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철학하자는 건가?”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회의론자들
“수행자여러분”
어느 법사는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서 “수행자여러분”이라고 불렀다. 초기불교의 십이연기와 위빠사나를 설명하는 법문에서 청취자에게 “수행자여러분”이라고 한 것이다. 이때 수행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이지만 크게 성직자와 신도로 나뉜다. 그래서 성직자는 주로 사제로서 역할을 하고 신도는 다만 따라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종교적 행태는 불교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특히 한국불교에서 그렇다.
영혼장사를 한다는데
한국불교에서는 영혼장사를 한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어느 절이든지 ‘천도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신자가 되면 천도재 권유를 받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상당수의 불자들이 불자가 되었을 때 한번쯤 거액의 천도재를 하였을 것으로 파악 된다. 더구나 사람이 죽었을 때 더 좋은 곳으로 보낸다는 의미로 ‘사십구제’를 지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영혼장사를 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도 많다.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불자들
최근 교계뉴스에 따르면 새로 출간한 책중에는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많다고 한다. 대표적으로 성법스님의 책을 들 수 있다. 세존사이트 운영자로서 인터넷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성법스님이 주장한 글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근 출간한 성법 스님 책은 업·윤회를 부정한다. 자극적인 단어를 뽑아 한 권의 책이라도 더 팔기 위해 내세운 것이 아니라 내용이 그렇다. 업·윤회 개념이 신도들을 착취하기 위해 왜곡됐다는 설명이다.
성법 스님은 책에서 “불교에서 윤회는 삶의 모습일 뿐”이라고 말했다.
스님이 윤회를 삶의 모습이라 말한 까닭은 몸과 마음이 나를 이루고 살아가는데 몸을 이루는 조건들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면 죽는다고 할 뿐, 몸과 마음이 조건에 따라 계속 변해가며 현재의 삶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님은 “계속 변화하는 마음이 새로운 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면 윤회 진행상 특징으로 '먼저 몸'과의 삶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 그로 인해 전생과 금생이라는 단절된 삶인 것으로 간주될 뿐이지 마음을 중심으로 보면 삶의 과정을 통해 계속 변해가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불교가 윤회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말씀은 옳을지 몰라도 윤회가 불교의 핵심사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 스님의 주장이다.
(불자들 잇딴 ‘업·윤회’ 부정…왜?, 2014-02-05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성법스님은 불교의 근간이라 볼 수 있는 업과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성법스님의 불교관에 대하여 ‘윤회는 없다고? 한 허무주의 스님의 넋두리를 보고’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려 비판한 바 있다.
“육도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입증해야 하나요?”
성법스님이 업과 윤회를 부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놀랍게도 한국불교가 영혼장사 하는 것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게 하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운명론적이고 숙명론적인 업설과 어떤 변치 않는 영혼이 있어서 윤회 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한다.
성법스님은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33개의 항목이 있다. 이중에서 두 개의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다.
7.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천도재와 영구위패로 신도들을 현혹하는 출가자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나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 침묵했거늘 너희는 어찌 영혼의 구제까지 확언하느냐? 라고 말입니다.
14. 지금 붓다께서 계신다면 ‘전생의 업이 현세의 나를 있게 한 것이다’ 라고 믿는 이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바라문들에 의해 사성제 계급제도에 악용되는 전생의 업을 오히려 부정하였다’ 라고 말입니다.
( [기고]김재영 법사의 승가 모독에 반론, 불교닷컴 2013-09-30)
7번째와 14번째 항목을 보면 윤회와 업을 부정하고 있다. 윤회와 업을 이야기하면 마치 힌두교와 같다고 주장한다.
성법스님은 자신이 운영하는 세존사이트에서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라는 글에서 “윤회가 있다고 믿는 것과 윤회는 없다는 것이 대립할 때, 어느 쪽이 당위성을 확보하는데 더 보편적이냐가 고려되어야 합니다.”라든가, “윤회가 실재하는 세계라고 당위성을 확보하려면, 붓다의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불일치에 대해 합리적인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윤회와 업을 부정하는 성법스님은 육도윤회에 대하여 “6가지라고 딱 잘라 분류를 하는 것일까요?”라고 의문을 제기 하고 있다. 심지어 “지옥과 천상의 세계는 관념의 세계가 아닌 실재(實在)여야 윤회에 합치되는데, 실재한다는 사실을 어찌 입증해야 하나요?”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지구의 인구는 엄청 증가하는데, 지구의 축생들이 선한 업을 지어 인간이 증가하는 것인가, 아니면 천상의 사람들이 복덕이 다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라고 묻기도 한다.
유물론적이고 존재론적 사고방식
성법스님은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지옥은 갈갈이 찢어진 고통을 육체에 주고 나서, 다시 깜짝할 사이에 복원을 시키는데, 그런 신묘한 기술을 복 짓고 사는 인간에게 주지 않고, 축생보다 못한 인간들을 혼내는데 사용하는 것은 ‘지옥 갈 일’ 아닌가요? 등등....
여러분은 능히 이런 의문을 만들 수 있고, 또 아시는 스님들께 답을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다. ‘윤회는 없다’면 질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바라문의 사소한 행태에도 당위성과 질책을 하신 붓다께서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로 윤회를 인정하셨을 개연성은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요체인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에 윤회가 들어갈 자리가 있습니까?
윤회의 개념을 생명체의 연속성과 재생에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아 육체를 화장하고, 화장 후 남은 재를 나무 밑에 뿌리고, 그 나무의 열매를 사람들이 먹게 되고, 새들도 먹게 되고.... 결국 질량보존의 법칙대로 내 육체의 질량과 에너지 많큼은 우주에 윤회되는, 이런 윤회를 설명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성법스님, 힌두교적 윤회는 없다. http://www.sejon.or.kr/ )
성법스님의 윤회관을 보면 철저하게 현세적이다. 오직 이몸이 살아 있을 때만 의미가 있음을 말한다. 이는 유물론적이고 존재론적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감각적 인지와 과학적 실증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자신의 눈과 귀로 인지 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 또 보고 듣지 않은 것은 없는 것으로 간주 한다.
인지와 실증에 바탕을 두면
이렇게 인지와 실증에 바탕을 두면 비록 지구 반대편 아마존에 우리 들이 알지 못하는 부족이 있거나 심해에 한번도 보지 못한 생명체가 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또 아직까지 죽어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기에 사후에 대한 이야기, 내세에 대한 이야기,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믿지 않는 것이다. 믿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에 따르면 부처님은 수 없이 업과 윤회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업에 대해서는 “바라문 청년이여, 뭇삶들은 자신의 업을 소유하는 자이고, 그 업을 상속하는 자이며, 그 업을 모태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친지로 하는 자이며, 그 업을 의지처로 하는 자입니다. 업이 뭇삶들을 차별하여 천하고 귀한 상태가 생겨납니다.(M135)”라고 말씀 하셨다. 이를 업자성정견이라 한다. 출세간적 정견이 사성제라면 세간적 정견은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윤회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윤회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그 중에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Santi kho pana sāriputta eke samaṇabrāhmaṇā evaṃ vādino evaṃ diṭṭhino: saṃsārena suddhīti. Na kho paneso sāriputta saṃsāro sulabharūpo yo mayā asaṃsaritapubbo iminā dīghena addhunā, aññatra suddhāvāsehi devehi. Suddhāvāse cāhaṃ sāriputta deve saṃsareyyaṃ, nayimaṃ lokaṃ punarāgaccheyyaṃ.
사리뿟따여, 어떤 수행자나 성직자는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다. ‘청정은 윤회를 통해서 온다.’ 사리뿟따여, 이 오랜 세월에 청정한 신들의 하느님 나라를 제외하고는 내가 일찍이 윤회하지 않은 윤회의 세계를 발견할 수 없다. 사리뿟따여, 그러나 내가 청정한 신들의 하느님 나라로 윤회한다면 나는 다시 이 세계에 올 수 없다.
(Mahāsīhanādasutta-사자후에 대한 큰 경, 맛지마니까야 M12 41절,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청정은 윤회를 통해서 온다”라는 말을 부정하였다. 이는 사명외도의 이론으로서 정해진 기간, 이를 테면 팔만사천 대겁 뒤에 윤회가 끝나면 청정해진다는 이론이다. 그래서 이를 ‘윤회청정(saṃsārena suddhīti).’이라 한다.
윤회청정에 대하여 잠을 예로 들 수 있다. 잠자는 사람은 아침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듯이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역시 마찬가지라 한다. 그래서 윤회에서 벗어 나기 위하여 달리 닦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침이 되면 자연스럽게 눈이 떠지듯이 닦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어도 팔만사천대겁 뒤에는 모두 청정하게 되어 윤회에서 벗어날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를 윤회청정이라 한다.
부처님은 경에서 ‘청정은 윤회를 온다’거나, ‘청정은 재생을 통해서 온다’거나, ‘청정은 주거를 통해서’ 온다 등의 청정관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그리고 부처님은 스스로 경에서도 ‘윤회(saṃsara)’하였음을 천명하였다. 이는 “내가 일찍이 윤회하지 않은 윤회의 세계를 발견할 수 없다.(M12)”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경에 따르면 부처님이 윤회하지 않은 곳이 있다고 하였다. 그곳은 색계 사선천인 ‘정거천(청정한 신들의 하느님 나라)’이다. 불환자들이 가는 정거천에 태어나면 다시는 윤회하지 않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이 정등각자가 되기 이전에는 정거천을 제외한 세계를 윤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품을 거두어 내자고?
이렇게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윤회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고 또 윤회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회의론자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 보여지는 내세, 윤회, 신통, 신비에 대하여 모두 후대에 삽입되었거나 조작된 것으로 본다. 그래서 거품을 거두어 내자고 말한다.
회의론자들이 말한 바와 같이 만일 거품을 내었을 경우 남아 있을 부처님의 가르침은 삼법인, 사성제, 연기, 사념처 등과 같이 근본가르침에 한정 될 것이다. 이렇게 거품을 모두 제거 하였을 경우 현재 보는 방대한 분량의 니까야는 소책자 한권 분량으로 줄어 들지 모른다.
회의론자들은 공통적으로 업과 윤회에 대하여 힌두교의 교리라 말한다. 심지어 경전에서 쓰여져 있는 업과 윤회에 대하여 힌두교의 교리가 ‘습합’ 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8만4천에 달하는 방대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하여 진위를 가리자고 한다.
경전에 대하여 회의하는 자들이 항상 주장하는 것은 “부처님은 현세적인 가르침을 말씀 하셨지 내세에 대하여 이야기 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성법스님 역시 그런 범주에 속한다.
“지금 철학하자는 건가?”
그런데 이렇게 업과 윤회를 부정하면 할수록 단멸론과 허무주의로 귀결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유물론과 존재론에 바탕을 둔 인지주의와 실증주의에 집착을 하는 한 역사적으로 실재 하였던 부처님은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하나의 철학자 되고 만다. 그래서 업과 윤회, 내세, 신통, 신비라는 거품을 거두어 내었을 때 더 이상 불교라는 종교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교철학’에 지나지 않고 부처님은 소크라테스와 동격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론자들에게 묻는다. “지금 철학하자는 것인가?”라고.
성법스님의 글을 보면 명백히 업과 윤회를 부정하고 있다. 이렇게 부정하는 주된 이유가 한국불교에서 승려들이 영혼장사를 하는 것에 대하여 경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빈데 잡자고 초간삼간 태우는 격’과 같다. 또 종교하자는 것이 아니라 철학하자고 하는 말과 같다.
불교에 대하여 거품을 뺀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인지와 과학적 검증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불교는 더 이상 종교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한
불교는 맹목적으로 믿는 유일신교와 다르다. 합리와 이성에 바탕을 둔 믿음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을 가졌을 때 업, 내세, 윤회, 신통, 신비 등에 대한 이야기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설령 자신의 인지와 한계를 넘어 서는 것일지라도 판단을 유보하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한다. 이는 자신의 인지에 벗어 났다고 하여 부정하는 회의론자와 다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의론자들은 법에 대하여 의심한다. 그러나 법을 의심하는 한 결코 청정해질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성자가 되는 조건 중의 하나가 의심의 극복이다. 이는 청정에 이르는 일곱단계 중에 네 번째 단계인 ‘의심을 극복함에 따른 청정(kaṅkhāvitaraṇa visuddhi)’에 해당된다.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은 또한 성자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회의 하는 자들은 인과에 대하여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심을 극복하려면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를 계발하여야 한다고 한다. 이런 지혜는 다름 아닌 ‘연기법’을 아는 것다. 연기법의 다른 말은 ‘인과법’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법에 대하여 의심하는 회의론자들은 연기법과 인과법을 의심하는 자들로서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심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불교는 으뜸 가는 가르침
불교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이다. 그것도 최고의 종교이다. 불교는 으뜸 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은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한 믿음에 기반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것은 신도가 되기 보다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는 자들은 신도나 신자로 불리기 보다 수행자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맛지마 주석서에서는 빅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고 한다.
붓다고사 스님은『디가 니까야』제2권「대념처경」(D22)에 대한 주석에서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한다. … 도를 닦는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DA.iii.755)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서에서 언급하는 ‘출가자의 길’이라는 술어를 오직 출가한 비구․비구니․사미․사미니 스님들에게만 적용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가려 뽑아 싣고 있는 출가자의 길에 해당되는 금구의 말씀은 해탈․열반이라는 우리의 스승 부처님이 제시하신 궁극적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진하는 사부대중 모두에게 해당되는 길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니까야 강독, 들어가는 말1, 각묵스님)
각묵스님은 인터넷 카페에 올려진 글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자들에 대하여 빅쿠라 하였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주석에 근거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5세기 붓다고사에 따르면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한다. … 도를 닦는 자는 신이든 인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사소한 행위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를 ‘빅쿠’라 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근거한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을(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Vsm1.7)”라고 뜻으로 그리고 문자적으로 풀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행위의 두려움을 보는 자가 빅쿠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해서 두려움을 보는 자는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에 사소한 행위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사만냐팔라경(수행자의 삶의 결실에 대한 경, D2)에서 “사소한 잘못에서 두려움을 보고 학습계율을 받아 배웁니다.(D2)”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행위는 윤회를 유발시킨다. 그런데 행위는 ‘의도’가 실린 행위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연기경에서 “비구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의도적인 행위들이, 의도적인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 (Avijjāpaccayā bhikkhave saṅkhārā.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 S12.1)”라고 번역하였다. 이는 ‘Saṅkhārapaccayā viññāṇaṃ’에 대하여 “행을 조건으로 식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의도적인 행위들을 조건으로 알음알이가”라고 함으로써 상카라에 대하여 ‘의도적인 행위’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주석적 번역’에 해당된다. 주석에 따르면 상카라(행)에 대하여 “그 무명을 조건으로 한 것으로부터 의도적인 행위가 발생한다”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업은 행위에 의하여 발생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의도에 따라 발생된 행위가 업으로서 효력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행위에서 두려움을 본다는 것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본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 “윤회에서(samsare) 두려움을(bhayam) 보기(ikkhati) 때문에 비구(bhikkhu)라 한다.(Vsm1.7)”라고 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행위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는 자들이 빅쿠라면, 누구든지 행위의 두려움과 윤회의 두려움을 보는 자는 빅쿠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비록 머리를 기르고 가정을 꾸리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사소한 행위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더 나아가 윤회의 두려움을 본다면 빅쿠라 볼 수 있을 갓이다.
가사를 입고 있는 유발의 재가불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고자 하는 자들은 삭발자이든 유발자이든 모두 빅쿠 또는 빅쿠니로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TV프로에서는 가사를 입고 있는 유발의 티벳재가수행자를 보았다. 또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가사를 걸친 테라와다불자들의 사진을 보여 주고 있다.
가사를 입고 있는 유발의 티벳수행자
이렇게 가사를 입고 있다는 것은 단순히 맹목적으로 믿는 신도나 신자가 아니라 하나의 수행자라고 볼 수 있다. 비록 가정을 가지고 머리를 기른 재가불자일지라도 도와 과를 지향하는 삶을 실천한다면 모두 빅쿠나 빅쿠니라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방송에서 어느 재가법사는 방송에서 “수행자 여러분”이라고 하였을 것이다.
2014-02-0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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