈냐나) 역시 수많은 다발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의식(윈냐나)에 대하여 무더기, 덩어리, 다발로 본다면 식온은 정보의 덩어리라고도 볼 수 있다. 마치 수많은 파일이 들어가 있는 컴퓨터CPU와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자소설가인 임현담님은 스타트렉에서 볼 수 있는 공간이동의 예를 들어 환생을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영상과 음성을 재생하는가?

 

스타트렉에서는 순간적인 공간이동 장면이 있다. 이쪽 공간에서 저쪽 공간으로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이다. 이때 몸전체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가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쪽 공간에서 정보가 재구성 되어 완전한 몸을 보여 주고 있다. 마치 홀연히 화생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공간 이동은 사실상 우리 주변에서 일상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방송을 들 수 있다.

 

라디오에서는 주파수만 맞추면 방송을 들을 수 있다. 이때 주파수라는 것이 반송파이다. 이를 ‘carrier wave’ 라 한다. FM이라면 88-108메가 헤르쯔 대역이다. 예를 들어 100메가 주파수를 고정하면 100메가헤르쯔 반송파에 실어 보내는 방송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라디오에서 주파수를 100메가헤르쯔에 고정하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방송하는 것을 전문용어로 변조(modulation)’한다고 한다. 반대로 수신측에서는 이를 역순으로 복원하기 때문에 복조(demodulation)’한다고 한다. 이처럼 변조하여 방송하고 복조 하여 수신하는 것이다.

 

 

 

 

변조(modulation) 조(demodulation)

 

 

 

그런데 변조된 반송파에는 음성정보가 실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반송파는 음성정보를 가득실은 배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반송파는 들을 수도 없다. 주파수가 100메가 헤르쯔로서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테나만 설치하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이는 반송파가 공중에 편재 되어 있기 때문이다.

 

TV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500메가 헤르쯔 캐리어에 영상과 음성 정보를 실어서 보냈을 경우, 시청자는 단지 리모콘으로 500메가 헤르쯔에 해당되는 채널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눈과 귀로 볼 수 없었던 영상과 음성을 재생할 수 있다.

 

스타트렉에서 공간이동 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방송시스템을 보면 스타트렉에서 공간이동을 떠 올리게 한다. 그래서일까 임현담님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식에 따른 재생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러면 식 이동이 뇌 안에서만 일어날 뿐인가?

 그렇지 않다.

 두뇌 안에서 가능하다면 당연히 핸드폰처럼 원거리 이동이 가능하다.

 사망에 이르러 모선[육신]이 파괴되면 외부탈출을 시도하게 되는 바, 이때 여러 가지 주의점이 제시된다. 심장이 멈추면서 식 이탈이 서서히 일어나는데 보통 이때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몸이 지속적으로 따뜻하다면 과정이 지속되는 진행형이며, 린포체들에게는 이 시간이 유달리 긴 이유는 정보량이 많아서다.

 

 티베트불교에서 심장이 멈춘 후에 곧바로 시신에 손을 대지 않도록 권유하는 일은 cut 혹은 copy 과정에서의 식 왜곡을 막으려는 이유다. 누워서 돌아가신 스승을 일으켜 좌탈입망의 자세를 만든다든지, 이리저리 시신의 자세를 고치는 일은 순간이동 중에 전원을 건드리는 일처럼 위험한 일이고, 그 결과 정보교란으로 인해 도력이 여간 높지 않은 스승이 아니라면 부정적인 사건을 맞이한다.  제자가 구루의 덕망을 널리 알리기 위해 시신을 조작하는 행위가 구루에게 도리어 커다란 죄악을 범하는 셈이다.

 

 금강승 제자들은 체온이 빠져 나갈 때까지, 말하자면 정보가 완전히 모선을 빠져나갈 때까지 모선을 흔들고 뒤집고, 우두둑 꺾기를 하지 않고 만뜨라를 봉송하며 조심스럽게 바라본다.

 

(윤회, 임현담님, 2009·11·26)

 

 

 

 

 

티벳불교 신봉자인 임현담님에 따르면 린포체의 환생에 대하여 식의 개념을 도입하여 설명하고 있다. 마치 스타트렉에서 공간이동 하는 것처럼 식이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그 식에는 그 사람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한다. 이는 식이 단순히 하나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무더기 또는 다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정보 덩어리로 보는 듯하다.

 

() 다른 숙주를 찾아 이동하는 일을 불교에서는 윤회라 부른다

 

임현담님은 이어서 식이 이동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동을 한다면 불필요한 정보를 버리고 중요한 핵심 정보만 가지고 슬림하게 만든 후 전송된다. 따라서 지상에서 평생 입고 있었던 낡은 육신과 관련된 정보,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 모선을 다루는 법처럼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버려야한다. 혈연, 지연 등등과 관련된 방대한 정보도 자연스럽게 폐기된다. 서글프지만 가족에 대한 기억 따위는 모선에 남겨져 분해되는 모선과 운명을 같이한다.

 

 그렇게 단출 슬림화된 핵심 식 다른 숙주를 찾아 이동하는 일을 불교에서는 윤회라 부른다.

 

(, 임현담님, 2009·11·26)

 

 

임현담님에 따르면 식이 이동할 때 불필요한 정보는 삭제 된다고 한다. 꼭 필요한 정보만 남게 되는데, 이 식으로 인하여 명색으로 재생 또는 환생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스타트렉의 공간이동 개념을 이용하여 식이 이동으로 다음 생이 시작 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윤회에 대하여 단출 슬림화된 핵심 식 다른 숙주를 찾아 이동하는 일을 불교에서는 윤회라 부른다.”라고 결론 짓는다.

 

이렇게 스타트렉의 공간이동에서 힌트를 얻어 식에 의한 윤회를 설명하였다. 그래서 작가는 글에서 개인적으로 널널한 시간만 주어진다면 힌두교, 불교, 노장, 양자 물리, 등등을 총동원하여 공들여 쓰고 싶은 SF작품이다.”라고 하였다.

 

이 어리석은자여 (moghapurisa)”

 

임현담님은 식이 윤회한다고 하였다. 그런 식에 대하여 ‘정보의 덩어리’라 하였다. 그래서  윤회하면 이 식온에 저장 되어 있는 정보가 명색으로 재생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식, 즉 마음이 윤회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윤회한다고 말하면 부처님에게 이 어리석은자여 (moghapurisa)”라는 소리를 듣기 쉽다. 제자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치욕스런 말이다. 왜 그럴까?

 

맛지마니까야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경(M38)’에 따르면 사띠빅쿠가 “세존이시여, 제게 이와 같이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의식이 유전하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는 견해가 생겨났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뜻에서 ‘moghapurisa (a stupid)’라고 부처님이 말한 것이다.

 

조건발생하는 식이 윤회한다

 

경에 따르면 사띠빅쿠는 식이 윤회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받아 들인 것이다. 왜 잘못인가? 이어지는 부처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Kassa nu kho nāma tva moghapurisa mayā eva dhamma desita ājānāsi? Nanu mayā moghapurisa anekapariyāyena paiccasamuppanna viññāa vutta aññatra paccayā natthi viññāassa sambhavoti.

 

Atha ca pana tva moghapurisa attanā duggahītena amhe ceva abbhācikkhasi, attānañca khaasi1, khahuñca apuñña pasavasi. Ta hi te moghapurisa bhavissati dīgharatta ahitāya dukkhāyāti.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즉 조건 없이는 의식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해석하여 나를 잘못 대변하고, 스스로를 해치고 많은 해악을 쌓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이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

 

(Mahātahāsakhayasutta- 갈애의 부숨에 대한 큰경, 맛지마니까야 M38,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은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의식이 윤회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단순하게 식이 윤회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만일 식이 윤회한다면 이는 연기법을 적용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아뜨만윤회와 다름 없다. 그러나 부처님은 조건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 (paiccasamuppanna viññāa)”이라고 분명히 말씀 하신 것이다.

 

연기(paiccasamuppada)라는 것이 인연과인데 이는 원인()과 조건()과 결과()로 설명된다. 이때 조건에 해당되는 것이 빠띳짜(paicca)이다. 십이연기에서는 빳자야(paccayā)라 하여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Sakhārapaccayā viññāa)”라고 설명 되어 있다.

 

이렇게 연기는 조건에 따라 발생된다. 그래서 현상은 일어날 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저절로 일어난다거나 누가 만들어서 생겨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사띠 빅쿠는 이제까지 (viññāa)’이 윤회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식이 윤회한다면

 

만일 식이 윤회 한다면 이는 영혼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몸에서 몸으로 몸만 바꾸는 윤회가 된다. 이를 환생(reincarnation)’이라 한다. 이는 힌두교 윤회방식으로서 윤회의 주체인 아뜨만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윤회의 주체가 있다면 연기법은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연기법은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와 같이 조건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식 그 자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한 식이 윤회함을 설명하고 있다.

 

식이 윤회한다면 연기법도 성립하지 않을 뿐더러 열반도 실현할 수 없다. 조건 발생하여만 열반을 이룰 수 있다. 이는 십이연기에서 형성이 소멸하면 의식이 소멸하고, 의식이 소멸하면 명색이 소멸하고(Sakhāranirodhā viññāanirodho. Viññāanirodhā nāmarūpanirodho, S12.2)”라고 설명 되어 있는 역관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식이 일어날 만한 조건이 소멸 되면 더 이상 의식이 일어나지 않게 되어 열반이 실현된다.

 

식이 윤회한다면 해탈은 가능할 것이다. 식이 맑아져서 청정하게 되기 때문으로 본다. 그래서 근원과 합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범아일여라 본다.

 

이렇게 윤회주체로서의 식은 궁극적으로 존재의 근원과 합일은 가능하지만 결코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 윤회주체로서의 식은 조건 발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매순간의 순간윤회

식이 윤회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식이 윤회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조건발생된 식이 윤회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조건 발생된 식의 윤회는 두 가지가 있다. 하는 이 몸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순간윤회이고, 또 하나는 죽음에 이르로 재생하는 일생윤회이다. 그렇다면 순간윤회와 일생윤회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순간윤회는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식에 대한 것을 보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며,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고, (Sakhārapaccayā viññāa. Viññāapaccayā nāmarūpa, S12.2)”로 설명할 수 있다. 이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매순간 연이어 조건에 따라 발생하는 연기에 대한 것이다. 이런 연기는 순차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적 발생일 수 있다.

 

순간윤회에서 중요한 것은 조건 발생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형성, 즉 의도적 행위를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그 행위라는 것은 신체적 형성, 언어적 형성, 정신적 형성 (kāyasakhāro vacīsakhāro cittasakhāro)’ 을 말한다. 이는 다름 아닌 이다. 이와 같은 신구의 삼업이 결국 마음을 일어나게 만드는 것이다.

 

마음은 대상이 있어아만 일어나고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처리 하지 못하기 때문에 두 마음일 수 없다. 그래서 행위를 지었으면 그 행위를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또 이런 마음()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그 명색이라는 것은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이 있으니 이것을 명이라고 부르고, 네 가지 광대한 존재, 또는 네 가지 광대한 존재에서 파생된 물질을 색이라고 한다. (S12.2).”라고 정의 되어 있다.

 

일생윤회에서 식과 명색의 관계

 

다음으로 일생윤회가 있다. 이는 삼세양중인과로 설명된다. 십이연기에 대하여 삼세에 걸쳐서 두번 인과를 받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삼세양중인과로 십이연기가 설명될 때 통상적인 십이연기 정형구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이 식과 명색의 관계이다. 이는 도시의 경(S21.65)’에서 볼 수 있다.

 

 

Tassa mayha bhikkhave, etadahosi: "kimhi nukho sati nāmaråpa hoti. Ki paccayā nāmaråpa"nti. Tassa mayha bhikkhave, yoni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þ "viññāe kho sati nāmaråpa hoti. Viññāapaccayā nāmaråpa"nti.

 

Tassa mayha bhikkhave, etadahosi: "kimhi nukho sati viññāa hoti. Kimpaccayā viññāa"nti. Tassa mayha bhikkhave, yoniso manasikārā ahu paññāya abhisamayo: "nāmaråpe kho sati viññāa hoti. Nāmaråpapaccayā viññāa"nti.

 

[세존]

 

그때 수행승들이여, 내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으면 명색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가? 그때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 지혜로 꿰뚫었다.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그때 수행승들이여, 내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무엇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가? 그때 수행승들이여, 나는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켜 지혜로 꿰뚫었다.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전재성님역)

 

 

첫번째 문단을 보면 늘 보는 십이연기 정형구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문단에서 이제까지 전혀 보지 못하던 내용이 나온다. 그것은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식과 명색을 바꾸어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왜 이렇게 한번은 식연명색으로 설명하고 또 한번은 명색연식으로 설명하였을까? 이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알 수 있다.

 

 

[세존]

그때 수행승들이여, 내게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며,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며,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생겨난다.

 

(나가라경-Nagarasutta-도시의 경, 상윳따니까야 S12:65,전재성님역)

 

 

 경에서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nāmaråpapaccayā viññāa, viññāapaccayā nāmaråpa)”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 대하여 한문식으로 표현하면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식(名色緣識)’이 된다. 바로 이구절이 식이 재생연결식으로사의 을 말한다. 이 재생연결식으로서 식 또한 조건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간윤회와 일생윤회의 차이를 표로 보면

 

순간윤회와 일생윤회에 있어서 식과 명색과의 관계에 대하여 표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식과 명색의 관계

 

순간윤회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Viññāapaccayā nāmarūpa, (S12.2)

식연명색(識緣名色)

일생윤회

1)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난다.

(viññāe kho sati nāmaråpa hoti. Viññāapaccayā nāmaråpa )  (S12:65)

 

2) 명색이 있으면 의식이 있고,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난다.

(nāmaråpe kho sati viññāa hoti. Nāmaråpapaccayā viññāa)  (S12:65)

1)식연명색(識緣名色)

2)명색연식(名色緣識)

 

 

 

표를 보면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순간윤회의 경우 식연명색(識緣名色)이고, 일생윤회는 식연명색(識緣名色)과 명색연식(名色緣識)이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일생윤회로서의 식은 명백히 재생연결식을 뜻한다. 특히 이 의식은 여기서 되돌아오고 더 이상 명색을 넘어서지 못한다.(S12.65)”라 하였는데, 이는 주석에 따르면 여기서 되돌아 오는 의식이란 재생의식(patisandhiviññāa)과 통찰지를 말한다. 재생의식은 조건으로부터 되돌아 오고 통찰지는 대상으로부터 되돌아 온다. 그것은 명색을 넘어서지 못하고 더 나아 가지 못한다. (Srp.II.125)”라고 설명되어 있다. 재생연결식은 조건 발생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일생윤회 역시 연기작용임을 알 수 있다.

 

경에서는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 (S12.65)”라고 하였다. 바로 이 문구가 식이 재생연결식임을 뜻하고 또 이와 같은 과정이 일생윤회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주석에 따르면 “ ‘명색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는 한, 이와 같이 태어나서 늙어서 죽고 세상을 떠나 다시 태어나야 한다.’라는 뜻이다. (Srp.II.115-116)”라고 설명 되어 있다.

 

정보의 양이 많으면

 

이렇게 순간윤회에서 있어서 십이연기정형구와 일생윤회에 있어서 십이연기 정형구는 다르다. 가장 큰 차이가 식과 명색의 관계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식과 명색에 대하여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식(名色緣識)’으로 하여 한번만 표시 되어 있으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여러 번일 것으로 추측한다. 이는 재생 하는 과정이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운 로드 할 때 시간이 걸린다. 특히 정보의 양이 많은 경우 더 시간이 걸린다. 아날로그로 방송시절 TV 채널의 전환속도는 0.5초 이내 이었다. 그러나 디지털 방송에 따라 처음 디지털수신기가 나왔을 때 채널 속도는 약3-5초 정도로 굼떳다. 이는 처리해야 할 데이터가 많기 때문이다. 영상압축(MPEG)된 방대한 정보를 처리 하기 위해서는 타임이 걸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로 인하여 요즘 디지털 기기의 채널 속도는 많이 개선 되었다.

 

마찬가지로 재생이 일어날 때 정보가 많다면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래서  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일어날 때 왕복 한번 뿐 만 아니라 수 없이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이와 같은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식(名色緣識)’의 상호 작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임현담님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정보의 양이 많으면 copy & paste 혹은 cut & paste 속도가 굼벵이처럼 느리게 되고 정보량이 미세하면 순식간 이동이 이루어진다. 물론 컴퓨터의 성능과 그 정보를 받아내는 USB 성능에 따라 속도가 변한다.

 

(윤회, 임현담님, 2009·11·26)

 

 

스타트렉에서의 공간이동에 대하여 정보의 양에 대한 설명이다. 다운로드 할 때 용량이 크면 시간이 더 많이 걸리듯이 일생윤회의 재생과정에 있어서 정보가 많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상상해 본다. 그래서 경에서는 식연명색(識緣名色)  명색연식(名色緣識)’상호작용에 대하여 한차례 밖에 표기 하여 놓지 않았지만, 재생하는데 있어서  정보가 많다면 무수히 반복될 것이라 상상해 본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

 

비유를 드는 것에 대하여 방편이라 한다.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진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방편을 들어도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방송시스템의 예를 들어 재생하는 것을 설명 하였지만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초기경전에서 수많은 방편을 들어 진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불교인이자 소설가인 임현담님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재생과정에 대하여 스타트렉에서 본 공간이동의 개념을 들어 설명하였다. 정보가 들어 있는 식이 이동하는 것으로 윤회를 설명하였다. 그래서 () 다른 숙주를 찾아 이동하는 일을 불교에서는 윤회라 부른다라고 정의 하였다. 그러나 단순하게 식이 이동하는 것을 윤회로 본다면 많은 논란을 일으킨다. 그것은 윤회에 주체가 있다는 아뜨만 윤회론으로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부처님 앞에서 식이 윤회한다고 말하면 아마도 사띠빅쿠가 그랬던 것처럼 이 어리석은자여 (moghapurisa)”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윤회는 식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발생된 식이 윤회하는 것이다. 이는 연기의 법칙에 따른 윤회를 말한다.

 

조건발생된 식이 윤회해야 연기법도 만족하고 또 열반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조건만 소멸하면 열반이 성취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이 윤회한다고 말하면 연기법도 만족하지 못하고 또 열반도 실현 할 수 없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법임을 알 수 있다.

 

 

 

2014-02-10

진흙속의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