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때 잘해!” 보시는 능력껏
가짜기부금 영수증
몇 일 전 ‘연말정산’에 대한 뉴스를 보았다. 월급생활자들에게 있어서 연말정산은 ‘열 세 번째 봉급’이라 불리운다. 그래서 각종 근거서류를 떼어다 내면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 중에 하나가 ‘기부금’이다.
그런데 뉴스에서는 커다란 자막으로 기부금 영수증 대부분이 ‘허위’라고 하였다. 본 뉴스에서는 이에 대한 기사를 상세히 보도 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절’이었다. 주지스님의 음성을 들려 주었는데 “불전함에 이삼만원 집어 넣고 일이백만원짜리 끊어 달라는 거에요”라고 하였다. 이렇게 남발하여 끊어 준 기부금 영수증이 천문학적 금액에 달한다고 한다.
그러나 검색에 따르면 이와 반대인 경우도 있다. 다음과 같은 케이스이다.
#회사원 A씨는 자신이 다니는 종교단체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3~5만 원을 지불하면 내지도 않은 기부금 영수증을 써준다는 것이었다. A씨는 허위 기부금 영수증을 받아 연말정산 신고를 하고 소득공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종교단체의 불법행위가 과세당국에 덜미를 잡히면서 자신은 소득공제 금액에 더해 가산세를 토해내야 했고, 종교단체 대표는 검찰 고발까지 당했다.
(연말정산 허위 종교기부금, 걸리면 '가산세'가…, 머니투데이 2013-01-15)
이기사에 따르면 종교단체에서 신도에게 가짜 영수증을 끊어 준 것이다. 3-5만원 지불하면 기부금 영수증을 끊어 준다고 하는데, 방송뉴스를 근거로 본다면 아마도 몇백만원짜리에 해당될 것이라 본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더 타내기 위하여 가짜기부금 영수증을 요청하고, 영수증 장사하는 예를 보았다.
보시에 인색한 불자들
어느 스님은 법문에서 “자기 돈 나가는 것이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 보다 더 아깝게 생각한다.”라는 취지로 말하였다. 보시를 하지 않고, 보시에 인색한 불자들을 지칭해서 한 말이다. 심지어는 교회와 비교하며 열등감을 조장하는 경우도 보았다. 지금 기독교인들이 잘 사는 것은 보시를 많이 하기 때문이라 하였다. 보시를 하면 그 백배, 천배로 보상이 뒤따르기 때문에 열심히 보시하자고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시를 강조한다. 그래서 입만 열면 보시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이는 대승불교의 실천수행법이라 볼 수 있는 ‘육바라밀’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대승불자들의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항목 중에 가장 첫 번째로 강조 되는 것이 ‘보시바라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초기불교에서 강조하는 보시바라밀
초기불교에서도 보시를 강조한다.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의 십일조식도 아니고, 대승불교의 보시바라밀에 대한 실천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포인트는 ‘능력껏’이다. 이처럼 능력껏 보시를 강조하는 경이 있다. 상윳따니까야 아딧따경(Ādittasutta, S1.41)이 그것이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불 경’이라 하였고, 성전협에서는 ‘불타는 집의 경’이라 하였고, 빅쿠 보디는 ‘Ablaze’라 하였다. 하늘사람이 보시공덕에 읊은 네 개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Ādittasmiṃ agārasmiṃ yaṃ nīharati bhājanaṃ,
Taṃ tassa hoti atthāya no ca yaṃ tattha ḍayhati.
Evamādipito1 loko jarāya maraṇena ca,
Nīharetheva dānena dinnaṃ hoti sunīhataṃ.
Dinnaṃ sukhaphalaṃ hoti nādinnaṃ hoti taṃ tathā,
Corā haranti rājāno aggi ḍahati nassati.
Atha antena jahati sarīraṃ sapariggahaṃ,
Etadaññāya medhāvī bhuñjetha ca dadetha ca.
Datvā ca bhutvā ca yathānubhāvaṃ anindito saggamupeti ṭhānanti.
(Ādittasutta, S1.41)
“집이 [맹렬한 불로] 불탈 때
밖으로 재물을 끄집어내면
그것이 주인에게 도움이 되지
안에서 타버린 것 도움 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세상이 늙음과 죽음에 불탈 때
보시를 통해서 [자신의 재물을] 꺼내야 하나니
주인에게는 밖으로 꺼낸 재물만이 도움이 되듯
보시야말로 그에게는 진정한 공덕입니다.
보시한 것은 행복한 결실 가져오지만
보시하지 않은 것은 그렇지가 않아서
도둑이 훔쳐가고 왕이 앗아가기도 하고
불에 타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마지막에 몸을 버릴 때 그의 재산도 버리나니
이런사실을 잘 알아서 즐기면서 보시하오.
현자여, 능력껏 배풀고 즐긴 뒤에는
비난받지 않고 천상의 경지로 올라갈 것입니다.”
(불 경, S1.41, 각묵스님역)
[하늘사람]
“집이 불에 탈 때는
가구를 꺼내서
태우지 않는 것이
유익한 것이네.
이처럼 세상이
늙음과 죽음으로 불탈 때에는
보시로써 구원해야 하니
보시만이 잘 구원하는 것이네.
보시하면 좋은 공덕을 얻지만
보시하지 않으면 좋은 공덕이 없다네.
도둑이나 왕들에게
약탈당하거나 불타서 사라진다네.
모든 재산과 함께 이 몸은 끝내는 버려야 하네.
슬기로운 자여, 잘 알아 즐기며 또한 보시하세.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 또한 즐기면
비난받지 않고 하늘나라를 성취하리.”
(불타는 집의 경, S1.41, 전재성님역)
“When one's house is ablaze
The vessel taken out
Is the one that is useful,
Not the one left burnt inside.
“So when the world is ablaze
With [the fires of] aging and death,
One should take out [one's wealth] by giving:
What is given is well salvaged.
“What is given yields pleasant fruit,
I But not so what is not given.
I Thieves take it away, or kings,
It gets burnt by fire or is lost.
“Then in the end one leaves the body
Along with one's possessions.
Having understood this, the wise person
Should enjoy himself but also give.
Having given and enjoyed as fits his means,
Blameless he goes to the heavenly state.”
( Ablaze, S1.41, 빅쿠 보디역)
첫 번째 게송을 보면 ‘불난 집’을 묘사 하고 있다. 지금 집이 불이 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값나는 것부터 꺼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nīharati bhājanaṃ’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밖으로 재물을 끄집어내면”이라 하였고, 전재성님은 “가구를 꺼내서”라 하였다. 빅쿠 보디는 “The vessel taken out(그릇을 밖으로 꺼내어)”이라 하였다. 이렇게 재산목록 일순위가 서로 다른 것은 ‘bhājana’에 대한 번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PCED194에 따르면 ‘bhājana’는 ‘a bowl, vessel, dish, 器, 容器, 器具’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빅쿠 보디의 번역이 직역에 가깝고 전재성님의 번역은 한자어 ‘器具’를 적용한다면 어느 정도 근접한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재물이라는 말은 ‘bhājana’의 뜻과 맞지 않는다. 과도한 ‘의역’이라 본다.
과도한 의역은 게송 전체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게송의 내용만 보면 단번에 알기 쉽게 번역하였다. 그래서 대괄호치기로 ‘[맹렬한 불로]’를 삽입하였고, ‘주인’이라는 말 역시 함께 집어 넣었다. 하지만 이는 주석적 번역에 속한다. 각주에서나 설명되어야 할 내용이 본문에 적용된 케이스이다. 1번 게송에 대한 비교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집이 [맹렬한 불로] 불탈 때
밖으로 재물을 끄집어내면
그것이 주인에게 도움이 되지
안에서 타버린 것 도움 되지 않습니다.(각묵스님역)
집이 불에 탈 때는
가구를 꺼내서
태우지 않는 것이
유익한 것이네.(전재성님역)
When one's house is ablaze
The vessel taken out
Is the one that is useful,
Not the one left burnt inside.(빅쿠 보디역)
법화경의 불난집의 비유(火宅喩)
1번 게송을 보면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법화경에서 볼 수 있는 불난집의 비유(화택유)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세상이 불타고 있다!”비유와 방편 없는 아딧땅경(연소경, S34.3.6)’라는 제목으로 올린 바 있다. 법화칠유 중의 하나인 화택유(火宅喩)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느 마을에 자식 많고 나이 많은 억만장자가 있었다. 그는 넓고 큰 저택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은 이미 낡아서 폐가처럼 황폐해 있었다. 새들이 집을 짓고 있었으며 뱀들도 서식하고 있었다. 큰 저택이지만 무슨 까닭인지 출입구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집에 불이나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장자는 재빨리 문밖으로 뛰쳐나왔으나 그가 사랑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불이 난 것도 모르고 집안에서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들의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므로 피할 마음도 없었다. 아버지인 장자의 마음은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위험하니 빨리 밖으로 나오너라’ 고 밖에서 크게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이 났다는 것이 무엇이며 불이 집을 태운다고 하는데 그 집이란 무엇인지, 또 불에 타서 죽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그저 집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문밖의 아버지를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자인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들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아이들이 평소에 원했던 것을 이것저것 생각한 끝에 ‘너희들이 항상 원하던 양(羊)이 끄는 수레, 사슴(鹿)이 끄는 수레, 소(牛)가 끄는 수레가 문밖에 있으니 빨리 밖으로 나와라’고 소리쳤다. 장자는 비록 늙기는 했지만 힘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써서 아이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본인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오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으므로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양이 끄는 수레와 사슴이 끄는 수레와 소가 끄는 수레는 모두 아이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것들이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자 손에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내던지고 앞을 다투어, 오직 하나뿐인 좁은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그곳에는 아버지가 말한 양의 수레, 사슴의 수레, 소의 수레는 그림자도 없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었으나 아이들은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며 막무가내로 아버지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약속한 양·사슴·소가 끄는 수레보다 더 크고 훌륭하며 날쌘, 흰 소(白牛)가 끄는 수레를 아이들에게 전부 나눠 주었으므로 아이들은 모두 만족했다.”
(화택유, 현대불교신문)
불타는 집에 대한 비유 화택유는 대승불교에서 ‘일불승’의 가르침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성문, 연각, 보살에 대하여 ‘삼승’이라 하고 이를 양, 사슴, 소가 끄는 수레로 비유 하였다. 하지만 법화경에 따르면 삼승은 방편이고 흰소가 끄는 일불승만이 진실이라 하였다.
이렇게 법화경에서는 삼승은 방편이고 일승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불타는 집을 비유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아이들을 붙타는 집 밖으로 끌어내기 위하여 양, 사슴, 소로 만든 수레를 보여 주는 방편을 사용하였다.
이런 방편은 일종의 속임수일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셨다”라고 항의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아이들을 불구덩이속으로 끌어 내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정당한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어떻게 세상이 불타는가?
화택유에서 불난집의 비유를 든 것은 삼승은 방편이고 일불승만이 진실임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아딧따경(S1.41)에서는 보시를 설명하기 위해서 불난 집의 비유를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게송을 보면 세상이 불타는 것으로 묘사 하였다. 어떻게 세상이 불타는가? 그것은 늙음과 죽음으로 불타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Evamādipito loko jarāya maraṇena”라 하였는데 이는 “세상이 늙음과 죽음으로 불탈 때에는(전재성님역)”으로 번역된다.
집이 불탈 때에는 가장 귀중한 것부터 챙겨야 한다. 그러나 불길이 너무 거세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한다. 집에 천만금이 있어도 모두 불에 타 버리기 때문에 한 번 불이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게송에서는 세상이 불탄다고 하였다. 그런 세상은 우리가 보는 삼라만상일까? 아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다. 이는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8)’에서 부처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일체가 불타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어떻게 일체가 불타고 있는가?
수행승들이여, 시각도 불타고 있고 형상도 불타고 있고 시각의식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도 불타고 있고 시각접촉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도 불타고 있다. 어떻게 불타고 있는가? 탐욕의 불로, 성냄의 불로, 어리석음의 불로 불타고 있고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불타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 (S35.28)
이렇게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에 대한 것이다. 경에서는 탐, 진, 치 삼독으로 세상이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딧따경(S1.41)의 두 번째 게송에서는 늙음과 죽음으로 불타고 있다고 하였다.
‘연소에 대한 법문의 경(S35.28)’에 따르면 탐진치 삼독은 윤회의 땔감이다. 그래서 욕심부리면 부릴수록, 성내면 성낼수록 윤회의 땔감은 풍부해져서 더 잘 타오르게 된다. 그래서 세세생생윤회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결국 늙어서 죽어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탐진치의 불이라는 것은 결국 “태어남,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 이끄는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늙음과 죽음에 대한 것이 아딧따경(S1.41)의 두 번째 게송에 보인다. 탐진치로 불타는 이 몸이 늙어 죽었을 때 과연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에 대해서이다.
오로지 욕심부리고 화만 내고 산사람에게 있어서 다음 생은 비참은 한 것이다. 이럴 경우 대게 ‘악처’에 떨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처’에 나는 방법이 있다. 두 번째 게송에서 보시만이 구원이라 하였다. 탐진치로 불타는 세상에서 그 동안 쌓아 둔 보시공덕은 절대 불에 타 없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시로써 구원해야 하니 보시만이 잘 구원하는 것이네.(전재성님역)”라 하였다.
“있을 때 잘해!”
요즘 기대수명이 높아져서 이제 9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실제로 주변에 그렇게 오래 사시는 분들이 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기대수명이 높아지다 보니 ‘의료비’ 지출이 높아졌다.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하였던 각종 암이 발생하여 암으로 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렇게 말년에 암이 걸렸을 때 이제 까지 모아 둔 노후자금 대부분이 암치료에 들어 간다고 한다. 특히 임종을 앞두고 마지막 한달 동안 항암 치료에 쏟아 붙는 돈이 전체 의료비의 절반에 달한다고 한다.
돈이나 재물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이라 보면 틀림 없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을 죽어서까지 가져 가져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져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업공덕이다. 그래서 세 번째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 하였다.
보시하면 좋은 공덕을 얻지만
보시하지 않으면 좋은 공덕이 없다네.
도둑이나 왕들에게
약탈당하거나 불타서 사라진다네.(S1.41)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있다. 지금 돈이나 재산이 있을 때 많은 보시공덕을 쌓는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있을 때 보시하고 공덕을 쌓으라는 말이다.
보시는 능력껏
거진 것이 없게 되면 보시공덕을 쌓고 싶어도 못한다. 그렇다고 하여 가나한 자는 보시공덕을 쌓을 기회조차 없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는 네 번째 게송에 “능력에 따라 보시하고”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다. ‘능력에 따라’에 해당되는 빠알리가 ‘yathānubhāvaṃ’이다. 이는 ‘yathā(as; like)와 ānubhāva(power; splendor,威力)’의 합성로서 “능력껏” 또는 “능력에 따라” “as fits his means”로 번역 되었다. 그래서 이 경의 키워드는 사실상 ‘능력껏’이라 볼 수 있다.
보시는 능력껏 해야 한다. 자신의 수입이나 재산 상태를 보아 적절한 보시가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수십, 수백억 자산가 임에도 월급생활자 정도에 달하는 보시를 하였다면 능력껏 보시라 볼 수 없다. 가진 것이 별로 없음에도 수입의 대부분을 보시 하는 것 역시 능력껏 보시라 볼 수 없다.
일반적으로 사회 통념상 보시는 몇 퍼센트라 한다. 자신의 수입에서 몇 퍼센트정도는 아낌 없이 보시해야 함을 말한다.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자신이 속한 종교단체에만 보시하라는 법은 없다. 어느 단체에나 보시하여도 그 공덕은 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만원 법칙’이 나왔을 것이다. 큰 것 한 장을 어느 특정 장소에 보시하는 것 보다 이를 만원으로 쪼개서 여러 곳에 보시하는 것이다. 이런 청정한 보시가 가장 값어치 있다고 한다.
가짜기부영수증을 사고 파는 시대이다. 어떻게 해서 든지 움켜 쥐려 하는 것은 내 돈 나는 것을 내 살점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깝게 생각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게송에서 부처님은 보시를 많이 하라고 하지 않았다. 게송에서는 분명히 ‘능력껏 보시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보시는 반드시 돈으로만 따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재능보시’라 하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기술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재능보시 역시 보시에 속한다. 그래서 능력이 되는 사람은 능력껏 재능보시를 하면 된다.
201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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